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쿡 - 애플의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는 조용한 천재
린더 카니 지음, 안진환 옮김 / 다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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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사후 애플의 수장이 된 팀 쿡에 관한 책이다. 팀 쿡의 전기라고 할 수 있는데 나 개인적으로는 팀 쿡에 대한 책보다는 트렌드 변화의 책으로 읽혔다. 아마도 스티브 잡스는 시대의 아이콘이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확연하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우선 스티브 잡스는 컴퓨터로 세상을 바꾸길 원했다. 그게 퍼스널 컴퓨터이든, 스마트폰이든 한 개인이 가진 기계 장치로 세상 사람들이 연결되고, 자료를 공유하고, 의견을 나눠서 보다 평등한 세상이 되기를 꿈꿨다. 이건 스티브 잡스의 한 개인의 바람이었다기 보다, 그 시절 기계를 좋아하던 키즈들은 그랬다. 어쨌거나 그 소망과 꿈을 갖고 있던 소년들 중 스티브 잡스는 능력도 출중했고, 상상력도 뛰어났으며 실행력도 좋았다. 완전하지 않지만 그는 어느 정도 성취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문제도 많았다. 사실 컴퓨터든 스마트폰이든 단지 누가 구상한다고 해서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도 세계인이 한 명 한 명 가질 수 있으려면, 기술적인 문제와 사업 관리 측면에서 해결해야 할 까다로운 문제가 많다. 사업은 사업인 것이다.



애플은 여러 번 위기를 겪었는데, 그중 제일 심각했던 때가 스티브 잡스가 쫓겨났다가 경영난으로 다시 애플로 복귀했을 때다. 한때 잘 나가던 기업이었지만, 앞으로 미래는 암울했다. 스타 같은 스티브 잡스가 다시 돌아왔어도 해결해야 하는 심각한 문제가 많았던 것.



그때 애플은 팀 쿡을 영입한다. 팀 쿡은 처음에 사양했다. 당연히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사양할 만했다. 애플은 망해가던 기업이었으니까. 하지만 팀 쿡은 스티브 잡스를 한 번 보길 원했고, 만난 지 몇 분 만에 애플로 갈 것은 결심한다. 스티브 잡스의 개인적 매력, 야망이 대단했던 덕분이다.





팀 쿡은 미국의 전형적인 보수적 지방인 남부 앨라배마주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노동자 출신인 부모 밑에서 근면 성실한 기독교인으로 자랐고, 당시 첨예했던 인종차별주의 때문에 부모는 최우수 공립학교로 팀 쿡을 진학시킨다. 여러 인종이 같이 다니는 학교보다, 백인이 더 많은 학교라면 분란에 휘말릴 일도 적고, 고급 교육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팀 쿡은 학교에서 성적이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사교성도 뛰어나 선생님이나 동급생 모두에게 인기 있던 학생이었다. 또 짬짬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벌었고, 학교 특별활동 시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대학은 오 번 대학의 산업공학을 전공했고 첫 번째 입사한 회사는 IBM 이었다. 그는 IBM에 입사한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아 재고 관리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그의 재고 관리 능력은 후에 애플에 획기적인 기여를 한다. (기업체에 재고 관리는 정말로 중요한 것!) 아마 이 재고관리 능력 덕분에 스티브 잡스가 팀 쿡의 능력을 신뢰하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또, 둘은 성향이 정반대일지는 모르겠으나 일벌레라는 공통점도 잡스가 팀 쿡을 믿고 애플의 후계자 자리를 물려준 이유 중 하나라 본다.




스티브 잡스 시절엔 애플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신기술을 많이 선보였지만, 세금 회피와 하청 업체 노동착취 문제, 그리고 환경오염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또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인종과 성별의 문제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팀 쿡의 체제로 넘어오면서 많은 게 바뀌었다. 우선, 요즘에도 티브이로 방영되는 애플의 광고에는 다양한 인종들이 다 함께 출연한다(내 눈에는 유**로와 비슷해 보임). 그만큼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환경문제가 끊이지 않자, 전 환경부 장관을 영입해 애플이 더 나아질 수 있도록 주문한다.



