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생각뿔 세계문학 미니북 클라우드 1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안영준 옮김, 엄인정 해설 / 생각뿔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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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들은 각 시대마다 끊임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 같다. 2008년 미국 발 세계경제 위기로 홍역을 치렀음에도,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 뉴욕으로 몰려드는 수많은 젊은이들. 그곳에서 자신과 맞는 부류, 혹은 좀 더 나은 형편의 사람을 만나고 성공을 향해 달려간다. 그 사람들은 개츠비만큼 극적으로 많은 돈을 벌진 못해도, 스스로 인정하고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큼 커리어를 쌓고 상식과 교양을 갖추며 중산층이 되어 간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개츠비』는 스테디셀러를 넘어 고전에 들었다. '성공'에 대한 갈망이 있는 젊은이라면 마음 한 편에 개츠비가 있고, 그래서 자신의 욕망이 투사된 『위대한 개츠비』를 좋아하는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위대한 개츠비』가 왜 인기 있는지 몰랐는데, 나이를 조금씩 먹으니 왜 이 책이 인기 있고, 왜 고전인지 조금 알 것 같다. 어렸을 때 내가 '개츠비 같은' 꿈과 목표가 없어서 오랫동안 개츠비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부유하고 매력적인 남자에게 반한 적이 없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내가 쟁취해 보여주겠다는 꿈도 꾼 적이 없고, 부를 선망해 본 적도 없으며, 성공에 대한 갈망도 크게 없었으니까(그래서 내가 개츠비처럼 극적이고 다채로운 삶을 살지 못하고 그냥 밋밋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며 살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데이지의 연인이 되겠다는 열망 하나로 개츠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번다. 그 결과 부유한 사람들도 놀랄 만큼 엄청난 부를 쌓는다. 하지만 그 부가 개츠비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오로지 데이지라는 초록색 불빛, 초록색 꿈이 있을 때만 그것이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개츠비는 미국식 물질만능주의와 부도덕성의 표본이지만 누구보다 순수했고 그래서 그의 죽음이 많이 쓸쓸했다.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 근데 그의 죽음이 쓸쓸해도 그의 인생까지 쓸쓸하고 가치 없었던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톰이나 데이지보다 의미 있게 살았다 보고, 톰과 데이지가 잠깐 위기를 모면했을 뿐이지만 그들의 삶이 개츠비의 인생만큼 역동적이고  기대에 의한 설렘과 행복이 있는 삶은 살지 못하리라 본다. 

어차피 인생은 어떤 삶을 택하든 그냥 자신이 선택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부터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돈 쓸 때의 맛을 알아버려서 돈이 많으면 참 좋겠다 싶지만, 나는 개츠비처럼 순수하지 못해서 늘 안이한 선택을 하며,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살고 있다. 내게 불만이 들 때면 개츠비의 순수함과 목표 지향적 삶이 부러워진다. 좀 속물적이면 어떠냐고. 개츠비는 법을 어기긴 했으나, 그 당시 법(ex. 금주법)이 좀 어처구니없는 면이 있었고 부귀를 쌓는 목적이 본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 용인이 된다. 물론 법을 어기지 않는 한에서. 

어렸을 땐 개츠비가 이해도 안 되고, '참 바보 같은 인간이다' 생각했는데 점점 그가 이해된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다시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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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독서사 - 우리가 사랑한 책들, 知의 현대사와 읽기의 풍경
천정환.정종현 지음 / 서해문집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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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과 서설을 읽고 '이 책, 내게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웬걸 읽다 보니 빠져든다. 가독성도 높고, 책의 내용도 흥미 있고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우리 현대사와 책, 독서에 관심 있는 분들께 강추한다. 



책은 1945년 해방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현대 독서사를 다루고 있다. 우리 현대사에서 '독서' 부분만 톡 떼어 다룬 미시사(微視史)인 것. 책은 해방과 한국전쟁 때까지 이 5년을 빼고는 10년 단위로 장을 나누고 그 시기의 시대적 분위기와 사람들이 많이 읽었던 책이나 특기할 만한 책과 잡지, 작가를 다루며 그 시대를 진단한다. 




