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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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상당히 재밌는 소설을 하나 읽었다. 이번에 문학동네(루페)에서 나온 개브리얼 제빈의 『비바, 제인』.

한 마디로 이 책을 설명해야 한다면 21세기 판, <주홍글씨>라 할 수 있다. 너새니얼 호손이 『주홍글씨』를 썼던 때와 변해버린 세월만큼, 낙인찍힌 여성의 달라진 모습이 이 책의 독서 포인트다. 


또, 달라진 것은 많으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여자 주인공들의 당당한 모습이다. 아니, '당당'보다는 '단단'이 더 적절한 표현이겠다. 『주홍글씨』의 헤스터도 단단했고, 『비바, 제인』의 제인도 단단하다. 


제인과 스캔들의 대상이었던 남성은 당사자였지만, 스캔들의 중심에서 한발 물러선 채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쾌락은 즐기되 마땅히 져야 할 책임과 의무는 져버리고, 마음을 녹이는 미소와 다정한 말로 항상 어물쩍 넘어간다. 여자들에게 사랑받는 법을 아는 것이다. 남자는 먹고사는 일에도 전혀 어려움이 없다. 섹스 스캔들만 터지지 않았더라면 더 성공했을 수 있겠지. 그래도 그의 정치생명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유권자들은 그의 스캔들은 못마땅했으나, 그에게 풍기는 호감 어린 모습과 정치 리더십은 인정하며 또 그에게 투표를 한다. 그래서 10선 하원의원이 된다. 『주홍글씨』에서 자신의 신분 뒤에 숨은 채 사람들의 비난에서 벗어나고, 마을 사람들의 호감과 존경을 받던 '딤스데일 목사'가 떠오른다. 



『비바, 제인』 줄거리


정치에 관심 있던 한 여대생(아비바 그로스먼)이 경력을 쌓기 위해 하원의원 선거사무소의 인턴으로 들어간다. 아비바는 하원의원을 사랑하게 되고, 함께 자는 사이가 된다(함께 자는 사이지만, 혹여나 싶어 그곳은 하원의원이 거부한다). 친구가 없던 아비바는 엄마에게 털어놓고, 엄마는 그녀의 엄마(아비바의 외할머니)에게 조언 받아, 하원의원의 부인에게 모든 사실을 말한다. 부인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아비바와 하원의원은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다가(선거사무소에서 일은 꾸준히 했다), 어느 날 둘이 탄 차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둘의 사이가 세상에 드러난다. 


한동안 시끌했지만, 얼마 후 911 테러가 일어나는 바람에 세간의 관심은 줄어들었다. 그래서 하원의원은 재선에 성공하나, 아비바는 취직을 하지 못한다. 그녀의 이름만 구글링해도 어떤 스캔들에 연루되었는지, 댓글에 달린 사람들의 평가가 끝도 없이 나온다. 아비바는 떠나기로 결정하고, 개명을 한 후 외할머니께 2만 달러를 빌려 메인 주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곧 그녀의 뱃속에 한 생명이 자라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야기 진행 방식


이 책은 하나의 굵은 이야기 줄기를 가지고, 다섯 사람의 시각으로 쓰였다. ① 제인의 엄마, 레이첼(레이첼 글로스먼, 셔피로) / ② 제인 영(아비바 그로스먼) / ③ 제인의 딸, 루비(루비 영) / ④ 엠베스(하원의원의 아내) / ⑤ 스캔들 당시의 아비바. 


②과 ⑤는 같은 사람이지만, 나이대가 다르다. ②는 나이가 든 후의 제인 영, ⑤는 선거 사무소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하원의원을 사랑하던 아비바 그로스먼의 시각에서 쓰였다(시점은 전지적 시점). 


