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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임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임재희 작가의 단편집, 총 7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7편은 모두 각기 다른 인물, 다른 이야기를 다루는데 소재와 주제가 하나로 수렴한다. 이곳과 저곳에 마음과 발을 걸친 사람들, 걸쳐 있기 때문에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소속되지 못하고 부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불안한 마음을 다룬다. 그런데 각 소설의 끝 맛이 묘하게 달라진다. 이야기가 전개되다 뭔가 하나도 해결된 것 없이 그냥 끝나는 듯한데, 그러면서도 긍정의 여지가 깃들어 있다. 매번 작은 '깨침'으로 마무리되는데, 이 느낌이 생소하고 재밌어서 수록된 단편소설들의 마지막 장, 마지막 문단, 마지막 문장만 또 두 어 번씩 더 읽었다. 다른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보는 각도에 따라 눈에 비치는 색깔과 그림이 달라지는 홀로그램 같았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상태로 읽느냐에 따라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다채롭고, 다양한 느낌으로 읽힐 것이다. 무지개색을 띠는 홀로그램처럼.
히어 앤 데어
이민을 떠났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동희 이야기.
지하철역에서 처음 만난 여성이 살갑게 다가와 밤에 여자 혼자 다니기 위험하니 함께 택시를 타자고 해서 탔다. 그런데 이 여성이 현금이 없다며 내일 송금하겠다고 연락처를 받아 택시에서 내린 후 감감무소식. 한 번 문자가 왔지만, 그 후로 완전히 연락이 끊긴다. 화자는 연락을 하고 싶지만, 적은 금액이라 독촉하는 모양새가 우스워 연락하기가 꺼려진다. 이 감정은, 택시비보다 '감정사기'를 당한 것 같아 불쾌하다.
시간이 흐른다. 미국에서 한국에 온 지 4개월이 되었다. 국적상실 신고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동희는 한국 국적을 선택할지, 미국 국적을 선택할지 선택의 기간이 남아 있었다.
동희는 문득 자신이 한국에 머문 지 어느덧 4개월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1년 8개월 지나면 거소증이 만료된다는 사실도. 더 연장할 건지 떠날 건지 지금부터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았다. 가령 어느 천변이 걷기에 좋은지, 어느 밥집이 맛있는지, 어느 마트가 친절한지, 어느 미용실이 샴푸를 더 깔끔하게 하는지 같은 거였다. 이 도시가 점점 몸에 익어가는 것만 같았다. 동희는 제 몸 어딘가에서 잔뿌리들이 뻗어 나와 흙을 가르고 축축한 곳을 찾아 스스로 내려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들은 본능처럼 익숙한 곳을 감지하고 저 홀로 뻗어 나갔다. 그러니 동희는 아무 일도 한 게 없었다. (- 34쪽)
4개월 만에, 아주 오래전에 떠났던 흙이 다시 익숙해지고, 몸 어딘가의 잔뿌리가 뻗어 나와 뿌리를 뻗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를 본다. 총 23개의 전번, 세탁소, 경비실, 마트... 그리고 택시를 함께 탄 여자의 번호도 총 23개의 전화번호 안에 포함되어 있다. 동희는 이 전화번호를 지우려다가 지울 수가 없었다.
왠지 그 번호를 지울 수가 없었다. 마치 그녀의 본적 주소나 주민등록번호 끝자리처럼 멀고도 가깝게 느껴졌다. 동희는 자신의 모습이 아름답게 스캔 된 사진을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여자의 번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34쪽)
법적으로 등록된 '본적 주소'와 '주민등록번호'는 이민을 가 있는 동안 기억할 필요도 없었고, 있는지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한국에 돌아오니 자신을 증명할 중요한 기호이다. 그런 것처럼 감정사기를 친 그 여성의 전화번호는, 불쾌하긴 하지만 어딘지 이 땅과 자신을 이어주는 하나의 연결고리, 기억이 된 것이다. 한국과 미국, 그 어디에도 제대로 소속되지 않고 부유하는 동희에게, 이곳의 기억, 소속감을 주고 감싸는 덩굴줄기 같은 것.