다양성, 환경에 대한 생각과 친환경적 기업 정책. 이 책을 읽으면서 이건 팀 쿡 개인의 성향이라기보다는 시대의 트렌드이고 이를 팀 쿡(과 애플)이 잘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나 개인적으로는 애플이 요즘에 좀 주춤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쨌거나 여전히 세계적으로 막강한 파워를 지니고 있고, 세계 트렌드를 이끄는 기업이므로 이 기업의 수장인 팀 쿡이 어쩌면 세상 트렌드의 한 면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어쨌거나 애플은 스티브 잡스 체제일 때와 팀 쿡 체제일 때가 사뭇 다르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 책의 저자인 린더 카니는 팀 쿡 체제의 애플이 현재 다양성과 환경에 주목하고 있다며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를 했는데, 문제는 '기업의 효율성과 재고 시스템', '다양성 추구'와 '환경'은 이 시대에는 필수 선택 사항이고 그 외의 다른 추가적인 매력을 선보여야 한다고 본다. 팀 쿡은 앞으로 애플을 통해서 세상에 무엇을 내놓을까.



사실 팀 쿡에 대해 잘 아는 바가 없었는데 이 책 덕분에 좀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사업을 하려면 무엇이 밑바탕이 되어야 하는지 잘 배웠다. 어쨌거나 팀 쿡의 경영 능력에 대한 능력은 좀 더 후에 명확한 판단이 가능할 것 같고(잘 나가던 사업가가 중간에 고꾸라지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나는 이 시점에서 그의 장점을 배우도록 해야겠다.



포용성(다양성 추구), 실행력, 근면 성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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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태어났으니 산다 - 열심히 살기는 귀찮지만 잘 살고는 싶은 나를 향한 위로의 한마디
해다홍 지음 / 놀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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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태어났으니 산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누구나 다.


어떤 삶을 살든 중요한 건 그 삶이 나에게 만족스러우냐 그렇지 않으냐의 문제.



이 책을 읽기 직전에 샤르트르의 『닫힌 방』을 읽었다. 샤르트르의 희곡 작품 중 가장성공한 작품으로 몇 겹의 은유가 있으나 표면적인 이야기는 어렵지 않다. 그냥 남자 하나, 여자 둘이 한 방에 갇히고 갈등하는 이야기다. 여기 닫힌 방은, 열리지 않는 방이다. 방 안을 비추는 불빛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 어두워 지지 않는다. 항상 밝다. 밝게 우릴 비춘다. (아, 이것만으로도 나는 벌써 부담스럽다) 그리고 배도 고프지 않아 먹지 않아도 된다. 아니, 먹을 게 없다. 먹을 게 없고 배도 고프지 않다. 방안엔 오직 색이 칠한 벤치 3개만 놓여 있을 뿐이다. 보통은 닫힌 방, 그것도 더운 방에 남자 한 명, 여자 두 명이 갇히면 에로틱한 상상을 할 테고 어딘지 즐거운 면이 있겠다 싶지만 이들에게는 이것이 지옥이다. 꺼지지 않는 불, 어두워지지 않는 방, 잠도 오지 않는 하루, 아니 시계도 시간도 없어 하루라는 것도 닫힌 방에서는 무의미한 것, 없는 것이다. 이곳은 과연 어디일까. 이곳은 바로 지옥이다. 샤르트르가 만들어낸, 그가 생각하는 지옥!



<타인은 지옥이다!>



현재 동명의 드라마가 제작 중인 것으로 아는데,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은 바로 샤르트르의 「닫힌 방」에서 나왔다. 이 책을 읽고 해다홍 님의 『일단 태어났으니 산다』를 읽으니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이 강하게 떠올랐다.




