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 - 하찮은 체력 보통 여자의 괜찮은 운동 일기
이진송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소 운동에 관심은 많은데 실제로 하는 운동은 별로 없는 나, 그래서 다른 분들은 어떻게 운동하시나 궁금해서 읽은 책이다. 이 책은 한 여성의 운동 분투기(?) 혹은 운동 에세이로 분류할 수 있다. 나나, 저자나 똑같이 운동에 관심 많지만, 관심 있는 운동이 완전 다르고, 신체 컨디션이나 운동하는 이유가 달라서 막 완전히 공감하며 읽은 건 아니다. 그냥 운동하고 싶어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군데군데 재미나고, 운동을 하고자 하는 사람(여성)으로서 공감되는 바는 있었다.




내가 처음 접한 운동은 일본의 가라테다. 어릴 때 우리 동네에 순전히 태권도 도장이 없어서 가게 된 곳. 확실히 태권도장이랑 달랐다. 일단 애들이 없다. 초등학생은 나랑 오빠뿐이었다. 가면, 대부분 고등학생 오빠(그렇다. 중학생도 없었다)나 20~30대 아저씨들이었다(당시만 해도 고등학교 졸업하면 내 눈엔 다 아저씨였다). 아이들에게 특화된 곳이 아니라, 어른 남성들을 위한 곳. 아드레날린에다 남성호르몬으로 쩔어서 문만 열어도 그 특유의 '남자 냄새'가 지독하게 나던 곳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곳에서 어리기도 제일 어렸고, 여자 초등학생이었으므로 기초 체력만 열심히 키웠다. 도장 뺑뺑이 돌기, 윗몸일으키기, 정강이로 상대방 허벅지 때리기(반대로 허벅지 맞기) 등등. 내가 워낙 운동 신경이 없고, 대련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이렇다 할 기술도 기억나는 게 없지만 어쨌든 그때 이후로 체력장 하면 모든 게 5등급이어도 윗몸일으키기만큼은 자신 있었고, 내 허벅지는 초등학교 4학년 이후로 단 한 번도 물러본 적이 없다. 언제나 단단. 지금도 운동선수 출신마냥 딴딴하다.


이때 경험 때문인지, 저자가 처음 복싱 학원을 찾았을 때 느꼈던 것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저자와 내가 달랐던 건 나는 그때 너무 어려서 배척이나 나만 다른 공간에 존재한다는 느낌보다는 아예 무존재이거나, 그냥 귀여운 대상 혹은 배려해야 할 소수자이자 약자였다. 당시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었는데(그렇다, 나는 초등학생 때가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도장에서만큼은 나를 대우해주고 배려해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그곳의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한 명의 아이일 뿐 신체나 정신적으로나 여성이 되지 않았을 때여서 그랬을 테고, 또 밀폐되지 않은, 많은 사람이 함께 잇는 곳이어서 그랬다고 생각한다. 어떤 장소를 만나는 것, 이것은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일 수 있겠다 싶다.


그리고 이 책에는 저자가 헬스클럽이나 필라테스 등 어딘가 '등록'해서 배우는 운동이 많이 등장한다. 나는 어디 등록하는 걸 싫어해서(돈이 없어서) 내가 하는 운동은 대부분 집에서 혼자 사부작거리며 하거나, 등산을 가거나 어디로 하염없이 걷는 운동을 좋아한다. 저자가 시도한 운동은 대부분 실내 운동으로 '머리로는 알겠지만 내가 실제로 겪지는 못한' 일들이 대부분이어서 다른 사람의 경험담을 듣는 것처럼 흥미롭게 읽었다(내 경험과 공명한 내용은 없었다는 의미).


///


저자는 상당히 많은 운동을 시도하는데, 좀 놀라울 정도. 책 표지에는 '하찮은 체력 보통 여자의 괜찮은 운동 일기'라고 적혀 있지만 글을 읽어보면 그렇게 하찮은 체력 같지 않고, 또 보통도 아닌 것 같았다. 유연해서 요가를 잘한다거나, 학년 대표로까지 나갔던 배드민턴 이야기 때는 전혀 하찮거나 보통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이런저런 상황이나 환경, 신체 컨디션, 운동에 대한 기대감과 달라서 '운동을 중도 하차'한 일이 많았을 뿐.



