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생각뿔 세계문학 미니북 클라우드 2
조지 오웰 지음, 안영준 옮김, 엄인정 해설 / 생각뿔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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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년 만에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다시 읽었다. 읽은 지 얼마나 오래됐으면, 이 소설이 공산주의와 독재를 풍자한 것까진 기억나지만 나머지는 기억나는 게 없었다. (돼지가 나쁘다, 는 것 빼고. 왜, 어떻게 나쁜지도 까먹음) 비록 다 까먹어서 다시 읽었지만, 이번에 읽고 든 생각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작품을 쓴 작가가 죽은 지 오래됐는데도 계속 출판되는 책은, 읽었어도 또 읽을 가치가 있다. 이번에 『동물농장』을 읽고 나서도 이런 생각을 또 하게 되었다. 정말, 재독가치(再讀價値) 뿜뿜!




조지 오웰이 기자로 활동했기 때문일까, 엘리트였지만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의 틈에 노동을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까 『동물농장』은 상당히 쉽다. 누가 돼지고, 누가 나폴레옹이고, 누가 복서인지 쉽게 떠오른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소련이 망하고 미소 냉전이 종식된 지도 오래. 이젠 스탈린도, 트로츠키도 잊힌 존재가 되었지만(요즘 학생들은 역사에 관심 없으면 잘 모를걸. 내가 학교 다닐 때도 그랬으니까), 독재가 횡행하는 그 어느 나라든 이 책은 1:1 대응이 가능해, 망해버린 소련이 어땠는지 잘 몰라도 각기 알고 있는 독재국가와 비교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여전히 고전이고, 앞으로도 고전일 수 있다. 




그리고 이번에 읽으며 새로 느낀 건, 『동물농장』이 독재국가에만 국한 되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 어느 시대고, 한 나라가 망하고 새로운 나라,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늘 이런 식의 민중에 대한 호도가 있어왔다.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왔던 일.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섰을 때라든지, 구한 말에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조선 사람들에게 조선이 얼마나 후진국가인지 세뇌시킨 거라든지, 북한이나 중국의 체제 변화라든지 등. 인간이 권력에의 욕망이 있는 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늘 적용 가능하고, 끊임없이 읽힐 고전이다. 

돼지와 인간 열두 명이 화난 목소리로 맞고함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 목소리가 비슷해서 서로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제 돼지들의 얼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 수 있었다. 바깥에 있던 동물들은 돼지를 쳐다보다가 인간을, 그리고 인간을 쳐다보다가 돼지를, 그리고 다시 돼지를 쳐다보다가 인간을 그렇게 순차적으로 눈길을 옮겨 가곤 했다. 하지만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누가 인간이고 누가 돼지인지, 도무지 어떤 게 어떤 건지 전혀 구별할 길이 없었다. (- 170쪽)

 『동물농장』의 제일 마지막 문단이다. 조지 오웰이 이 책을 빌어 사람들에게 제일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 문장들. 모두가 평등한 세상, 모두 적당히 일하고 여유와 행복을 즐기는 삶, 유토피아를 꿈꾸며 단결하고 행동했지만 달콤한 열매는 소수의 지도자만 누릴 수 있다. 그리고 그 부류의 사람들끼리만 어울리고, 지고의 안락함과 부유함을 누린다. 


어쨌든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허상을 믿으면 안 된다. 지금 우리가 선택하고 있는 대의 민주주의도 말 많고 탈 많고, 높으신 분(?!)들의 비리와 호도가 여전히 비일비재하지만 그래도 이 체제가 나은 건 '견제'를 할 수 있다는 거다. 견제가 무너지면 얼마든지 『동물농장』의 세계가 될 수 있다. 

오랜만에 읽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고전은 역시 고전이고 고전은 늘 새롭게 다시 읽힘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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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리트리버 코난, 미국에 다녀왔어요 - 미국의 개 친구들을 찾아 떠난 모험 이야기
김새별 지음 / 이봄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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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 관련 책을 가끔 본다. 개와 함께 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에 대한 대리만족을 위해서. 개책을 읽고, 삽입된 개사진을 보다 보면 잊고 있던 옛 기억들이 떠오른다. 개들의 여러 가지 표정, 아닌 척 시치미 뚝 떼는 연기, 기가 죽은 모습, 부드럽게 이름 부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후다다다닥 거리며 달려와 품 안에 파고드는 아이들. 내 강아지도 아닌데,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 눈물이 날 지경이다. 


사람마다 개에 대한 생각이 다 다를 텐데, 나는 이렇다. 믿음을 주고받는 공동체라고 할까. 그래서 나는 인간보다 개가 더 좋고, 인간보다 개를 더 믿는다. 그런데 인간과 개는 완전히 다른 동물이다 보니, 좋을 땐 좋지만, 도시 생활 그리고 아파트 생활이 개들에게 너무 좋지 않다. 이웃에게 불편을 끼칠까 봐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유난을 떨면서 개를 애지중지하고 '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아, 다 싸우자!'라는 심정으로 개와 사는 것도 싫다. 그냥 인간과 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을 때 함께 살고 싶다. 그런 날이 언제 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는 책이나 티비로 대리만족하기로. 