『대한민국 독서사』는 각 시기마다 사람들이 읽었던 책들이 그 시대를 비춰주는 거울이었음을 보여준다. 


또 지금도 유유히 내려오고 있는 그 무엇도 느낄 수 있었는데, 그건 '전설의 전혜린' 글 부분이었다. 나도 대학생 때 전혜린의 책을 접하고 그녀가 번역한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는 물론이고 다른 책도 읽고 다른 독일 작가의 책들에 푹 빠져 살았다. 또 전혜린의 어느 에세이에서 접한 프랑수아즈 사강에 대한 글을 읽고 사강의 책들도 모조리 다 읽었다. 암튼 그 시절, 나에게 전혜린의 영향력은 참 막강했는데 이게 나만 겪은 일이 아닌가 보다. 『대한민국 독서사』를 읽고 전혜린 신드롬이 1960년부터 있덨던 걸 알게 됐다. 독서를 꾸준히 하는 사람에겐, 어느 정도 전혜린이 자극이 된다. 선망의 대상이랄 수도 있고 모델이라 할 수도 있고. 어쩌면 지금 이 시대에도 전혜린은 여전히 '개인주의나 여성주의적 해방의 어떤 아련한 표징이기도' 한가 보다. '읽고 쓰는 지적 여성'의 상징. 


20세기 들어 전 세계 어느 나라고 격변을 겪지 않은 나라가 없다. 제1차 세계대전만 해도 유럽 내에 국한된 전쟁이었지만(넓게 봐서 미국까지), 식민지 확장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전 세계가 하나로 묶여버렸다. 각 나라별로 따로 돌아가던 역사의 바늘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경제사나 정치사는 비슷한 역사와 환경의 나라끼리 묶어서 설명 가능하다. 깊이 파고들면, 나라마다 다른 양상을 보여도 그래도 비슷한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독서사는 경제사와 정치사와 달리 상당히 지역적이다. 어느 정도 다른 나라와 영향을 주고받긴 하지만 독서 시장 자체가 한 나라 안에서 형성되고 언어와 문화, 성향의 차이가 독서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시대 생산된 거의 모든 것들이 다른 나라와 재빨리 동조화되지만, 아직 책은 다른 것에 비해 나라별 독자성이 강하다. 그래서 독서사는 다른 나라와 쉽게 묶을 수 없다. (물론 독서시장도 다른 나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다. 우리나라는 영향을 주기보다 아직 영향을 받는 쪽이지만)


'독서'라는 한 분야로 우리 현대사와 우리 시대를 읽고 싶은 분들께 추천한다. 상당히 흥미롭고, 기준과 다른 방식으로 우리 역사에 접근 가능하다. 또, 모르는 책이나 잡지도 많지만, 제목과 이름은 익히 들어본 책과 작가가 많아서 이 고유명사가 끈이 되어 흥미를 돋우고, 교양을 쌓았다는 느낌이 든다. 한마디로 유익함. 


다만, 객관적 사실만 열거한 역사책이 아니고, 부분부분 저자의 가치판단도 있기 때문에 저자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은 불편할 수도 있을 듯하다. 이 또한 우리 역사(좁게는 독서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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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국에 집을 두고 일하고 공부하고 여행하는 나는 노마디스트
손 켄 지음 / 북루덴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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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끌려서 읽은 책. 

책 제목만 보고 이 책이 '노마디스트' 삶에 중심을 두고 쓰인 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책은 '노마디스트'보다는 '일'과 '깨달음'에 집중되어 있고, '에세이'보다는 본인의 지난 삶을 요약한 '자서전'에 가깝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자기소개서를 읽는 느낌이다. 아마, 뉴욕에서 오랫동안 금융계에 일하며 이력을 자주 업데이트하고, 헤드헌터나 채용 담당자와 했을 그 많은 인터뷰 때문에 어느 정도 저자의 인생을 말할 때 어떤 패턴이 있는 것 같다. 그 느낌이 글로 느껴진다. 특히 회사 동료들이 응원해주고, 많이 도와주었다는 글에서 인터뷰 용 말이라는 걸 느꼈다. 