'운동해야 하는데',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라는 말이 친숙하고, 자신이 한 말 같거나 꼭 본인이 하고 싶은 말 같다면, 이 책 추천한다. 공감하는 바가 많을 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조 사회 1 - 존재의 방식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6년 스파링으로 문학동네소설상
2017년에는 저스티스로 세계문학상을 받은
도선우 작가의 신작, 『모조사회』


소설 제목에서 감이 오다시피 모조(模造)사회를 배경으로 한 SF장르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국내 SF소설은 잘 안 읽는 편인데, 이 책은 재밌을 것 같아 읽었는데 내 예감이 맞았다. 재밌게 잘 읽음!!

SF소설 3대 거장(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인리히, 아서 클라크) 이후 SF 소설은 거의 비슷한 주제와 소재를 반복, 재생산하고 있으므로, 도선우 작가의 『모조사회』도 여러모로 기시감 많이 느껴지는 소설이다(SF를 많이 접하지 않은 분들께도). 하지만 저자가 구축한 모조 사회나 그 외 여타 사회 구성, 인물 캐릭터를 보면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쓴 게 느껴진다. 날로 쓰고 발로 쓴 SF소설을 많이 접해 본 나로서는, 애쓴 흔적이 느껴지는 이 소설은 소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며, SF소설이나 현실 반영 소설을 좋아한다면 추천한다(SF 장르만큼 현실 반영이 도드라지는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기본 줄거리

① 외인부대 용병으로 활동하다가 탈영 후 프랑스 파리에 체류 중이었던 '류건'. 마침 폭탄 테러가 발생했고 우연찮게 ‘정탄’이라는 한국인의 목숨을 구해준다. ② 정탄‘은 신경정신과 전문의로 똑똑하고, 돈도 많아서 생명의 은인인 ’류건‘을 위해 직장도 마련해주고 여러모로 물심양면 도와준다. ③ ’은수‘, 고등학교 수학 선생,

은수와 류건, 정탄 이 세 사람은 원래 서로 모르는 사람이었다(정탄과 류건도 모르는 사이였으나 몇 년 전 있었던 파리 폭탄 테러로 알게 됨) 어느 날 대지진이 있던 날, 셋은 우연히 마주치는데 모두 언젠가 본 적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다가 반복적으로 꾸던 꿈에서 본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다. 이런 깨달음도 잠시, 지진으로 세상이 무너졌고 이 세 사람은 현실과 완전히 딴판인 곳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들이 가게 된 곳은 300년 후의 세상. 과학기술은 고도로 발달했고, 정체 모를 바이러스 때문에 나무들은 놀라울 정도로 비대하게 커졌고, 동물들은 방사능에 노출되어 유전자가 조작된 것처럼 이 동물과 저 동물이 유전자적으로 섞인 것처럼 생경한 모습이다. 하지만 빛과 어우러진 자연은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랭‘이라는 여성이 '은수'에게 놀라운 사실들을 ’홀로그램‘을 재생하며 가르쳐 준다. 당신이 ’현실‘이라 믿었던 세상은 ’신경회로 컨트롤러‘가 조작한 300년 전의 모습을 한 가짜 세상(모듈 사회)이었으며, 현재는 바이러스의 대재난 이후 대부분 인류는 죽고 도시는 멸망했으며, 단 두 개의 사회만 존재하는 세계라고 설명한다. 은수는 랭의 설명을 듣고,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되고 더불어 지금부터 해결해야 할 일을 자각하게 된다.



│『모조사회』에 등장하는 사회

모조사회 : 철저한 계급 사회. 무사 가문의 후손이 의장을 맡고, 모조가 총리를 맡고 있는 사회. 표면적으로는 시의원, 평의원, 총리 이렇게 권력이 3등분 된 것 같으나, 의장과 총리로 권력이 양분된 사회다. 모조사회는, 총리 이름을 따서 사회 이름을 부르는데, 이곳은 모조가 총리라 그의 이름을 따 도시 이름이 ’모조사회‘이다.

모듈사회(모조사회 내 속함) : 모조사회의 제일 하위 세계로, 계급에서 추방된 범죄자들을 가두고 노동 착취하는 곳이다. 반란이 일어날까 봐 신경회로 컨트롤러로 수감자들의 감각과 지각을 조작해 비루한 현실을 근사하고 아늑한 장소처럼 잘못 지각하도록 보여준다. 모듈사회도 총 4구역으로 나뉘는데 류건, 정탄, 은수는 알파 구역에 있다가 대지진 때 ’공동체 사회‘에 의해 구조된다. 류건이 외인부대 용병, 정탄이 신경정신과 의사, 은수가 고등학교 수학 선생이었다는 것도 사실 모듈 사회에서 조작된 기억이었다. 실상은 비루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던 수감자일 뿐이었다.