동국
아버지 장례식이 되어서야 작은엄마로만 불렀고, 작은엄마로만 알았던 사람의 이름이 '최동국'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는 이야기.
작은엄마의 운명은 실로 기구해서, 현재 알코올에 의존해 살 수밖에 없다. 그런 작은엄마가 안됐기도 하고, 인연의 끈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화자는 작은엄마와 함께 종종 밥도 먹고 만났다. 그러다 화자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작은엄마는 '누구의 엄마', '누구의 처'가 아닌, 본인의 이름으로 부조금 100만 원을 낸다. 그 금액이 컸기에, 화자와 화자의 엄마는 작은엄마와 함께 제주도에 여행을 간다. 그리고 이곳에서 왜 작은엄마는, '누구의 엄마', 누구의 처'가 아닌 본인의 이름으로 부조금을 냈는지 알게 된다.
“형님도 이제 나를 동국아, 그렇게 불러줘요. 이제 다 벗어버리고 싶어요. 세욱이 엄마라는 것도, 세미 엄마라는 것도. 나는 그냥 최동국. 예전에는 부끄럽고 남자 이름 같아서 안 썼는데, 동국, 최. 동. 국.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해요.”
작은엄마 목소리가 엄마보다 더 컸다. 그녀는 크게 팔을 벌리고 과장되게 박수를 치며 화면 앞에 서서 몸을 계속 흔들었다. 엄마는 이런 작은엄마의 모습이 기가 막히기도 하거니와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기에 그냥 침대에 누워 TV 화면도 작은엄마도 아닌 그 어떤 허공의 중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 63쪽)
내 이름은 동국이야.
오토바이를 타고 길 위를 쌩쌩 달리던 처녀 동국의 환한 얼굴이 거기 있었다. 이제야 그녀는 오토바이 없이도 오토바이를 타는 맛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었다. 동국, 겨울 국화라는 뜻일까. 그녀의 스산했던 삶이 이제야 겨우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것만 같았다. (- 64쪽)
누군가에 소속된, 누군가에 의존한 존재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살기 시작하려는 최동국, 작은엄마. 이 소설집에서 제일 무거웠던 이야기지만, 끝이 참 묘하고 긍정적이었다. 아직 유리컵째 소주를 벌컥벌컥 마시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살려는 의지가 있으니 이런 기구한 인생도 이제 곧 끝나지 않을까.
라스트 북스토어
매해 미국으로 이민 간 남동생 네를 찾아가는 화자의 이야기.
동생네 집에 갈 때마다 집의 상태가 못마땅한 화자의 어머니. 화자는 올케가 단지 건망증이 있을 뿐이라고 올케를 변호한다. 어느 날 화자는 그곳에서 '라스트 북스토어'라는 헌책방에 간다. 동생이 데려다주는데 가는 동안, 올케에게 '우울증'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화자는 헌책방으로 자신을 데리러 오기로 약속한 올케를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올케는 오지 않는다. 겨우 통화된 올케.
“어디야, 올케? 안 와?”
“네? 어디를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한 올케의 목소리가 내게 어떤 아득함을 불러일으켰다. 변기통의 오물과 치약이 가득 묻어 있는 채로 굳어 있던 칫솔과 바닥이 시커멓게 타버린 냄비들과 세탁기 안에 꾸덕꾸덕 말라가던 빨래들이 내게 살려달라며 달려드는 것만 같았다. (- 87쪽)
수화기 건너편에서 올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먼 시간의 실타래를 애써 잡아당기는 사람 같았다. 나는 시커먼 파도 더미가 동생네 아파트를 덮치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처럼 조바심이 일었다. 모든 것이 휩쓸려가고 뼈대만 남은 폐허 속에 남겨진 사람들을 본 것처럼 아득해졌다. 올케는 담담한 목소리로 지금 당장 출발하겠다며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그 말속에 모든 결심이 다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좋으니 꼭 오라고 말했다. 그녀가 데리러 오지 않으면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고집을 부렸다. (- 87쪽)
헌책을 모아두고, 헌책을 파는 헌책방 '라스트 북스토어', 심각한 우울증으로 기억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올케. 그리고 헌책방에서 만난, 미스터리한 여자.