전반적인 문체나 주위 사람들, 그리고 깨달음에 대한 전형화된 표현만 없다면, 저자의 인생은 많이 다채롭고 흥미진진하며 재밌다. 특히 뉴욕에 처음 도착해서 애먹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재밌었다. 한국에서 부친 짐이 항구에 도착해 간단히 짐가방 두 개만 들고 항구에 나갔는데 어마무시하게 큰 박스로 도착해서 기겁했다는 이야기,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그 길로 창고 밖으로 뛰쳐나갔는데 천우신조인지 한글이 적힌 트럭이 지나가(미국 고속도로에 한글이 적힌 트럭을 마주칠 확률이 과연 얼마일까), 손을 흔들어 트럭을 세우고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에 그분의 트럭에 싣고 갔다는 이야기는 진짜 드라마틱 하고 재밌었다. 

그 외에는 책 대부분 열심히 공부해서 학위를 따고, 노력해서 내로라하는 글로벌 금융 기업에 취업해서 동료들에게도 상사들에게도 인정받고 돈도 많이 벌고 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다 몇 번의 깨달음으로, 미래를 몇 차례 수정하고, 여행을 하면서 꿈을 키우고, 직장을 그만둔 후 영국으로 가 동아시아 역사 학위를 땄다는 것으로 끝난다. 

실제로 저자를 만나서 본인이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들으면 상당히 흥미진진하고 재밌을 것 같다. 말도 잘 하실 것 같고, 경쟁이 치열한 곳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답게 자신만만함과 여유도 있을 것 같다. 다만, 책에서는 이런 느낌을 잘 받을 수 없다는 게 아쉽다. '노마디스트'에 중심을 둔 에세이도 아니고, 자서전이나 본인의 치열하게 공부했던 시절의 회고록도 아니어서 뭔가 이도 저도 아닌 게 되었다. 또 인생의 변곡점마다 저자의 깨달음도 나오지만, 이 깨달음이 자기계발서 느낌으로 다가와 가슴에 크게 와닿지 않은 것도 있다.

나 개인적으로 이소은의 『딴따라 소녀 로스쿨 가다』나, 홍정욱의 『7막 7장』 같은 책을 좋아해, 이 책도 외국에서 치열하게 공부한 이야기, 외국 금융 업계에서 자리 잡고 목표한 바 성취한 이야기를 심도 있게 풀어썼어도 좋았을 것 같다. 이 책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좀 빈약한데, 사람들은 결과보다 과정에 관심이 많으니까 다음번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다. 

아무튼 저자는 인생의 이야깃거리가 많은 분이고, 책은 잘만 다듬으면 더 좋은 스토리텔링이 가능할 것 같은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 다채로운 경험, 다양한 경력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참 흥미롭고 재밌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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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가로질러 - 밤, 잠, 꿈, 욕망, 어둠에 대하여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전대호 옮김 / 해나무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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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랫동안 밤을 잊고 살았다. 매일 해지기 전에 집에 들어오고, 설사 저녁이나 밤에 집에 오더라도 차를 타고 대화를 하며 집에 도착하니까 밤을 인식하지 못했다. 물론 낮이 아닌, 늦은 시각이라는 건 알지만, '아, 밤이구나' '어둠이 보이네'라고 인식한 건 정말로 오래되었다. 밤이 되어도, 언제나 밝은 빛 아래 있기 때문에 밤을 잊고 살았다.


