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 - 책 읽고, 놀고, 대학도 가고, 일석삼조 독서토론기
조원진.김양우 지음 / 삼인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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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인 모습이다. 고 2학년 시절부터 고 3학년,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에서 제일 정신없고 바쁜 때에 독서토론 모임을 만들어서 우정과, 사랑과, 학업의 증진과 독서를 나눌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정말 창의적이고 도발적인 행위이다.


만일 나와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이 그것을 시도한다고 했을 때 찬성을 했을까?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상황과, 믿음을 가진 부모님들이 계셨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또, 무모하리만큼의 도전이 있었기에, 좋은 발전이 있지 않았을까?


입시 준비의 황금기, 단 1분 1초도 허비할 수 없음을 촌음을 아끼지 아니하고 공부에 열중하게 하는 때에, 그 시절을 그래도 그들을 향한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믿음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던 일이다.


또한 학생들의 신선한 도전이 그 일을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느끼는 것은 어떻게 그렇게 논리적으로 언어를 구사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다섯 명 중이 함께 하였지만,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 조원진과 김양우 학생이 정리하여 잘 책을 엮어 내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 책을 통하여 맨 먼저 느끼는 것은 나도 이러한 독서 토론 모임을 만들어야 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몇 년전 동일한 길을 가고 있는 동기들과 함께 독서 토론을 만들어 함께 독서에 열심을 내자고 하였는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많았기에 시작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만 하차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하여 방법론과, 마음가짐, 준비 등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아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함께 사랑하고, 함께 협력하면서 한 무리를 이루어야 하는 그들이 경쟁의 논리에 밀려, 겉과 속이 다른, 아니, 오직 자신을 위하며 모든 것을 버리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서글프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게 하는 현 시대의 젊은이들, 그것은 기성세대들이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오직 현재만을 생각한 채, 앞의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나만 잘 되면 된다고 하는 지극한 이기주의의 모습이 우리를 더욱 안타깝게 한다. 아니 나 역시 그렇게 하도록 하는 공범인지도 모른다.


어찌 우리 시대가 이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식의 결론만을 중요시 하는 발상이 결국 과정 뿐만 아니라, 윤리와 인간성을 모두 상실하게 만들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모두가 다시 돌아가야 한다. 세계화 되고 있는 이 시대 가운데서 먼저 남을 배려하고 사랑을 나누고, 아픔을 함께 하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러할 때에 진정한 가치추구와 사랑이 있다고 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기는 노란 잠수함과 같은 모임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뿐만 아니라, 아무런 보수나 대가도 바라지 아니하고 학생들을 위하여 열심을 다해 주셨던 분들과 같은 선생님들도 많이 계셨으면 좋겠다. 아울러 그들을 믿고 격려해주신 부모님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마지막으로 이 각박하고 바쁜 시대 가운데서도 느림의 미학을 가지고, 도발적인 상상력과 창의성을 가지고 한 시대의 조그마한 부분의 혁명을 가져온 노란잠수함 대원들에게 뜨거운 찬사와 격려를 보낸다. 그리고 수혜와 증여를 입은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낌없는 응원과 조언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그대들이 있기에 아직도 대한민국과 한국 교육에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음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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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클래식을 만나다
정인섭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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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시골의 조그마한 읍 소재지에서 자랐다. 극장은 두 군데 있었지만, 영화를 볼 만한 기회는 거의 없었다. 워낙 엄격한 가정에서 자랐기에! 거기에서 노래를 듣는다는 것, 거의 몰래 듣는 수준이었다. 그것도 가요(유행가)정도로만~~,

텔레비전이 거의 없었던 시절 아버지께서, 라디오로 뉴스만 들으시고, 다음에 가요가 나오면, “라디오 꺼라!!!~~~”라는 형편이었다. 그러기에 클래식을 접한다는 것, 그리고, 명화를 본다는 것. 초등학교 시절에는 거의 상상도 해보지 못한 수준이었다.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자랐기에 문화적(?)혜택은 거의 받지를 못하였다. 아니 내 자신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대학을 들어가서 도청 소재지가 있는 곳으로 왔지만, 워낙 기본이 있어야지!!!