공동체 사회 : 모조사회에 속하지 않고, 자연과 벗하고 존중하며, 평등과 다수결로 의사결정하는 민주적인 곳. ’정의‘를 공동체 사회의 제1의 가치로 친다. 자연 속에 숨어 살아서 모조사회는 '공동체 사회'의 존재를 모른다.

///

소설 『모조사회』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은수가 공동체 사회로 가서 랭으로부터 실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듣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은수는 원래 모조 사회의 1급 시민으로서, 할머니 아버지 모두 능력이 특출났던 과학자였고, 은수는 그들 모두를 뛰어넘을 만큼 머리가 좋은 아이였다. 그러다 아버지가 사건에 휘말려 돌아가시고, 은수는 아버지가 복원(?!)한 건과 함께 4급 사회에서 ’춘춘 할머니‘를 만나 모조에게 복수할 꿈꾼다.

그나저나 모조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진 사회일까. 일단 모조사회의 시간적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300년 후다. 30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300년 후 모조사회 같은 철저히 계급사회적인 세상이 등장했을까.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기, 그러니까 이제 막 한창 인공지능 연구가 활발해지고, 안드로이드가 세상에 나오기 시작할 즈음 ’무사 가문‘의 제1대 조상이 등장한다(무사 가문을 무소불위의 권력 가문으로 만든 것이 3대째, ’무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이 1대 조상을 무사 할아버지라고 한다) 무사 할아버지는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았던 사람으로, 말 그대로 길바닥 인생을 살았다. 돈의 중요함을 알았기 때문에 악착같이 돈을 벌었고 이 돈으로 개인에게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금업으로 점차 부를 쌓고 사업을 확장한다. 무사 할아버지 때부터 세계적인 대부호가 되었지만, 그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세계를 지배하려는 마음을 갖는다. 무사 아버지가 그의 아버지로부터 이 같은 정신을 잘 이어 받았고, 3대째였던 무사는 '공포'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아이로서 사람들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이용, 선동해서 ’돈‘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정신‘까지 지배하기에 이른다.

무사의 시기 때가 실제 ’류건‘이 외인부대 용병으로 활동하던 시기로, 무사의 독주를 막기 위한 세력들이 류건을 회유해 무사가 가진 슈퍼컴퓨터를 망가뜨려고 한다. 그러나 무사가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가졌다는 걸 몰랐던 사람들, 사고로 무사가 개발했던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졌고 이 때문에 인류 대부분은 죽었고 극소수의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지구 대부분이 오염되었지만, 유일하게 반도(아마도 우리 한반도 같음?!)만이 인간이 살 수 있는 지역으로 판명 나자, 무사 가문 및 세력가 등 생존자들은 반도에 있던 원주민을 내쫓고 그들만의 계급사회를 구축한다. 일단 자리를 잡게 되자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좁은 반도에 몇 억 명의 사람이 살아야 했으므로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건물을 짓고, 최상층에서부터 최상급, 1등급, 2등급... 사람들이 거주하고 마지막 지하엔 범죄자들이 사는 도시를 건설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대재난 이후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은 급격히 좁아졌지만 그 나름으로 균형을 잡게 되자 다시 과학기술을 빼돌렸던 사회(공동체 사회)는 안정적 환경 속에서 과학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달시켰고, 이 공동체 사회에 살던 ’루‘라는 소녀가 공동체의 뜻과 자신의 뜻이 맞지 않아 무사 가문의 후손인 의장과 거래를 한다. 루는 자신의 이름을 ’모조‘로 바꾸고 그곳에서 총리로 등극하며, ’퀸‘이라는 어마어마한 성능을 가진 인공지능을 만들어 모조사회를 거의 제 손바닥인 양 다룬다.

은수는 이 시기에 태어나 인공지능까지 위협하는 천재 소녀로 자란다. 어떤 일에 휘말려 아버지인 은 박사는 죽고, 아버지가 살려낸 액체질소탱크 인간 류건과 함께 4등급 시민이 사는 곳에서 '춘춘 할머니' 밑에서 모조에게 복수하기를 은수는 꿈꾼다.