스캔들을 겪은 여성의 인생을 상당히 효과적으로 나타냈다. 단순히 1인칭 주인공 시점이나,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썼다면, 이 책이 주는 인상과 여운은 덜 했을 것 같다. 이미 이런 책은 많으니까. 그런데 『비바, 제인』은 시점을 달리해, 하나의 일을 다채롭게 풀어쓰고,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저자, '개브리얼 제빈'이 그냥 그저 그런 작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제일 재밌게 읽은 파트는 첫 번째 파트인 레이첼 파트. 그녀는 자기 나름대로 똑똑하고, 자기 관리 철저한 사람으로 적어놓았지만, 다른 파트에 등장하는 레이첼은 딸바보에다, 그냥 바보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독자는  첫 파트 이야기의 주인공 레이첼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고, 일단 그녀의 말이 옳다고 믿고 글을 읽어나가는데,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쓴 글을 읽다 보면 레이첼의 시각에서 쓴 이야기들이 하나씩 전복된다. 그리고 마지막엔 레이첼은, 그냥 좀 극성맞은 엄마로만 보이게 된다. (가령, 레이첼 파트에서 레이첼은 딸의 불륜을 멈추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다섯 번째 아비바 파트에서 엄마가 한 일 따윈 아무 일도 아니고, 그래서 정말 아무런 언급도 되지 않는다. 아비바는 엄마가 엠베스를 만났다는 것도 모름) 



제인, '살다'를 선택하다


말이 났으니 말인데, 어젯밤 당신의 꿈에 아비바 그로스먼이 나왔다. 꿈에서 그녀는 마이애미 시장 선거에 출마했다. 당신은 그녀에게 다가가 조언을 구했다. "하나만 물어도 될까?" 당신이 말했다. "어떻게 그 스캔들을 극복했어?"

그녀가 말했다. "수치스러워하기를 거부했어."

"어떻게? 당신이 물었다.

"사람들이 덤벼들어도 난 가던 길을 계속 갔지."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가슴을 활짝 편다. 정장 재킷의 단추를 여민다. 머리칼을 단정히 쓸어넘긴다. 

당신은 투표지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고, 선택한다. (- 마지막 페이지, 395쪽)


'삶'은 사는 것의 명사형이고, '살다'는 사는 것의 동사형이다. 명사는 뭔가 구체적인 형태를 띤 채 멈춰있는 모습이 떠오르고, 동사는 끊임없이 형태를 변화시키며 약동하고 움직이는 모습이 떠오른다. 제인은, 삶 속에 결박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살기를 선택한다. 젊은 시절의 스캔들은 그녀를 움켜잡지 못한다. 가장 사랑하는 그녀의 딸, 루비의 비난과 반항도 제인을 멈추지 못한다. 


『주홍글씨』의 헤스터는 그 시대에서 할 수 있는, 본인 선택의 자유를 누린다. 누군가는 비난하고, 누군가는 설교하고, 누군가는 외면했지만 그녀는 본인 선택에 의해 기꺼이 받아들인다. 비난을 어쩔 수 없이 받는 것과 기꺼이 받는 것은 완벽히 다른 것이다. 


제인은, 인턴 시절 철이 없고 너무 낭만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그 당시엔 하원의원을 사랑한다 믿었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니까 그녀는 과거의 자신을 외면하지 않고, 변명하지도 않으며, 포장하지 않고 순순히 인정한다. 


세상이 달라졌다고 해도, 여전히 '주홍글씨'는 남아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다른 사람에게 주홍글씨를 새기려 한다. 본인의 죄는 외면하고서 말이다. 그래서 본인의 죄를 당당히 드러내자 마을 사람들의 죄를 꿰뚫어본 『주홍글씨』의 헤스터와 웨딩플래너를 하며 지역 사람들의 죄와 수치를 알게 된 『비바, 제인』의 제인은 서로 통한다. (이 책에도 『주홍글씨』가 종종 언급된다. 아마 이 책을 떠올리며, 섹스 스캔들에 대해 풀어썼을 것이다)



알쏭달쏭 그 이름, 페미니즘


이 책에 여러 번에 걸쳐 페미니즘에 대해 나오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페미니즘이 뭔지. 여전히 성차별이 심하고, 성에 대한 편견과 성을 상품화가 심해 이런 불균형과 불합리는 조절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주장하는 것들에 대해서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다양한지, 얼마나 제각각 생각하는지. 또 '페미니즘'이라는 한 단어에 너무 많은 것(이 세상의 모든 여성)을 꾹꾹 밀어 넣고, 정작 생각해 봐야 하는 건 외면하는 건 아닌지 여러 생각이 든다. 


제인이 자신의 길을 걸어갔듯 나도 특정 단어, 특정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말 재밌게 읽은 소설이다. 묵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주제의 무게와 적절히 가벼운 문체를 적절히 잘 배합했다. 대부분 독자들이 재밌게 읽지 않을까.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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