방송국 PD 김새별 님이 쓰신 『골든 리트리버 코난, 미국에 다녀왔어요』를 읽었다. 게 사랑에 하트 뿅뿅. 


책 제목과 부제, 표지만 보면 개와 함께한 미국 횡단기로 보이는데, 이건 좀 페이크다. 이 책에서 미국 여행기는 맨 마지막 장(章)에 기대보다 적은 분량으로 수록되어 있고, 책의 나머지는 코난과 함께 겪은 일화나 개를 비행기에 태울 때  필요한 서류나 절차, 미국에서의 개복지(?), 공공시설물 이용(공원, 해변 등), 개와 함께 해서 행복한 여러 미국인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여행 이야기가 많이 없어서 여행 에세이라고 하긴 어렵겠고, 여행기를 가장한 실용서라고 해야 할까. 이 책은 개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여행할 분이거나, 개와 이주할 분들에게 유익한 내용들이 많다. 아마도, 저자가 방송국 PD라서 그런 듯. 기자나 방송국 PD 분들이 책을 쓰면, 몇 줄 읽고도 직업이 감이 오는데 모니터를 켜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 직업병이 저절로 발동하나 보다.  


저자는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해 독자(시청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알찬 정보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서 적어 놓았다. (어쩔 수 없이 발동되는 직업정신!) 이 책의 2장인 '코난과 나의 미국 개 문화 탐사기'나 '코난의 친구집 방문기'를 보면, 에세이 책을 읽는 느낌보다 TV 교양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례'를 보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개사랑인들이 많은 미국에서 개를 어떻게 대하고 공공장소에서의 개티켓, 미국인들의 개사랑법 등을 알 수 있어 좋았다. 비교문화연구. 우리도 참고해서 도입했으면 하는 것도 꽤 있었다. 가령 개들을 위한 공원 같은 거. 




이 책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물론 코난의 이야기도 다 좋았지만) 릴리의 이야기였다. 릴리는 사나운 종으로 악명 높은 '피트불'. '-불'이 붙은 개를 무서워하는 건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닌 듯, 미국에서 아무리 개를 사랑해도 '피트불' 등 맹견으로 알려진 종은 좀 많은 차별이 있나 보다. 지역 사회에서도, 사람들 믿음에서도. 


데이비드라는 사람이 보호소에서 '릴리'라는 개를 만났다. 다른 개들은 천방지축, 왕왕 짖고 난린데 '릴리'는 피트불이면서도 참 얌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릴리는 데이비드의 차에 그냥 올라탔고 내릴 생각이 없어 보여 데이비드는 릴리를 입양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한동안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하던 어머니께 보내드렸는데 어머니도 처음엔 반응이 신통찮으셨다. 피트불, 맹견이니까. 


그래도 함께 살기 시작하자, 급격하게 릴리와 할머니는 친해졌고 둘은 떼려야 떼 놓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철길을 걷다가 할머니가 갑자기 쓰러졌다. 기차는 다가오고, 릴리는  쓰러진 할머니를 철길 밖으로 끌어내려고 안간힘을 다 썼다. 이 모습을 본 기관사는 가까스로 기차를 멈췄고, 할머니는 무사했다. 하지만, 릴리는 다리 하나를 심하게 다쳤고, 내장 기관까지 성한 곳이 거의 없었다. 큰 수술을 해야 했고, 수술비도 너무 비쌌으며 무엇보다 수술을 해도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다. 다행히, 지인이 페이스북에 릴리의 사연을 올려, 수술비를 마련할 수 있었고, 할머니와 데이비드의 지극정성의 보살핌으로 릴리는 건강을 되찾았다. 다만, 너무 심하게 다친 다리는, 어쩔 수 없이 잘라 내야 했다. (위 사진) 


짧게 적힌 사연이었지만, 읽고 눈물 콧물이 펑펑. ㅠㅅㅠ 릴리가 완쾌했다는 것보다, 릴리가 할머니를 철길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져 애틋함 때문에 눈물이 났다. 

한창 반려견과 관련해 사회가 한창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지금은 조용하지만, 언제 또 이슈가 될지 모를 일이다. 이런 문제는, 개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 미국에서도 많이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라는 걸 이 책을 보고 알게 되었다. 뭐, 어쨌든 그래도 우리나라보다 미국이 개와 함께 살기에 좋다(일단, 땅이 넓잖아요). 


가벼운 여행기일까 펼쳤지만, 결국 개와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 문제로 돌아온 책으로 개를 좋아하시는 분, 개와 함께 해외여행을 가고 싶은 분, 개 관련 공공 문제에 관심 있는 분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아름다운 코난의 사진은 덤. 