///

이런 배경 속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현재 발달하고 있는 과학 기술, 근 미래 기술들이 총집합으로 나오며, 우리에게 익숙한 사회 문제인 계급주의, 양극화 갈등, 세뇌와 선동, 갈등, 배신, 환경문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강한 인공지능', 과학 기술 남용(인간이 만든 바이러스, 대지진 등), 테라포밍(他 지구형 행성으로의 이주), 독재와 민주주의 등 다양한 문제를 다룬다. 저자가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를 이 책으로 다 담아내려 한 듯 엄청난 포부가 느껴진다. 특히 디테일한 묘사가 인상적이었던 '모조사회'가 기억에 남는다. 이런 피라미드 형 계급 구성은 고대 문명 태동기 때부터 늘 있어 온 문제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있을 사회 문제다.

어쨌거나 기시감은 느껴지지만 원래 SF 장르 자체가 첨단 소재를 다루면서도 어느 장르보다 주제나 소재가 진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 느껴지는 기시감이나 익숙한 배경을 가지고 이 작품의 수준을 평가할 순 없을 것 같다. (내가 읽은 대부분의 SF소설, 내가 본 대부분의 SF영화가 다 비슷비슷하다) 어쨌거나 저자가 많은 노력으로 정성을 쓴 소설이며, 배경이나 주제가 탄탄하다. SF 장르를 좋아하시는 분께 추천한다.


덧붙임> 춘춘 할머니의 화살은 개인적으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욘두 '화살'이 떠올랐다. 욘두의 화살은 살인병기가 예술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물론 이는 영화에서만 그래야 한다). 이 소설 읽고 급 가오갤이 보고 싶어졌다. ㅠㅠ 그리고 <토르>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할매가 돌아왔다
김범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2012년 作 『할매가 돌아왔다』의 개정판

2015년 SBS에서 방영한 <떴다! 패밀리>의 원작소설


줄거리는 대충 이러하다. 67년 전에 돌아가신 줄 알았던 할머니가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왔다. 머리에 노란물을 들이고, 화려한 옷차림에 벙거지 모자를 쓰고! 35년째 백수인 35살, 우리의 화자 ‘최동석’은 깜짝 놀라지만 곧 감정을 다스리고 아버지에게 이 소식을 알린다. 아버지는 놀란 상태로 잠적해 버리고, 할아버지와 고모는 노발대발이다. 할아버지, 백파 최종태 어르신으로 말할 것 같으며 충남 부여에서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나 자랐고, 공부도 잘해서 경성에 유학까지 갔다. 늘 고고한 선비 정신을 유지하신 분이다. 할아버지는 학생 시절, 고향에 들렀다가 참으로 아름다운 ‘정끝순’을 보고 한눈에 반하게 된다. 정끝순도 최종태에게 반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들 사이를 가르는 신분 차이가 있었다. 끝순이는 이미 정해져 있던 혼처가 있었고, 그 결혼이 이루어지면 최씨네 집에서 종살이를 해야 할 입장이었던 것이다. 양반 가문이었던 최씨 집에서 극도로 반대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최종태와 정끝순을 젊었다. 결혼이라는 맹목적인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랑에 눈먼 남자들이 간혹 저지르곤 했던 극단의 방법을 행했던 것. 더불어 적절한 시기에 끝순이가 쌍둥이를 임신한다. 


