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가야 한다
정명섭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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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에 태어났지만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했던 두 남자 이야기. 

한 명은 가세가 약하기는 하나, 엄연히 양반집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고, 또 다른 한 명은 어머니가 외거노비여서 태어날 때부터 그 집 노비로 살아야 했다. 양반집 아들 이름은 강은태, 종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의 이름은 황천도였다. 만적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라고 부르짖은 지도 몇 백 년 지났지만, 신분질서는 공고했고 능력이 어떠하든 주어진 강은태와 황천도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두 남자의 운명은 극히 달랐으나, 우연히 같은 입장으로 만나게 된다. 때는 혼란했던 시대 명-원 교체기. 후금의 위협을 받던 명은, 조선에 지원병을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명분을 중시했던 조선은, 명의 요청대로 조선군을 파병한다. 그러나 입바른 말 하는 양반들은 온갖 핑계를 대며 자기 자식은 보내지 않았고, 그 집의 종을 아들 대신 보냈다. 그래서 만주로 파병된 이가 황천도다. 그리고 크게 별 볼 일 없는 무인 집이었던 강 씨네 집은, 선비들에게 잘 보여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자진해 만주로 간다. 물론 강은태는 가기가 저어했으나, 아버지가 강하게 요구해 가게 된다.

조명 연합군과 후금의 군이 붙자, 당연히 오합지졸인 조명 연합군은 대패할 수밖에 없었다. 죽는 자는 죽고, 산 자는 붙잡혀 후금의 농사꾼이나 장사꾼에 팔려 노예의 삶을 살게 된다.

여기서 양반이었던 강은태와 노비였던 황천도가 만난다. 농사일이라면 젬병인 강은태는 주인이 시키는 농사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럴 때마다 매질을 당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황천도는 강은태를 조금씩 도와주었고, 둘은 우정을 쌓게 된다.




양반과 노비는 서로 친구가 될 수 없었지만, 힘든 상황 속에서 둘은 우정을 맺고 호형호제하는데 그럼에도 노비 출신인 황천도는 양반인 강은태와 자신은 다르다며 속 깊은 반감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

그 반감이 기어코 터졌다. 둘이 만주에 온 지도 수 세월 흘렀고, 그 사이 동안 조선에서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난리가 있은 후 조선이 많이 달라졌으나 생각보다 빨리 사회는 안정되어 갔다. 혼란과 변화가 기회임을 간파한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우선 내세울 게 없었던 양반인 강은태 아버지가 자진해 출정한 아들의 덕을 보아 벼슬을 얻었고, 가문에 돈이 없어 돈 많은 상인 출신 며느리가 온갖 수완을 펴서 어느새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부자가 된 것이다. 이제 살만해졌고, 청과도 타의로든 어쨌든 원만히 지내게 되었으니 만주에서 고생하고 있을 아들을 데려오기로 한 것이다.

강은태를 데리러 온 사람이 오자, 황천도는 다시 뼈져리게 신분 차이를 깨닫고 눈이 뒤집어졌다. 자신도 고향에 집이 있다고, 자신도 고향에 아버지가 있다고... 그래서 수년간 친구로 지냈던 강은태와 강은태를 데리러 온 심부름꾼을 죽이고, 황천도 본인이 강은태로 위장해 조선의 양반으로 살기로 결심한다.




이후에는 어떤 일이 펼쳐졌을까. 스포일러라 여기까지. ㅋㅋㅋ 

황천도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강은태의 아내와 몇 사람들과 싸우게 되고, 이 과정에서 황천도는 점점 사람이 달라진다. 신분 세탁을 위해 오랜 친구도 서슴없이 죽였는데, 그 이후로는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다. 