(골든 리트리버는 정말로 아름다운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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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임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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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희 작가의 단편집, 총 7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7편은 모두 각기 다른 인물, 다른 이야기를 다루는데 소재와 주제가 하나로 수렴한다. 이곳과 저곳에 마음과 발을 걸친 사람들, 걸쳐 있기 때문에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소속되지 못하고 부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불안한 마음을 다룬다. 그런데 각 소설의 끝 맛이 묘하게 달라진다. 이야기가 전개되다 뭔가 하나도 해결된 것 없이 그냥 끝나는 듯한데, 그러면서도 긍정의 여지가 깃들어 있다. 매번 작은 '깨침'으로 마무리되는데, 이 느낌이 생소하고 재밌어서 수록된 단편소설들의 마지막 장, 마지막 문단, 마지막 문장만 또 두 어 번씩 더 읽었다. 다른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보는 각도에 따라 눈에 비치는 색깔과 그림이 달라지는 홀로그램 같았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상태로 읽느냐에 따라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다채롭고, 다양한 느낌으로 읽힐 것이다. 무지개색을 띠는 홀로그램처럼. 





히어 앤 데어

이민을 떠났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동희 이야기. 

지하철역에서 처음 만난 여성이 살갑게 다가와 밤에 여자 혼자 다니기 위험하니 함께 택시를 타자고 해서 탔다. 그런데 이 여성이 현금이 없다며 내일 송금하겠다고 연락처를 받아 택시에서 내린 후 감감무소식. 한 번 문자가 왔지만, 그 후로 완전히 연락이 끊긴다. 화자는 연락을 하고 싶지만, 적은 금액이라 독촉하는 모양새가 우스워 연락하기가 꺼려진다. 이 감정은, 택시비보다 '감정사기'를 당한 것 같아 불쾌하다. 

시간이 흐른다. 미국에서 한국에 온 지 4개월이 되었다. 국적상실 신고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동희는 한국 국적을 선택할지, 미국 국적을 선택할지 선택의 기간이 남아 있었다.


동희는 문득 자신이 한국에 머문 지 어느덧 4개월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1년 8개월 지나면 거소증이 만료된다는 사실도. 더 연장할 건지 떠날 건지 지금부터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았다. 가령 어느 천변이 걷기에 좋은지, 어느 밥집이 맛있는지, 어느 마트가 친절한지, 어느 미용실이 샴푸를 더 깔끔하게 하는지 같은 거였다. 이 도시가 점점 몸에 익어가는 것만 같았다. 동희는 제 몸 어딘가에서 잔뿌리들이 뻗어 나와 흙을 가르고 축축한 곳을 찾아 스스로 내려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들은 본능처럼 익숙한 곳을 감지하고 저 홀로 뻗어 나갔다. 그러니 동희는 아무 일도 한 게 없었다. (- 34쪽)


4개월 만에, 아주 오래전에 떠났던 흙이 다시 익숙해지고, 몸 어딘가의 잔뿌리가 뻗어 나와 뿌리를 뻗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를 본다. 총 23개의 전번, 세탁소, 경비실, 마트... 그리고 택시를 함께 탄 여자의 번호도 총 23개의 전화번호 안에 포함되어 있다. 동희는 이 전화번호를 지우려다가 지울 수가 없었다. 


왠지 그 번호를 지울 수가 없었다. 마치 그녀의 본적 주소나 주민등록번호 끝자리처럼 멀고도 가깝게 느껴졌다. 동희는 자신의 모습이 아름답게 스캔 된 사진을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여자의 번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34쪽)


법적으로 등록된 '본적 주소'와 '주민등록번호'는 이민을 가 있는 동안 기억할 필요도 없었고, 있는지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한국에 돌아오니 자신을 증명할 중요한 기호이다. 그런 것처럼 감정사기를 친 그 여성의 전화번호는, 불쾌하긴 하지만 어딘지 이 땅과 자신을 이어주는 하나의 연결고리, 기억이 된 것이다. 한국과 미국, 그 어디에도 제대로 소속되지 않고 부유하는 동희에게, 이곳의 기억, 소속감을 주고 감싸는 덩굴줄기 같은 것. 



동국


아버지 장례식이 되어서야 작은엄마로만 불렀고, 작은엄마로만 알았던 사람의 이름이 '최동국'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는 이야기. 


작은엄마의 운명은 실로 기구해서, 현재 알코올에 의존해 살 수밖에 없다. 그런 작은엄마가 안됐기도 하고, 인연의 끈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화자는 작은엄마와 함께 종종 밥도 먹고 만났다. 그러다 화자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작은엄마는 '누구의 엄마', '누구의 처'가 아닌, 본인의 이름으로 부조금 100만 원을 낸다. 그 금액이 컸기에, 화자와 화자의 엄마는 작은엄마와 함께 제주도에 여행을 간다. 그리고 이곳에서 왜 작은엄마는, '누구의 엄마', 누구의 처'가 아닌 본인의 이름으로 부조금을 냈는지 알게 된다. 


“형님도 이제 나를 동국아, 그렇게 불러줘요. 이제 다 벗어버리고 싶어요. 세욱이 엄마라는 것도, 세미 엄마라는 것도. 나는 그냥 최동국. 예전에는 부끄럽고 남자 이름 같아서 안 썼는데, 동국, 최. 동. 국.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해요.” 

