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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평점 :
자유와 소망: 글을 쓴다는 것.
아고타 크리스토프 저, '어제'를 읽고.
주인공 토비아스 호르바츠는 시계 공장에서 일하는 단순 노동자다. 그는 오래 전 다른 나라에서 도망치듯 이곳으로 왔다. 성인도 되기 전, 살인 미수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엄마와 내연 관계에 있었던 학교 교사,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의 유일한 사랑 린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남자 상도르의 등에 칼을 꽂았었다.
창녀이자 거지였던 엄마 에스테르가 그를 버리지 않고 키웠던 유일한 이유는, 그가 크면 일을 시켜 돈을 벌어내기 위해서였다. 상도르는 토비아스를 그런 식으로 키워선 안 된다고 주장하며 반대했다. 에스테르를 토비아스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했다. 언제나처럼 잠자리였던 부엌에서 이 이야기를 엿듣던 중 토비아스는 엄마와 자기를 떨어뜨리려고 하는 상도르를 불쑥 죽이고 싶어졌다. 그래서 엄마와 포개져 있을 때 상도르의 등에 칼을 깊숙이 찌르면 아래에 있는 엄마까지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아이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둘의 생사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토비아스는 그렇게 조국을 황급히 떠났었다. 그리고 이 떠남은 자연스럽게 린과의 작별을 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 토비아스는 언제나 린을 기다린다. 그가 기다리는 린은 조국을 떠나기 전 학교를 같이 다니던 배 다른 여동생 린이 아니다. 그가 기다리는 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여인이다. 그 누구도 될 수 없고, 또 되어선 안 되는 린. 그런 그녀를 그는 항상 기다린다. 그리고 그는 매일 같이 글을 쓴다. 마음 한 켠에는 언제나 죄책감으로 가득 찬 상태로, 아무런 연고도 없고 언어도 다른 타국에서 일개 노동자로 외로이 살아가는 이민자와 소수자의 애환은 린과의 불가능한 만남을 소망으로 소환하며 기다리는 토비아스의 마음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시계 공장에서 일하지만 그 공장의 누구도 완성된 시계를 만들 수 없는 비극처럼, 불완전한 토막으로 살아가는 삶. 저자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단문의 향연으로 거침없이 드러내는 메시지의 핵심이 아닐까.
그런데 어느 날, 그 린이 왔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아니 어쩌면 불가능해야만 했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결혼을 하고 어린 아이를 낳은 채로 의사인 남편을 따라 타국에 1년 간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그 기간 동안 토비아스와 같은 공장에서 일과 시간을 보내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토비아스는 꿈만 같았다. 꿈이 벌컥 실현되어버린 것이었다.
토비아스의 삶은 그 이후로 완전히 바뀐다. 눈에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던 소망이 어느덧 현실 가운데 스며들어와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대상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매일 그녀와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이 점심을 먹는다. 일이 너무나도 단조롭고 외로워 자살까지 시도했던 토비아스. 그는 이제 차라리 쉬는 주말보다 일하는 주중이 기다려질 만큼 공장 가는 날이 더 좋아졌다. 그 동안 주말에 아무런 사랑도 없이 만나 잠자리를 같이 하거나 별 말도 없이 시간을 함께 보내던 욜란드에게 찾아가는 일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린에게는 남편이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집을 비우고 일을 해야 할 시간에 그를 우연히 마주친 토비아스. 그의 주위에는 다른 여자들이 있었다. 토비아스는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칼을 하나 들고 린의 집으로 찾아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푹!" 토비아스의 두 번째 살인미수였다. 이번에도 칼이었다. 누군가를 죽이지도 못하는 칼을 이번에도 휘둘러버렸다.
집으로 가 누군가 자기를 잡으러 올 때를 기다렸지만, 정작 찾아온 사람은 린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칼에 맞았지만 치명상은 아니었으며, 토비아스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경찰에 보고하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고국으로 돌아가는 즉시 이혼하기로 합의를 봤으며, 아이 또한 남편이 데리고 가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고 전했다. 마침 두 번째 아이를 가졌다가 유산까지 하게 된 린. 그녀는 이 모든 상실이 토비아스 때문이라 여겼다. 토비아스에게는 소망의 실현이었던 린과의 만남이 이렇게 끝나버린 것이었다.
린은 그렇게 떠났고, 토비아스는 모든 걸 잃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자살을 하거나 상실감에 젖은 불행한 사람으로 전락하지 않았다. 그는 욜란드와 결혼해서 두 아이를 가진다. 첫째는 딸, 이름은 린. 둘째는 아들, 이름은 토비아스. 그는 여전히 시계공장에서 일한다. 그러나 공장으로 가는 버스에는 이제 아무도 타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글도 더 이상 쓰지 않는다. 그러나 왜 이런 마지막 상황이 내겐 행복으로 비쳐지지 않았던 걸까.
토비아스에게 찾아온 린은 과연 소망의 실현이었을지 생각해본다. 그에게 소망이란 차라리 실현되지 않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소망할 땐 마음껏 기다리고 가슴 부풀기도 하며 언제나 상상하고 글도 쓰면서 일상의 따분함과 이민자의 비애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소망이 실현되고 또 떠나버린 자리에는 자유가 사라진 채 현실 안주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자유에의 의지가 꺾였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소설적 장치가 아니었을까. 그가 이루지 못한 자살은 글을 쓰지 않는다는 행위에서 비로소 실현된 게 아니었을까.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나는 다시 조용히 내게 묻는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42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