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왕의 복음 - 당신의 삶에 예수의 통치가 임하게 하라!
스캇 맥나이트 지음, 박세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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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왕의 복음: 개인구원을 위한 천국티켓을 넘어서.


스캇 맥나이트 저, ‘예수 왕의 복음’ (새물결플러스 출판)을 읽고.


사영리식 전도의 목적은 영혼 구원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 결단을 위해 전도자는 피전도자를 설득해야 한다 (선포가 아닌 설득이라는 점에 유의하라). 설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이에 따른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그래서?” 하는 무관심한 반응과 “정말?” 하는 관심의 반응이다. 물론 전도자는 후자의 반응을 기대한다. 일단 전도자는 피전도자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기로 작정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상황이다. 시나리오대로 피전도자의 반응이 나와준다면, 잃어버린 영혼을 하나 더 구원하는 셈이며, 교회로 돌아가 ‘영접시킨 영혼’ 수에다 한 칸 더 추가할 수도 있고, 어쩌면 ‘전도대왕’이라는 타이틀의 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전도대왕’의 경험이 있다). 그런데 현장에서 피전도자의 반응이 후자인 경우는 거의 없다 (만약 후자인 경우라면 무슨 말을 하든지, 혹은 안해도, 영접을 할 것이다). 보통 전자이거나, 얼굴엔 가느다란 웃음으로 위장한 채 대화가 빨리 끝나기를 고대하면서 가만히 듣고 있는, 소위 ‘아량 깃든 무반응’이 대부분이다. 어쨌거나, 전도자는 준비해온 게 있다. 이를 위해 떨리는 가슴으로 얼마나 부단히도 연습을 했던가. 피전도자의 반응이 어떻든지 상관없이 전도자는 끝까지 진행해야만 한다. 목적은 영접이다. 


두 번째, “그런데 당신은 죄인이다.” 

죄라는 정의가 기독교 신앙 안에서도 해석이 명확하지 않으며, 영적인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 밖의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개념이기 때문에, 이 두 번째 메시지를 듣는 사람은 어리둥절할 수 있다. 만약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것 같다면, 그건 대부분 기독교에서 주로 말하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과 같은 영적인 죄로써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도덕적 성찰로 비롯된 반응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내가 왜 죄인이냐?”라며 기분 나빠하는 경우다. 생각해보라.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와서 좋은 소식을 전해주겠다고 해서 어디 한 번 말해보라고 허락했는데, 뜬금없이 자기더러 죄인이라고 선포하니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그 죄를 인간의 힘 (선행이나 봉사 희생 등등으로도)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하니, 이건 완전히 자신이 구제불능이라는 말밖에 안 된다. 그러면 결코 좋은 소식은 좋은 소식이 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전도자는 이런 경우를 당하면 감정이 울컥해지면서 계획했던 진도를 나가기가 어려워진다. 죄의 개념을 이해시키고자 이런저런, 자기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설명을 피상적으로 해보지만, 화가 난 피전도자는 눈을 멀뚱멀뚱 뜨고서 무슨 귀신 신나락 까먹는 소리하냐는 식으로 전도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앉아있다. 아, 이 난처한 상황. 이건 교회에서 배운 사영리식 전도 매뉴얼에 나와있지도 않다. 그러나 크게 걱정할 건 없다. 다행히 (?) 이런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첫 번째 메시지에서 반응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무반응’이다 (단, 아량은 점점 사라져간다). 그래서 전도자들 대부분은 계획했던대로 세 번째 메시지로 별 무리없이 진행할 수 있다.


세 번째 메시지는 “예수님만이 죄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다.”이다. 죄가 무엇이지 선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예수라는, 신이자 사람인 존재가 (우와..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아스가르드의 토르 같은 건가? 그러면 신화란 말인가?) 나타나서 자신의 죄문제를 이미 해결했다고 선포하니, 생각해보라.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겠는가. 도대체 그 죄가 뭐길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게 도대체 뭐길래, 모든 인간을 밑도 끝도 없이 구제불능으로 만들어 버리는가. 그리고 그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예수를 제시하니, 피전도자는 정말 황당하지 않겠는가. 도대체 예수라는 존재가 누구이길래, 부탁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죄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는 건가. 이건 도대체 고마워해야만 하는 상황인가. 이렇게 머리가 온통 복잡해진 상태에서 별다른 반응을 하지 못할 무렵, 전도자는 슬그머니 네 번째 마지막 메시지로 넘어간다. 상투적인 사영리식 전도의 경우, 보통 이렇게 세 번째 메시지까지 이르면, 전도자의 경우는 지치고 긴가민가하면서도 일단 끝가지 가보자는 마음가짐이 되고 (전도자는 피전도자가 큰 반대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흑암이 결박되었다거나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고 믿게 된다), 피전도자는 어여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상황이 된다 (이런 상황을 가리켜 ‘동상이몽’이라고 한다). 