뭔가 책은 샤방, 가벼운 느낌이지만 음 책 느낌은 다소 무겁다. 그렇다고 어렵거나 슬프거나 그런 건 아닌데 음, 쉽게 말하면 우울할 때 보면 더 우울해지는 책이랄까. 어떤 분들은 위안을 얻는다고 하는데 나는 위안보다는 우울을 얻었다. ;ㅅ;



어쩌면 지금의 내 사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샤르트르의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처럼, 언젠가부터 집이 나에게 '닫힌 방'이 되었고, 닫힌 방 속에서 함께 사는 가족이 나에게 지옥이 되었다. 이런 말이 너무 과격하고, 좀 맞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닫힌 방」을 읽으면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 달 전에 독립을 했고, 근 한 달 동안 나는 정말 말그대로 천국을 맛보았다.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본가에 간 어제 또 그 지옥의 느낌을 조금 느끼고 급 우울해 하며 집으로 왔지만.



나는 『일단 태어났으니 산다』를 그릴 해다홍 님이 무슨 이유로 우울하고, 타인에 대해 그런 느낌을 받는지 잘 모르겠다. 이유는 나오지 않고 감정만 직간접적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인데, 그래서 어딘가 공감이 되면서도 지금 나에게는 위험한 것 같았다. 타인에게서 받는 울화를 느끼지 않기 위해 현재 나온 나로서는.



나도 사는데 이런 이유, 저런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꼭 열심히 살아야 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내 생이 그리고 내 오늘과 지금 이 순간이 만족스러웠으면 한다. 이 만족은 말초적인 만족이나 흥분과 다르며, 억지로 나를 누르고 인내하는 것과도 다르다. 내 오늘 하루와 생이 하나의 게임처럼 내가 정한 룰에 따라 즐겁게 하나, 하나씩 완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잘못하다가 game over가 뜨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게임처럼. 어딘가 깊이, 느껴지는 만족감. 이만하면 됐다, 좀더 잘했으면 싶다, 이쪽을 좀 더 손볼까. 등등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어쨌거나, 사람은 정체되어 있지 않고 늘 움직이고 변화하는 존재로 만나는 책도 그 때가 있는 것 같다. 지금은 나와 좀 맞지 않았지만 가끔 생각날 때 아무 데나 펼쳐서 읽으면 공감되고 좋을 것 같은 책이었다.




이렇게 재밌는 장면도 있으니. ㅋ 피식 웃으며 공감했다.




덧붙임> 참, 저자의 강아지가 예전에 내가 키우던 강아지 이름이랑 똑같아서 정말 반가웠다. 룽지 +ㅁ+, 성은 누요, 이름은 룽지. 누룽지. 갈색이, 정말 누룽지 빛깔이 감돌아서 내가 지어준 이름이었고 그 이름이 참 좋았는데. 이 이름을 학교에 가서 친구에게 말했고, 이 말이 또 다른 친구 친구들에게 흘러흘러가, 자기들끼리 "어떻게 같이 사는 강아지한테 먹는 걸로 이름 붙일 수 있지?"라는 말을 들은 게 기억이 난다. 그냥, 내가 그 애한테 못 마땅해서 그렇겠지, 정말 먹는 걸로 이름 지어서 그런 말을 했을까 싶다. 햐, 왜 갑자기 이런 기억이 떠오르지? 악. 타인은 지옥이다,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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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꽃 - 2019년 50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최수철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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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게 꿈이었을까, 환각이었을까, 상상 혹은 망상이었을까.



다 읽고 나서 학창 시절에 배웠던 「구운몽」이 떠올랐다. 성진이라는 승려가 하룻밤 꿈을 꿨는데 그 꿈속에서 성진은 양소유라는 이름으로 살며 파란만장한 生을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흥미로운 점은 꿈속의 양소유의 삶이 보다 현실적이고, 꿈밖의 성진의 이야기가 되려 꿈 혹은 환상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최수철의 5년 만의 소설 『독의_꽃』도 그러하다.



