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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떠나며 -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
이연식 지음 / 역사비평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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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성격을 ‘역사논픽션’으로 정한 것이 일종의 ‘목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이야기 형식의 다양한 에피소드는 독자로 하여금 패전을 맞이한 재조선일본인들의 체험에 스스로 뛰어들게 한다. 또한 저자의 필력 역시 가독성을 높이는 데 좋은 요인이 되었다. 과거 학계에서 뭉뚱그려져 왔던 ‘지배자 또는 통치자’로서의 일본인들이 실은 그 사회 내부에서 확실한 계층 분화가 이루어진 상태였다는 점, 또한 이러한 분화가 그들이 지니고 있던 식민주의적 감성·체험과 어떻게 융합되는지가 상당히 날카롭게 드러났다.

  ‘패전’에 따른 일본인들의 귀환(인양, 히키아게) 체험과 그 체험들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변수들이 때로는 미시적으로, 때로는 거시적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의 서술 방식과 내용에서 가장 큰 미덕인 것 같다. 예를 들어 아시아태평양전쟁 이후 한반도에 주둔한 소련군과 미군의 귀환 정책이 달랐다는 점, 이것이 남한과 북한 지역에 살던 일본인의 귀환 체험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 귀환 과정에서 나타난 온갖 종류의 브로커들을 거론하면서 그 귀환 과정이 실제 생활과 어떻게 연관되어 갔는지를 밝힌 점, 총독부 관료나 기업인들의 귀환 방식과 과정이 일반 ‘서민’에 속한 일본인들에게 어떤 좌절을 주었고 이것이 기억을 어떻게 재구성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 또한 이렇게 귀환한 일본인들과 본토인들의 관계가 어떤 모습이었고, 이것이 향후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 하는 점, 조선에 끊임없이 잔류하고자 한 일본인들의 노력에는 제한적이고 파편적인 생활공간이 영향을 주었다는 점 등, 개인의 기억에 영향을 끼칠만한 거의 모든 요소들에 대한 고민이 엿보인다는 점은 이 책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배경일 것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 책은 모리타 요시오의 󰡔조선종전의 기록󰡕과 기타 수많은 회고록을 활용하면서도 그 내용이 품고 있는 역사적 함의에 대해 성공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 책은 기억이 등장하는 맥락‘들’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그 맥락 속에서 빠지게 된 역사적 성찰이 무엇인지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귀환 체험을 가진 일본인들이 국가권력에 의해 광의의 ‘전쟁 피해자’로 명명된 사실을 비판하려는 목적을 가진 책이라고 생각된다. 귀환 체험을 가진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체험과 그로 인해 재구성된 기억을 국가에 의해 전유당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피해자’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의 지향점에는 분명히 ‘한일관계’라는 거시적 문제의식이 있다. 이를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양의 체험들로부터 기억들이 파생되고, 그 기억들의 재구성이 결과적으로 그들 스스로를 ‘피해자’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양 민족이 입은 피해는 각각 그 결 자체가 다르다. 따라서 가해주체 역시 확실히 구분지어 설명되어야 한다. 일본인은 스스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자신들의 기억을 다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는 책 말미에 소개된 이소가야 스에지의 삶을 통해 보다 명시적으로 표현된다. 분명 귀환 체험을 가진 일본인들을 성찰하고 그 결과가 이러한 질문으로 점철된다면, 책임을 묻는 주체와 대상은 명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의식한 독자층이 누구인지가 애매하다. 평자가 느끼기에는 오늘 날의 일본인을 주로 의식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니까 일본인으로 하여금 ‘다시 성찰하자’고 권유하는 책인 것이다. 오늘 날의 한국인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어떤 맥락의 성찰을 야기할 수 있을지는 일말의 의구심이 든다. 이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나타난 것 같다. “다양한 변수 때문에 다양한 체험을 했다. 그래서 매우 다양한 기억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 기억에는 역사적 성찰이 빠져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성찰을 다시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육하원칙을 억지로 껴 넣는다면 ‘어떻게’가 빠져 있는 모양인데, 책의 목적이 정해져 있음으로 날선 비판은 할 수 없지만, 문제제기의 방식과 내용은 매우 구체적인 반면 성찰의 방식과 내용은 상대적으로 매우 모호하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얼핏 이러한 서술 방식이 현재 일본인들의 기억을 고려한 결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내용의 측면에서 매우 재미있는 책이었고, 지식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상당히 유익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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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에 묻히다 - 독립영웅, 혹은 전범이 된 조선인들 이야기
우쓰미 아이코.무라이 요시노리 지음, 김종익 옮김 / 역사비평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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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르타주. 이 단어가 주는 생명력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이 책이 세상이 나오던 시점과 공간에서 전범으로 몰린 조선인 군무원을 추적하겠다는 발상을 어느 누가 할 수 있었겠는가. 저자들의 노력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범주에서 시작했다는 점은 이 책을 느끼는 데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왜냐하면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자신이 바로 이 책의 주인공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등장인물은 식민지를 살아가는과정에서 군무원이 되었고, 다시 전범으로 내몰렸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사형을 당했고, 누군가는 타국의 독립투사로 추앙받았다. 고려독립청년당을 결성한 누군가는 아주 먼 훗날 국가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았고, 누군가는 그냥 존재 자체가 아예 사라졌다. 우리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제국과 식민지 체제로 본격화된 근대가 개개인의 삶에 어떤 이야기들을 만들어 놓았는지 아주 조금은 상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저자들이 이 책을 통해 성공한 것을 꼽자면 이것이 아닐까.