아무튼 살아서 (조선 땅에) 가기 위해 기울여야 할 노력이 양반과 노비는 극과 극이다. 똑같이 포로로 잡혀 있지만, 양반은 고국에서 모시러 오고, 노비는 그곳에 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오직 가족만이 가슴 끓이며 기다리고 있다.  착잡하고 슬픈 이야기다. 우리가 모르는 이런 일들이 조선 시대 때 얼마나 많이 있었을까. (본 소설책에도 나온다. 혼란을 틈타, 신분세탁하는 사람이 많다고) 


전쟁 소설인 줄 알았으나 실은 신분과 차별에 대한 소설이었고, 인간의 욕망을 다룬다. 모 재벌의 어린 딸이 운전기사에게 했던 막말이 떠오른다. 최상류층의 사람들은, 아직도 조선시대처럼 신분제가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이 사건으로 한창 시끄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읽어서 마음이 많이 착잡했다. 세상이 조선시대와 완전히 바뀌었다지만, 돈과 권력이 있는 이들에겐 전혀 그렇지 않은가 보다. 그리고 이런 신분 차이가 있으면, 이 차이를 비집고 늘 위로 상승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황천도와 같은 이가 지금도 있을까. 갑자기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가 떠오른다. 시대가 바뀌어도 늘 통하는 이야기 같아서 씁쓸하다.

역사 소설이지만 문장이 어렵지 않고, 내용 전개도 빨라 재밌게 읽었다. 주제가 뚜렷하고, 산만하지 않아 몰입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덧) 그냥 내 생각이지만, 황천도가 신분세탁 후 조선에 왔을 땐 그다지 막 나가지 않는다. 아마도 돌아온 지 얼마 안 됐고, 자기 편이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답답했다. 좀 더 휘몰아쳐 나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너무 굼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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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트랜스휴머니즘
엘로이즈 쇼슈아 지음, 이명은 옮김 / 그림씨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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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에 본 액션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로 〈업그레이드>가 있다. 영화 <업그레이드> 주인공은 영문도 모른 채 괴한들의 공격을 받아 아내가 죽고, 본인은 신경이 절단돼 얼굴 말고 다른 신체 부위는 단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전신불수가 된다. 그런데 이 남자가 현존 최고의 AI 칩을 이식받고 몸의 기능이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존재로 거듭난다. AI 덕분에 슈퍼 초사이언 급 능력을 갖게 된 주인공은 아내를 죽게 만들고 자신의 몸을 불구로 만든 사람을 잡으러 다니는데, 잡고 보니 그들은 주인공과 비슷하긴 하나 조금 다른 '트랜스 휴먼'이었다.


​범인들은 전쟁에 참전했다가 몸이 만신창이로 망가진 제대 군인들이었다. 주인공 아내는 실력 좋은 엔지니어로, 제대군인들에게 놀라운 기술이 탑재된 기기를 이식했고 그 덕분에 장애를 가졌던 그들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식한 눈으로 건물벽을 투시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사람을 본다든지, 팔에 심은 총으로 총알을 손바닥으로 쏘아댄다든지 인간이었던 그들은 말 그대로 몸 전체가 병기가 되었다.


AI 칩을 심어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된 주인공과 상한 몸에 기기를 이식해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된 악당은 비슷해 보이지만 그 결이 조금 다르다. 주인공은 컴퓨터이고, 악당은 이 책의 제목과 관련 있는 '트랜스 휴먼'이다.



트랜스 휴머니즘 개념 : 

과학과 기술을 이용해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 성질 및 능력을 개선하는 것 (133쪽) 



이 만화책은 프랑스 일러스트레이터 엘로이즈 쇼수아가 그리고 글 쓴 작품이다. 만화책이긴 하나, 판화 같은 감각적인 그림들로 이루어져 있어, 단순 만화책보단 이야기가 있는 일러스트 같다.


이 책을 읽고 놀랐던 건, 프랑스의 사실적인 교육이랄까 그랬다. 이 책을 굳이 우리 식대로 설명하면, '트랜스 휴머니즘'에 대한 교육 만화라고 할 수 있으나 우리나라의 흔한 교육 만화와는 좀 다른 느낌이다.