『독의_꽃』의 시작은 이렇다. 어떤 이유로 직장을 그만둔 남자가 한 달여 여행을 다녀온 후 냉장고 속에 곰팡이가 핀 음식을 먹고 급성 식중독에 걸려 병원으로 실려온다. 응급처치를 받고 깨어났지만 비몽사몽 한 남자. 입원실로 옮긴 후 다소 기운을 차린다. 하지만 걷잡을 수없이 쏟아지는 잠과 무기력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도 그의 몸과 마음을 오싹하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병실 바로 옆 환자였다. 그 환자도 본인처럼 중독 상태로 입원한 듯했다. 몰골은 오싹하고, 기이했으나 어딘지 고고해 보이기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외모가 아니었다. 병원 관계자들이 병실에 없으면, 이 환자는 염불을 외듯, 이상하게 웅얼거리는 소리로 어떤 말을 했다. 처음엔 알아듣기 힘들고 기분이 너무 나빠 듣기 싫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정신을 집중해 그의 말을 듣기 시작하다 곧이어 빠져든다. 묘한 흡입력과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그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바로 이렇게 시작하고, 소설의 중심축은, 바로 옆 환자의 웅얼거리듯 끊임없이 말하는 독과 관련된 본인의 연대기이다.




소위 액자식 소설이다. 위에 잠시 언급한 「구운몽」과 비슷한 구조라고 할 수 있는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독의_꽃』 주인공의 이름이 '조몽구'이다. 이름 뜻을 풀이하면 '아홉 개의 꿈', 그렇다면 '구운몽(아홉 구름의 꿈)'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구운몽」이 떠올랐고, 『독의_꽃』 소설은 마치 첩첩산중에 그 산 사이사이로 안개가 스며들어 한 치 앞도 안 보이다가, 어느 순간 안개가 그쳐 모든 게 또렷이 보이고 또 어느 순간 부지불식간에 안개로 뒤덮여 내가 어디에 있는지 가늠이 안 된다.



나 개인적으로 안개 낀 산을 좋아한다. 너무나 매혹적이고, 선선한 느낌이 나를 정화하는 듯 신비로운 느낌이 감돈다. 이런 느낌은 아마도 산에 있는 대부분의 생명들, 즉 식물들이 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안개가 짙어지면 일제히 어떤 화학 물질을 뱉으며 자라는 느낌이 든다. 모든 식물이 그러하기 때문에 각기 식물이 자란다기 보다, 산 자체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자라는 느낌이 든다. 정말 묘하고, 매혹적인 느낌.... 그런데 인간은, 이런 순간이 위험하다. 안개가 꼈을 때 앞을 분간할 수 없어 길을 잘못 들거나 발을 헛디뎌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수철의 『독의_꽃』은 이런 느낌을 준다. 문체가 간결하고 좋고, 소재로 다루는 독도 어딘가 매혹적이어서 계속 읽게 된다. 하지만 이 느낌은 결코 유쾌한 느낌은 아니다. 밝은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에서 어떤 보랏빛을 띠는 작은 맹독성 입자가 뿜어져 나오는 느낌도 든다. 소설의 인물도 결코 밝지 않다. 그 끝이 다 비극적이다. 독으로 인한 죽음. 독으로 인한 죽음도, 끔찍한 사고로 인해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반인이 보기 힘든 형상이다. (만약, 『독의_꽃』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몇 년 전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영화 <곡성>과 비슷하지 않을까. 본 지 오래되어서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 영화에도 독성 물질이 나왔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소설의 주요 화두는 독과 약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으며, 때로 독이 약이 되기도 하고 때때로는 약이 독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경계가 모호하며, 중요한 것은 '상황'과 ' 정도'의 차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한약이나 양약이나, 환자에게 처방되는 '약'은 일반인에게는 '독'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건 한약과 양약 모두 약을 섭취하는 양이 중요하고, 언제 먹는지도 중요하다.



독과 약의 경계가 모호할 진데, 우리 인간관계도 똑같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건 화자와 화자의 부모의 관계다. 화자의 부모, 즉 그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는 상당히 이상야릇했다. 어머니가 속아서 결혼했다고 할 수 있는데, 속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부터 어머니는 아버지를 싫어하게 되었고 그 싫어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이런 어머니의 마음은 화자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본래 어머니는 화자를 낳을 생각이 없었다. 싫어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수를 써서 기어코 임신을 시켰고, 어머니는 화자를 잉태한다.