밤을 인식할 땐 늦은 오후에 잠시 뒷산에 가거나, 낚시를 하러 갔을 때다. 한창 낚시 다닐 때 보통 오후 3~4시에 갔다. 한낮에는 태양이 너무 강렬해서 눈도 부시고, 얼마 안 있어 몸도 너무 피곤하다. 그래서 늦은 오후에 가서 2~3시간만 낚시하다 오면 딱 좋았다. 계절에 따라 해지는 시간에 차이가 많이 나지만, 일단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하면 짐을 싸기 시작한다. 왜냐면 해는 상당히 빨리 움직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실제로는 지구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자전하는 것이지만). 마음이 조급해져 노을을 즐기고 할 시간이 없다. 짐을 다 챙겨서 차에 도착하면, 노을은 어디 가고 없고 하늘은 어슴푸레해진다. 근처 화장실에 가 손 씻고 차에 시동을 건 후, 차를 출발시킬 때면 해는 완전히 사라지고, 어슴푸레함도 점점 사라지며 밤의 색이 뚜렷해진다. 

프랑스 말로 해가 져 어두워지는 것을 La nuit tombe라고 하는데, 직역하자면 밤이 내리다/어둠이 내리다의 뜻이다. 그 말대로, 시나브로 하늘에서 어둠이 내린다. 어두워지는 모습은 매번 봐도 장관이고, 아름답다. 낚시를 마치고 집으로 출발할 땐, 그래서 항상 차분한 행복을 느끼곤 했다. 묘하게 설레고, 묘하게 안도감 드는 것이 내가 마치 어떤 사치를 누리는 것 같았다. 사치는 비싼 것, 귀한 것을 손에 넣고, 누릴 때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해가 뜨고, 점점 밝아지는 순간도 무척 좋아해 예전엔 일부러 해 뜨기 전에 집을 나서, 점점 밝아지고 세상 속에서 걷곤 했다. 이것과 저것의 경계 그 사이에 있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 속에 있다 보면 이것과 저것의 경계란 결국 없다는 걸 깨닫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밤을 잊고 살았다는 건 그만큼 내가 일상에서 누린 작은 기분 좋은 사치를 잊고 살았단 말이다. 언젠가부터 나에게 밤은 없고 언제나 낮만 이어진 것 같다. 물론 매일 해진 저녁에 근처 공원에서 운동을 하지만, 너무 밝고 수많은 사람들로 그곳은 낮의 연장일 뿐 내가 밤 속에 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한다. 




이 책은, 한동안 내가 잊고 밤을 일깨워 주었다. 이 책은 '밤'에 관한 여러 지식을 담은 책인데 서정적이기보단, 과학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와 내 정신을 또릿또릿하게 해주지만 과학적 이야기 외에 밤의 어두운 면이나 옛날 사람들이 가졌던 밤에 대한 미신, 두려움, 잠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 새삼 내가 알던 밤이 떠오르는 것이다. 밤 세계의 여러 조각들. 

늘 '빛에서 빛으로' 이동하며 안전한 도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밤을 잊은 지 오래지만, 밤을 잊고서는 안식이나 평온, 행복은 없으리라 본다. 요즘 북유럽 사람들의 행복이 세계적으로 주요 화두다. 북유럽 사람들이 행복감을 자주 느끼는 건 밤을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더 많이, 더 직접적으로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서정적이기보다 과학적이고, 박학한 지식을 다루는데 이런 지식을 읽다 보니 책 속 지식보다도 잊고 있던 밤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식보다는 감각, 이성보다는 감성.

밤의 어둠은 낮의 밝음을 통해 비로소 명확해지므로 낮과 밤의 상호 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서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 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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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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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상당히 재밌는 소설을 하나 읽었다. 이번에 문학동네(루페)에서 나온 개브리얼 제빈의 『비바, 제인』.

한 마디로 이 책을 설명해야 한다면 21세기 판, <주홍글씨>라 할 수 있다. 너새니얼 호손이 『주홍글씨』를 썼던 때와 변해버린 세월만큼, 낙인찍힌 여성의 달라진 모습이 이 책의 독서 포인트다. 


또, 달라진 것은 많으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여자 주인공들의 당당한 모습이다. 아니, '당당'보다는 '단단'이 더 적절한 표현이겠다. 『주홍글씨』의 헤스터도 단단했고, 『비바, 제인』의 제인도 단단하다. 


