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 왜 신앙의 언어는 그 힘을 잃었는가? 비아 제안들 시리즈
마커스 J. 보그 지음, 김태현 옮김 / 비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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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지경의 신앙

마커스 J. 보그 저,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를 읽고
(책의 부제: 왜 신앙의 언어는 그 힘을 잃었는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건 이스라엘만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을 제사장 민족 삼아 열방에 복을 전하는 게 하나님 선교의 목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열방에 본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러지 못했다. 참 이스라엘로, 그리고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 이야기의 완성이자 모든 약속의 성취로 오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다. 예수는 왕이시며 주님이시다. 구원자이자 해방자이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복음은 점점 오해되고 있다. 구원의 문화가 복음의 문화로 둔갑한 현실을 보라. 예수의 복음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개인 영혼 구원 정도로 축소되었다. 구약의 이스라엘 이야기는 물론 예수가 공생애 기간에 가장 강조하셨던 하나님 나라 사상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예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 사건에만 치중하게 되었다. 믿음은 사영리 같은 교리에 정신적으로 동의하는 것 정도로 축소, 변질되었다. 그 결과 구원은 개인적 죄 사함 정도로 좁혀졌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상관없이 바코드가 찍힌 천국행 티켓이 구원의 전부로 전락해버렸다. 천국은 죽어서나 갈 수 있는 막연한 곳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믿음과 신앙이 기독교의 전부라고 믿은 채 다른 것들은 모두 이단시하고 악마화하여, 열방을 위해 본이 되어야 하고 열방을 향해 뻗어나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은 갈수록 게토화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게나 이단들 가리기에 열을 올리고, 형님 교단, 정통 교단을 자처하며 소위 순수한 믿음과 신앙을 지키는 데 열을 올린 한국 기독교는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이것이 과연 가지를 쳐내며 남은 순수 정통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란 말인가. 아닐 것이다. 아마 이젠 스스로도 그렇다고 말하기엔 부끄러울 것이다. 결국 어렵게 수호한 고요한 우물은 고인 물일 뿐이었다. 고인 물은 썩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 결과가 현재 우리가 두 눈으로 목도하고 있는 안타까운 한국 기독교의 현실이다. 

성공회 소속 신약학자인 저자 마커스 J. 보그의 저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는 이러한 맥락에서 써진 책이다. 물론 미국 상황에 한정된 이야기이지만, 미국 기독교 우파의 영향을 진하게 받은 한국 기독교의 현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책은 무언가 잘못되지 않았거나,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않았다면 써지지 않았을 책이다. 즉 이 책에 담긴 저자의 목소리에는 잘못된 무언가를 바로 잡고자 하는 소망이 진득하게 묻어있다. 그는 그리스도교 언어를 왜곡하고 잘못 이해하게 된 데에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는 그리스도교인, 비그리스도교인을 막론하고 그리스도교 언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경향. 둘째는 이른바 ‘천국과 지옥’이라고 부르는 틀로 그리스도교 언어를 해석하는 것. 요컨대 ‘문자 주의’와 ‘천국과 지옥 해석 틀’에서 그리스도교 언어가 오해된 원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을 중심으로 해서 저자는 그리스도교 언어에 담긴 풍성한 의미와 지혜를 되살리고자 노력한다. 이 책은 일종의 ‘그리스도교 언어 입문서’로써 오해되고 왜곡된 언어들의 원래 의미를 되찾아주며 우리의 바른 이해를 돕는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다. 구원, 성서, 하나님, 예수, 부활, 믿음, 신앙, 자비, 의로움, 죄, 용서, 회개, 거듭남, 승천, 재림, 천국, 삼위일체, 주기도문 등. 난이도는 전혀 높지 않다.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언어를 사용하여 술술 읽히도록 쓴 저자의 배려가 돋보인다. 읽어 나가다 보면 부분적으로 혹은 전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던 개념들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깊고 풍성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단초가 되어줄 것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교 언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조차 그리스도교 신앙을 잘못 이해하고 곡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문자 주의’와 ‘천국과 지옥 해석 틀’은 바로 그렇게 유창하게 그리스도교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성서가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성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라고 묻는 대신 “저 언어가 ‘그때 거기’에서 그들에게 의미했던 바를 생각하면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자 주의’를 넘어서자고 강력하게 요청한다. 문자 그대로 믿는 근본주의적인 성경 해석은 반지성적이고 콘텍스트를 철저히 무시한 것이며 개인주의적인 욕망이 반영된 결과이다. 성경은 미지의 독자가 대상이 아니었다. 현재 우리에게 써진 게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대상 독자였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써진 책이지만, 하나님이 불러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쓴 것도 아니며, 기본적으로 그들을 위해 그들이 쓴 책인 것이다. 즉 시공간의 한계를 가진 인간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 21세기에 사는 우리들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써진 콘텍스트를 이해하면서 텍스트를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적용할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우리가 처한 콘텍스트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 

‘천국과 지옥’ 플롯에 천착한 성경 해석은 여러 가지 많은 오해를 불러왔다. 그중 구원이라는 개념은 특히나 많이 왜곡되었다. 저자는 구원은 죽음 저편이 아닌 이편의 삶에서 맞이하는 변환을 뜻한다고 알려준다. 즉 구원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환과 그리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삶에서 일어나는 변환을 모두 아우른다는 말이다.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성서에서 구원은 내세와 거의 관련이 없다. 구약성서가 다루는 거의 모든 세기를 통틀어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내세를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구원에 대한 이해는 ‘천국과 지옥’ 플롯으로는 백 분의 일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저자가 우스갯소리로 지적하듯이, 만약 기독교가 “언젠가 천국에 가려면 지금 그리스도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종교라면, 기독교는 고작 조건과 보상의 종교가 되어버릴 뿐이고, 전도와 선교는 협박이 되어버릴 뿐이다.

대신 저자는 구원은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귀양살이에서의 귀환’, ‘위험에서 구출됨’을 뜻한다고 정리해준다. 즉 구원은 새로운 삶,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핵심 주제인 하느님과 언약 맺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구원은 해방과 변환을 이야기한다. 또한 넓은 차원에서,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은 개인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이다. 성서에 나타난 구원의 정치적인 의미는 두 부분, 정의와 평화에 초점을 맞춘다. 성서에서 가장 중시하는 정의는 경제 정의다. 가난한 자과 헐벗고 굶주린 자가 구약과 신약에서 끊이지 않고 언급되고 하나님 백성들이 도와야 할 대상으로 등장하는 이유다. 레위기 19장의 거룩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희년의 의미까지도 경제 정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것들 말고도 위에서 언급한 리스트에 나온 단어들의 개념 바로잡기가 책의 끝까지 지속된다. 근본주의나 보수주의 기독교라는 우물에서 평생 자라오면서 아무 문제가 없었던 그리스도인들이나 그 우물이 전 우주라고 철저히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조금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도 부분적으로 등장한다. 특히 예수와 예수의 죽음, 부활에 대한 꼭지를 읽을 때면 아마도 거부 반응이 심할 분들도 왕왕 있으리라 예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의 해석에 대한 근거를 논리적으로 달고 있으며, 그것을 유일한 해석이라고 강조하지도 않기 때문에 지경을 넓힌다는 차원에서라도 이 책은 꼭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 기독교 안에서만 신앙생활을 해온 분들에겐 필독을 권한다. 기독교라는 큰 우산에서 한국 기독교가 속한 교파나 교단이 얼마나 지엽적인지 알게 되는 기회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비아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21?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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