잉태한 다음에도 싫은 마음은 계속 있었던 지라, 어머니의 몸에서 독소를 만들어 태아를 공격했다. 태아는 독의 공격을 받으며 역시 독으로 맞섰다. 엄마의 독은 아이에게 치명적이었고, 아이의 독 역시 엄마에게 치명적이었다. 그럼에도 둘은 기적적으로 살았고, 아이는 무사히 태어났다.



아이가 태어나자 엄마는 아이를 지극정성으로 키운다. 둘의 사이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아버지는 그 둘을 심하게 질투한다. 이 질투심은 훗날 엄마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아버지의 마음에 언제는 독이 있었고 이 독이 어머니를 잠식해 간 것이다. 이런 기묘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화자 역시 기묘한 운명을 타고 날 수밖에 없었다. 독에 관해 남들과 다른 체질적 반응을 가진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말 그대로 '독'이기도 했으며 '약'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독특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그의 침이나 정액은 남들과 달랐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화자에게 끌렸지만, 키스를 하거나 사랑 행위를 하고 나선 기겁하여 그를 떠났다. 보통의 여자들에게 화자의 침이나 정액은 독이었기 때문이다. 화자는 그렇다고 외롭거나 괴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사람들과 섞일 수 없다는 걸 본인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에게 운명 같은 여성들이 나타났고, 그 여성과는 사뭇 다른 관계를 맺었다. 서로에게 독처럼 작용을 하기도 하고, 해독제인 것처럼 약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해독제도 본래 독이다. 해독 후에 더 강한 독으로 서로가 괴로워하기도 한다.



이런 독과 해독제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와도 참 닮았단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의 주제처럼 세상만사 독 아닌 것이 없고, 약 아닌 것이 없고 모든 게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는 것 같다. 지금 인류야 많은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그냥 고개를 숙여 길바닥 아스팔트 틈으로 난 작은 이름 모를 한 송이도 매 순간 처절하게 세상과 싸우고 있고, 이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독을 품는다.



지구가 생기고 처음 대기라는 것이 생겼을 때 지구에 산소가 희박했다. 또 기껏 생긴 생명체들은 산소를 싫어했다. 산소는 어느 산소보다도 독하고 몸에 유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명체들은 호흡하고 소화하며 몸에 해로운 산소를 몸밖으로 배출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그들이 뿜어낸 유해 가스인 산소가 지구에 많아지면서, 생태계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언젠가부터 이 유독한 산소를 흡입하여 살기 시작한 생물이 나타난 것이다. 그 생명체의 머나먼 후손인 우리는, 그 조상이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유독한 산소를 흡입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이 유익한 산소라는 것도 너무 많으면 산소에 중독되어 죽고 만다. 모든 것은 적정량이 중요하다. 이 양이라는 것은 마치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유해와 유익의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것이다.



사실 독뿐만 아니라, 위에 말했듯 인간관계도 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이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파멸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적당한 선을 지키고 그 사이에 선선한 바람이 오가도록 유지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서로의 독에 영향받지 않고 공존공생할 수 있는 길인 것 같다.


오랜만에 참 괜찮은 한국 소설을 읽었다. 구성도 탄탄하고 문체도 좋다. 한국 소설 특유의 파괴적인 낭만주의적 성향이 느껴진다. 주제나 소재는 다르지만 탐미주의 소설인 김동인의 「광염 소나타」가 떠올랐고, 본인의 예술을 위해 딸을 죽음으로 내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지옥변」도 떠올랐다. 『독의_꽃』에서도 이 소설들과 똑같지는 않지만 본인이 원하는 것을 느끼거나 얻기 위해 여럿 죽음으로 내몰린다. 이런 이야기들은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리지만 그럼에도 어떤 호기심에 끝까지 읽게 된다. 아무튼 요즘 작가들도 이런 소설을 쓰는지 몰랐는데, 근래 읽은 현대 한국소설 중 가장 잘 읽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몇몇 구성에서 틈이 보인다는 것. 조몽구의 부모가 일제강점기 때 학교를 다닌 사람들인데, 나중에 보면 조몽구는 거의 21세기 대학생 같다. 학교에서 막 프레젠테이션 하고 삼촌네 집에서 컴퓨터를 하며 소일한다. 왜?! 좀 이해하기 힘든데, 뭐, 이게 다 독으로 인한 환각, 망상이었다면 몰라도, 좀 납득은 안 간다.