영화 보는 것도 별로인데! 클래식은 무슨! 그나마도, 기숙사의 방을 함께 썼던 친구가 학교 앞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로, 디제이를 봤다(일명 판돌이) 그 친구 덕분에 엘리제를 위하여 라든가, 운명, 메시야? 정도!, 클레식에 조금은 눈을 뜨고, 팝송에 대해서도 약간의 맛은 보았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나 아내를 만나결혼을 하고 난후, 아내는 대도시 대전에서 성장하여 나름대로 음악과 영화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나는 거의 모르기에 뚱딴지 같은 반응이었다.

그래서 항상 클레식과 명화는 거의 남의 이야기다,

요즘도 아내는 가끔 혼자 영화를 보러 간다. 그것도 조조로, 무슨 청승인지, 주로 드라마나, 로맨스 정도, 하지만, 나는 주로 스릴러, 또는 첩보 영화 정도, 그 덕분에 쇼생크 탈출 정도는 보았다. 그리고 아련한 기억 속에 있는 엑스칼리버, ~~~

그런데 이번에 “영화, 클레식을 만나다”를 읽고 영화에 대하여 그리고 거기의 배경이 되는 음악이 나를 새롭게 하였다. 덧붙여 지나간 영화들 이미 극장가에서 사라진지 오래지만, DVD나 인터넷에서 다운을 받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리고 비록 짧지만, 저자의 영화와 음악평, 참으로 신선했다. 그로 인해서, 영화에 그리고 음악에 새롭게 눈을 뜰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더욱 새로운 것은 영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시대적 상황이라든가? 제작에 관한 것, 시놉시스등, 거기에다. 영화에 어울리는 음악이 주어졌을 때에 영화의 감각이 더욱 배가되는 모습을!!

이제 영화를 보러 가면 영화의 장면 뿐만 아니라, 거기에 쓰이는 배경음악도 살필 수 있을 자신이 생기게 됨을 본다.

그리고 이제 영화도 골라볼 수 있는 자신감도 든다. 보고 싶은 영화를 선택할 때에 무엇을 먼저 살피고, 어떠한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지 그리고, 장면에 너무 눈이 팔려서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그 배경음악이 어떠한 상황에서 영화의 감을 더해주는지!

영화에 클래식에 조금 더 눈을 뜨고, 그래도 한마디라도 할 수 있는 자신이 생기는 것 같다.

영화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분, 그리고, 거기에 쓰인 배경음악 특히 클래식에 대하여 알고 싶은 분들에게는 좋은 볼거리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주변 사람들이 보더니 책이 참 제작되었다고 칭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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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김선주 지음 / 삼인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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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성자라고 하는 마하트마 간디가 기독교를 전파하는 선교사에게 이런말을 했다고 들었다. “나는 예수는 좋아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당신들은 싫어합니다. 라고~~ , 도무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은 잘못하면 예수까지 싫어할 상황이다. 그때보다 더한 상황이 지금 이시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기독교인인 나도 한 몫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요즘, 본서 “한국 교회의 일곱가지 죄악”이라는 책과 같은 부류의 책들이 인터넷 상에, 그리고 서점가에 하나씩 늘어남을 볼 수 있다. 기독교에 대한 실망과 자기반성으로, 그것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한 실체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거기에는 기독교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 그것도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먼저 큰 틀에서 보았을 때에, 내 자신을 돌아보는 것 같아 심히 부끄러웠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교회의 현실, 삶의 자리를 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러면서, 왜 이렇게 까지 한국의 기독교가 이지경이 되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는 나도 한 몫을 하고 있음이 분명한 사실이다.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말씀하신 글에서, 교도소에 가서 재소자들을 만나보니, 그들과 나와 다른 점은 별반 없더라고 하는 것이다. 다만 다른 것은, 그들은 죄를 짓고 그것이 발각되어서 교도소 안에 있는 것이고, 나는 발각되지 않아서, 밖에 있는 것이라고,


거기에 나는 동감한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사회와 윤리에 크게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밖에서 생활하는 것 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초대교회, 처음 선교사(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했던 안디옥 교회, 그들은 그들 스스로 호칭하지 않았는데도 주위의 사람들이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비판이 아닌 칭찬이었다. 그들의 언행이 본이 되었기에, 칭찬받을만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반열에 오를 뿐만 아니라, 복음이 급속도로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2천이 지난 한국 땅, 한국교회의 현주소는 복음이 급속도로 전파되는 일도 없다. 거기에는 저자가 지적한 많은 죄된 요소가 자리잡고 부족하고 잘못된 길로 기독교가 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몸담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면서 두 가지 부분을 생각해 보았다.