국가는 과연 인간 존재의 필연적 토대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자신이 국제법상 어떤 국가에 소속하게 되었는가에 따라 신민이거나 전범이 되고, 또는 아예 망각되는 것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이 책의 저술동기가 국가를 대신해 국가’(한국과 일본)로부터 버림받은 개인들을 추적한다는 것임은 오히려 이런 슬픈 현실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엄연한 현실인 상황에서 저자들이 제기하는 국가의 폭력성, 편의적 기억 선택, 그로 인한 대중들의 망각과 관련된 것들은 국가 물신주의에 빠진 오늘 날을 되돌아보게 하는 데 유효할 수 있다. 국가를 인식하기 이전에 국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이곳이 국가를 세우기 위한 전장의 한복판이었다면, 또한 그 유산들이 주변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면, 따라서 그 전쟁이 여전히 진행 중임을 인식하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 걸까. 전장에서는 누구라도 범죄자’, ‘독립투사’, ‘애국자’, ‘매국노’, 심지어 존재하지 않았던 것등이 될 수 있다.

그들로부터 나를 투시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꽤 주옥같은 책을 읽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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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드라곤에서 배우자 + 몬드라곤의 기적 세트 - 전2권 몬드라곤 시리즈
윌리엄 F. 화이트 & 캐서린 K. 화이트 지음, 김성오 옮김 / 역사비평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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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오늘 날. 여기저기에서 이에 대한 대안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그 질이 양을 받쳐주지 못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몬드라곤에 대한 이야기도 결국 그 수많은 대안들 중의 하나이다. 문제는 이것이 대안으로서 어느 정도의 질을 담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리라.