작은엄마 목소리가 엄마보다 더 컸다. 그녀는 크게 팔을 벌리고 과장되게 박수를 치며 화면 앞에 서서 몸을 계속 흔들었다. 엄마는 이런 작은엄마의 모습이 기가 막히기도 하거니와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기에 그냥 침대에 누워 TV 화면도 작은엄마도 아닌 그 어떤 허공의 중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 63쪽)


내 이름은 동국이야. 

오토바이를 타고 길 위를 쌩쌩 달리던 처녀 동국의 환한 얼굴이 거기 있었다. 이제야 그녀는 오토바이 없이도 오토바이를 타는 맛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었다. 동국, 겨울 국화라는 뜻일까. 그녀의 스산했던 삶이 이제야 겨우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것만 같았다. (- 64쪽)


누군가에 소속된, 누군가에 의존한 존재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살기 시작하려는 최동국, 작은엄마. 이 소설집에서 제일 무거웠던 이야기지만, 끝이 참 묘하고 긍정적이었다. 아직 유리컵째 소주를 벌컥벌컥 마시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살려는 의지가 있으니 이런 기구한 인생도 이제 곧 끝나지 않을까. 



라스트 북스토어


매해 미국으로 이민 간 남동생 네를 찾아가는 화자의 이야기. 

동생네 집에 갈 때마다 집의 상태가 못마땅한 화자의 어머니. 화자는 올케가 단지 건망증이 있을 뿐이라고 올케를 변호한다. 어느 날 화자는 그곳에서 '라스트 북스토어'라는 헌책방에 간다. 동생이 데려다주는데 가는 동안, 올케에게 '우울증'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화자는 헌책방으로 자신을 데리러 오기로 약속한 올케를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올케는 오지 않는다. 겨우 통화된 올케.


“어디야, 올케? 안 와?”

“네? 어디를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한 올케의 목소리가 내게 어떤 아득함을 불러일으켰다. 변기통의 오물과 치약이 가득 묻어 있는 채로 굳어 있던 칫솔과 바닥이 시커멓게 타버린 냄비들과 세탁기 안에 꾸덕꾸덕 말라가던 빨래들이 내게 살려달라며 달려드는 것만 같았다. (- 87쪽)


수화기 건너편에서 올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먼 시간의 실타래를 애써 잡아당기는 사람 같았다. 나는 시커먼 파도 더미가 동생네 아파트를 덮치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처럼 조바심이 일었다. 모든 것이 휩쓸려가고 뼈대만 남은 폐허 속에 남겨진 사람들을 본 것처럼 아득해졌다. 올케는 담담한 목소리로 지금 당장 출발하겠다며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그 말속에 모든 결심이 다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좋으니 꼭 오라고 말했다. 그녀가 데리러 오지 않으면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고집을 부렸다. (- 87쪽)

헌책을 모아두고, 헌책을 파는 헌책방 '라스트 북스토어', 심각한 우울증으로 기억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올케. 그리고 헌책방에서 만난, 미스터리한 여자. 

나는 쓰다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 것처럼 손에 들고 있던 책과 LP 판을 계속 쓸어내리고 있었다. 연희가 내게 달려오는 길을 떠올렸을 때 아직 내게 닿지 않은 먼 시간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했다. (- 89쪽)


이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화자의 미래의 모습, 망각, 건망증, 기억의 소실, 치매 그 먼 미래의 모습이 보인다는 뜻으로도 와닿는데, 그럼에도 내 느낌에 우울하거나 그렇진 않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선택하고 결심할 수 있는 '결단'이란 최후의 보루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화자의 손에 들고 있던 책과 LP 판이 화자의 결단에 도움이 됐길 바라며,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천천히 초록


아버지가 돌아가신 1년 후, 모든 것이 위태롭게 느껴졌던 화자 부부의 이야기. 

제대로 먹지도 않고, 직장에도 나가지 않고 자기 자신을 추스르지 못할 때 남편은 화자에게 그녀의 고향을 한 번 둘로 보자고 했다. 강원도 철원,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친척들이 아버지에 대해 수군대던 말들. 군인이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총을 겨누고 쏜 일이었는데 이런 일화는, 직접 보고 겪지 않아도 자신의 기억에 들러붙어 너무나 생생히 본 듯, 직접 겪은 일 같다. 


“43번 국도가 끝나는 곳을 보여주고 싶었어. 그래야, 당신이 뭔가 정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그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 114쪽) 


“어, 어?”

그가 내 얼굴을 쳐다본다.

“47번 국도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꿰맨 자국 없이 길이 다시 이어졌다. 언제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어느새 47번 국도 위를 달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길의 속성이라는 걸 그제야 배운 사람들처럼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길이 바뀌어도 우리가 여전히 함께 있다는 사실이 당연하면서도 이상한 사람들 같았다. (- 115쪽)


"우리, 이제 여기 오지 말자."

