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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언제나 만년 청년작가라 불리는 박범신 작가가 오랜만에 '사랑'을 다뤘다. 그것도 일흔이 다 돼가는 노작가의 열일곱 ‘처녀’를 향한 사랑.
아, 나는 왜 불과 같이, 너를 갖고 싶었던가.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모든 게 끝나버릴 질문이겠지. 사람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라고 설명한다.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 (…) 사랑을 본 적도 만진 적도 없어서 나는 그 말, 사랑을 믿지 못한다. _ 본문 중에서
본 적도, 만진 적도 없어서, 라고 시인은 말했다. 만약 사랑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이었다면, 시인은 사랑을 믿었을까. 그렇기에, 자신의 감정을 그런 믿지 못할 실체에 맡길 수 없기에, 작품이 끝날 무렵까지 노시인은 ‘그의 처녀’를 향해 ‘사랑한다’는 말을 그리 아꼈던 것일까.
어쩌면 엄청나게 다양하고 수많은 감정의 갈래, 열망의 모습들을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 단 하나의 잣대로만 묶어버린다. 궁핍한 언어를 탓할 일이지만, 결국 그 섬세함과 다양함을 살리지 못한 채 하나로만 묶인 ‘사랑’의 기준을 저도 모르게 받아들여, 타인의 사랑을 평가하고 비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시인에게, 그 사랑에,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조금 부럽기도 했다. 일생에 단 한 번,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그런 열정과 넘치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면. 생의 마지막, 그런 불같은 감정을 끝끝내 지닌 채 사라져간 노시인은 어쩌면 진정 행복한 사람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