  이 책을 접하기 전에는 나는 몬드라곤을 단순히 협동조합의 연합체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어쨌든 이 책을 접한 이후에는 협동조합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지식도 많았고, 사회적 기업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두 권의 책 중에 󰡔몬드라곤에서 배우자󰡕는 평자로 하여금 협동조합주의자로의 전향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뭐라고 형용할 수 없었던 앙금이 󰡔몬드라곤의 기적󰡕을 읽으면서 조금은 가시화하는 것을 느꼈다. 하나의 대안으로서 몬드라곤은 분명히 그 의의가 적지 않다. 특히 필자()가 말했던 것처럼 협동조합형태의 기업지배구조가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는 것이야말로 이 두 권의 책이 가진 가장 큰 의의이다. 독자로서 평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배우자󰡕를 읽으며 쌓였던 앙금이 󰡔기적󰡕을 통해 가시화하는 순간을 나름대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선택지는 보다 건강해질 것이다.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노동자가 기업을 경영하는 형태는 분명히 경영자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에 대한 통상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공격을 받을 것이다. 󰡔한겨레󰡕의 한 서평에 달린 댓글이 가리키는 대로 결론은 미친 짓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혹자의 말대로 노동자가 기업을 경영하는 것을 시장경제 체제에서 이미 실패한 실험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기업 소유자의 사익이 침해될 것을 우려하는 영미식 주주 자본주의의 틀에 갇힌 획일적 시각일 뿐이다.” 이미 몬드라곤이라는 실례가 있고, 이로써 그 가능성은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배우자󰡕를 읽으며 느꼈던 감동과는 별개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우려는 바로 몬드라곤의 미래에 대한 것이었다. 이미 협동조합이 지배하는 기업경영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가장 핵심은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것이었고, 이것은 조직이기주의라는 말로 표현되고는 했다. , 노동운동이 바라보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라고 했을 때 협동조합은 그 출발부터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소위 착한 자본주의라는 형용모순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아마 협동조합주의자들은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협동조합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본의 종속성이기 때문이다. 칼 폴라니가 간파했던 것처럼 시장교환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시장이 생산영역을 장악함으로써 사회로부터 튀어나간(배태)’ 일이다. 때문에 협동조합의 이러한 가치는 자본이 사회로부터의 독립되어 있음을 핵심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가장 커다란 공격 무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협동조합주의의 상상력은 자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필자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몬드라곤의 글로벌화는 협동조합의 민주적 성격에 중대한 결함을 야기했다. 국제연대가 글로벌화와 동일어가 되지 못한 이러한 현상은 결국 협동조합의 상상력이 여전히 자본주의의 영향력 하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어딘가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살지 않을 수 있다는 상상력이 이미 대안 그 자체일 수 있다. 이러한 부분은 자본주의자로서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평자는 매우 비겁하게도 아직까지 이러한 부분을 방관하는 중이다(학생이라 그런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이 책의 가장 좋았던 점은 필자()가 최소한 방관자는 아니라는 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머리말에서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이 알고 보았더니 남장을 한 여자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감정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 사실일 것이다. 소위 386세대 중 운동권이었던 이들이 오늘 날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모습은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필자가 취한 일종의 방어태세는 분명히 정당하다. 그는 노동자에 대한 신뢰를 협동조합주의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함으로써 지켰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 몬드라곤과 현대를 비교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필자(김성오)는 스스로를 협동조합주의자라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몬드라곤에 대한 기대를 거의 신앙처럼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는 몬드라곤이 점차 거대화하면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소개하고는 있지만, 이는 단지 지켜볼 문제일 뿐이다. 왜냐하면, 짐작건대 협동조합이 지난 200년 동안 지켜온 정신과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몬드라곤과 같은, 이미 글로벌화된 협동조합 복합체가 내부적으로 가지게 된 문제, 이를테면 민주적 운영 원리의 퇴색 등이 그 부정적인 모습을 극대화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아마도 필자는 자신의 위치에서 이에 대한 연구를 열심히 진행하고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책을 통해서 그러한 노력을 읽어낼 수는 없었다. 그가 협동조합의 원칙에 기댈 수 있는 원인은 우선 역사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1974년 울고의 파업은 협동조합 내부의 자기비판을 보여주는 한 사례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필자가 가지고 있는 노동자에 대한 신뢰이다. 협동조합의 원칙이 관철될 수 있는 기본적인 전제는 연대와 희생이라는 일종의 휴머니즘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어떻게 본다면 순수한 사회주의자 이상으로 노동자에 대한 신뢰를 강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지만, 국제연대가 곧 글로벌화라는 주장은 보다 신중한 논의를 요한다. 이러한 논의는 역사나 노동자에 대한 신뢰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관건은 지역경제의 정체성을 공동체주의가 강화된 방향으로 형성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렇게 강화된 지역경제끼리 연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협동조합 복합체가 기업경영을 지배하는 사례가 지역경제라는 차원에서 축적된 경우가 양적으로 많지 않다는 것이다. 주워듣기에는 몬드라곤 이외에 이탈리아의 어느 지역이나 퀘백 등도 그 예가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정말 지역경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제 스페인의 몬드라곤과 같은 최초의 지역공동체를 어떤 지역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만들어내는 방법론을 상상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처럼 몬드라곤이 ‘MONDRAGON’으로 그 범위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필요한 것은 글로벌화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동시에 그러한 글로벌화된 조직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이지 않을까? 단순히 지켜볼 일이 아닌 것이다.

