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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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동뮤지션에서 오빠를 담당하고 있는(...응?!) 이찬혁의 소설. 책이 얇고, 각 장(章)마다 길이도 짧아 금방 읽을 수 있다. 처음에는 책 제목과 맨 앞의 이야기가 낯설고 어떻게 이 소설에 적응해야 할지 고개가 갸우뚱해졌는데 뒤로 갈수록 이찬혁 작가(!!)가 이 소설을 빌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드러난다. 저자의 고민이 담긴 이야기여서 단순히 겉멋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생각보다 많은 가구, 연기자들이 소설을 쓰곤 했는데 결과는 글쎄...). 저자가 어린 나이에 싱어송라이터로 유명해지고 엄청난 팬덤이 있는 만큼 자신이 누구인지, 가수인가 예술가인가 등 본인의 정체성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아마도 이런 고민들 때문에 해병대에 입대하지 않았을까. 잘 모르지만, 만고 나 혼자 추측을 해본다)


이 책은 소설 속 화자(이름│선이)가 '자신은 가수인지 예술가인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화자는 우연찮게 좋은 밴드를 만나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게 되고, 좋은 음악을 감별할 수 있는 사람의 귀에 띄어(눈에 띄다가 아니고, 귀에 띈 것이다) 유명 연예 기획사에서 러브콜이 오게 되었다. 거의 성공이 눈에 보일 듯한 순간에 화자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노래만 잘해도 가수는 될 수 있어. 

하지만 무언가를 표현하는 사람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해." (60쪽)


"예술가, 예술가. 

그 단어도 이제 진부한 것 같아. 

나는 예술가보다 더 매력적이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 

"그게 뭐죠?"

내가 예술가보다 목표로 할 수 있는 게 있단 말이야?

나는 그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기 위해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건 바로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사람이야."

(...)

"그들은 예술가 사이에서도 진정한 예술가지.

자신이 표현하는 것이 곧 자신이 되는 사람이거든.

예술가인 척하는 사람들은 절대 그런 삶을 살지 못해."

(...)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는 꿈을 꾸곤하지! 

자신이 곧 예술이 되는 사람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거든.

그의 말을 믿고 뒤에 줄을 서는 자가 수두룩할 거야.

그만큼 책임이 따르기도 하고..." (63쪽)


음악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그 순간에 나는 다짐했다. 수많은 거짓과 모방이 판치는 그곳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면, 그 사이에서 '진짜'가 될 수 있다면, 그때 진정한 예술가로서 음악을 할 것이라고. (65쪽)




화자는 성공을 눈앞에 둔 채 그곳을 떠난다. 1년 동안 화자는 여행을 한다. 여행을 하는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다. 예술가들도 만났는데, 그중에는 본인은 예술가로 주장하지만 전혀 예술가이지 않은 사람도 많았고,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진짜 예술가인 사람도 만났다. 그중에서 한 사람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거리의 행위 예술가였다. 그는 예술가이긴 했지만, 예술가와 사기꾼 그 어디쯤에 있는 사람이었다. 이 부분을 읽고 많은 예술가들이, 혹은 많은 사기꾼들이 예술과 사기 그 사이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화자는 계속 여행을 한다. 그리고 지칠 대로 지쳐, 마지막으로 어떤 '섬'에 가고자 한다. 섬에 가는 배를 탄 날, 거센 파도가 배에 부딪히는 와중에 화자는 갑판에서 아주 칠흑 같은 머리카락에, 그 머리카락만큼이나 눈동자가 까만 한 여성을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해야'다. 화자는 사나운 파도에 휩쓸릴 뻔한 '해야'를 구해주고, 등을 크게 다친다. 그것도 잠시 화자가 바다에 빠져 고래에 삼켜지고 의식이 사라진다.


깨어나 보니 선실 안 본인의 침대에 누워 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고래에 잡아먹히지 않았지만 등은 욱신욱신 너무 아파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실제인지 분간할 수 없다. 그러다, 갑판에서 만난 '해야'를 다시 만나게 된다. 둘은 섬에 함께 들어가, 함께 지내며 많은 시간을, 많은 추억을 켜켜이 쌓았고(그 추억은 그들만의 서랍에 넣어지고, 보관되고, 기억될 것이다), 화자는 '해야'로부터 자신이 줄곧 붙들고 놓치지 않았던 생각, 의문들을 하나씩 풀어나간다.


화자, 그러니까 '선이'에게는 '해야'가 뮤즈였던 것이다. 칠흑 같은 밤, 거센 파도가 갑판 위에 선 사람을 집어삼킬 만큼 사나웠던 바다 위에서 만난 '사이렌' 같은 존재가 '해야'였다. 다만, '해야'는 뱃사람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았고 도리어 생명력,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고 떠난다.