또 군데군데 상당히 에로틱한 부분이 있다. 흥미로운 건 딱 저자가 남성임이 드러난다는 것. 이 말인즉슨, 군데군데 남성들의 판타지가 스며있다. ㅋㅋ (간호사가 갑자기 페로몬에 홀린 듯 거기에 입을 갖다 댔다는 부분에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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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에 관한 짧은 철학
필리프 J. 뒤부아 외 지음, 맹슬기 옮김 / 다른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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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류학자와 철학자가 함께 쓴 글. 새들의 행태를 보고 인간의 어리석음이나 무지를 일침 하는 글도 있고, 새들의 짝짓기, 양육, 일생 등을 글도 있다. 나 개인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글보다는 그냥 새들에 관한 글이 좋았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도, 티비 다큐멘터리에서 본 새들의 행동 양태가 흥미진진하고 재밌어서 좀 더 새에 대해 알고 싶어서 본 거니까. (인간의 어리석음은 굳이 이 책을 읽지 않아도, 그냥 나 자신의 일기장만 보아도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잘 알 수 있다 ㅋㅋ)




새들은 자연계에서 드물게 1부 1처제를 많이 유지한다. 모든 새들이 바람 한 번 안 피우고, 배우자와 알콩달콩 새끼를 키우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러하다고 들었다. 그 이유는 새들도 인간처럼 살기 위해 어느 정도 지식과 기술을 습득해야 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란다. 새들은 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먹이 잡는 법도 배워야 한다. 이를 가르쳐주기 위해선 새끼가 날 수 있을 만큼 클 때까지 부모 새가 새끼 새를 키워야 한단 의미이며,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중요한 만큼 많이 낳아 기르는 전략보다는, 소수의 알만 낳아 부모가 애지중지 키우는 전략으로 진화했다. (현재 인간도 의료와 위생이 급격히 발달해 유아 사망률이 감소하자 오히려 더 출산율이 낮아지는데 이는 자녀 생존율보다 자녀의 교육에 더 힘을 더 쓰겠다는 걸 의미한다)


새는 인간과 많이 다른 존재지만 자녀 양육에 대한 태도나 배우자에 대한 태도가 비슷해서 오래전부터 인간에게 새들은 흥미의 대상이자 배움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이런 이야기들이 이 책에도 많이 실려 있다. 알고 있던 내용도 있고, 처음 듣는 재미난 이야기도 많았다.


어쨌든 제일 인상적인 부분은, 저자가 스쳐 지나가듯 말한 부분이지만 새들이 '단호'하다는 것이 좀 인상 깊었고 내가 새에 대해 철학을 한다면, 제일 가슴에 새기고 싶은 면이었다. 새끼와 배우자 새에게 최선을 다해야 할 땐 최선을 다하고 그만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단호하게 뒤돌아 보지 않고 자기 길로 가는 모습 정말 멋있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단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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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무민 골짜기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8
토베 얀손 지음, 최정근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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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다가오는 늦가을, 무민 가족이 없는 무민 골짜기.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의 마지막 작품, 『늦가을 무민 골짜기』 마지막 작품인데 이 작품 어디에도 무민이나 무민파파, 무민마마, 스노크메이든이 없다. 무민의 부재, 무민이 없는 만큼 겨울을 코앞에 둔 늦가을이 더욱 쓸쓸하고 허전한 것 같다. 하지만 무민 가족이 없는 무민 골짜기에 새로운 인물들이, 새로운 이야기를 엮는다. 무민 가족과 다른 방식으로, 다른 느낌으로.



