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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라 문서
파울로 코엘료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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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코엘료의 작품을 읽었다.


‘다시 시작하라, 오늘이 네 삶의 첫날인 것처럼’이라는 문구에 이끌려 선택했는데,

이 책, 기존의 코엘료 소설과는 느낌이 좀 다르다.


이제까지의 코엘료 소설에 녹아 있는 인상깊은 메시지를 총망라한 것 같으면서, 

그 메시지를 코엘료가 나에게 바로 속삭여주는 듯한 느낌을 주는 책이다.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직접적인 문체를 쓰기 때문일까, 

보통 소설보다 더 가슴에 절절하게 와닿는 문장들이 가득하다.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콥트인 현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그 질문의 내용이 참으로 놀라웁다.


“패배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고독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나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아름다움에 관해 말씀해주세요.”

“사랑은 늘 내 곁을 지나가버립니다.”


당장 내일이면 목숨이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에,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처음에는 조금 의아했다. 정말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것이 이 책의 핵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품었던 의문들, ‘왜 내 인생은 이럴까?’라는 풀리지 않는 질문에 대한 답을 생이 끝나기 전에 꼭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삶의 방향이자, 세월이 흐르더라도 똑같이 적용될 인생의 지혜이기에.


그러면서 나에게도 질문이 떠올랐다.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순간, 나는 어떤 질문을 할 수 있을까?

질문을 고민하는 새에 생의 마지막이 다가올 수도 있을 만큼 어려운 문제이지만,

어쨌든 항상 질문을 찾으며, 또 그에 대한 해답을 찾으며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현자의 답변은 어디선가는 한번쯤 들었던 이야기이고, 

또 누구나 생각하고 있는 말들일 수 있지만, 

그것을 ‘파울로 코엘료’가 ‘글’로써 독자들에게 이야기한다는 점이 

이 책의 가치인 것 아닐까?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어나가다가, 가슴에 꽂히는 화살처럼 강렬했던 문장 하나를 꺼내본다.


“그렇다면 성공한 삶이란 어떤 삶일까?

매일 밤 평화로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으면 성공한 삶이다.” (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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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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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만년 청년작가라 불리는 박범신 작가가 오랜만에 '사랑'을 다뤘다. 그것도 일흔이 다 돼가는 노작가의 열일곱 ‘처녀’를 향한 사랑.

아, 나는 왜 불과 같이, 너를 갖고 싶었던가.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모든 게 끝나버릴 질문이겠지. 사람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라고 설명한다.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 (…) 사랑을 본 적도 만진 적도 없어서 나는 그 말, 사랑을 믿지 못한다. _ 본문 중에서

본 적도, 만진 적도 없어서, 라고 시인은 말했다. 만약 사랑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이었다면, 시인은 사랑을 믿었을까. 그렇기에, 자신의 감정을 그런 믿지 못할 실체에 맡길 수 없기에, 작품이 끝날 무렵까지 노시인은 ‘그의 처녀’를 향해 ‘사랑한다’는 말을 그리 아꼈던 것일까.

어쩌면 엄청나게 다양하고 수많은 감정의 갈래, 열망의 모습들을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 단 하나의 잣대로만 묶어버린다. 궁핍한 언어를 탓할 일이지만, 결국 그 섬세함과 다양함을 살리지 못한 채 하나로만 묶인 ‘사랑’의 기준을 저도 모르게 받아들여, 타인의 사랑을 평가하고 비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시인에게, 그 사랑에,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조금 부럽기도 했다. 일생에 단 한 번,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그런 열정과 넘치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면. 생의 마지막, 그런 불같은 감정을 끝끝내 지닌 채 사라져간 노시인은 어쩌면 진정 행복한 사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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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석유 없는 삶 - 우리 가까이 있는 분명한 미래
제롬 보날디 지음, 성일권 옮김 / 고즈윈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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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 가지고 다니지 않기에 석유값이 오른다는 것에 실제적인 타격을 입지는 않지만, 오며가며 보이는 주유소의 가격표나 차를 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주위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예전보다 교통 체증이 덜한 것 같은 모습을 보며 확실히 유가가 올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3년 전, 업무상 유가를 조사할 일이 있어 찾아보았을 때가 배럴당 40달러였고, 당시 '전문가'들은 곧 60달러 선을 돌파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었다(그 당시 배럴당 60달러는 거의 '마의 고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젠 100달러도 훌쩍 넘어 150달러까지 가다니!! 
 
지금은 다시 유가가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배럴당 120달러 정도이다. 그런데 이 책 <(거의) 석유 없는 삶>은 지금으로부터 8년 후, 2016년에 석유값이 배럴당 380달러에 이르는 상황을 가정한다. 지금의 세 배 이상이라는 얘긴데, 그러한 미래가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 그러한 미래를 예측하는 근거가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 놀랍다.

저자는 2016년에 일어날 여러 변화들을 구체적으로 얘기하는데, 다 읽고 난 후 느꼈던 저자의 주장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우리는 좀더 부지런해져야 한다'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뜨끔뜨끔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은 나의 게으른 품성에 대한 자책 때문이었을까. 사실 지금보다 몸을 좀더 움직이며 산다는 것은 지금보다 더 힘들게 산다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지금 너무 편안하게 사는 나머지 당연히 몸을 움직여야 할 일을 움직이지 않으며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석유 이전의 삶, 땅속에 있는 광물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쓰기 이전의 삶이 더 인간다운 것일까, 아니면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편안함을 추구하는 지금의 삶이 더 인간다운 것일까. 석유뿐 아니라 석탄, 가스, 우라늄.... 등등 우리가 파내어 쓰고 있는 에너지원은 편리함을 주는 동시에 무시무시한 공해와 질병을 야기하는데, 이러한 일이 과연 자연스러운 것일까.