'해야'의 존재는 실제였는지, 환상이었는지 책에는 뚜렷하지 않다. 다만 '환상'이었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그럼에도 '선이'는 '해야'를 진짜 만났었고(그것이 실제였든 환상이었든, 만난 것은 만난 것이다), 이전의 '선이'가 아니게 된다.


모든 종류의 음악이란 참 신비한 게 재생되는 순간부터 그 공간의 흐름을 바꾸어버린다. (18쪽)


이제 선이는 자신이 원하는 음악, 하고 싶은 음악을 하게 되고 새로운 뮤즈, '양이'를 만나 '해야'와의 이별의 고통에서 차츰 벗어나게 된다. 어쩌면은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쓰면서 저자 또한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가'는 무엇인지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 같다.


"아저씨에게 예술은 뭐죠?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 같아서요."

신사는 입을 다물고 조금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비둘기도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친구야, 나도 네 나이로 돌아가고 싶구나. 그럼 뭐든 시작했을 텐데. 너도 현실을 경험하면 알게 될 거야. 꿈은 서커스에서 쓰는 붉은색 커튼과 같다는걸. 화려하고 잘 찢어지지도 않지. 하지만 현실이라는 창문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것을 옆으로 걷어야 하는 날이 오고 만단다. 밤이 되면 다시 그것으로 창문을 가리고, 지쳐 울든 꿈을 꾸든 맘대로 해도 돼. 하지만 아침이 오면 다시 걷어내는 거야. 우린 꿈보다 하루를 살아야 하니까. 지금 나에겐 비둘기, 자전거 그리고 모자밖에 없어. 그리고 네가 준 돈으로 햄버거를 먹을 예정이지. 고맙구나."

신사는 외발자전거에 몸을 싣고 공원 외곽으로 사라졌다. 그를 지나치는 사람마다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진 재능과 웃음이 아까웠다. (105-106쪽)


"난 방울토마토를 먹을 거야."

해야는 잠자코 있다가 포크로 토마토를 찍어 입에 넣었다.

"난 방울토마토를 씹을 거야."

그리고 해야는 거칠게 그것을 깨물었다. 톡 터지는 소리와 함께 토마토 즙이 그녀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

"너 이거 다 먹을 수 있어?"

해야가 물었다. 배가 조금 부르지만 가능하긴 한 양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다 못 먹어."

"그럼 왜 이렇게 많이 퍼 온 거야?"

"내가 다 못 먹는다는 걸 보여주려고." 

나는 도대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난 방울토마토를 좋아하지만 이렇게 많이 먹을 순 없어. 하지만 네가 말한 어떤 가짜들은 이걸 다 먹어. 그리고 카메라를 보면서 이런 말을 하겠지. '지구 반대편에는 이조차 먹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으니까요.!'"

그녀는 아까 내가 가짜들을 흉내 냈던 목소리를 그대로 따라 했다.

"그들은 네가 말하는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남들에게 이용당하거나 자신을 속이는 대가를 치르면서 정상으로 올라가. 정당한 대가인지는 알아서 생각하는 거지만, 어찌 됐든 진짜 가짜 할 것 없어. 분야가 다르다고 생각하면 편해." 

(...)

"아, 그건 그거고 난 그런 사람들을 안 좋아해." 

(...)

"선아, 거창한 걸 생각하지 마. 뱉은 말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으면 그냥 할 수 있는 만큼의 말을 하면 돼. 난 어렸을 때부터 술을 먹지 않을 거라고 말했어.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마시지 않았어. 왜냐하면 난 내가 안 마실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리고 지금 난 토마토를 먹을 거야."(90-93쪽)


자기가 한 말을 지키는 사람, 이것이 곧 예술가라고 이찬혁 작가이자 뮤지션은 생각한 것이다.


화가든, 건축가든, 음악가든 인간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은 정말 行한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했고, 무언가를 만들어 냈으며, 세상 흐름에 어떤 변화를 기여했다. 자신이 한 말, 자신이 한 생각, 자기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 내겠다고 결심하고, 정말 그 결심을 실제로 정말 이뤄낸 사람들이 바로 예술가, 크리에이터!


이찬혁 작가도 이 소설과 이 소설을 모티브로 한 '항해' 앨범을 마무리 지으면서 한 발 더 도약하지 않았을까.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 불변한 것이 없으니, 이 소설과 앨범으로 어떤 답을 내렸더라도 또 다른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으려 애쓰지 않을까 싶다. 예술가로서의 앞으로의 이찬혁 작가도 응원한다.


덧붙임) 그런데, 책 제목은 참 마음에 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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