일단, 독자를 학생이나 애 취급하지 않는다. 어려울 수 있는 설명을 최대한 쉽게 하고, 학생들이 이 책에서 다루는 것들을 일상에서 느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알고 싶지 않지만 꼭 알아야 할 사항들은 회피하지 않고 보여준다.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것이 우리 신체이고, 또 그 신체가 절단된 사항, 우리 신체 구조를 그림으로 보여주는데 누구는 이런 것들을 알고 싶지 않을 수 있다. 우리 몸속을 아는 것, 이건 오래도록 터부시 되어 온 것이니까 사람으로서 근본적 거부감이 있다(사실 이런 터부 때문에 동양과 서양 모두 외과가 오래도록 발전을 못하다 근대 들어서 급속히 발전했다). 보기 꺼려지는 신체 구조를 이 책은 최대한 간결하면서 정확하게 그려낸다. 의사에 꿈이 있는 아이들에게 무척 유익할 듯하다.


​그리고 서양 교육의 특징인 '연역(+ 역사)'을 세밀하게 밟는다. 저자는 '트랜스 휴머니즘'의 개념과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를 이끌어 내기 위해 '근대 외과학의 아버지'인 아브루아즈 파레를 주인공의 안내자로 설정해 서양 절단술의 연역을 밟고(고대 그리스인 히포크라테스나 로마인 켈수스부터 시작-), 오늘날에 이르렀다가 미래에 마주하게 될 문제를 던지며 현재 우리가 해야 할 철학적 사유를 끌어낸다(히야, 진정 '바칼로레아'의 나라답다).


일반인들은 일상에 크게 와닿지 않고, 생각하기엔 너무 먼 문제인 '트랜스 휴머니즘'. 그래도 가끔씩 티비(보통 해외 토픽)에 나오는 장애우들을 위한 신체 도구나 기기들을 보면 생각보다 트랜스 휴머니즘 기술이 상당히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게 그냥 '와, 좋다', '절망에 빠졌던 장애우분들께 희망이 되었네요'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언젠가는 돈이나 권력을 쥔 사람들이 그들의 신체 기능을 월등히 향상시킬 기기를 이식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신체가 개선된 트랜스 휴먼들이 세상을 다스리고(주인), 일반 인간들은 그들에게 지배받는(노예) 세상이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여기까지 이르는데,



그래, 진짜 우생학적이다.


만화로 풀어쓴 트랜스 휴머니즘에 관한 책이지만 곧 닥칠, 혹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 트랜스 휴머니즘을 알고 생각하기에 좋을 작품이다. 학생들에게 추천하나, 어른이 읽어도 좋다. 외국의 교육 만화는 어떻고 어떤 수준인지도 체감할 수 있어 추천한다.


+ 만화를 번역해 내는 건 상당히 까다로운 일인데 이명은 박사님의 번역이 상당히 좋고, 사용된 한글 활자나 활자 배치 등이 원작 그림과 내용 진행에 어울리도록 출판사에서 세심히 신경 써서 만든 게 느껴진다. 이 분야에 관심 있는 학생과 일반인께 강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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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라, 내 얼굴 슬로북 Slow Book 4
김종광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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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오랫동안 안 써서 어떻게 써야 하는지 까먹었다. 생각하기를 오랫동안 멈춰서 생각하는 법도 까먹었다. 그냥 하루를 살고 있고, 살아가고 있다. 책은 꾸준히 읽고 있다. 영화도 보고, 공연도 보러 다닌다. 글 쓰는 법을 까먹어서 후기를 못 올릴 뿐이다.


능동적인 게 뭘까. 스스로 생각하기, 스스로 선택하기, 결심을 실천하기, 실천으로 유익한 뭔가를 생산하기... 이런 것이 '능동'인 것 같다. 요즘의 나는 과연 능동적으로 살았던가. 먹고살기 위해 돈은 벌고 있으나 능동적이기보단 수동적이다. 살아 있으되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 지는 꽤 오래전인 것 같다.


생각해보니 웃은 지도 오래되었네. 웃는 법도 까먹은 것 같고... 아, 주문을 외자. '웃어라, 웃어라, 내 얼굴!'


웃음에는 '능동성'이 내재되어 있으니까, '웃어라'라고 명령을 내려도 부지불식간에 수동성이 능동성으로 변환될 테지. 어쨌건 웃어라고 내 얼굴에게 명령하는 것처럼, 리뷰도 써보려고 한다. 일단 글을 쓰면, 시작이야 수동성이더라도 곧 능동적으로 변하겠지.







