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作 『할매가 돌아왔다』의 개정판
2015년 SBS에서 방영한 <떴다! 패밀리>의 원작소설
줄거리는 대충 이러하다. 67년 전에 돌아가신 줄 알았던 할머니가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왔다. 머리에 노란물을 들이고, 화려한 옷차림에 벙거지 모자를 쓰고! 35년째 백수인 35살, 우리의 화자 ‘최동석’은 깜짝 놀라지만 곧 감정을 다스리고 아버지에게 이 소식을 알린다. 아버지는 놀란 상태로 잠적해 버리고, 할아버지와 고모는 노발대발이다. 할아버지, 백파 최종태 어르신으로 말할 것 같으며 충남 부여에서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나 자랐고, 공부도 잘해서 경성에 유학까지 갔다. 늘 고고한 선비 정신을 유지하신 분이다. 할아버지는 학생 시절, 고향에 들렀다가 참으로 아름다운 ‘정끝순’을 보고 한눈에 반하게 된다. 정끝순도 최종태에게 반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들 사이를 가르는 신분 차이가 있었다. 끝순이는 이미 정해져 있던 혼처가 있었고, 그 결혼이 이루어지면 최씨네 집에서 종살이를 해야 할 입장이었던 것이다. 양반 가문이었던 최씨 집에서 극도로 반대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최종태와 정끝순을 젊었다. 결혼이라는 맹목적인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랑에 눈먼 남자들이 간혹 저지르곤 했던 극단의 방법을 행했던 것. 더불어 적절한 시기에 끝순이가 쌍둥이를 임신한다.
천신만고 끝에 둘은 결혼을 하게 되지만, 좋았던 시절도 잠시였다. 태평양 전쟁은 막바지로 접어들었고 일본은 조선 학생들을 군에 징집한다. 최종태는 일본군으로 전쟁터에서 싸우느니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한다. 최종태는 떠났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의 아내였던 정끝순은 놀랍게도 최종태와 독립 운동한 사람들을 밀고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일본인 순사와 눈이 맞아 일본 패망 때 일본으로 도항했다. 아내의 밀고 때문에 일본군에 잡혀 고초를 치렀던 최종태 할아버지. 결국 풀려나기는 했지만, 아내, 정끝순에 대한 분노는 67년이 지난 후에도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일본 순사와 눈이 맞아 자기가 낳은 생떼 같은 어린 자식을 버리고 도망친 나쁜 할머니가, 나이가 들어 살길이 막막해지니 염치없이 얹혀살려고 온 것 같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런 생각과 달리 다른 전개가 이어진다. 한눈에 반하여 간도 쓸개도 다 내어 줄 것 같았던 남자들이, 일단 결혼하고 나서는 돌변했다. 자신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아내에 대한 폭력으로 풀어낸 것이다. 정끝순 여사는 자신의 혹독한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변화를 꾀한다. 마음이 변하여 사랑 없이 학대만 일삼는 조선 남편과 살 것인가, 꽃을 꺾어주며 진심어린 사랑을 표현하는 일본인 순사와 함께할 것인가. 정끝순은 후자를 택한다. 그리고 일본에 가서도 조선에서 마찬가지 일이 반복된다. 최종태처럼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기 시작하는 일본인 남편. 정끝순은 운 좋게 기회가 닿아 미국으로 간다. 미국에서 또 한 남자를 만난다. 그 남자도 답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시민권’을 위해 딱 그 기간만큼 참고 산다. 이 기간이 지나자 정끝순 여사는 또 한 번 새로운 모험을 감행하고, 이 때 만난 남자는 정끝순의 운명 같은 남자로 가정적이고, 온화하며, 늘 부지런하여 노년 때까지 자리 잡고 편안한 일생을 산다. 그러다 암스트롱 씨가 죽자, 정끝순 여사는 잠시 요양원에 있다가 예전에 버렸던 두 자식이 생각나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참지 않고, 변화를 꾀하고 능동적으로 환경을 바꿔보려는 정끝순 여사의 자세가 대단하다. 생명력이라고 해야할까. 자기 인생에 대한 애착이라고 해야할까. 물론 자식들은 엄마가 본인들을 버리고 떠난 만큼 상처를 받았겠지만, 반대로 생각해서 무능하고 언제나 화가 난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결코 자식들을 위한 엄마의 자세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쩌면 떠나는 것이 자신과 자식에 대한 최선이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해와 비난, 미움을 받더라도 말이다.

모든 게 내 마음 같지 않은 게 인생사인 것 같다. 정끝순 여사가 남편과 독립 운동가들을 밀고했다는 이야기는, 그 부부를 질투했던 박 씨 할아버지가 만들어낸 거짓이었고, 독립운동을 했다며 평생 고고한 자존심으로 살았던 할아버지는 알고 봤더니 독립 운동은커녕 만주 근처에도 못가고 고향으로 돌아왔던 것이며 정끝순 여사에게 한눈에 반해 모든 걸 다 해주겠다던 남자들은 자신의 말과 다르게 본인의 자존감이 흔들릴 때마다 만만한 정끝순에게 분풀이를 했다. 자식들은 주위 어르신이 하는 얘기만 듣고, 엄마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엄마를 미워하고 증오한다.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일까.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가 아닐까 싶다. 선비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 받고, 입에서 욕설 한 마디 내뱉지 않던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보더니 대뜸 욕설과 폭력을 행사한다. 농민과 노동자의 친구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아버지는 집안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자취를 감추고 도망 다닌다. (그만큼 책임감이 없다는 소리) 자수 성가했다고 입만 열면 자기 자신과 자식에 대한 자랑만 하는 사람이, 더 큰돈(공돈)을 가지고자 욕심을 부린다. 화자의 친구인 상우는 어떠한가. 어렸을 때부터 항상 공부를 잘했고 모범적이었던 상우는, 모두로부터 칭찬 받고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실은 몰래몰래 길거리에서 여성들을 성추행하고, 노래방이나 다방에서 추잡스럽게 놀며, 그렇게 놀다가 집에 들어간 날이면 꼭 아내를 때린 가정 폭력범이었다.
사람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어떤 가문 출신인지, 학벌이 어떠하고, 어떤 직장에 다니고,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지가 그 사람의 전부를 보여주는 건 아닌 것. 그 속에 감추어진 뭔가가 있다는 건 본인 혹은 아주 가까운 사람만 은밀히 알 뿐이다. 반대로 모든 사람에게 비난받고 힐난받는 사람도, 알고보면 누명을 썼을 수 있고 남들에게 말하기 힘든 어떤 내막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섣불리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
어쨌거나 67년 만에 나타나 누명도 벗고, 자식들과도 오해를 푼 정끝순 여사의 마지막 행보가 참 멋지다. 억울함을 푸는 것도 용기가 있어야 가능하다. 정끝순 여사의 여생은 이제 꽃길만 걸었으면 싶다. 물론 소설 속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땅에 정끝순 여사 같은 억울한 인생을 살았을 수많은 할머니들을 많을지 생각하면 허구의 인물일지라도 정끝순 여사를 응원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