 

  결국 실례가 있기 때문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외침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조금 공허하다. 몬드라곤에서 노동자 기업이 나올 수 있었던 지역성이란 것을 한국에 비춰 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이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이 책을 통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평가하자면 조금만 알 수 있었다. 책의 말미에 제안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분명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한 현재까지의 연구 수준일 터인데,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현재의 몬드라곤의 글로벌화를 부러워하는느낌조차 들었다. 따라서 곽노현의 추천사에 나오는 필자의 말, “문제는 실천이다라는 것을 해명할 필요는 없다. 결국 문제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나는 협동조합주의자는 아니지만, 언젠가 한국의 협동조합 복합체가 일종의 모범 사례로 거론되는 것을 기대한다. 선택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그리 되기 위해서는 지금의 몬드라곤으로부터 한국의 협동조합주의자들의 인식이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실천은 한국에서 협동조합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법론을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것에서 구체화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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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역사 세트 - 전2권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이종석 지음,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 역사비평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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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 이 두 책의 미덕은 분석의 깊이와 치밀함에 있다. 독자들이 가질 수 있는 지적인 가려움을 거의 전부 긁어준다. 단순히 ‘대중서’로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한 호흡에 읽어 내려갈 수 있을 만큼 흥미로운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책이다. 상대적으로 북한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왔고, 더구나 사회적으로 ‘북한의 역사’라는 것이 인정될 수 없는 분위기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대중들이 북한역사에 대한 개설서를 접하기는 어려웠었다. 그러나 이 책들이 나옴으로써 한동안은 이러한 불만들이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사실 이 책들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그리고 그 저자가 김성보와 이종석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기대를 많이 했었다. 두 저자는 각각의 전공 분야가 다르지만(역사학, 정치학) 북한 연구자들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또한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그 학문적 깊이 역시 가장 뛰어난 것 같다. 또한 이들은 사회적인 실천력 역시 뛰어나다. 특히 이종석의 경우 전 통일부 장관으로서 북한을 둘러싼 국제정세에 대해 언제나 치밀한 분석을 제시하였고, ‘가짜 김일성’說에 대해 가장 유력한 반론을 제기한 사람으로서 유명하다. 이러한 두 사람이 집필을 맡았으니, 최소한 fact 부분에서는 거의 오류가 없을 것으로 기대된다. 게다가 이들의 학문적 깊이는 북한을 “총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서술을 가능하게 했다. 따라서 독자들은 fact에서 거의 오류가 없는 북한의 역사를 다각도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서로서 이만한 충분요건이 또 있을까?
  그런데 이 책들의 장점은 비단 그 분석 방법이나 사실의 측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북한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그 자체가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김성보는 북한 역사가 가질 수 있었던 ‘다양한 가능성’들에 대해 천착하는데, 역으로 이야기하면 이것은 북한 체제가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빠르게 경직화됨으로써 그들이 향할 수 있었던 해방 직후의 경로가 막혀버렸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또한 이종석은 현재 북한 사회의 위기가 그 지배층이 자랑해 마지않던 유일체제 등이 북한 주민의 다양한 사고와 창의성을 억압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양자는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상당한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또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두 책 모두 북한을 엄연한 ‘일국’으로 인정한다는 점이다. 연구자들에게 이 문제는 상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반공 이데올로기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는 대중들에게 이 부분은 신선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김성보는 북한 체제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해법으로서 ‘북한이 초심으로 돌아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는 것’을 제시한다. 또한 지속적으로 남북관계에 대한 부분을 거론하면서 양자의 관계가 어느 한 쪽이 우위에 있었을 때 초래된 부작용을 지적한다. 이것은 남한과 북한이 서로를 ‘대등한’ 상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관점의 직접적인 표현일 것이다. 이것은 이종석 역시 마찬가지이다. 북한 지도부의 ‘주관주의’로 대변될 수 있는 체제구상이 북한을 침체와 비효율이 가득한 나라로 만들었음을 치밀하게 논증한다. 결국 이 두 책은 오늘 날 남북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남, 북한 각각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기본 토대로 바라보면서 국가 대 국가의 대등한 관계를 역설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성상의 장점으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간간히 첨부되어 있는 “스페셜 테마”이다. 사실 개설서의 가장 큰 약점은 역사의 다양한 흐름에 대해 보여주지 못하거나 당시의 세세한 내외적 사정에 대해 알기 어렵다는 점인데, 이 코너는 이러한 약점을 정말 잘 극복했다는 생각이 든다. 본문을 읽다가도 다음 “스페셜 테마”의 내용이 궁금해질 정도였다. 개인적으로는 이종석의 책에 있는 「남한의 정치 변동과 유일체제 형성의 상관성」이나 「북한의 근로단체가 하는 일」, 김성보의 책 중에는 「경제 건설을 위해 남은 일본인 기술자들」이나 「동독 건축가 레셀의 눈으로 본 북한」, 「평률리 민주선전실장의 농촌생활」 등이 가장 재미있었다.