나는 쓰다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 것처럼 손에 들고 있던 책과 LP 판을 계속 쓸어내리고 있었다. 연희가 내게 달려오는 길을 떠올렸을 때 아직 내게 닿지 않은 먼 시간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했다. (- 89쪽)
이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화자의 미래의 모습, 망각, 건망증, 기억의 소실, 치매 그 먼 미래의 모습이 보인다는 뜻으로도 와닿는데, 그럼에도 내 느낌에 우울하거나 그렇진 않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선택하고 결심할 수 있는 '결단'이란 최후의 보루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화자의 손에 들고 있던 책과 LP 판이 화자의 결단에 도움이 됐길 바라며,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천천히 초록
아버지가 돌아가신 1년 후, 모든 것이 위태롭게 느껴졌던 화자 부부의 이야기.
제대로 먹지도 않고, 직장에도 나가지 않고 자기 자신을 추스르지 못할 때 남편은 화자에게 그녀의 고향을 한 번 둘로 보자고 했다. 강원도 철원,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친척들이 아버지에 대해 수군대던 말들. 군인이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총을 겨누고 쏜 일이었는데 이런 일화는, 직접 보고 겪지 않아도 자신의 기억에 들러붙어 너무나 생생히 본 듯, 직접 겪은 일 같다.
“43번 국도가 끝나는 곳을 보여주고 싶었어. 그래야, 당신이 뭔가 정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그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 114쪽)
“어, 어?”
그가 내 얼굴을 쳐다본다.
“47번 국도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꿰맨 자국 없이 길이 다시 이어졌다. 언제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어느새 47번 국도 위를 달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길의 속성이라는 걸 그제야 배운 사람들처럼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길이 바뀌어도 우리가 여전히 함께 있다는 사실이 당연하면서도 이상한 사람들 같았다. (- 115쪽)
"우리, 이제 여기 오지 말자."
그가 뜻 모를 이야기를 남기고 다시 눈을 감았다. (...)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본 것은 신문지를 꽉 움켜쥔 아버지의 두 주먹분. 묻지 않아도 될 것과 알지 않아도 될 것들 속에서도 삶은 충분히 완전체로 흘러갈 거였다. (116쪽)
어쩌면 무의식 속에 똬리 튼 기억과 직접 마주하고, 이 기억에 대해 어떻게 할지 결심하는 것만으로도 삶은 한 단계 도약한다.
로사의 연못
꿈에 그리던 전원주택을 갖게 된 '로사'. 로사는 집을 갖게 된 기쁨도 잠시, 어떤 불길함에 사로잡히고 그 불길함은 현실이 되어 로사의 남편은 집의 연못에 집착하고 로사는 그런 남편을 방관하며 지켜보는 이야기.
로사는 연못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비 내리는 오후와 삽을 든 남편에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에게 들려주는 거였다.
누군가는 찾으려 하고,
누군가는 숨기려 하고,
숨바꼭질은 계속되고,
열쇠는 처음부터 내 마음속에 있었고.... (- 141쪽)
시간과 공간이 묘하게 뒤틀린 듯 다가온 단편이었다. 화자의 마음속에 처음부터 있었다는 열쇠는 무엇일까. 제일 흥미롭게 읽었는데, 마지막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단편 본문에 자주 등장하는 색인, 검은색과 닮은 소설이었다. 완전 어두운 까만색인데, 그래도 그 검은색 속 어딘가 반짝이는 열쇠가 있을 것만 같다.
분홍에 대하여
같은 단어, 같은 말, 같은 언어를 써도 결코 서로 같은 언어로 말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이야기.