천신만고 끝에 둘은 결혼을 하게 되지만, 좋았던 시절도 잠시였다. 태평양 전쟁은 막바지로 접어들었고 일본은 조선 학생들을 군에 징집한다. 최종태는 일본군으로 전쟁터에서 싸우느니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한다. 최종태는 떠났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의 아내였던 정끝순은 놀랍게도 최종태와 독립 운동한 사람들을 밀고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일본인 순사와 눈이 맞아 일본 패망 때 일본으로 도항했다. 아내의 밀고 때문에 일본군에 잡혀 고초를 치렀던 최종태 할아버지. 결국 풀려나기는 했지만, 아내, 정끝순에 대한 분노는 67년이 지난 후에도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일본 순사와 눈이 맞아 자기가 낳은 생떼 같은 어린 자식을 버리고 도망친 나쁜 할머니가, 나이가 들어 살길이 막막해지니 염치없이 얹혀살려고 온 것 같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런 생각과 달리 다른 전개가 이어진다. 한눈에 반하여 간도 쓸개도 다 내어 줄 것 같았던 남자들이, 일단 결혼하고 나서는 돌변했다. 자신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아내에 대한 폭력으로 풀어낸 것이다. 정끝순 여사는 자신의 혹독한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변화를 꾀한다. 마음이 변하여 사랑 없이 학대만 일삼는 조선 남편과 살 것인가, 꽃을 꺾어주며 진심어린 사랑을 표현하는 일본인 순사와 함께할 것인가. 정끝순은 후자를 택한다. 그리고 일본에 가서도 조선에서 마찬가지 일이 반복된다. 최종태처럼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기 시작하는 일본인 남편. 정끝순은 운 좋게 기회가 닿아 미국으로 간다. 미국에서 또 한 남자를 만난다. 그 남자도 답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시민권’을 위해 딱 그 기간만큼 참고 산다. 이 기간이 지나자 정끝순 여사는 또 한 번 새로운 모험을 감행하고, 이 때 만난 남자는 정끝순의 운명 같은 남자로 가정적이고, 온화하며, 늘 부지런하여 노년 때까지 자리 잡고 편안한 일생을 산다. 그러다 암스트롱 씨가 죽자, 정끝순 여사는 잠시 요양원에 있다가 예전에 버렸던 두 자식이 생각나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참지 않고, 변화를 꾀하고 능동적으로 환경을 바꿔보려는 정끝순 여사의 자세가 대단하다. 생명력이라고 해야할까. 자기 인생에 대한 애착이라고 해야할까. 물론 자식들은 엄마가 본인들을 버리고 떠난 만큼 상처를 받았겠지만, 반대로 생각해서 무능하고 언제나 화가 난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결코 자식들을 위한 엄마의 자세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쩌면 떠나는 것이 자신과 자식에 대한 최선이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해와 비난, 미움을 받더라도 말이다.




모든 게 내 마음 같지 않은 게 인생사인 것 같다. 정끝순 여사가 남편과 독립 운동가들을 밀고했다는 이야기는, 그 부부를 질투했던 박 씨 할아버지가 만들어낸 거짓이었고, 독립운동을 했다며 평생 고고한 자존심으로 살았던 할아버지는 알고 봤더니 독립 운동은커녕 만주 근처에도 못가고 고향으로 돌아왔던 것이며 정끝순 여사에게 한눈에 반해 모든 걸 다 해주겠다던 남자들은 자신의 말과 다르게 본인의 자존감이 흔들릴 때마다 만만한 정끝순에게 분풀이를 했다. 자식들은 주위 어르신이 하는 얘기만 듣고, 엄마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엄마를 미워하고 증오한다.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일까.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가 아닐까 싶다. 선비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 받고, 입에서 욕설 한 마디 내뱉지 않던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보더니 대뜸 욕설과 폭력을 행사한다. 농민과 노동자의 친구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아버지는 집안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자취를 감추고 도망 다닌다. (그만큼 책임감이 없다는 소리) 자수 성가했다고 입만 열면 자기 자신과 자식에 대한 자랑만 하는 사람이, 더 큰돈(공돈)을 가지고자 욕심을 부린다. 화자의 친구인 상우는 어떠한가. 어렸을 때부터 항상 공부를 잘했고 모범적이었던 상우는, 모두로부터 칭찬 받고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실은 몰래몰래 길거리에서 여성들을 성추행하고, 노래방이나 다방에서 추잡스럽게 놀며, 그렇게 놀다가 집에 들어간 날이면 꼭 아내를 때린 가정 폭력범이었다.


사람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어떤 가문 출신인지, 학벌이 어떠하고, 어떤 직장에 다니고,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지가 그 사람의 전부를 보여주는 건 아닌 것. 그 속에 감추어진 뭔가가 있다는 건 본인 혹은 아주 가까운 사람만 은밀히 알 뿐이다. 반대로 모든 사람에게 비난받고 힐난받는 사람도, 알고보면 누명을 썼을 수 있고 남들에게 말하기 힘든 어떤 내막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섣불리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


어쨌거나 67년 만에 나타나 누명도 벗고, 자식들과도 오해를 푼 정끝순 여사의 마지막 행보가 참 멋지다. 억울함을 푸는 것도 용기가 있어야 가능하다. 정끝순 여사의 여생은 이제 꽃길만 걸었으면 싶다. 물론 소설 속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땅에 정끝순 여사 같은 억울한 인생을 살았을 수많은 할머니들을 많을지 생각하면 허구의 인물일지라도 정끝순 여사를 응원하고 싶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후의 만찬 - 제9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서철원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이 소설 제목 때문에 서양 배경 소설인가 싶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소설은 서학이 유입되고, 공서파가 신서파를 대대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한 18세기 말 조선시대가 배경이다. 그래서 이 소설이 역사 소설이냐, 하면 또 그렇지 않다. 뒤이어 나오는 이야기들과 설정들이 놀랄 노자다. 사람 뒤에 비치는 후광은 그렇다 치고, 금가루 떨어지는 사탄의 검은 날개 장면도 나오는데 이런 설정을 보면 이 소설이 환상 소설인가 싶어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이 외에도 기상천외한 설정들이 다수 있다. 표지에 적힌 대로 진짜 한국 문단에 폭풍을 몰고 올 것 같다. 독자 모두, 본인도 모르게 혀를 내두르게 될 듯.

