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가야 한다
정명섭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같은 날에 태어났지만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했던 두 남자 이야기. 

한 명은 가세가 약하기는 하나, 엄연히 양반집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고, 또 다른 한 명은 어머니가 외거노비여서 태어날 때부터 그 집 노비로 살아야 했다. 양반집 아들 이름은 강은태, 종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의 이름은 황천도였다. 만적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라고 부르짖은 지도 몇 백 년 지났지만, 신분질서는 공고했고 능력이 어떠하든 주어진 강은태와 황천도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두 남자의 운명은 극히 달랐으나, 우연히 같은 입장으로 만나게 된다. 때는 혼란했던 시대 명-원 교체기. 후금의 위협을 받던 명은, 조선에 지원병을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명분을 중시했던 조선은, 명의 요청대로 조선군을 파병한다. 그러나 입바른 말 하는 양반들은 온갖 핑계를 대며 자기 자식은 보내지 않았고, 그 집의 종을 아들 대신 보냈다. 그래서 만주로 파병된 이가 황천도다. 그리고 크게 별 볼 일 없는 무인 집이었던 강 씨네 집은, 선비들에게 잘 보여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자진해 만주로 간다. 물론 강은태는 가기가 저어했으나, 아버지가 강하게 요구해 가게 된다.

조명 연합군과 후금의 군이 붙자, 당연히 오합지졸인 조명 연합군은 대패할 수밖에 없었다. 죽는 자는 죽고, 산 자는 붙잡혀 후금의 농사꾼이나 장사꾼에 팔려 노예의 삶을 살게 된다.

여기서 양반이었던 강은태와 노비였던 황천도가 만난다. 농사일이라면 젬병인 강은태는 주인이 시키는 농사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럴 때마다 매질을 당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황천도는 강은태를 조금씩 도와주었고, 둘은 우정을 쌓게 된다.




양반과 노비는 서로 친구가 될 수 없었지만, 힘든 상황 속에서 둘은 우정을 맺고 호형호제하는데 그럼에도 노비 출신인 황천도는 양반인 강은태와 자신은 다르다며 속 깊은 반감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

그 반감이 기어코 터졌다. 둘이 만주에 온 지도 수 세월 흘렀고, 그 사이 동안 조선에서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난리가 있은 후 조선이 많이 달라졌으나 생각보다 빨리 사회는 안정되어 갔다. 혼란과 변화가 기회임을 간파한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우선 내세울 게 없었던 양반인 강은태 아버지가 자진해 출정한 아들의 덕을 보아 벼슬을 얻었고, 가문에 돈이 없어 돈 많은 상인 출신 며느리가 온갖 수완을 펴서 어느새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부자가 된 것이다. 이제 살만해졌고, 청과도 타의로든 어쨌든 원만히 지내게 되었으니 만주에서 고생하고 있을 아들을 데려오기로 한 것이다.

강은태를 데리러 온 사람이 오자, 황천도는 다시 뼈져리게 신분 차이를 깨닫고 눈이 뒤집어졌다. 자신도 고향에 집이 있다고, 자신도 고향에 아버지가 있다고... 그래서 수년간 친구로 지냈던 강은태와 강은태를 데리러 온 심부름꾼을 죽이고, 황천도 본인이 강은태로 위장해 조선의 양반으로 살기로 결심한다.




이후에는 어떤 일이 펼쳐졌을까. 스포일러라 여기까지. ㅋㅋㅋ 

황천도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강은태의 아내와 몇 사람들과 싸우게 되고, 이 과정에서 황천도는 점점 사람이 달라진다. 신분 세탁을 위해 오랜 친구도 서슴없이 죽였는데, 그 이후로는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다. 

아무튼 살아서 (조선 땅에) 가기 위해 기울여야 할 노력이 양반과 노비는 극과 극이다. 똑같이 포로로 잡혀 있지만, 양반은 고국에서 모시러 오고, 노비는 그곳에 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오직 가족만이 가슴 끓이며 기다리고 있다.  착잡하고 슬픈 이야기다. 우리가 모르는 이런 일들이 조선 시대 때 얼마나 많이 있었을까. (본 소설책에도 나온다. 혼란을 틈타, 신분세탁하는 사람이 많다고) 


전쟁 소설인 줄 알았으나 실은 신분과 차별에 대한 소설이었고, 인간의 욕망을 다룬다. 모 재벌의 어린 딸이 운전기사에게 했던 막말이 떠오른다. 최상류층의 사람들은, 아직도 조선시대처럼 신분제가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이 사건으로 한창 시끄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읽어서 마음이 많이 착잡했다. 세상이 조선시대와 완전히 바뀌었다지만, 돈과 권력이 있는 이들에겐 전혀 그렇지 않은가 보다. 그리고 이런 신분 차이가 있으면, 이 차이를 비집고 늘 위로 상승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황천도와 같은 이가 지금도 있을까. 갑자기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가 떠오른다. 시대가 바뀌어도 늘 통하는 이야기 같아서 씁쓸하다.

역사 소설이지만 문장이 어렵지 않고, 내용 전개도 빨라 재밌게 읽었다. 주제가 뚜렷하고, 산만하지 않아 몰입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덧) 그냥 내 생각이지만, 황천도가 신분세탁 후 조선에 왔을 땐 그다지 막 나가지 않는다. 아마도 돌아온 지 얼마 안 됐고, 자기 편이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답답했다. 좀 더 휘몰아쳐 나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너무 굼떴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