“예수님을 영접하세요.” 네 번째 메시지다. 이 말을 들으면, 아마도 ‘내 이럴 줄 알았다. 결국 교회 나오라는 말이었군’하고 생각하는 피전도자들이 많을 것이다. 예수 믿고 교회 나오라는 말을 하려고 앞의 세 가지 메시지를 성경구절까지 외우면서 장황하게 설파했던 거라고 여길 것이다. 그리고 쉴 틈을 주지 않고 전도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기도를 따라해야 하는데, 따라하겠냐고 물어본다. 피전도자는 난감하다. 화를 낼 수도 없다. 무턱대고 영접기도라는 것을 따라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아니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만약 안 한다고 하면 다음에 또 찾아오거나 귀찮게 할테니 그냥 따라해줄까 고민한다. 어떤 피전도자의 경우는 가만히 생각해보다가 영접기도를 따라한다. 아니 따라해준다. 한 번 더 아량을 품고 다음과 같이 생각을 해본 것이다. ‘만약 죄라는 것이 진짜로 있다고 치고 (비록 믿기지는 않지만), 그 죄를 전도자의 설명대로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치며 (왜 해결 못하는지 이유는 모르면서), 예수라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존재가 어쨌거나 자신의 죄문제를 해결했다고 치면 (‘음… 땡큐일 수도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공짜 천국티켓을 딸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도 든다), 그 영접기도인가 뭣인가만 따라하면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든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고, 절대 그 구원은 잃어버리지 않을 거라고 강력하게 말하는데 (보이는가? 모든 게 가정이다. 복음 선포에 믿음이 생긴 게 아니라 전도자의 열심에 설득을 당해준 것이다), 밑져야 본전 아닐까?’ 그래서 영접기도를 따라해주겠다는 결단 (?)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웃픈 상황이 현장에서 항상 벌어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사실은 직간접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상황 중 추스린 것이다). 눈치 빠른 독자는 벌써 알아챘겠지만, 그렇다. 나는 사영리식 전도의 부정적인 영향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런 이야기에 공감을 한다면 (위의 장황한 글을 단숨에 읽어내려온 독자들 모두 포함), 아마도 당신도 비슷한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봤거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해봤다는 뜻일 것이다. 


스캇 맥나이트의 ‘예수 왕의 복음’이란 책을 읽고나서, 나의 이런 불경스런 (?) 생각이 전적으로 틀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의 메시지는 그것이 가지는 무게에 비해 아주 단순하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종교개혁 즈음부터 시작해서 ‘구원의 문화’를 ‘복음의 문화’로 착각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본래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밝히는데 초점을 둔다. 그 복음은 바울과 사도들의 복음이자, 신약성경이 전해주는 복음이며, 또한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이다. 그것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이야기의 완성이자 약속의 성취로서의 예수님 이야기다. 우리들이 흔히 복음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구원의 문화’는 ‘복음의 문화’ 안에 속한 것일 뿐, 결코 ‘구원의 문화’는 ‘복음의 문화’와 똑같지 않다. 저자는 복음의 예수님을 요약해서, ‘왕이신 예수님’, 혹은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메시아이며 주님이시다’라고 말하겠다고 한다. 왕으로서, 메시아로서, 주님으로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 혹은 해방자이시라는 것이다. 


조소 섞인 이 글의 앞부분에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단지 사영리식 전도방법이 잘못되었다거나 그것을 피상적으로 수정하자는 게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즉 사영리식 전도방법의 배경이 되고 근간이 되어온 기독교의 잘못된 문화를 꼬집고 싶었던 것이다. 스캇 맥나이트가 간파한대로, 복음은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받는지에 관한 체계가 아니다. 사영리식 전도에서 말하는 복음이란 천국티켓용으로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값싼 구원, 오로지 죽은 이후의 사후세계가 지옥이 아닌 천국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안전한 보험과도 같은 복음은 결코 예수가 선포했고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믿고 전했던 복음이 아닐 것이다. 복음이 좋은 소식인 이유는 결코 영혼 구원을 충족시키는 수단이기 때문이 아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한 개인 영혼 구원을 넘어서는 더 큰 이야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구약성경에서 줄곧 이야기된 이스라엘의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가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맥락이 없이 전해지는 사영리식 영혼 구원 방법은 허탈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런 영혼 구원에 초점을 둔 전도는 이 시대의 기독교가 말과 행동이 다른 이중적인 거짓종교라는 탈을 쓰게 된 이유 중 분명히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우린 복음이 무엇인지 똑바로 알아야 한다. 일부를 가지고 전체인 것처럼 믿으면 꼬인 실타래는 더 꼬이기만 할 것이다.