먼저 한국교회의 삶의 자리라고 하는 것이다. 처음 한국교회에 복음이 전파될 때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그것은 구한말 한국에 소망이 없는 시대에 선교사들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리고, 일제의 억압을 받으면서, 소망이 없는 이 나라와 민족의 백성들에게 유일한 소망과 민족정신을 일깨울 수 있는 곳으로 한 몫을 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일제 통치 35년을 지내고, 다시 한국전 전후 좌우익으로 말미암은 이념 논쟁, 1960년대의 정치적 혼란기, 1970년대의 유신시대, 1980-1990년대의 혼란기, 2000년대의 경제적 안정기를 지나오면서, 어쩌면 양적인 성장을 많이 가져오기는 했으나, 질적 성장에 많은 관심을 가져오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사상누각의 상황에서 한국 기독교가 약 120년의 시간을 보내왔다. 그러다 보니 신학적인 반성이나,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자유, 관계성에 정확한 확립이나 흐름도 없었다. 다만, 현실에 급급한 나머지, 자신의 뿌리와 기반을 바로 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이념논쟁에, 정치, 경제, 군사적 상황에서 분명한 연구도, 또한 바른 길도 제시하지 못하고 실천하지도 못했다. 그러다 보니 한국적 상황에서 비전을 제시하지도, 분명한 대안도 드러내지 못한 체 오늘까지 이른 것이 오늘의 한국교회이다. 그러다 보니 저자와 같은 지적이 나올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한국교회는 대한민국의 역사 한 가운데서 어지럽고, 때로는 소망이 없는 상황에서 많은 영향력을 제시한 것은 사실이다. 이 부분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저자의 의도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단 한군데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잘못된, 죄악된 부분을 지적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당연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양면성을 살피는데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대형교회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기록했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중소형교회들이 이름 없이 헌신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열심을 내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수고와 헌신은 도외시 하였다. 마치 모든 한국교회가 이와 같은 것 처럼 비추어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어떠한 곳이든 자기 성찰이나 자기 반성이 없이는 결코 발전이나 성장, 성숙은 기대할 수 없다.


물론 저자의 모든 부분에 동의하거나 수긍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저작 의도가, 먼저 예수님을 사랑하고, 다음은 한국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성도들을 사랑하는 충심에서 쓴 부분이기에 대체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 한국교회의 사명은 끝났는가?

많은 부분에 있어서 바르지 못한 것이 아직도 한국교회에 많이 남아있지만, 이러한 책들이 자주 나오는 것은 아직도 소망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나의 조그마한 바램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이 책을 진지하게 살펴보고 냉철한 자기 반성을 통하여, 자신들을 돌아보고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더불어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을 기독교 비판의 도구로 삼기 위한 근거로 삼아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저자가 기록하지 않은 한국교회의 순기능적인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양면성을 가지고 두루 살필 수 있는 혜안도 있어야 할 줄로 믿는다.

마지막으로 내 자신과, 주변을 살필 수 있는 그리고 한국교회의 건강한 앞날을 위하여 좋은 방향을 제공해준 저자에게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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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물을 내신 하나님
신인철 지음 / 엘도론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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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물을 내신 하나님!

독특한 제목이다.


물론 성경 말씀에 소개되어 있는 내용임에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느낌이 생소한 것은 무엇일까? 라고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너무 신비주의적이고, 너무 감상적인 것은 아닐까? 물론 여러가지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삶의 자리가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이미 너무 배불러 있다. 아니 하나님의 자리에 우리 자신이 앉아 있다. 그래서 인격체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억지를 강요하지 아니하신다. 하지만, 우리의 자리를 비워드릴 때에 언제든지 그 분께서 우리의 중심에서 우리를 통치하신다.


다만 우리는 그 분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에 우리 자신을 드리게 될 때에 우리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줄로 믿는다. 저자는 본인이 직접 선교현장에서 체험한 내용을 글로 정리하였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과 신앙의 자세를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준다.


부족하고 어리석은 인간은 눈으로 보이는 것 만을 강조하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저자는 인간과 자연속에 숨겨져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을 지혜를 제공한다.