그가 뜻 모를 이야기를 남기고 다시 눈을 감았다. (...)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본 것은 신문지를 꽉 움켜쥔 아버지의 두 주먹분. 묻지 않아도 될 것과 알지 않아도 될 것들 속에서도 삶은 충분히 완전체로 흘러갈 거였다. (116쪽)


어쩌면 무의식 속에 똬리 튼 기억과 직접 마주하고, 이 기억에 대해 어떻게 할지 결심하는 것만으로도 삶은 한 단계 도약한다. 



로사의 연못


꿈에 그리던 전원주택을 갖게 된 '로사'. 로사는 집을 갖게 된 기쁨도 잠시, 어떤 불길함에 사로잡히고 그 불길함은 현실이 되어 로사의 남편은 집의 연못에 집착하고 로사는 그런 남편을 방관하며 지켜보는 이야기. 


로사는 연못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비 내리는 오후와 삽을 든 남편에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에게 들려주는 거였다.

누군가는 찾으려 하고,

누군가는 숨기려 하고,

숨바꼭질은 계속되고,

열쇠는 처음부터 내 마음속에 있었고.... (- 141쪽)


시간과 공간이 묘하게 뒤틀린 듯 다가온 단편이었다. 화자의 마음속에 처음부터 있었다는 열쇠는 무엇일까. 제일 흥미롭게 읽었는데, 마지막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단편 본문에 자주 등장하는 색인, 검은색과 닮은 소설이었다. 완전 어두운 까만색인데, 그래도 그 검은색 속 어딘가 반짝이는 열쇠가 있을 것만 같다.




분홍에 대하여


같은 단어, 같은 말, 같은 언어를 써도 결코 서로 같은 언어로 말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이야기. 



“나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그의 말을 이해했어. 그도 나의 말을 이해했어. 우리는 서로의 말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이었어. 그러니까 사랑이지.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 (- 151쪽)


“이 세상 그 누구의 말보다 나는 그의 말이 가장 이해하기 쉬웠고,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같은 한국 사람들끼리 이해 못 할 말이 세상에 어딨느냐고 물을 거야.”

그녀는 정작 그런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돌을 쪼듯, 그는 내 맘에 꼭 드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골라 내게 말을 걸어주던 사람이었어.” (- 152쪽)


“‘언어도 죽는구나. 죽을 수도 있구나.”

세레나는 무대에 올라선 배우가 마지막 연극 대사를 읊조리는 것처럼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가한 오후였고 나른해서 꺼낸 얘기가 심각하게 흘러갔다.

“그럼, 내가 한국에서 사용했던 언어들……. 나와 함께 죽을 수도 있겠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계속 사용하잖아요. 그러니 살아 있지요…….”

나는 내가 들려준 이야기와 세레나의 비유는 상관관계가 없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녀의 말이 어떤 식으로든지 옳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말꼬리를 내렸다.

“아니……. 그래도 어떤 특정한 사람과 사용했던 언어들 말이야……. 특정하고 고유한 순간들의 그 언어…….”

세레나는 답답하다는 듯, 아무도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오른손으로 제 가슴을 살짝 쓸어내렸다. (- 164쪽)

특정한 사람과 특정한 순간에 서로 나눈, 특정한 언어.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분홍에 대하여」는 가장 쉽게 이해되었다. 


나는 새로운 어감의 단어와 마주친 사람처럼 무언가 아득해졌다. 굳이 세레나의 설명이 없어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되었다. 세레나가 입술을 오므리고 분홍이라고 말했을 대 나는 분명히 그걸 느꼈다. 핑크가 절정으로 치닫던 어느 순간들의 화려함이라면 분홍은 붉은빛의 모든 열기가 다 빠지며 남긴 지울 수 없는 흔적이었다. (- 168쪽)

대부분의 사람과는 서로 같은 발음의 단어와 문장을 말해도, 서로 적확하게 그 뜻을 공유하고 공감하기 어렵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가닿지 못한다. 서로 사용하는 어휘, 그 어휘를 느끼고 이해하고 머릿속에 그리는 모든 것이 나와 똑 맞는 사람을 만나기가 얼마나 힘든지, 그래서 그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압시드


'압시드'란 이름을 가진,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되었던 한 노인의 이야기. 

자신과 다르게 생긴 미국인의 틈 속에서,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미자'와 만나고 서로 교감한 이야기 그리고 자기가 왜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입양된 자기가 왜 중동스러운 '압시드'란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말한다. 


양아버지는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말을 했어요. 남자가 나를 데리고 왔을 때 편지 한 통을 남겼는데, 거기에 아주 큰 글씨로 ‘ABCD'라고 쓰여 있었대요. 양아버지는 그걸 보고 많은 생각을 했었대요. 미국으로 데려가 달라는 말인가? 공부를 많이 시켜달라는 뜻인가? 그래도 의문이 풀어지지는 않았나 봐요. 흔히 적어놓을 법한 한국 이름이나 출생일은 없었고요. 마치 손으로 꾹꾹 정성 들여 쓴 글씨처럼 보여 함부로 버리지도 못했대요. 그러다 양아버지는 오랜 생각 끝에 나의 이름을 그렇게 지어달라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대요. 그래서 Abcd라고 써놓고 ’압시드‘라고 발음해보았더니 꽤 괜찮더래요. 그렇게 나는 한국에서부터 영문 이름을 갖게 되었지요. (- 190쪽)


