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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쟁이 유씨
박지은 지음 / 풀그림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어떤 분이 <읽고 싶은 책>이라는 게시판에 사진이랑 같이 올린 글을 보고 이 책을 읽고 싶었다. 같은 제목의 연극도 있는 거 같은데, 그 분이 연극 무대의 사진을 올리셨다. 천이 여기저기 걸려 있기에 나는 염쟁이가 염색하는 장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염쟁이는 염색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염쟁이란, 장의사를 옛날에 속된 말로 부른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염쟁이가 염을 한다고 하는데, 염이라는 것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책에도 나왔던 시체 닦는 일과 제를 올리는 거라든지 장례에 관한 일을 폭넓게 부르는 말같다.
_ 처음이자 마지막 인터뷰
여자 주인공, 주기자가 자살에 실패한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랑했던 남자친구가 알고 보니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자살 시도를 하는데, 수면제를 먹고 잠만 푹 잘자고 일어났다(깨어난 후 어질어질 하긴 함). 며칠동안 회사를 땡땡이 친 벌로, 염쟁이 유씨의 인터뷰를 해오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동안 주기자가 염쟁이 유씨와 인터뷰를 하려고 몇 차례 시도는 했었지만 번번이 거절받은 터라, 오히려 주기자에겐 잘 되었다. 주기자는 염쟁이 유씨에게 어떤 심경 변화가 있었던 건지 궁금해 하며, 그에게 찾아간다. 염쟁이 유씨는 어떤 사연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마지막 염을 하기 전에 누구한테라도 염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낫겠다싶어 그녀에게 연락했노라고 한다.
염쟁이 유씨는, 염쟁이는 죽은 사람을 상대로 일하는 사람이지만, 사실 산 사람도 상대로 한다고 이야기 하면서 평생동안 염을 하면서 인상 깊었던 죽음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기자에게 해주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_ 21개의 사연
가치 없는 사람이 없으니, 가치 없는 죽음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특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염쟁이 유씨는 이야기 해준다. 모두 21가지 이야기.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이다. 뉴스에서 나왔던 이야기들 같다. 하지만 뉴스 특성상 어쩔수 없는 앵커의 무미건조한 말투로는 사람들이 감정이입되기 힘들다.
하지만 이 책은, 염쟁이 유씨의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전하기 때문에, 감정이 쉽게 동한다. 꼭 아는 사람의 건너 아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처음 읽을 땐 대부분의 사연마다, 그다음엔 체크 했던 거 옮겨 적을 때, 그다음 체크 한 거 다시 볼 때도 울었다. 참 안타깝고 슬펐다.
이 책의 좋은 점은 각 사연이 그냥 슬퍼서 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에 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게 왜 좋냐하면 나 자신의 삶을, 그리고 내 주위 사람들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_ 恨 (한) -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내가 다른 나라의 모든 장례를 본 것은 아니지만, 각 나라마다 장례 분위기와 장례식에 임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각기 다른 것 같다. 행사를 차치하더라도, 분위기도 나라마다 많이 다르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치뤄지기도 하고, 죽어서 행복하라고 즐겁운 노래도 부르는 곳도 있다.
어느 나라든 가까웠던 사람, 고마웠던 사람 등등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테지만 각 나라마다 문화에 따라 장례때 사람들의 슬픔의 표현은 나라의 수만큼이다 다양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나라사람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무엇이 가장 다를까? 나는 恨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장례식장에서 울 때, 한이 서린 목소리로 운다. 곡이라는 것도 중국에서 건너왔다지만, 우리 나라 사람이 곡을 하는 걸 들을 땐, 정말 생판 모르는 사람이 죽었어도, 슬퍼진다.
한은 슬픔과 울분이 섞인 것이다. 울분은 후회가 가슴에 맺혀서 된 것이다. 염쟁이 유씨가 하는 이야기들만 봐도, 전부 한이 서린 사람들이 빈소를 찾고, 서글피 울고, 자신의 잘못을 유씨에게 이야기 해 주는 것이다.
"엄니를 찾으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라. 엄니가 나를 버리고 떠나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을 것을 생각하믄 나가 가슴이 너무 아픈께...
엄니를 만나면 난 엄니를 한번도 원망해 본적 없다구 꼭 말해주고 싶었지라.
그란디 그 한마디를 못하고 죽은께 나가 가슴이 답답하요."
(p.40 어머니를 구하려다 죽은 조폭이 유씨 꿈에 나타나 한 말)
"슬픔보다 더 진하고 오래가는 게 바로 후회여." (p.70 유씨의 말)
_ 산자에게 죽음이란
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서 모든 게 끝이라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식물도 동물도 그렇고 특히나 사람은 더더욱 끝이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동생이 죽은 게 아니라 형이 죽었다는 사실이여."
"아니 동생이란 놈이 벼락 맞아 죽어도 시원찮을 판에 형이 죽은 게
다행이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 자의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한테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으니께.
그란디 형의 죽음은 다르지. 살아있는 자들을 겸손하게 만드는 죽음이란 말이여.
그래서 그 동생 놈이 염하는 곳이나마 찾아와 눈물이라도 흘릴 수 있는 거 아니겄어?"
(p. 106 동생의 욕심으로 인생이 완전히 뒤바뀐 쌍둥이 형제 이야기)
죽음이 뜻깊은 건, 죽은 사람보다도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음'으로 인해서 마음과 행동이 바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염쟁이 유씨의 아버지, 염쟁이 유씨(유씨의 아버지도 염쟁이셨다, 사실 대대로 염쟁이셨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염까지, 이 유씨 집안에서 했다.)의 말처럼 사람들이 잘 살려고 하는 이유가 다 잘 죽으려고 하는 것이다. 좋은 삶은 좋은 죽음으로 마무리 되고, 좋게 죽기 바라는 사람은 결국 좋은 삶을 살기 때문이다.
"염쟁이로 평생 살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배우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도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네.
아직도 잘 모르겠네만, 죽는다는 건, 생명이 끝나는 거지 인연이 끝나는 게 아닌 것 같거든.
그러니께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뭔가 남기는 죽음, 부끄럽지 않은 죽음,
그런 죽음은 그런 삶에서 비롯되는 거 아니겠는가 말여."
(p. 203 마지막 염하기 직전 염쟁이 유씨의 말)
_ 죽음 ≒ 삶
나도 길게 살지 않았지만, 가까운 사람이 죽는 걸 2번 겪었다. 할머니께서 명대로 사시다 돌아가시는 걸 보았고(세상에 나온지 아흔번째 해에 돌아가심), 고등학교 졸업 일주일만에, 꽃다운 나이에 교통사고로 죽은 친구도 보았다.
태어나는 건 순서가 있지만, 죽는 건 정말 순서가 없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도 해보았다.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는 건 곧, 내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수는 없지만, 언젠가 꼭 죽으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죽기 전에는 나는 언제나 살아있다. 그래서 오늘도 지금도 잘 살기 위해 노력하려고 한다.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생각하라.
때가 오면 자랑스럽게 물러나라.
한 번은 살아야 한다.
그것이 제1의 계율이고,
한 번만 살 수 있다.
이것이 제2의 계율이다.
<두 가지 계율, 에리히 케스트너>
자신이 어떻게 살고 싶은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