비록 환경이 열악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는 아프리카인들, 특히 그곳에서도 소외되고 힘든, 외국에서 이주해 온 자들의 형편과 처지를 살피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그러면서, 현실과 자신의 목적 사이에서 방황하기도 하고, 힘들어 하면서도 결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놓치지 않는 모습에서 저자의 위대함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느낄 수 있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의 현장이 어떠하든지, 그곳에 순응할 때에 모두가 적응해 나간다고 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조금 불편하면서, 부족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편안하면서도 풍족하다고 하는 차이점은 있지, 궁극적으로 인간이 존재하는 인생의 자리는 결코 불가능 할 것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막연히 느껴지는 아프리카의 어려움, 그렇지만, 그곳에서도 자신의 할 일을 바로 발견하고 최선을 다하게 될 때에 결코 실패나 좌절이 아닌 성공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고 본다.


다만 자신이 포기하지 아니하고 열심을 가지게 될 때에,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나 여건에 구애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나의 주변의 환경이 준비되어 있는 상태, 거기에는 기도도 간절함도 자연 연약할 수 밖에 없다. 조금은 힘들고 어려움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 대한 겸손한 무릎을 꿇음과 기도가 있어질 줄로 믿는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삶을 통해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읽고 나서 느끼는 것은 비록 저자가 그곳을 떠나왔지만, 마음 한 곳에는 항상 아프리카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사랑이 남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상황이 어떠하든지 인간은 자신이 한 동안 지냈던 곳을 다시 가고싶은 회상의 존재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저자의 따스한 사랑과, 먼지나는 아프리카에서 흘렸을 땀내음이 지금도 내 자신에게 전해 옴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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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축복 - 작은 자를 크게 쓰신 하나님의 은혜
김병태 지음 / 브니엘출판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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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삶을 살아가면서, 항상 자신이 있는 곳, 경험한 것 밖에는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여행을 하고, 책을 보는 것으로 외부에 대하여 습득하고 자신의 견문과 지식을 넓혀 나간다.


야곱 역시 그러한 인물이었다. 자신이 처한 가나안 땅, 거기에서 어머니 리브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성장하였다.


하지만, 복에 대한 욕심은 남다른 면이 있었다. 그것에 대하여 집착하고, 결국 그로 인하여 도망자의 신세로까지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어머니 리브가의 모습을 이 땅에서 다시는 보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것으로 인하여 그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수많은 고생을 한 끝에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복을 주심으로, 이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결코 만만치 않는 장애물이 그 앞에 가로막고 있었다.


바로, 형 에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간절한 기도와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마침내 그는 무사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분명 복을 받은 인물이다. 하지만, 그 복은 결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수 많은 연단과 시련을 겪고서 얻어진 것이다.


우리 인생은 우물안의 개구리이다. 자신이 경험한 것이 모든 것인양, 그것이 전부이고, 내가 생각하는 부분이 옳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을 받아 누릴 수는 없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 시키시며, 인생 광야로 몰아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하시고, 또 인생의 걸음과, 삶의 질을 새롭게 하신다.


특히,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전 세계가 어려운 이때에, "야곱의 축복"은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다시금 무장할 수 있는 좋은 내용이었다.


저자 자신이 삶을 살아오면서 몸소 경험한 것, 독서를 통하여 습득한 것, 성경을 통하여 체득화 시킨 것을 바탕으로 하여 책으로 만들었다.


어찌보면 살아있는 간증집이요, 실제생활과 신앙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다.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 책을 대하게 될 때에,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과, 그 분을 믿고 따르며,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어려운 때에 우리에게 다시금 소망을 주고,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는 좋은 내용임에 틀림이 없다.

특별히 책을 읽는데 부담감이 없도록 큰 활자로 인쇄되어서, 책을 넘기는데 수월함을 느꼈다.


그리고, 각 장마다 생각할 수 있는 TIP이 있어서 읽었던 부분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가?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 가운데 있는가? 새롭게 무언가를 바라보고자 하는 돌파구를 찾고 싶은가? 이 책을 읽게 될 때에 분명한 힘과 용기를 가질 수 있을 줄로 믿는다.


좌우가 막히고, 앞뒤가 보이지 아니할 때에 야곱과 같이 하늘을 쳐다 볼 때에 좋은 방법을 얻을 수 있다.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목마르고, 갈망하는 자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며, 그 분이 주시는 능력으로 새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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