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고백록 현대지성 클래식 2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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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믿음의 조화로 온전한 신앙을.


레프 톨스토이 저, '고백록'을 읽고.


이성과 믿음의 조화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성을 향한 한낱 바람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이성에 천착한 사람은 이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러나 엄연한 질서를 가지고 버젓이 존재하는 세상의 또 다른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언젠간 대면하게 된다. 반대로, 이성을 배제한 믿음만으로 무장한 사람 역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믿음인 줄 알았던 것의 실체가 자신의 미련한 고집이었음을 언젠간 발견하게 되고, 그 고집으로는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며, 사람들로부터는 오히려 무분별하다거나 ‘나누는 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어 맹목적인 사회악으로 자리매김하는 날을 맞이하게 된다. 누군가는 이성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인생을 마치고, 또 누군가는 믿음으로 시작하여 이성으로 생을 마감한다. 믿는 자들의 눈으로 보면, 전자는 ‘회심’, 후자는 ‘변심’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의 시선으로 볼 때, 전자는 그저 정신 줄을 놓았다거나 나약해졌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고, 후자의 경우는 뒤늦게 철이 들었다는 말을 듣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분 자체에 불만을 느낀다. 꼭 나눠야만 하는가. 어느 한 쪽을 택하면 나머지 하나는 폐기해야만 하는 것인가. 둘 다 가질 순 없는 것인가.


나는 그리스인이 아닌 일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지녀야 할 (또한, 지니게끔 되어있는, 마치 바른 가지가 바른 열매를 맺듯) 성숙한 인격과 성품을 ‘이성과 믿음의 조화’에서 찾는다. 치우치지 않는 신앙 역시 이러한 바탕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삶과 신앙의 조화에도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실질적인 일상을 살아가며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요소이리라 믿는다.


회심이란 단순히 이성을 버리고 믿음을 선택한 행위를 말하는 것일까. 이성을 져버린 믿음이 과연 참 믿음일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회심은 이성과 믿음에서 조화를 이루어 그 어느 것도 버리지 않고 둘 다 취한 상태이지 않을까. 이성의 한계를 인지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이성적인 판단이며, 맹목적인 믿음의 한계를 인지하는 것 역시 이성적인 판단만이 아닌 믿음의 판단을 포함한다. 둘은 상호 보완해가면서 온전한 신앙을 이루어내는 것이지, 결코 그 어느 하나를 버리거나 배제해야만 하는 대상이 아니다. 서로를 적으로 보는 시선이 그대로 살아있는 한 결코 건강한 신앙은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대문호 톨스토이의 고백록을 읽어보면, 부와 명예와 지성의 끝에 서있는 한 인간이 신앙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지, 그리고 그 신앙이 어떻게 그 사람에게 작동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집안 내력으로 정교회 문화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벌써 그는 신앙과 삶의 간극을 목도하고 껍데기 뿐인 신앙의 모습에 환멸을 느꼈으며 결국 신앙을 멀리하게 된다. 인생의 의미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존재 의미와 정체성에 대해서, 사적인 호기심을 넘어 인간 전체로까지 범주를 확대하여 철학적이고 과학적이며 신학적인 고민을 하면서 거의 일평생을 보낸다. 톨스토이는 태생부터 귀족 출신이었기에 자신의 얼굴에 땀을 흘리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면서도 많은 돈을 남길 수 있을 만큼 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젊은 나이에 작가로서, 그리고 지성인으로서 세상으로부터 명예와 존경을 얻었다. 그러나 그가 어릴 적부터 가져왔던, 내면의 목소리에 그는 끝내 답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 그가 착안한 것은 신앙인의 도덕적인 불완전함이었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일상적인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꼴을 목도한 후, 톨스토이는 그 문제의 답이 도덕적인 완전함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도덕적 완전함을 추구했지만, 그것은 이내 모든 것에서 완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고, 그것은 다시 자기자신이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 욕망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은 또 다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 즉 다른 사람들보다 더 유명하고 더 중요하며 더 부유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바뀌었다. 


청년 시절부터 톨스토이는 성공한 작가가 되어 일찌감치 부와 명예를 안고 지성인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여파로 선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지만,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으며, 오히려 그가 피라미드 위에 올라가고, 그 자리를 모든 비열한 욕망으로 지켜내는 모습에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인정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이 회고록에서, 자신의 청년 시절을 떠올리기만 하면 너무나 끔찍해서 소름이 끼치고 역겨워진다고 고백한다. 사회적인 출세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였으며, 세상의 성공이 아닌 도덕적인 완전함과 선함을 위한 인생관을 내심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기득권이 주는 근사한 매력과 유익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끊임없는 괴리를 느끼며 두 영역으로 분리된 삶을 그는 거의 평생 동안 살아갔다.


