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몬드라곤에서 배우자 + 몬드라곤의 기적 세트 - 전2권 ㅣ 몬드라곤 시리즈
윌리엄 F. 화이트 & 캐서린 K. 화이트 지음, 김성오 옮김 / 역사비평사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오늘 날. 여기저기에서 이에 대한 대안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그 질이 양을 받쳐주지 못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몬드라곤에 대한 이야기도 결국 그 수많은 대안들 중의 하나이다. 문제는 이것이 대안으로서 어느 정도의 질을 담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리라.
이 책을 접하기 전에는 나는 몬드라곤을 단순히 협동조합의 연합체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어쨌든 이 책을 접한 이후에는 협동조합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지식도 많았고, 사회적 기업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두 권의 책 중에 몬드라곤에서 배우자는 평자로 하여금 협동조합주의자로의 ‘전향’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뭐라고 형용할 수 없었던 앙금이 몬드라곤의 기적을 읽으면서 조금은 가시화하는 것을 느꼈다. 하나의 대안으로서 몬드라곤은 분명히 그 의의가 적지 않다. 특히 필자(김)가 말했던 것처럼 협동조합형태의 기업지배구조가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는 것이야말로 이 두 권의 책이 가진 가장 큰 의의이다. 독자로서 평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배우자를 읽으며 쌓였던 앙금이 기적을 통해 가시화하는 순간을 나름대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선택지는 보다 건강해질 것이다.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노동자가 기업을 경영하는 형태는 분명히 경영자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에 대한 통상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공격을 받을 것이다. 한겨레의 한 서평에 달린 댓글이 가리키는 대로 “결론은 미친 짓”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혹자의 말대로 노동자가 기업을 경영하는 것을 “시장경제 체제에서 이미 실패한 실험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기업 소유자의 사익이 침해될 것을 우려하는 영미식 주주 자본주의의 틀에 갇힌 획일적 시각일 뿐이다.” 이미 몬드라곤이라는 ‘실례’가 있고, 이로써 그 가능성은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배우자를 읽으며 느꼈던 감동과는 별개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우려는 바로 몬드라곤의 ‘미래’에 대한 것이었다. 이미 협동조합이 지배하는 기업경영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가장 핵심은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것이었고, 이것은 조직이기주의라는 말로 표현되고는 했다. 즉, 노동운동이 바라보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라고 했을 때 협동조합은 그 출발부터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소위 ‘착한 자본주의’라는 형용모순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아마 협동조합주의자들은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협동조합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본의 종속성”이기 때문이다. 칼 폴라니가 간파했던 것처럼 시장교환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시장이 생산영역을 장악함으로써 사회로부터 ‘튀어나간(脫배태)’ 일이다. 때문에 협동조합의 이러한 가치는 자본이 사회로부터의 독립되어 있음을 핵심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가장 커다란 공격 무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협동조합주의의 상상력은 자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필자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몬드라곤의 글로벌화는 협동조합의 민주적 성격에 중대한 결함을 야기했다. 국제연대가 글로벌화와 동일어가 되지 못한 이러한 현상은 결국 협동조합의 상상력이 여전히 자본주의의 영향력 하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어딘가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살지 않을 수 있다”는 상상력이 이미 대안 그 자체일 수 있다. 이러한 부분은 非자본주의자로서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평자는 매우 비겁하게도 아직까지 이러한 부분을 방관하는 중이다(학생이라 그런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이 책의 가장 좋았던 점은 필자(김)가 최소한 방관자는 아니라는 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머리말에서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이 알고 보았더니 남장을 한 여자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감정’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 사실일 것이다. 소위 386세대 중 운동권이었던 이들이 오늘 날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모습은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필자가 취한 일종의 방어태세는 분명히 정당하다. 그는 노동자에 대한 신뢰를 협동조합주의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함으로써 지켰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 몬드라곤과 현대를 비교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필자(김성오)는 스스로를 협동조합주의자라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몬드라곤에 대한 기대를 거의 신앙처럼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는 몬드라곤이 점차 거대화하면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소개하고는 있지만, 이는 단지 “지켜볼 문제”일 뿐이다. 왜냐하면, 짐작건대 협동조합이 지난 200년 동안 지켜온 정신과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몬드라곤과 같은, 이미 글로벌화된 협동조합 복합체가 내부적으로 가지게 된 문제, 이를테면 민주적 운영 원리의 퇴색 등이 그 부정적인 모습을 극대화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아마도 필자는 자신의 위치에서 이에 대한 연구를 열심히 진행하고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책을 통해서 그러한 노력을 읽어낼 수는 없었다. 그가 협동조합의 원칙에 기댈 수 있는 원인은 우선 ‘역사’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1974년 울고의 파업은 협동조합 내부의 자기비판을 보여주는 한 사례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필자가 가지고 있는 노동자에 대한 신뢰이다. 협동조합의 원칙이 관철될 수 있는 기본적인 전제는 연대와 희생이라는 일종의 휴머니즘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김)는 어떻게 본다면 순수한 사회주의자 이상으로 노동자에 대한 신뢰를 강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지만, 국제연대가 곧 글로벌화라는 주장은 보다 신중한 논의를 요한다. 이러한 논의는 역사나 노동자에 대한 신뢰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관건은 지역경제의 정체성을 공동체주의가 강화된 방향으로 형성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렇게 강화된 지역경제끼리 연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협동조합 복합체가 기업경영을 지배하는 사례가 지역경제라는 차원에서 축적된 경우가 “양적으로 많지 않다”는 것이다. 주워듣기에는 몬드라곤 이외에 이탈리아의 어느 지역이나 퀘백 등도 그 예가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정말 지역경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제 스페인의 몬드라곤과 같은 최초의 지역공동체를 어떤 지역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만들어내는 방법론을 상상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처럼 몬드라곤이 ‘MONDRAGON’으로 그 범위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필요한 것은 글로벌화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동시에 그러한 글로벌화된 조직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이지 않을까? 단순히 “지켜볼 일”이 아닌 것이다.
결국 ‘실례’가 있기 때문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외침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조금 공허하다. 몬드라곤에서 노동자 기업이 나올 수 있었던 지역성이란 것을 한국에 비춰 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이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이 책을 통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평가하자면 조금만 알 수 있었다. 책의 말미에 제안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분명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한 현재까지의 연구 수준일 터인데,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현재의 몬드라곤의 글로벌화를 ‘부러워하는’ 느낌조차 들었다. 따라서 곽노현의 추천사에 나오는 필자의 말, “문제는 실천이다”라는 것을 해명할 필요는 없다. 결국 문제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나는 협동조합주의자는 아니지만, 언젠가 한국의 협동조합 복합체가 일종의 모범 사례로 거론되는 것을 기대한다. 선택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그리 되기 위해서는 지금의 몬드라곤으로부터 한국의 협동조합주의자들의 인식이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실천은 한국에서 협동조합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법론을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것에서 구체화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