“나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그의 말을 이해했어. 그도 나의 말을 이해했어. 우리는 서로의 말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이었어. 그러니까 사랑이지.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 (- 151쪽)
“이 세상 그 누구의 말보다 나는 그의 말이 가장 이해하기 쉬웠고,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같은 한국 사람들끼리 이해 못 할 말이 세상에 어딨느냐고 물을 거야.”
그녀는 정작 그런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돌을 쪼듯, 그는 내 맘에 꼭 드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골라 내게 말을 걸어주던 사람이었어.” (- 152쪽)
“‘언어도 죽는구나. 죽을 수도 있구나.”
세레나는 무대에 올라선 배우가 마지막 연극 대사를 읊조리는 것처럼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가한 오후였고 나른해서 꺼낸 얘기가 심각하게 흘러갔다.
“그럼, 내가 한국에서 사용했던 언어들……. 나와 함께 죽을 수도 있겠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계속 사용하잖아요. 그러니 살아 있지요…….”
나는 내가 들려준 이야기와 세레나의 비유는 상관관계가 없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녀의 말이 어떤 식으로든지 옳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말꼬리를 내렸다.
“아니……. 그래도 어떤 특정한 사람과 사용했던 언어들 말이야……. 특정하고 고유한 순간들의 그 언어…….”
세레나는 답답하다는 듯, 아무도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오른손으로 제 가슴을 살짝 쓸어내렸다. (- 164쪽)
특정한 사람과 특정한 순간에 서로 나눈, 특정한 언어.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분홍에 대하여」는 가장 쉽게 이해되었다.
나는 새로운 어감의 단어와 마주친 사람처럼 무언가 아득해졌다. 굳이 세레나의 설명이 없어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되었다. 세레나가 입술을 오므리고 분홍이라고 말했을 대 나는 분명히 그걸 느꼈다. 핑크가 절정으로 치닫던 어느 순간들의 화려함이라면 분홍은 붉은빛의 모든 열기가 다 빠지며 남긴 지울 수 없는 흔적이었다. (- 168쪽)
대부분의 사람과는 서로 같은 발음의 단어와 문장을 말해도, 서로 적확하게 그 뜻을 공유하고 공감하기 어렵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가닿지 못한다. 서로 사용하는 어휘, 그 어휘를 느끼고 이해하고 머릿속에 그리는 모든 것이 나와 똑 맞는 사람을 만나기가 얼마나 힘든지, 그래서 그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압시드
'압시드'란 이름을 가진,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되었던 한 노인의 이야기.
자신과 다르게 생긴 미국인의 틈 속에서,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미자'와 만나고 서로 교감한 이야기 그리고 자기가 왜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입양된 자기가 왜 중동스러운 '압시드'란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말한다.
양아버지는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말을 했어요. 남자가 나를 데리고 왔을 때 편지 한 통을 남겼는데, 거기에 아주 큰 글씨로 ‘ABCD'라고 쓰여 있었대요. 양아버지는 그걸 보고 많은 생각을 했었대요. 미국으로 데려가 달라는 말인가? 공부를 많이 시켜달라는 뜻인가? 그래도 의문이 풀어지지는 않았나 봐요. 흔히 적어놓을 법한 한국 이름이나 출생일은 없었고요. 마치 손으로 꾹꾹 정성 들여 쓴 글씨처럼 보여 함부로 버리지도 못했대요. 그러다 양아버지는 오랜 생각 끝에 나의 이름을 그렇게 지어달라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대요. 그래서 Abcd라고 써놓고 ’압시드‘라고 발음해보았더니 꽤 괜찮더래요. 그렇게 나는 한국에서부터 영문 이름을 갖게 되었지요. (- 190쪽)
그러니까, 당신의 말은, 네 개의 알파벳은 한 남자의 슬픔이고, 유언이고, 알고 있는 세계의 전부라는 말이군요. (- 191쪽)
저쪽 세계에서 이쪽으로 건너와, 또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잘 쓰는 이름을 갖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로, 어디에도 제대로 소속될 수 없는 남자가 자기 인생에서 자기 것이라 가졌던 몇 안 되는 것에 대한 사연이다('가졌던'이라고 하기 애매하지만). 압시드가 미자에게 가졌던 감정과 압시드의 한국 친아버지의 마음이 애틋하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온 가족이 함께 이민을 갔다가, 화자의 어머니만 한국으로 돌아왔다. 며칠 동안 어머니와 함께 한국에 머물다 비행기 좌석이 없어 하루 더 머물게 된 화자, 폴의 이야기다. 한국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미국에서 자란 폴은 한국인의 외형을 가졌지만, 내면의 많은 것들은 미국 사람이다. 한국이라는 나라, 한국인이라는 사람들이 낯설고 어떤 벽을 느낀다. 하지만 택시 아저씨의 작은 친절, 호텔 흡연실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의 작은 호의로 한국에 작은 소속감을 느끼게 된다.