이러한 이중적인 삶이 과연 톨스토이만의 전유물일까. 앞서 이성과 믿음의 조화를 꿈꾸며 작은 실천으로 일상을 살아내려는 나의 고민과 몸부림도 같은 맥락에 놓여있진 않을까. 또한 이 글에 공감을 하며 종말론적 신앙관을 가지고 오늘을 그날처럼 살아내려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기도제목이 아닐까. 이러한 괴리를 인지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과연 그 사람이 가진 신앙의 눈은 떠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감긴 채, 알고 보면 지극히 사적인 안위만을 추구하며 정의와 공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작디작은 자기만의 왕국의 평화만을 고수하려는 peacekeeper의 눈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톨스토이가 청장년 때 내린 결론은 인생의 무의미함이었다. 그것은 그의 이성을 매개로 한 모든 학문적인 연구에서 도출된 믿음직한 결과였다. 형이상학적인 추상 학문도, '어떻게'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는 자연 과학도 모두 인생을 왜 살아야 하는지, 어차피 죽음으로 모든 것이 파괴될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의미 있는 삶을 살아낼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은 얻을 수 없었다. 학문의 도움만이 아닌 종교의 도움으로도, 그리고 그 시대에 알려져 있던 현인들의 인생관에서도 그는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의 삶은 정지했고, 삶은 무의미하기만 했다. 그러한 굴레에서 빠져 나오는 유일한 탈출구는 자살밖에 없었다.


자살만이 해답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그러나 그는 자살을 감행할 결심을 할 수 없었다. 혹시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신앙으로 돌아온다. 지식인들과 현자들이 이성에 기초해서 제시한 지식은 삶의 의미를 부정했지만, 무수히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인류 전체는 삶의 의미가 이성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지식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성에 기초하지 않는 지식, 그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던 그것은 바로 '신앙'이었다. 하나님과 도덕적 완전함, 그리고 삶에 의미를 부여했던 '신앙'으로, 평생의 시간을 들여가며 결국 그는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었다. 그러나 이전과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었다. 똑같은 자리였지만, 이번엔 그가 바뀌었다. 전에는 신앙의 모든 것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던 반면, 다시 돌아온 시점에선 그것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거의 평생을 들여 이렇게 저렇게 인생의 답을 찾는 구도자로서 '방황'을 했던 기간이 준 선물일지도 몰랐다. 다음은 톨스토이가 자살 충동에서 드디어 벗어나게 된 깨달음을 고백한 부분이다. 


| 내 안에서 어떤 음성이 소리쳤습니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하나님 없이는,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는 것은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이다. 하나님을 찾는 삶을 찾아라. 하나님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내 안에 있는 모든 것과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력하게 환해졌고, 그 이후로 그 빛은 나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 


20세기 세계적인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도 그의 저서,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자신의 진정한 회심을 이성과 논리로 변증하지 못했다. 톨스토이 역시 이 책 '고백록'에서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두 인물이 신앙을 멀리하게 된 이유는 달랐고, 다시 신앙을 회복하게 된 길도 달랐다. 하지만 공통점은 모두 철저하고 치열한 이성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 그러나 결국에는 그 이성을 버리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 덕분에 절박함을 가지고 원래 그들 자신이 서있었던 신앙의 자리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내가 앞서 언급한 질문과 고민의 관점에서 해석해보자면, 두 사람 모두 마침내 이성과 믿음의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이성이 전혀 필요 없다거나, 이성이 믿음을 얻기 위한 발판으로만 쓰이고 최후에는 버려지는 것도 아닌 것이다. 이성과 믿음은 결코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다. 서로 합하여 선을 이루어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성품을 발현케 하는 것이다.


진지한 고민의 과정에 진입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응원한다. 피터 엔즈의 통찰에 의해서도 '확신의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의심의 숲을 지나야만 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지식과 믿음, 그리고 그분을 향한 신뢰와 순종이 이루어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꼭 거쳐야만 하는 과정일 뿐이다. 다만, 사람들의 이러저러한 말에 솔깃해져서 본질을 놓치지 않도록 늘 깨어있도록 성령께 간구하자.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하면서 절박한 심정으로 이성과 믿음의 조화를 이루며, 그 열매로 삶과 신앙의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구하고 순종하자. 바로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일상, 하나님나라!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24?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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