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의 악몽
가엘 노앙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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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라는 장르를 딱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책이든, 영화든.

간혹 미스터리인 줄 모르고 봤다가, 영화 내내 긴장한 탓에 영화가 끝난 후 녹초가 되는 경험을 몇번 하고 나서 미스터리는 참 힘든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왔던 터였다. 그렇기에 '미스터리'라는 딱지를 달고 나온 '책'은 거의 손을 대지 않았었다. 영화의 장면은 순간이지만, 독서는 스스로 장면을 그리며 하는 것이기에. 

이 책, 역시 미스터리인 줄 몰랐다! 책을 집어들고 중간 정도 읽을 때까지의 기분은 미스터리 영화를 보고 나온 것처럼 뭔가 속은 느낌이었다. 내가 둔감한 것일까? (읽고 나니 알게 된 것이지만) 제목에 '악몽'이라는 키워드가 있고, 그림이 뭔가 신비스러우면서도 으스스한 느낌이 나는 것이 - 게다가 표지의 그 물결무늬라니!!! - 장르적 성격이 있음을 파악했어야 하는 것인데. 날이 더워지니 판단력도 흐려졌는지.

그러나,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의 책을 단숨에(!) 읽고, 처음의 나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쉽게 '미스터리'라는 장르로 단정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요소'는 충분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몽과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을 늘 바라보지만 어찌할 수 없는 엄마(악몽의 근원), 그리고 서서히 밝혀지는 악몽의 정체... 하지만 악몽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미스터리의 느낌보다는 대하서사극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수십년전 바다에서 삶을 펼쳤던 바다사나이들의 야망과 고된 삶, 그들을 기다리는 여인네들의 기다림. 참혹한 전장(세계 1차대전)에서의 비인간적인 살육극과 그로 인해 미쳐버린 병사들의 모습. 아이들 각자의 악몽이 먼 옛날 조상들의 한(限)과 퍼즐처럼 맞춰지며 이어지는 이야기. 이는 단순한 '미스터리'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아닐까.

그리고 이 소설을 미스터리로만 볼 수 없는 또 한 가지. 이 책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악하기만 한 인물이 없다. 절대악으로 보이는 카르덱마저 아르델리아의 추궁에 두려움을 보이며,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인간임을, 살아남기 위해 그랬음을 항변한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소설 속에서 가장 치열한 삶을 살았던 인간은 바로 카르덱인 것 같다. 가장으로서, 선장으로서의 책임감이 그에게 악역을 맡게 한 것이다. 하지만 그도, 결국, 나약한 인간이었다.

셋째 아들 기누가 죽었다가 살아난 사건 이후 변화한 큰아들 브누아와 사건 당사자 기누, 그리고 악몽의 정체를 밝히여 용감하게 나섰던 뤼네르, 악몽에 시달려 왔지만 그것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소년들, 이 소설은 어찌 보면 미스터리보다는 성장소설에 가깝다.

호러에 가까운 끔찍한 장면에 낚여 이 책을 섣불리 '장르문학'으로 치부할 뻔했으나, 다행히 작가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파악하며 모처럼 가슴 벅찬 독서를 경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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