우선 소설은 1791년 신해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과 권상연이 고초를 받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들의 죄는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고, 가계를 허물었'으므로 강상의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진 고문을 받고, 결국 완산벌(전주) 경기전 앞뜰에서 순교한다. 그들을 측은히 여긴 이들은, 그들의 죽음으로 서학이 퍼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들의 의도와 달리 서학을 믿는 사람들은 날로 많아졌고 그에 따라 박해도 심해졌다. 곤장을 맞고 장독으로 죽는 사람, 고문을 받다가 머리가 깨지고, 허리가 부러져 죽는 사람 등 박해로 죽어가는 이들이 자꾸 늘었다.



이때 조선의 왕이었던 '정조'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정조는 본인이 아끼던 사람들 중 신서파, 즉 서학에 우호적인 사람들을 많이 아꼈으므로 이런 박해가 안타까웠고 고뇌에 휩싸인다. 그러던 중 윤지충의 집에서 그림 한 점이 발견되었고, 그 그림을 보고 정조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그림은 13명이 식사를 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에 호기심을 느끼게 된 정조는, 결국 김홍도를 이탈리아로 급파한다. 김홍도는 나중에 이 그림에 대해 알아오는데, 이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 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그리고 김홍도는 이것보다 더 놀라운 이야기를 하는데 이 그림의 오른쪽 두 번째에 그려진 사람이 바로 조선 초 발명가 '장영실'이라는 폭탄(?!) 발언을 한다.

기록에 따르면 장영실은 전라도 '밤섬'에 들렀다가 홀연히 사라지는데, 알고 봤더니 신분이 아닌 능력을 알아봐 주는 평등한 세상, 이탈리아로 건너가서 본인의 능력을 마음껏 펼쳤다는 이야기다. '최후의 만찬' 오른쪽 두 번째 인물의 눈코 등 얼굴 비례가 딱 장영실이라며! 밀라노에 간 장영실♩



모델로 활동한 장영실

이외에도 천주실의의 숨은 뜻을 가야금으로 표현하는 도향, 복수의 마음을 품은 초라니 패 등등 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하는데 정말 '소설'같은 소설이다. 상상, 그 이상의 상상이 이 소설에 깃들어 있다! 소설은 이것 외에도 페르시아 전쟁, 파우스트 폴, 파우스트 폴에 맞선 프리메이슨 이야기까지 다양하게 등장한다.


///

소설은 창작의 영역이고, 악의적으로 역사를 왜곡하지 않는 한 창의성 만발한 역사 이야기는 좋아한다. 그래도 어느 정도 팩트 체크는 필수지 않을까 싶다. 정조 시대 때만 해도 이탈리아는 아직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에 김홍도가 정조에게 장영실이 이탈리아에 갔다고 하는 건 문제가 있고, 또 여기서 등장하는 '르네상스'라는 말도 당시 유럽에서도 단편적으로 쓰였을 뿐이다. 본격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19세기 프랑스 역사가 미슐레 이후다. 당연히 정조와 김홍도가 죽은 후. 그래서 김홍도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이탈리아, 밀라노, 레오나르도 다빈치, 르네상스, 페르시아, 스파르타, 프리메이슨'을 이야기하는 데에 거부감이 든다.

故 최명희 작가가 『혼불』을 어떻게 쓰셨는지 생각하면 이런 오류들이 안타깝게 느껴지고, 띠지 뒤에 적힌 '역사소설'이라는 말도 부적절하다고 본다. <역사 환상소설> 정도가 알맞은 듯. 어쨌든 많이 놀라며 읽은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악동뮤지션에서 오빠를 담당하고 있는(...응?!) 이찬혁의 소설. 책이 얇고, 각 장(章)마다 길이도 짧아 금방 읽을 수 있다. 처음에는 책 제목과 맨 앞의 이야기가 낯설고 어떻게 이 소설에 적응해야 할지 고개가 갸우뚱해졌는데 뒤로 갈수록 이찬혁 작가(!!)가 이 소설을 빌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드러난다. 저자의 고민이 담긴 이야기여서 단순히 겉멋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생각보다 많은 가구, 연기자들이 소설을 쓰곤 했는데 결과는 글쎄...). 저자가 어린 나이에 싱어송라이터로 유명해지고 엄청난 팬덤이 있는 만큼 자신이 누구인지, 가수인가 예술가인가 등 본인의 정체성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아마도 이런 고민들 때문에 해병대에 입대하지 않았을까. 잘 모르지만, 만고 나 혼자 추측을 해본다)