그러니까, 당신의 말은, 네 개의 알파벳은 한 남자의 슬픔이고, 유언이고, 알고 있는 세계의 전부라는 말이군요. (- 191쪽)


저쪽 세계에서 이쪽으로 건너와, 또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잘 쓰는 이름을 갖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로, 어디에도 제대로 소속될 수 없는 남자가 자기 인생에서 자기 것이라 가졌던 몇 안 되는 것에 대한 사연이다('가졌던'이라고 하기 애매하지만). 압시드가 미자에게 가졌던 감정과 압시드의 한국 친아버지의 마음이 애틋하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온 가족이 함께 이민을 갔다가, 화자의 어머니만 한국으로 돌아왔다. 며칠 동안 어머니와 함께 한국에 머물다 비행기 좌석이 없어 하루 더 머물게 된 화자, 폴의 이야기다. 한국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미국에서 자란 폴은 한국인의 외형을 가졌지만, 내면의 많은 것들은 미국 사람이다. 한국이라는 나라, 한국인이라는 사람들이 낯설고 어떤 벽을 느낀다. 하지만 택시 아저씨의 작은 친절, 호텔 흡연실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의 작은 호의로 한국에 작은 소속감을 느끼게 된다. 


폴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아들’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 사람과 ‘형’ 노릇을 해준 사람을 떠올렸다. 양말 장수 아저씨와 공항 체크인 데스크 직원 그리고 택시 안에서 들었던 거친 목소리의 주인공까지. 그들이 잘 지내야 엄마가 잘 지낼 것만 같았다. 그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오래전에 와봤던 곳을 찬찬히 바라보는 사람처럼 창밖에 두었던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히비스커스 붉은 꽃 하나가 소리 없이 활짝 피어날 것만 같았다. (- 220쪽)


불쾌한 기억은 불쾌한 대로, 좋은 기억은 좋은 대로 이곳에 감정과 기억을 뿌리내리고 소속감이랄까 정이랄까, 애틋함이랄까, 말로 쉽게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로드


엄마가 알려준 주소로 자동차 여행을 하게 되면서, 그동안 몰랐던 엄마의 마음과 엄마의 의도를 깨닫게 되는 이야기. 길은 한 장소와 다른 한 장소를 이어주고, 그가 사는 곳(집, 지역, 나라 등)은 그가 누구인지 알려 준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번에 엄마가 가보라는 집은 엄마의 어떤 정서가 그런 행위를 하게 만든 결과물이라는 거지." (- 238쪽)


진과 범의 눈이 명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에 모였다. 아, 하는 감탄사가 누군가의 입에서 먼저 흘러나왔고 동시에 다른 둘의 입에서도 터졌다. 다른 큰 집들에 가려진, 언뜻 보면 작은 별채 같은 크기의 집이었다. 그래도 그건 어디에서 보아도 '엄마의 집'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릴 집이었다. 대로에서 멀리 떨어져 차들이 많이 지나다니지 않고, 아이들이 집 앞에서 뛰어놀기에 안전한 컬드색, 단단한 붉은 벽돌집. 평소에 엄마가 노래처럼 말했던 그런 집이 그들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246쭉)


진은 여전히 엄마가 선택한 엄마의 집이라고 믿고 싶었고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엄마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진은 얼굴을 유리창에 더욱 바짝 붙이고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엄마라는 존재가 여전히 그녀를 놀라게 해 다행스러웠다. (- 247쪽)


나이를 얼마나 먹든, 우리는 엄마라는 사람, 엄마라는 존재가 느껴지는 안전한 장소를 희구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건, '소속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국적으로부터, 이름으로부터, 기억으로부터, 과거로부터, 꿈으로부터, 언어로부터, 소망으로부터, 친근함으로부터, 엄마로부터. 


아니, '소속감'이라는 것도 정확한 표현이 아니겠다. 인간 존재야말로, 어딘가 완전히 소속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대부분의 경계는 흐릿하고 모호하다. 단지, 자신의 믿음과 막연한 느낌만으로 자기를 규정하고 구성하는 게 아닐까 싶다. 정말로,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그림과 색채를 띤 홀로그램과 닮은 소설이었다. 다만, 형광 빛깔의 무지개색 홀로그램보다, 톤 다운된 따듯한 색감에 그림의 경계가 모호한 홀로그램의 소설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나와 다른 느낌을 받았을 테지. 그러니 정말 홀로그램 같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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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랑 - 김충선과 히데요시
이주호 지음 / 틀을깨는생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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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조선에 쳐들어 왔다가 귀화한 '사야가'의 이야기. 

사야가는 일본 장수로 조선에 침입한 지 얼마 안 되어 조선에 귀화했다. 조총과 화약에 통달했고 조선에 조총에 관한 많은 지식을 전수해 주었다고 한다. 귀화 후 왜군과 벌인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중에 선조로부터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사야가라는 이름은 낯설지만, '김충선'이란 이름은 낯익고 간질간질 생각이 날 듯 말듯해서 궁금증에 이 소설을 읽었다. 