몇 달 전에 읽었던 『놀러 가자고요』의 저자, 박종광 작가의 신작 산문집 『웃어라, 내 얼굴』을 읽었다. 짧고 간결한 잡문을 엮은 책인데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책에 실린 글이 짧고,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만 간결하게 담겨 있다. 긴 글만 읽으면 정신이 혼미해지는 나에게 좋았다.


그리고 대부분 생활밀착형 에세이로, 글 대부분 나도 이해 가능한 내용이라 공감하며 재밌게 읽었다. '보통 에세이는 거진 생활밀착형 글 아니냐' 할 수 있겠지만... 아니다. 세상은 넓고, 세상엔 오만 에세이들이 다 있다. 그냥 에세이라고 하기엔, 뜻을 알 수 없고 모호하며 뜬구름 잡는 글도 많고 중2병에 빠진 사람이 쓴 글이라든지, 익명 처리 후 자기 가족이나 자기 지인에 대해 섭섭했던 일들만 열거하는 글, 자기자랑을 하거나 혹은 어떤 투철한 정신으로 독자 계몽을 위해 쓴 에세이 등등 세상엔 참말 많은 에세이가 있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에세이 대부분이 소설가의 산문집으로 읽히기보단 일상을 살아가는 '일반인',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소시민'의 이야기로 읽혔다. 대출 이야기, 주공 아파트, 국민체육센터, 먹고사는 이야기를 읽을 때 그러했다.


그러니까 소설가의 에세이집이라 해서,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에서 느껴지는 '후까시(...?!)'가 박종광 작가의 에세이엔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무리 힘을 빼고, 일상 그대로의 에세이를 쓴다고 해도, 돈 걱정 없는 세계적인 작가의 하루는 매일매일 생활비 걱정을 해야 하는 작가의 에세이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리 듣고 언제나 고뇌에 차 있던 엘리트 작가, 전혜린의 에세이와도 천지 차이.


지금 『웃어라, 내 얼굴』의 여러 이야기 중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국민체육센터' 이야기인데, 나도 작가님과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극 동감하며 읽었다. 예전에 남자친구와 국민체육센터에 배드민턴을 치러 갔었다. 기계로 코트를 예약해야 해서 막 기계를 누르려고 하는데, 어디서 우릴 지켜봤는지 배드민턴 동호회 사람들이 개떼같이 몰려와 자기들이 쳐야 하는데, 자기들이 사람이 많아서 어쩌고저쩌고 말을 많이 해서 그냥 나와버렸다. 작가님처럼 며칠 동안 분노한 정도는 아니지만, 텃세에 밀려난 느낌으로 좀 짜증이 났다. 철새에게 작은 공간 하나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텃세 부리는 텃새마냥... 흥, 나빴어!


대부분 이런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작가라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들쑥날쑥한 수입에 직장인보다 불안정한 생활과 그로 인해 겪어야 하는 고민들이 많이 적혀 있다. 그 고민은, 아내와 부모님에 대해 쓴 글에 많이 녹아 있다. 현재 내가 하는 고민과도 비슷하다. 위에 썼듯이 요즘 내가 글 쓰는 법을 잊고, 생각하는 법도 잊고, 웃는 법도 잊고 하루를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대부분 이런 데서 비롯했다. 연말이 되니 좀 더 그런 듯.

어쨌거나 작가님도 빠듯한 생활비로 살면서도 스스로의 선택대로 20년 차 생계형 소설가로 살아오셨듯, 나도 나대로 살아갈 테지. 참, 작가님이 9년 전 불혹을 앞두고 쓴 글에 붙인 제목이 「웃어라, 내 얼굴」이다. 작가님과 띠도 같고 몇 년 후면 나도 불혹... 한 살 더 먹기 전 연말인 지금, 나도 나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웃어라, 내 얼굴! 웃어라, 내 커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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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은 능동태다
김흥식 지음 / 그림씨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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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말이 없다면 인간은 무엇인가? 