  어쨌든 대충이나마 다 읽고 나서 그다지 아쉬움이 남지 않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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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 왕의 공부
김태완 지음 / 역사비평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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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 처음 이 책을 읽기로 마음먹었을 때,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일종의 “지도자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 좋은 지도자”는 분명 현대의 우리들이 고민해야 하는 주제 중에 하나이기는 할 테지만, 내가 하기는 싫었다. 나는 엘리트에서 나오는 지도자에 희망을 가지기 보다는, 언젠가 신채호가 이야기했던 “깨닫는 민중”이 사회를 형성해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더 좋은 왕”이 되기 위해 했다는 경연이 마음 깊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보기에 이 책의 목적의식은 지도자를 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프롤로그에 소개된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에 방점을 찍고 읽으면 더 좋을 것이다. 

  과거 사회에서 중화를 이루어가는 주체는 왕이나 군자였지만, 이제는 민주시민이다. 민주시민은 저마다 자신이 서 있는 지점에서 주체적인 존재이다. 시민이 저마다 자신의 처지에서 중화를 이루어간다면, 이이가 말한 것처럼 중화가 나와 내 집안과 내가 속한 사회와 나라에 확산되어 갈 것이다(20쪽). 

   책의 내용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것 같지는 않다. 경연과 관련된 많고 다양한 사료를 표출하고, 이 사료에 대해 ‘현재적 관점’을 중심으로 풀이한다. 우선 일반 독자는 몰랐던 조선 시대의 그림들이 눈앞에 펼쳐지니, 한 장 한 장 넘기는 것이 즐거울 것이다. 전공자들 역시 분위기를 환기하고 자신의 문제의식을 되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즐거울 것이다. 그런데 위 인용문을 보다 깊게 생각하면 이 책이 단순히 왕, 또는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로 읽혀서는 곤란하다. 최소한 나에게 이 책은 ‘자아’ 그리고 ‘성찰’에 대한 것이었던 것 같다.  

  저자는 인문학적 마인드를 상당히 중요시한다. 왕과 경연이 소재가 된 것은 아무래도 그의 전공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저자는 경연을 통해 ‘인문학적 소양을 끊임없이 쌓아가는 왕’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의 문제의식 속에는 오늘 날 민주주의 사회의 왕은 시민과 등치된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끊임없이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야 하는’ 존재는 바로 시민이 될 것이다.   

  프리모 레비는 ��주기율��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물을 생각할 수 있는 인간에게 그 무엇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치욕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서경식,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창비, 60쪽) 개인적으로는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다. 정치에는 항상 맹목적인 신앙이 있다. 누군가 대신 생각하여 말하게 하지 말고,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이 오늘 날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 자발적 복종 상태를 면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런 것들을 위해 “함께 끊임없이 공부하자!!”고 독자들에게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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