소설 속 사야가는 조선에서 태어난 조선인이다. 조선 이름은 김석운. 김석운이 태어났을 때 조정의 당쟁이 극에 치달았고, 피비린내 나는 사화가 일어난다. 사화 속에서 김석운의 집안은 몰락하고, 갓난아기였던 김석운만 구사일생 살아남아, 일본의 장사치의 손에 건네진 후 왜군 용병 장수, 겐카쿠의 집에 팔려 간다. 

겐카쿠는 소위 전쟁고아들을 거둬 병사로 키우고, 용병 일을 수주받아 먹고사는 집안이었다. 돈만 주면 뭐든 할 수 있는 용병이라지만, 겐카쿠는 돈보다 오다 노부나가와의 유대 관계를 중시해 그의 군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는다.

겐카쿠의 집에서, 김석운은 '석(石)이라는 글자를 따서 '히로(사야가)'라는 일본식 이름을 갖게 된다. 히로는 겐카쿠의 용병 집단에서, '조선인'이라며 멸시를 받고 괴롭힘당한다. 그러나 히로는 일본 여인의 손에서 길러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항상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천식 때문에 어린 시절 몸이 약했고, 동료 아이들과 갈등을 곧잘 빚던 히로는, 어느 날 겐카쿠가 출정을 떠날 때 그의 딸 아츠카를 호위하는 일을 맡게 된다. 아츠카와 히로는 작은 일상을 나누고, 공연을 보며 정을 쌓다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히로는 몸은 약했지만 머리는 총명한 아이로, 포도국(포르투칼) 사람을 정기적으로 찾아가 조총에 대한 지식을 쌓고 포도국 말을 익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히로는 어린 나이에 일본 최고의 조총 전문가가 되었고, 조총에 적합한 전술을 개발한다. 히로의 전술과 히로가 개량한 조총 덕분에 오다 노부나가는 여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뒀고, 오다 노부나가가 승리할 때마다 히로의 이름도 일본 열도에 퍼진다. 

히로를 탐내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히로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히로는 돈이나 지위보다 '아츠카'가 제일 소중했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제안을 번번이 거절하고, 그러자 히데요시는 히로의 주변 사람들을 파괴한다. 우선 양아버지라 해도 상관없을 겐카쿠를 죽였고, 그다음 히로의 연인, '아츠카'를 인질로 삼는다. 히로는 히데요시의 인질이 된 '아츠카'를 위해 그가 일으킨 임진왜란에 참전한다.

히로는 고향인 조선에서, 왜군들이 벌이는 살육에 괴로워 하지만 아츠카와 만날 날을 위해 묵묵히 전투에 임한다. 그러다 어느 날 히데요시로부터 밀명이 떨어지고, 그 밀명을 완수하기 위해 히로는 몸을 움직인다. 

책은 두껍지만 흥미진진한 전개로 빨리 읽힌다. 소설이지만, '과연 그럴 듯하다'라는 생각도 들고 우여곡절 끝에 히로처럼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이 많겠다 싶었다. 

이 책을 읽고 제일 흥미로웠던 건 조선과 일본의 차이. 나는 우리와 일본이 상당히 다른 가치관과 문화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역랑』을 읽고 그 차이는 어디서 비롯한 것인지 조금 이해하게 됐다. 

  히로는 일본과 조선의 차이를 먼저 이해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는 성이 함락되면 성주는 할복하고 성에 사는 주민은 항복하여 해당 지역이 평정되는 것이 전쟁의 기본 방식이었는데 조선은 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각지에서는 백성이 저항했다. 이것이 고려 시대까지 올라가는데 현종, 고종, 공민왕도 이러한 방식으로 불리한 형편을 타개했었다. 조선 백성에게는 별로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일본군 입장에서는 굉장히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백성이 정복자에 대항하는 실정에도 충격받았다. 일본에서 백성이란 단순히 거주를 이전하는 자유도 없는 영지에 부속된 농노나 전리품일 뿐이었다. 일본은 이런 차이를 모른 채 정복한 조선에서 보급과 급료 등의 비용을 충당할 예정이었으므로 기본 계획에 큰 차질을 빚고 말았다. (- 305~306쪽)

이 구절을 읽고 '하아!' 감탄사를 냈다. 과연!

이 땅의 유서 깊은 '지도자의 비겁함'은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이어져,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전 대통령이 다리를 끊고 도망간 일이 떠오른다(다리 끊지 말고, 비겁함을 끊으라고!!). 


오다 노부나가나 히데요시, 이에야스를 우리 국사 책에서만 접하고, 따로 일본 역사 책이나 역사 소설은 접하지 않았는데 이 소설을 읽고 일본 전국시대 말기, 이 세 사람에 대해 조금 알 수 있었다. 조선에서의 전투 장면은 유성룡의 『징비록』에서 접했는지라 여전히 숨통 막혔지만, 의병이 일어나고 이순신 장군의 활약이 시작되자 뭔가 유쾌, 통쾌, 상쾌해졌다. 