스캇 맥나이트는 구원의 문화가 복음의 문화로 둔갑한 현실을 진단/폭로하면서, 참 복음이 무엇인지 (앞서 언급했듯, 참 복음은 이스라엘 이야기의 완성이자 해결로서의 예수님 이야기이다) 신약성경, 특히 고린도전서 15장을 중심으로 밝힌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복음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묻는 사람도 왕왕 있었다면서, 그 사람이 가졌던 근본적인 문제점은, 복음을 개인적, 실존적, 사적인 죄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만 이해할 뿐, 이야기 문제, 즉 메시아 해결책을 찾아 헤매던 이스라엘 이야기의 결말로는 이해하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구원 계획이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는지를 알게 하는 복음을 더 많이 선포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바울은 이신칭의를 말했지만, 바울이 이해한 복음은 단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았다. 바울의 복음은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이야기를 맥락으로 하는 사도적 복음이었다. 단지 성금요일 이야기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계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삶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그 다음, 이런 웃지 못할, 구원이 복음을 압도하게 된 현실의 메카니즘을 밝힌다. 과거의 어느 지점에선가 이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지점을 종교개혁 시기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특정한 두 개의 문서를 통해 확산되었다고 판단한다. 루터파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와 칼빈주의/개혁파 진영의 제네바 신앙고백이 바로 그것이다. 조항의 목차를 구원과 이신칭의에 관한 항목으로 바꾸면서 ‘복음의 문화’가 ‘구원의 문화’,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칭의의 문화’로 변형되었다고 말한다. 종교개혁에서 복음 이야기나 신조를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모든 것의 순서를 재배치함으로써 복음 이야기가 구원 이야기라는 새로운 틀로 재구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복음주의, 특히 영국과 미국의 복음주의에서는 (장로교가 압도적인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 복음주의 중 극우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종교개혁의 구원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현재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저자는 판단하고 있다. 또한 ‘복음이 구원으로 축소되고 구원이 개인적 죄사함으로 축소된 것을 죄 관리의 복음’이라고 부르면서 강력하게 비판했던 달라스 윌라드의 말을 인용하면서, 복음 이야기가 복음의 창백한 그림자가 되고 말았다고 한탄한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초점을 맞췄지만, 바울은 적어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는 칭의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과거에는 ‘바울은 하나님나라를 선포했는가?’ 혹은 ‘예수님은 칭의를 선포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저자는 간파한다. 복음은 하나님나라나 칭의라는 단어만으로 정의할 수 없으며, 그 두 용어보다 더 큰 개념이라고 말한다. 복음이란 이스라엘 이야기가 예수님 이야기 안에서 마무리되었다는 선언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포하셨는가?” 혹은 “예수님은 자신에 관해 선포하셨는가?” 만약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예수님도 복음을 선포한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을 다르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도 많이 있기 때문에 저자는 이를 염두에 둔 것이라 본다. 그는, 복음은 하나이며, 그것은 예수님이 선포하셨던 것이고, 복음서가 말하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바울과 베드로가 사도행전이나 서신서에서 설교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달라진 것은 앞서 지적했듯, 종교개혁 시기 이후 기독교의 변천과정에서 구원이 복음을 압도한 점진적인 사건인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 가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도행전의 복음전도는 메시아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이 구원과 관련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선언하기 때문에 듣는 이들에게 예수님을 메시아이자 주님으로 고백하라고 촉구하는 반면, 우리의 복음전도에서는 죄인들에게 그들의 죄를 인정하고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한다.’ 다시 이 글의 서두로 돌아가 저자의 주장과 맞춰보면,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전도는 누군가로 하여금 결단하게 만드는 데 몰두하는 반면,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제자를 만드는 데 몰두했다는 점을 간파해낼 수 있다. 결단에 초점을 맞추는 복음전도는 복음의 의도를 온전히 구현하지 못한다. 그러나 제자 삼기를 목표로 하는 복음전도는 서두르지 않고 예수님과 사도들의 온전한 복음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다. 결단은 제자의 삶을 살게 하는 핵심 요소가 아닌 것이다. 사실 태극기 부대를 앞세운 극우 세력의 기독교인들이 결단이라면 누구보다도 선두에 서있는 분들 아니겠는가. 중요한 건 한 번의 결단이 아니라 어떻게 세상 속에서 세상과는 다른 정체성을 깨닫고 세상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느냐,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내느냐 하는 것이다. 즉 종말론적 신앙관을 가지고 ‘지금, 여기’에서 새하늘과 새땅을 살아내는 것이다. 이는 저자가 말하는 제자의 삶과도 같을 것이다.


나 역시 저자처럼 복음의 문화가 복원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복음이 값싼 천국 가는 티켓 정도로 추락한 현실이 슬프다. 여기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복음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 복음을 끌어안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경 이야기를 하나님의 백성에 관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그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의 문화는 교회의 문화이며, 그것은 곧 앞서 내놓은 제안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복음의 문화로 변화되는 교회의 문화다.’ 그렇다. 예수님의 전체의 삶을 이스라엘 이야기와 연결하고 그것의 완성 내지는 성취라고 보는 큰 이야기 (big story)를 이해할 때에야 비로소 복음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고, 그 이야기가 곧 구원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며, 우리들 역시 그 이야기의 연장선에 있음을 감사하게 될 것이다. 구원의 문화가 아닌 복음의 문화가 회복된 교회를 꿈꾼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16?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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