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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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시작.

요시모토 바나나 저, ‘키친’을 읽고.

미카게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부엌이다. 그녀는 부엌을 보고 그 집이 어떤지 파악한다. 낯선 곳에서도 부엌과 친해지면 어려울 게 없다. 부엌은 그녀에게 있어 집이자 안식처다.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도, 숱한 삶의 냄새도 부엌은 항상 그 자리에서 소리 없이 흡수하고 소리 없이 들려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갔다. 일찌감치 고아가 된 이후 미카게는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았다. 할머니마저도 죽자 미카게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살아남은 건 미카게와 할머니의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부엌이었다.

이사하기 전 반년 정도 머물렀던 유이치의 집에서도 그녀를 가장 반겼던 건 부엌이었다. 그녀는 낯섦 가운데서도 그 집의 부엌이 맘에 들었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부모도 조부모도 모두 사라진 상황, 죽음이 다소곳이 그녀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상황. 그녀는 일어나 부엌을 청소하고 요리를 시작했다. 부엌은 다시 빛을 띠기 시작했다. 이미 죽은 자의 흔적이 아닌 현재 살아있는 자의 생기로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가 마음껏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유이치와 그의 엄마 에리코가 있었다. 그들의 조용한 신뢰와 지지는 그녀에게 어려운 시기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에리코가 살해를 당하자 유이치도 혼자가 되었다. 이번엔 미카게 차례였다. 미카게는 유이치의 허망한 마음,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 멍하니 시간만 보내고 있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작품의 끝, 혼자가 된 둘은 함께 보냈던 지난 반년의 기억의 연장선으로 돌입하게 된다. 해피엔딩의 전야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 이미 가족과도 같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러한 인정에 이르기까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탐색하는 과정에는 음식이 있었다. 미카게가 요리하여 함께 먹던 음식. 문득 나도 아내와 매일 같이 하던 식탁이 그리워진다. 부엌은 일상이고 가족이며 사랑이며 치유다.

한 페친 덕분에 감사하게도 잔잔한 일상을 그림처럼 시처럼 풀어내는, 그러면서도 때론 절제된 송곳처럼 가슴 깊은 곳을 푹 찔러 공감을 유도하는 멋진 에세이 같은 소설을 만나게 되었다. 여러 작가의 필체를 경험한다는 건 벅차도록 즐거운 일이다. 아무래도 나는 남성 작가보다 여성 작가의 에세이를 좋아하는 것 같다. 이 두 작품 ‘키친’과 ‘만월’에서도 느꼈다. 남성이라면 이런 글을 도저히 쓸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여자도 아닌데 이런 게 느껴져서 지금도 놀라고 있다. 상처를 받고 난 이후 미처 아물지 않은 상처를 그대로 안고서 일상을 꿋꿋이 살아내는 사람들. 왜 나는 이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남자보단 여자가 먼저 떠오르는 걸까. 아마도 내가 여성의 글에 더 끌리는 이유와 연결되어있진 않을까.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3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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