전반적으로 흥미롭게 잘 읽었다. 다만, 작가의 상상력이 많이 가미된 역사 소설로 실제 역사와 저자의 상상은 독자가 구분해야 하고, 온전한 사실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그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흥미가 다소 떨어진다. 우리 역사의 치부가 나오기 때문에 부끄러움과 외면하고 싶은 마음에 이럴 수도 있다고 본다. 또 전투 장면은 사실, 글로 묘사하기 상당히 까다롭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만 더 잘 써주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어렸을 때 읽은 초한지나 삼국지, 뭐 이런 소설에 길들어져서 일랑가요?!) 그리고 히로가 조선에 대해 왜 매력을 느끼는지, 그에 대한 이유도 약하다. 조선 땅에 건너와 도인 같은 사람이든 아주 인상적인 사람을 만나 감화된 부분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비슷한 설정을 저자가 한 것 같기도 한데, 설득력이 좀 떨어진다고 느꼈다. 


아쉬움은 있지만, 재밌게 잘 읽었고 영화로 제작하기에 좋은 소설 같다. 시나리오 원작으로 활용하면 좋겠다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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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김신회 지음 / 놀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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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다. 다만, 처음엔 두려움이 들다가 점점 익숙해져 편안한데 그러다 어느 시점부터 심적 압박에 조급함, 죄책감이 든다. 어쨌든 고도로 분업화된 세상 속에서 아무것도 안 해도 어떻게든 살 수 있지만(분업화된 자본주의기 때문에 가능), 결코 아무것도 안 하기란  힘들다.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혼자 벗어나 살 순 없기 때문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라'고 말했던 장면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학생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주장하며 가만히 서 있던 학생이었다. (우앗, 멋있어. 생각도 못 했는데!) 오래전에 본 영화로 많은 장면이 기억 속에 잊히고 사라졌는데, 그래도 딴 건 다 잊어도 이 장면은 잊지 못하겠다(아, 그렇다고 해도 학생들이 책상 위에 올라간 건 잊을 수 없죠). 그때까지 내가 갖고 있던 하나의 편견, 고정된 생각을 깨준 장면이었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불안을 항상 안고 사는 것 같다. 불안해 보이는 사람도 그렇고, 자기 일에 매진하는 사람도, 뭔가 태평스러워 보이는 사람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안이 있다. 왜 모두 불안을 갖고 사는지 모르겠지만, 이 불안은 현대인의 규정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된 지 오래. (이 불안을 오래전에 제대로 통찰한 사람이 프란츠 카프카와 뭉크가 아닐까 싶다)


좋은 것도 아니고, 우릴 억압하는 '불안'을 왜 가져야 하는지.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하는 대중사회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잊은 채 대중이 움직이는 흐름과 물결에 떠밀려 살아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익명의 불특정 다수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본인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다. 이런 영향은 어느 순간에, 버거움과 강박증으로 드러난다.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는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를 쓴 김신회 작가의 에세이다. 책은 저자가 일상에서 느꼈던 '감정의 불편'과 그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해 했던 생각, 그리고 깨달음이 쓰여있다. 


그리고 이 책을 관통해서, 저자가 다소 방어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을 읽고도 든 생각인데 결국에 인생은 '자기 자신과 자기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궁극적인 우리의 목표. 우리가 느끼는 불안함,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불편은 '내 마음과 내 행동' 혹은 '나 자신과 내가 놓인 환경'의 <괴리>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과 말이 불편한 건, '내가 바라보는 나'와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나'의 괴리에서 오는 당혹감, 속상함인 것 같다. 근데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우리가 어떻게 손써 볼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 


그나마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바로 나 자신. 나를 '내가 원하는 나'로 조금씩 바꿔가며 일치시키는 수밖에 없다. (뭐, 종교적으로 말하면 '합일'이랄 끄나) 남에 대한 마음, 남에 대한 섭섭함을 백날 생각해봤자, 바뀌는 건 없고 늘어나는 건 타인에 대한 미움과 자괴감, 무력감 뿐이다. 페르소나, 즉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모습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된다면 다른 사람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건 '생각'보다는'믿음'의 문제다. 


지금 생각나는 사람이 사르트르인데, 그의 자서전을 보면 그는 자기가 자기가 원하는 행동을 하고, 자기가 원하는 목표를 이룰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고통은 있겠지, 하지만 사르트르는 이 고통을 실제로 느끼기보다 외할아버지와 누나 같던 엄마에게 보여 준 '고통을 감내하는 연기'에 가까웠고, 이런 연기가 그의 인생을 관통했다고 봤다. 그는 페르소나에 짓눌리기 보다 페르소나를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세상과 삶을 보다 흥미롭고 재밌게, 그리고 용감하게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내 말은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고 크게 별일도 없으니, 자유자재로 자신을 연기해도 된다는 말이다. 이는 능동성이다. 이 능동성이 우리를 자유케하고, 세상을 낙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며, 본인을 단단하게 만든다. 


다음 책에서는 좀 더 가벼워진 모습, 팔을 휙휙 흔들며 씩씩하게 걸어가는 저자를 만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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