제인과 스캔들의 대상이었던 남성은 당사자였지만, 스캔들의 중심에서 한발 물러선 채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쾌락은 즐기되 마땅히 져야 할 책임과 의무는 져버리고, 마음을 녹이는 미소와 다정한 말로 항상 어물쩍 넘어간다. 여자들에게 사랑받는 법을 아는 것이다. 남자는 먹고사는 일에도 전혀 어려움이 없다. 섹스 스캔들만 터지지 않았더라면 더 성공했을 수 있겠지. 그래도 그의 정치생명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유권자들은 그의 스캔들은 못마땅했으나, 그에게 풍기는 호감 어린 모습과 정치 리더십은 인정하며 또 그에게 투표를 한다. 그래서 10선 하원의원이 된다. 『주홍글씨』에서 자신의 신분 뒤에 숨은 채 사람들의 비난에서 벗어나고, 마을 사람들의 호감과 존경을 받던 '딤스데일 목사'가 떠오른다. 



『비바, 제인』 줄거리


정치에 관심 있던 한 여대생(아비바 그로스먼)이 경력을 쌓기 위해 하원의원 선거사무소의 인턴으로 들어간다. 아비바는 하원의원을 사랑하게 되고, 함께 자는 사이가 된다(함께 자는 사이지만, 혹여나 싶어 그곳은 하원의원이 거부한다). 친구가 없던 아비바는 엄마에게 털어놓고, 엄마는 그녀의 엄마(아비바의 외할머니)에게 조언 받아, 하원의원의 부인에게 모든 사실을 말한다. 부인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아비바와 하원의원은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다가(선거사무소에서 일은 꾸준히 했다), 어느 날 둘이 탄 차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둘의 사이가 세상에 드러난다. 


한동안 시끌했지만, 얼마 후 911 테러가 일어나는 바람에 세간의 관심은 줄어들었다. 그래서 하원의원은 재선에 성공하나, 아비바는 취직을 하지 못한다. 그녀의 이름만 구글링해도 어떤 스캔들에 연루되었는지, 댓글에 달린 사람들의 평가가 끝도 없이 나온다. 아비바는 떠나기로 결정하고, 개명을 한 후 외할머니께 2만 달러를 빌려 메인 주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곧 그녀의 뱃속에 한 생명이 자라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야기 진행 방식


이 책은 하나의 굵은 이야기 줄기를 가지고, 다섯 사람의 시각으로 쓰였다. ① 제인의 엄마, 레이첼(레이첼 글로스먼, 셔피로) / ② 제인 영(아비바 그로스먼) / ③ 제인의 딸, 루비(루비 영) / ④ 엠베스(하원의원의 아내) / ⑤ 스캔들 당시의 아비바. 


②과 ⑤는 같은 사람이지만, 나이대가 다르다. ②는 나이가 든 후의 제인 영, ⑤는 선거 사무소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하원의원을 사랑하던 아비바 그로스먼의 시각에서 쓰였다(시점은 전지적 시점). 


스캔들을 겪은 여성의 인생을 상당히 효과적으로 나타냈다. 단순히 1인칭 주인공 시점이나,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썼다면, 이 책이 주는 인상과 여운은 덜 했을 것 같다. 이미 이런 책은 많으니까. 그런데 『비바, 제인』은 시점을 달리해, 하나의 일을 다채롭게 풀어쓰고,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저자, '개브리얼 제빈'이 그냥 그저 그런 작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제일 재밌게 읽은 파트는 첫 번째 파트인 레이첼 파트. 그녀는 자기 나름대로 똑똑하고, 자기 관리 철저한 사람으로 적어놓았지만, 다른 파트에 등장하는 레이첼은 딸바보에다, 그냥 바보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독자는  첫 파트 이야기의 주인공 레이첼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고, 일단 그녀의 말이 옳다고 믿고 글을 읽어나가는데,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쓴 글을 읽다 보면 레이첼의 시각에서 쓴 이야기들이 하나씩 전복된다. 그리고 마지막엔 레이첼은, 그냥 좀 극성맞은 엄마로만 보이게 된다. (가령, 레이첼 파트에서 레이첼은 딸의 불륜을 멈추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다섯 번째 아비바 파트에서 엄마가 한 일 따윈 아무 일도 아니고, 그래서 정말 아무런 언급도 되지 않는다. 아비바는 엄마가 엠베스를 만났다는 것도 모름) 