석유 고갈 시기에 대해서는 전세계적으로 이견이 분분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2016년, 배럴당 380달러의 시대는 사실과 거리가 먼 얘기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책에서 말하는 '석유 없는 삶'은 미리 생각하고 각오해둘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 삶이 지금, 아직 석유를 돈 내고 쓸 만한 시점에 이루어진다면 다가올 미래가 지금보다는 밝아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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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악몽
가엘 노앙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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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라는 장르를 딱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책이든, 영화든.

간혹 미스터리인 줄 모르고 봤다가, 영화 내내 긴장한 탓에 영화가 끝난 후 녹초가 되는 경험을 몇번 하고 나서 미스터리는 참 힘든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왔던 터였다. 그렇기에 '미스터리'라는 딱지를 달고 나온 '책'은 거의 손을 대지 않았었다. 영화의 장면은 순간이지만, 독서는 스스로 장면을 그리며 하는 것이기에. 

이 책, 역시 미스터리인 줄 몰랐다! 책을 집어들고 중간 정도 읽을 때까지의 기분은 미스터리 영화를 보고 나온 것처럼 뭔가 속은 느낌이었다. 내가 둔감한 것일까? (읽고 나니 알게 된 것이지만) 제목에 '악몽'이라는 키워드가 있고, 그림이 뭔가 신비스러우면서도 으스스한 느낌이 나는 것이 - 게다가 표지의 그 물결무늬라니!!! - 장르적 성격이 있음을 파악했어야 하는 것인데. 날이 더워지니 판단력도 흐려졌는지.

그러나,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의 책을 단숨에(!) 읽고, 처음의 나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쉽게 '미스터리'라는 장르로 단정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요소'는 충분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몽과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을 늘 바라보지만 어찌할 수 없는 엄마(악몽의 근원), 그리고 서서히 밝혀지는 악몽의 정체... 하지만 악몽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미스터리의 느낌보다는 대하서사극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수십년전 바다에서 삶을 펼쳤던 바다사나이들의 야망과 고된 삶, 그들을 기다리는 여인네들의 기다림. 참혹한 전장(세계 1차대전)에서의 비인간적인 살육극과 그로 인해 미쳐버린 병사들의 모습. 아이들 각자의 악몽이 먼 옛날 조상들의 한(限)과 퍼즐처럼 맞춰지며 이어지는 이야기. 이는 단순한 '미스터리'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아닐까.

그리고 이 소설을 미스터리로만 볼 수 없는 또 한 가지. 이 책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악하기만 한 인물이 없다. 절대악으로 보이는 카르덱마저 아르델리아의 추궁에 두려움을 보이며,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인간임을, 살아남기 위해 그랬음을 항변한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소설 속에서 가장 치열한 삶을 살았던 인간은 바로 카르덱인 것 같다. 가장으로서, 선장으로서의 책임감이 그에게 악역을 맡게 한 것이다. 하지만 그도, 결국, 나약한 인간이었다.

셋째 아들 기누가 죽었다가 살아난 사건 이후 변화한 큰아들 브누아와 사건 당사자 기누, 그리고 악몽의 정체를 밝히여 용감하게 나섰던 뤼네르, 악몽에 시달려 왔지만 그것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소년들, 이 소설은 어찌 보면 미스터리보다는 성장소설에 가깝다.

호러에 가까운 끔찍한 장면에 낚여 이 책을 섣불리 '장르문학'으로 치부할 뻔했으나, 다행히 작가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파악하며 모처럼 가슴 벅찬 독서를 경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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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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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멤논의 딸>을 재미있게 읽었기에, 그 속편이라는 이 책을 자연스레 선택할 수 있었다. <아가멤논의 딸>이 좀 무겁고 정치성이 강한 작품이어서 속편도 그런 분위기를 이어가지 않을까 예상했는데(그래서 구입을 잠시나마 주저하기도 했다 -_-), 같은 작가가 쓴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느낌의 소설을 만날 수 있었다.

<아가멤논의 딸>에서 이야기의 핵심 역할을 하는 수잔나의 아버지 ‘후계자’가 어느 날 ‘자살’하고, 그 죽음에 관계된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시각에서 사건을 재구성한다. 책제목이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이지만, ‘누가’ 죽였는지를 밝히는 게 작품의 핵심은 아닌 듯하다. 후계자의 자살을 둘러싸고 온갖 소문과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마치 법정에서 증언을 하듯 관련자들이 차례로 등장하여 그 사건을 자신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점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무엇이 진실인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끝까지 모호하다는 점에서 추리소설적인 요소도 다분하다. 

작품의 분위기가 심각하고 진지하게 흘러가다가도 작가가 설치해놓은 웃음 포인트에서 한번 피식 웃게 되는 것이 카다레 소설의 매력인 듯싶다. 또한 글의 전개에 전설이나 동화를 삽입하는 카다레의 솜씨는 여전히 혀를 내두를 만하다. 뿔이 나 있는 조르크 골렘, 왕의 여섯 마리 종마… 어쩜 그리도 딱 들어맞는 비유를 끌어오는 것인지. 괜히 거장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이같이 치밀하게 잘 짜인 작품을 읽을 때면, 마음속이 빈틈없이 꽉 메워지는 그 느낌이 참 좋다. 이것이 소설을 읽는 기쁨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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