이 책은 소설 속 화자(이름│선이)가 '자신은 가수인지 예술가인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화자는 우연찮게 좋은 밴드를 만나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게 되고, 좋은 음악을 감별할 수 있는 사람의 귀에 띄어(눈에 띄다가 아니고, 귀에 띈 것이다) 유명 연예 기획사에서 러브콜이 오게 되었다. 거의 성공이 눈에 보일 듯한 순간에 화자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노래만 잘해도 가수는 될 수 있어. 

하지만 무언가를 표현하는 사람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해." (60쪽)


"예술가, 예술가. 

그 단어도 이제 진부한 것 같아. 

나는 예술가보다 더 매력적이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 

"그게 뭐죠?"

내가 예술가보다 목표로 할 수 있는 게 있단 말이야?

나는 그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기 위해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건 바로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사람이야."

(...)

"그들은 예술가 사이에서도 진정한 예술가지.

자신이 표현하는 것이 곧 자신이 되는 사람이거든.

예술가인 척하는 사람들은 절대 그런 삶을 살지 못해."

(...)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는 꿈을 꾸곤하지! 

자신이 곧 예술이 되는 사람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거든.

그의 말을 믿고 뒤에 줄을 서는 자가 수두룩할 거야.

그만큼 책임이 따르기도 하고..." (63쪽)


음악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그 순간에 나는 다짐했다. 수많은 거짓과 모방이 판치는 그곳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면, 그 사이에서 '진짜'가 될 수 있다면, 그때 진정한 예술가로서 음악을 할 것이라고. (65쪽)




화자는 성공을 눈앞에 둔 채 그곳을 떠난다. 1년 동안 화자는 여행을 한다. 여행을 하는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다. 예술가들도 만났는데, 그중에는 본인은 예술가로 주장하지만 전혀 예술가이지 않은 사람도 많았고,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진짜 예술가인 사람도 만났다. 그중에서 한 사람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거리의 행위 예술가였다. 그는 예술가이긴 했지만, 예술가와 사기꾼 그 어디쯤에 있는 사람이었다. 이 부분을 읽고 많은 예술가들이, 혹은 많은 사기꾼들이 예술과 사기 그 사이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화자는 계속 여행을 한다. 그리고 지칠 대로 지쳐, 마지막으로 어떤 '섬'에 가고자 한다. 섬에 가는 배를 탄 날, 거센 파도가 배에 부딪히는 와중에 화자는 갑판에서 아주 칠흑 같은 머리카락에, 그 머리카락만큼이나 눈동자가 까만 한 여성을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해야'다. 화자는 사나운 파도에 휩쓸릴 뻔한 '해야'를 구해주고, 등을 크게 다친다. 그것도 잠시 화자가 바다에 빠져 고래에 삼켜지고 의식이 사라진다.


깨어나 보니 선실 안 본인의 침대에 누워 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고래에 잡아먹히지 않았지만 등은 욱신욱신 너무 아파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실제인지 분간할 수 없다. 그러다, 갑판에서 만난 '해야'를 다시 만나게 된다. 둘은 섬에 함께 들어가, 함께 지내며 많은 시간을, 많은 추억을 켜켜이 쌓았고(그 추억은 그들만의 서랍에 넣어지고, 보관되고, 기억될 것이다), 화자는 '해야'로부터 자신이 줄곧 붙들고 놓치지 않았던 생각, 의문들을 하나씩 풀어나간다.


화자, 그러니까 '선이'에게는 '해야'가 뮤즈였던 것이다. 칠흑 같은 밤, 거센 파도가 갑판 위에 선 사람을 집어삼킬 만큼 사나웠던 바다 위에서 만난 '사이렌' 같은 존재가 '해야'였다. 다만, '해야'는 뱃사람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았고 도리어 생명력,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고 떠난다.