우리말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 5쪽


1. 말의 참모습

말은 의사소통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말은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니, 인간이 인간임을 드러내는 궁극의 모습일지 모른다. (...) 말이 곧 인간이다. 그리고 우리말은 곧 우리 겨레요, 우리 자신이다. 결국 한 인간이 사용하는 말은 곧 그 인간이요, 한 겨레가 사용하는 말은 곧 그 겨레이며, 한 세대가 사용하는 말은 곧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류 역사의 한 세대인 셈이다. 그런 말을 우리는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 9쪽


2. 사전의 풍요로움

'보이는 사전(책으로 된 사전- 먼지잼 주)'은 의지만 있다면 전혀 모르는 항목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 12쪽

우리말의 소멸을 막기 위해서라면, 아니 막는 것은 언감생심 꿈꾸기 어렵다면 조금 늦추기 위해서라도 우리말 사전을 책상마다, 교육 현장마다 놓을 일이다.  - 17쪽


3. 주어 찾기

우리말 문장에서는 주어가 없는 경우, 동사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 20쪽

결국 우리 문장과는 본질부터 다른 것이 영어 문장이다. 그리고 그런 문장을 끝없이 접하면서부터 우리 언어생활은 상처를 받기 시작한다. - 23쪽

주어 없는 세상인 우리말에서는 당연히 사람이 주인이다. 반면에 주어가 반드시 등장해야 하는 영어 문장에서는 세상 만물이 다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주어의 등장은 훨씬 심각한 우리말 소멸을 가져온다. - 24쪽


4. 수동태라는 괴물

수동태가 영어 문법 요소로 등장하는 것은 수동사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말에는 피동사가 있다. 그러니 우리는 엄밀히 말하면 수동태가 필요 없다. - 28쪽


5. 우리 집인가 내 집인가


6. 다수는 늘 옳은가

사실 언어생활이라는 것이 누구나 알다시피 언중, 즉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시민들의 실천적 사용을 전제로 하기에 언중의 결정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도 언어의 기본 틀을 벗어나면서까지 언중의 뜻을 따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된다면 한 나라의 언어는 언제든 틀을 벗어나 전혀 다른 언어가 되거나 소멸할 수 있기 때문이다. - 56쪽


7. 한글 애국주의 대 한자 사대주의

우리말은 한글전용 주의를 채택한 후 조어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 81쪽


8. 글을 맺으며

언어가 단일화된다면 문화가 단일화되는 것이요, 단일 문화가 된다면 민족 또한 단일화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민족의 단일화란 다양성의 소실이니 이는 곧 수많은 민족의 멸종을 의미한다. (...) 지금 당장 우리말, 그리고 한글의 독자성을 지키기 위해 나서야 한다. 지금 나서지 않으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늦을지 모른다. - 87쪽




저자의 직접적 의견이 담겨 있는 책으로, 자기주장이 강해서 꼭 저자와 마주 앉아 저자의 말을 직접 듣고 있는 듯하다. 


저자는 우리말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분으로, 현재 영어 문장에 영향받아 파괴되고 있는 우리말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나 또한 저자처럼 우리말을 사랑하고 우리말이 잘 보존되길 바라지만, 저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주장엔 동의하고, 어떤 주장엔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토론할 거리가 많은 책이라 봤다) 


말은 생물과 같아서 주위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 현재 우리나라는 영미 문화권에 속한다 할 수 있고, 당연히 영어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영어의 여러 영향 중 예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우리말에 거의 쓰지 않던 '주어'나 '수동태'의 빈번한 사용이다. 


우리말은 용언이 무척 발달해서 문장에 주어를 쓰지 않아도 된다. 반면 영어는 동사나 형용사가 우리말처럼 세밀하지 않아 주어를 꼭 넣어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주어의 남발을 걱정하지만, 구어에서는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문제 같다. 문어 중 번역 문장은 좀 공론이 필요한 것 같고(번역가들도 다양한 의견을 갖고 있는 걸로 안다) 순수 우리 문학에서 주어를 남발하는 건 지극히 작가의 자질 문제라고 본다. 