제인, '살다'를 선택하다


말이 났으니 말인데, 어젯밤 당신의 꿈에 아비바 그로스먼이 나왔다. 꿈에서 그녀는 마이애미 시장 선거에 출마했다. 당신은 그녀에게 다가가 조언을 구했다. "하나만 물어도 될까?" 당신이 말했다. "어떻게 그 스캔들을 극복했어?"

그녀가 말했다. "수치스러워하기를 거부했어."

"어떻게? 당신이 물었다.

"사람들이 덤벼들어도 난 가던 길을 계속 갔지."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가슴을 활짝 편다. 정장 재킷의 단추를 여민다. 머리칼을 단정히 쓸어넘긴다. 

당신은 투표지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고, 선택한다. (- 마지막 페이지, 395쪽)


'삶'은 사는 것의 명사형이고, '살다'는 사는 것의 동사형이다. 명사는 뭔가 구체적인 형태를 띤 채 멈춰있는 모습이 떠오르고, 동사는 끊임없이 형태를 변화시키며 약동하고 움직이는 모습이 떠오른다. 제인은, 삶 속에 결박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살기를 선택한다. 젊은 시절의 스캔들은 그녀를 움켜잡지 못한다. 가장 사랑하는 그녀의 딸, 루비의 비난과 반항도 제인을 멈추지 못한다. 


『주홍글씨』의 헤스터는 그 시대에서 할 수 있는, 본인 선택의 자유를 누린다. 누군가는 비난하고, 누군가는 설교하고, 누군가는 외면했지만 그녀는 본인 선택에 의해 기꺼이 받아들인다. 비난을 어쩔 수 없이 받는 것과 기꺼이 받는 것은 완벽히 다른 것이다. 


제인은, 인턴 시절 철이 없고 너무 낭만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그 당시엔 하원의원을 사랑한다 믿었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니까 그녀는 과거의 자신을 외면하지 않고, 변명하지도 않으며, 포장하지 않고 순순히 인정한다. 


세상이 달라졌다고 해도, 여전히 '주홍글씨'는 남아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다른 사람에게 주홍글씨를 새기려 한다. 본인의 죄는 외면하고서 말이다. 그래서 본인의 죄를 당당히 드러내자 마을 사람들의 죄를 꿰뚫어본 『주홍글씨』의 헤스터와 웨딩플래너를 하며 지역 사람들의 죄와 수치를 알게 된 『비바, 제인』의 제인은 서로 통한다. (이 책에도 『주홍글씨』가 종종 언급된다. 아마 이 책을 떠올리며, 섹스 스캔들에 대해 풀어썼을 것이다)



알쏭달쏭 그 이름, 페미니즘


이 책에 여러 번에 걸쳐 페미니즘에 대해 나오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페미니즘이 뭔지. 여전히 성차별이 심하고, 성에 대한 편견과 성을 상품화가 심해 이런 불균형과 불합리는 조절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주장하는 것들에 대해서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다양한지, 얼마나 제각각 생각하는지. 또 '페미니즘'이라는 한 단어에 너무 많은 것(이 세상의 모든 여성)을 꾹꾹 밀어 넣고, 정작 생각해 봐야 하는 건 외면하는 건 아닌지 여러 생각이 든다. 


제인이 자신의 길을 걸어갔듯 나도 특정 단어, 특정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말 재밌게 읽은 소설이다. 묵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주제의 무게와 적절히 가벼운 문체를 적절히 잘 배합했다. 대부분 독자들이 재밌게 읽지 않을까.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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