'해야'의 존재는 실제였는지, 환상이었는지 책에는 뚜렷하지 않다. 다만 '환상'이었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그럼에도 '선이'는 '해야'를 진짜 만났었고(그것이 실제였든 환상이었든, 만난 것은 만난 것이다), 이전의 '선이'가 아니게 된다.


모든 종류의 음악이란 참 신비한 게 재생되는 순간부터 그 공간의 흐름을 바꾸어버린다. (18쪽)


이제 선이는 자신이 원하는 음악, 하고 싶은 음악을 하게 되고 새로운 뮤즈, '양이'를 만나 '해야'와의 이별의 고통에서 차츰 벗어나게 된다. 어쩌면은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쓰면서 저자 또한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가'는 무엇인지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 같다.


"아저씨에게 예술은 뭐죠?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 같아서요."

신사는 입을 다물고 조금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비둘기도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친구야, 나도 네 나이로 돌아가고 싶구나. 그럼 뭐든 시작했을 텐데. 너도 현실을 경험하면 알게 될 거야. 꿈은 서커스에서 쓰는 붉은색 커튼과 같다는걸. 화려하고 잘 찢어지지도 않지. 하지만 현실이라는 창문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것을 옆으로 걷어야 하는 날이 오고 만단다. 밤이 되면 다시 그것으로 창문을 가리고, 지쳐 울든 꿈을 꾸든 맘대로 해도 돼. 하지만 아침이 오면 다시 걷어내는 거야. 우린 꿈보다 하루를 살아야 하니까. 지금 나에겐 비둘기, 자전거 그리고 모자밖에 없어. 그리고 네가 준 돈으로 햄버거를 먹을 예정이지. 고맙구나."

신사는 외발자전거에 몸을 싣고 공원 외곽으로 사라졌다. 그를 지나치는 사람마다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진 재능과 웃음이 아까웠다. (105-106쪽)


"난 방울토마토를 먹을 거야."

해야는 잠자코 있다가 포크로 토마토를 찍어 입에 넣었다.

"난 방울토마토를 씹을 거야."

그리고 해야는 거칠게 그것을 깨물었다. 톡 터지는 소리와 함께 토마토 즙이 그녀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

"너 이거 다 먹을 수 있어?"

해야가 물었다. 배가 조금 부르지만 가능하긴 한 양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다 못 먹어."

"그럼 왜 이렇게 많이 퍼 온 거야?"

"내가 다 못 먹는다는 걸 보여주려고." 

나는 도대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난 방울토마토를 좋아하지만 이렇게 많이 먹을 순 없어. 하지만 네가 말한 어떤 가짜들은 이걸 다 먹어. 그리고 카메라를 보면서 이런 말을 하겠지. '지구 반대편에는 이조차 먹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으니까요.!'"

그녀는 아까 내가 가짜들을 흉내 냈던 목소리를 그대로 따라 했다.

"그들은 네가 말하는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남들에게 이용당하거나 자신을 속이는 대가를 치르면서 정상으로 올라가. 정당한 대가인지는 알아서 생각하는 거지만, 어찌 됐든 진짜 가짜 할 것 없어. 분야가 다르다고 생각하면 편해." 

(...)

"아, 그건 그거고 난 그런 사람들을 안 좋아해." 

(...)

"선아, 거창한 걸 생각하지 마. 뱉은 말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으면 그냥 할 수 있는 만큼의 말을 하면 돼. 난 어렸을 때부터 술을 먹지 않을 거라고 말했어.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마시지 않았어. 왜냐하면 난 내가 안 마실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리고 지금 난 토마토를 먹을 거야."(90-93쪽)


자기가 한 말을 지키는 사람, 이것이 곧 예술가라고 이찬혁 작가이자 뮤지션은 생각한 것이다.


화가든, 건축가든, 음악가든 인간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은 정말 行한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했고, 무언가를 만들어 냈으며, 세상 흐름에 어떤 변화를 기여했다. 자신이 한 말, 자신이 한 생각, 자기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 내겠다고 결심하고, 정말 그 결심을 실제로 정말 이뤄낸 사람들이 바로 예술가, 크리에이터!


이찬혁 작가도 이 소설과 이 소설을 모티브로 한 '항해' 앨범을 마무리 지으면서 한 발 더 도약하지 않았을까.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 불변한 것이 없으니, 이 소설과 앨범으로 어떤 답을 내렸더라도 또 다른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으려 애쓰지 않을까 싶다. 예술가로서의 앞으로의 이찬혁 작가도 응원한다.


덧붙임) 그런데, 책 제목은 참 마음에 안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