폴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아들’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 사람과 ‘형’ 노릇을 해준 사람을 떠올렸다. 양말 장수 아저씨와 공항 체크인 데스크 직원 그리고 택시 안에서 들었던 거친 목소리의 주인공까지. 그들이 잘 지내야 엄마가 잘 지낼 것만 같았다. 그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오래전에 와봤던 곳을 찬찬히 바라보는 사람처럼 창밖에 두었던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히비스커스 붉은 꽃 하나가 소리 없이 활짝 피어날 것만 같았다. (- 220쪽)
불쾌한 기억은 불쾌한 대로, 좋은 기억은 좋은 대로 이곳에 감정과 기억을 뿌리내리고 소속감이랄까 정이랄까, 애틋함이랄까, 말로 쉽게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로드
엄마가 알려준 주소로 자동차 여행을 하게 되면서, 그동안 몰랐던 엄마의 마음과 엄마의 의도를 깨닫게 되는 이야기. 길은 한 장소와 다른 한 장소를 이어주고, 그가 사는 곳(집, 지역, 나라 등)은 그가 누구인지 알려 준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번에 엄마가 가보라는 집은 엄마의 어떤 정서가 그런 행위를 하게 만든 결과물이라는 거지." (- 238쪽)
진과 범의 눈이 명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에 모였다. 아, 하는 감탄사가 누군가의 입에서 먼저 흘러나왔고 동시에 다른 둘의 입에서도 터졌다. 다른 큰 집들에 가려진, 언뜻 보면 작은 별채 같은 크기의 집이었다. 그래도 그건 어디에서 보아도 '엄마의 집'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릴 집이었다. 대로에서 멀리 떨어져 차들이 많이 지나다니지 않고, 아이들이 집 앞에서 뛰어놀기에 안전한 컬드색, 단단한 붉은 벽돌집. 평소에 엄마가 노래처럼 말했던 그런 집이 그들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246쭉)
진은 여전히 엄마가 선택한 엄마의 집이라고 믿고 싶었고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엄마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진은 얼굴을 유리창에 더욱 바짝 붙이고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엄마라는 존재가 여전히 그녀를 놀라게 해 다행스러웠다. (- 247쪽)
나이를 얼마나 먹든, 우리는 엄마라는 사람, 엄마라는 존재가 느껴지는 안전한 장소를 희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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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관통하는 건, '소속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국적으로부터, 이름으로부터, 기억으로부터, 과거로부터, 꿈으로부터, 언어로부터, 소망으로부터, 친근함으로부터, 엄마로부터.
아니, '소속감'이라는 것도 정확한 표현이 아니겠다. 인간 존재야말로, 어딘가 완전히 소속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대부분의 경계는 흐릿하고 모호하다. 단지, 자신의 믿음과 막연한 느낌만으로 자기를 규정하고 구성하는 게 아닐까 싶다. 정말로,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그림과 색채를 띤 홀로그램과 닮은 소설이었다. 다만, 형광 빛깔의 무지개색 홀로그램보다, 톤 다운된 따듯한 색감에 그림의 경계가 모호한 홀로그램의 소설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나와 다른 느낌을 받았을 테지. 그러니 정말 홀로그램 같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