개인적으로 무민 시리즈 중에서 『늦가을 무민 골짜기』가 제일 좋았다. 다른 소설들도 다 재밌고 좋지만, 다른 소설들은 주로 '모험'이 주요 소재다. 지구가 너무 뜨거워진다든지, 겨울잠 자는 무민이가 혼자 잠에서 깨 긴긴 겨울을 혼자 나야 한 이야기 등 어딘지 무섭고 세기말적인 이야기들이 많았다. 무민의 둥글둥글한 외모와 달리 무민이가 겪어야 한 일들은 뾰족뾰족 날 서 있고 위험한 이야기가 많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고 했었다. 동화라 할 수 있지만, 음, 뭐랄까 정말 토베 얀손만의 동화적 느낌. 마냥 아이들을 위한 상냥한 이야기가 아니고, 그렇다고 신나는 모험도 아니고, 어딘가 묘하고 모호한 매력적인 이야기가 무민이 시리즈가 아닐까 싶다.


그런 중에 연작소설의 마지막 『늦가을 무민 골짜기』는 어딘가 여유롭고, 마음에 긴장을 풀고 읽을 수 있다. 일촉즉발의 위기가 없고 단지 무민 가족의 부재만이 있다. 이 부재도 나에겐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무민 가족은 꼭 돌아올 거야.'라는 안전한 믿음을 가지고 읽을 수 있고, 무민네가 없는 동안 개성 만점의 여러 캐릭터들이 무민이 집에서 일상을 소소하게 보내는 이야기가 어딘지 안심이 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민의 시리즈 중 가장 긴장을 덜 하며 읽은 책이라고 할까. 가장 여유로운 마음으로 읽은 책이라고 할까.


그리고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만화 같은 걸 보면, 언제나 번외 편을 더 재밌게 봤었다.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인물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지내는지가 늘 궁금했다. 내가 제일 애정하는 소설인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도 작가가 중간중간 스쳐 지나가는 캐릭터의 이야기도 하나의 이야기로 들려주는 것이 좋았다. 아마 『늦가을 무민 골짜기』도 주인공 없는 번외 편 같은 이야기 느낌이라 제일 마음에 들게 읽지 않았나 싶다. (모순적이게도 주인공의 중심 이야기가 있어야 번외 편도 있는 것이라 중심 이야기부터 재밌게 읽어야 한다는 모순 아닌 모순이 있닼)


또 토베 얀손이 중간에 스쳐 지나가듯 쓴 문장들이지만, 사물이나 세상 그리고 감정을 세심하게 잘 표현한 부분들이 있다. 한 줄도 다 채우지 못하는 문장도 있는데, 짧지만 어떤 통찰력이 느껴져 좋다. 책 속에 점점이 뿌려진 보석 같은 문장들로, 이런 문장을 발견하면 언제가 기분이 좋다. 토베 얀손이 무심하게 짧게 스쳐 지나가듯 썼지만, 저자 본인도 심혈을 기울인 문장이 아닐까 싶다. 어쨌거나 참 좋다.


무민의 연작 소설은 여기서 끝났다. 하지만 우리에게 책이 좋은 것은, 읽었던 책을 펼치면 새로운 이야기처럼 예전과 같은 듯 다르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좋아하는 책을 재독, 삼독하는 걸 좋아한다. 읽는 동안 나는 달라졌기에, 그리고 읽을 때마다 나는 다른 맥락 속에 놓인 존재이기에 책을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이 든다. 무민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몇몇 시리즈는 재독을 했는데 다른 느낌이었다. 『늦가을 무민 골짜기』도 당연히 다음번엔 또 다른 감상을 하지 않을까.


이 책이 먼 곳으로 놀러 갔다가 무민 골짜기에 돌아오는 무민 가족이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장면에서 끝났듯 곧 다가올 새 만남을 기약하며 『늦가을 무민 골짜기』의 독후감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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