문제는 수동태의 남발이다. 수동태 사용은 학교에서 교육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보는데,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음 그리고 수동태는 단순히 우리 언어생활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문제도 스며 있다고 본다. 우리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과 미 군정 시기 때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역사가 거의 단절돼 버렸다고 본다. 말 많고 탈 많았던 조선 500년이지만 어쨌든 자기주장 확실한 꼬장꼬장한 선비들의 나라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와 한국전쟁, 분단국가란 현실 속에서 자기주장을 확실히 내기 힘들었고, 수동적으로 의사를 표현해야 했다. 우리 의식도 능동보다 수동, 피동이 강하다. 스스로 책임지기보다 남 탓하는 문화가 강한 것도 이런 영향이 아닐까 싶다. 


내가 우리말에 정말로 감탄했던 때는, 벽초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을 읽었을 때다. 『임꺽정』은 조정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와 조선 최하층민인 백정과 길바닥 인생들의 이야기가 교차로 이어지며 펼쳐지는데, 이때 벽초 선생의 문장 다루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다. 조정의 일은 당시 조정에서 쓰던 딱딱한 한문으로 묘사하셨고(한문이라서 읽어도 뭔 말인지 하나도 모름), 길바닥 인생 이야기는 오롯이 우리말, 우리 리듬대로 묘사해 조정과 길바닥 인생의 교차가 얼마나 극명하던지. 이 책을 정말 벽초 한 사람이 쓴 것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문장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홍명희 선생 외에 박경리 선생이라든지, 『혼불』을 쓰신 최명희 선생의 글도 마찬가지다. 구한말, 일제강점기 속에서 그나마 조금 이어져 오던 우리말과 우리 문장을 홍명희, 박경리, 최명희 선생님 등은 익히고 자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 현재는 그런 분위기 속에 자란 아이도 없고, 그래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멸종되었다고 본다. 아직 연세 많으신 분들 중엔 간혹 좋은 글 쓸 수 있는 분이 계시겠지만, 40~50대 이하로는 없다고 본다. 


단순히 영어 영향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밈(Meme)이라는 것이, 격동의 세월을 겪는 동안 완전히 꺾이고 달라져 버렸다고 본다. 


그래도 이 책의 저자, 김흥식 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의식적인 노력은 해야겠죠. 

단순히 영어에 대항하려는 자세보다, 우리 고전을 즐겨 읽고 사라지고 있는 우리 말과 우리글의 리듬을 체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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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의 계절
타샤 튜더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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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행복을 곁에 두고 싶어서 읽은 책



타샤 튜더 할머니의 그림책입니다. 

이 책은 총 12장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마다 일 년 열두 달의 풍습이 담겨 있습니다. 


책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할머니,

엄마가 저만할 때는 어땠어요?

뜨개질 하던 할머니는 손녀의 질문에 따스한 미소를 짓고는 그녀의 딸이자 손녀의 엄마가 어렸을 때 무엇을 하며 즐겁게 지냈는지 이야기 들려줍니다. 




#JANUARY

우선 12월 31일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가족들은 이날 모닥불을 피우고 그 주위를 춤을 추며 돕니다.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다음 날인 1월 1일, 가족들은 긴 식탁에 둘러앉아 소고기 구이와 그 고기즙으로 만든 푸딩을 먹고 사과파이, 아이스크림, 치즈를 먹었습니다. 1월 6일, 크리스마스로부터 12일이 지날 날엔 염소 썰매 경주를 하고, 저녁엔 가족끼리 연극을 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FEBRUARY

집에 자그마한 참새 우체국이 있어 이 우체국으로 밸런타인데이 카드가 도착합니다. 2월 22일은 워싱턴 대통령 생일로, 워싱턴 대통령의 어렸을 적 일화가 있는 '체리'를 넣어 만든 <워싱턴 파이>를 나눠 먹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저녁엔 워싱턴 대통령의 어린 시절을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합니다. 


#MARCH

3월은 나무즙 채취하기 좋은 달입니다. 모두 모여 산으로 가 나무즙을 채취하고, 집에 와서 함께 시럽을 만듭니다. 이 시럽을 아직 녹지 않은 눈 위에 뿌려 먹으면 달콤하고 맛있었다고 하네요. 


#APRIL

부활절 주가 있는 4월입니다. 부활절 달걀 만든 이야기, 십자가 모양의 빵을 만든 이야기가 빠질 수 없죠. 그리고 큰 나뭇가지에 부활절 달걀을 걸고 부활절 트리를 장식합니다. 


#MAY

5월 1일은 5월제입니다. 농사가 잘 되기를 비는 날이죠. 이 날이 되면 아이들은 이웃 사람 몰래 이웃집 문 앞에 꽃바구니를 갖다 두었습니다. 문을 열고 나온 이웃 사람들이 기뻐했을 것 같아요. 


#JUNE

6월 24일은 세례 요한의 축일입니다. 줄이 달린 인형극인 마리오네트 인형극을 했습니다. 마리오네트 인형과 인형극 무대 등등 이 모든 걸 아이들이 손수 만들었고, 인형극도 아이들이 직접 했습니다. 인형극을 관람하던 어른과 아직 인형극에 참여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많이 좋아했을 것 같습니다.


#JULY

독립기념일에는 빈 깡통에 폭죽을 넣어 멀리멀리 보냈습니다. 그리고 국기를 내걸었고, 맛있게 만든 음식을 싸 들고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마법의 섬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습니다. 


#AUGUST

할머니의 딸이자 손녀의 엄마의 생일이 있는 달입니다. 생일 파티는 밤에 강가에서 했습니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들을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재미난 그릇에 담고 생일 파티를 즐겼습니다. 이 생일 파티에서 뭐니 뭐니 해도 제일 멋진 이벤트는, '강에 띄운 생일 케이크'였습니다. 케이크에는 불을 붙인 초가 꽂혀 있었는데요, 정말 아름답고 멋진 광경을 연출했어요. 


#SEPTEMBER

노동절이 있는 달, 9월. 인형들의 잔치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재밌는 대회를 많이 했어요. 


#OCTOBER

직접 키우고 가꾼 사과로 주스를 만드는 달입니다. 시월의 마지막 날인 핼러윈 데이 준비도 한창이고요. 그리고 멋진 핼러윈 데이를 보냅니다. 


#NOVEMBER

추수감사절이 있는 11월. 칠면조를 구워 먹었어요. 그리고 이때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또한 1년 동안 쓸 양초도 만들었고요. 


#DECEMBER

12월 5일이 되면 강림절 달력을 벽에 겁니다. 성 니콜라스 케이크도 만들어 먹고요.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숲속에 꾸며 놓은 신비로운 아기 구유로 갑니다.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꽉 차는 크리스마스 밤입니다.



이렇게 할머니는 손녀에게 손녀의 엄마가 어린 시절, 매해 열두 달을 어떻게 보냈는지 들려줍니다. 


할머니가 손녀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은 본디 미국 가정집에서 치르는 행사이며, 타샤 튜더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야기 속에는 타샤 튜더 할머니가 직접 생각하고 만든 행사도 있습니다. 지금은 타샤 할머니의 후손들이, 버몬트에서 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합니다. 


타샤 할머니의 책은 기회 있을 때마다 보고는 하는데요, 타샤 할머니의 책이나 그림은 뭔지 모를 고유한 느낌이 있습니다. 어떤 즐거운 연극에 초대된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 과거로 그리고 지구 반대편으로 이동해 타샤 할머니의 집에 있는 기분도 듭니다. 이 느낌은 너무 생생해서 가끔 현기증이 느껴지기도 해요. 책 속에 그려진 꽃에서 진짜 그 꽃의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림 속 여기저기에서 발랄하게 뛰어다니거나 배를 내밀고 쓰다듬어주기를 낙천적으로 기다리는 코기들은 정말 책 속에서 뛰어나와 곧장 제 품에 안길 것 같습니다. 다른 많은 그림책을 봐왔지만, 타샤 할머니 그림은 역시 타샤 할머니 그림입니다. 생생함과 독특한 생동감이 있어요. 


그림책으로 타샤 할머니의 그림을 한 장, 한 장씩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시간 여행의 느낌이 들 거예요. 책 속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생생히 엄마의 어린 시절을 상상했을 어린 소녀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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