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중심은 나에게 둔다 - 싫은 사람에게서 나를 지키는 말들
오시마 노부요리 지음, 황국영 옮김 / 윌북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 아침에 신문 기사 하나를 읽다가 충격 받았다. 기사는 충격을 넘어 엽기적인데,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동네 일진을 군대에서 만났다. 가해자(어릴 때 일진)는 제3자가 분실한 물건 값과 가해자 본인이 패배한 내기 당구 비용을 후임인 피해자에게 뒤집어 씌웠다. 이틀동안 2,000만원의 허위빚을 씌운 것이다. 피해자는 제2금융권에 빚을 내고 가해자가 요구한 빚을 다 갚았다. 그러나 가해자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콩팥 하나에 1억이고, 사람은 콩팥 하나만 있어도 사니까 콩팥 하나 팔아 1억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가해자를 두려워한 피해자는 장기 밀매 브로커와 접촉까지 했다고 한다.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협박과 폭행을 일삼았고 그래서 총 8,300여 만원을 뜯어냈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갈만한 내용인데, 문제는 세상에 없을 법한 이런 엽기적 뉴스가 종종 보도된다는 것. 위의 기사 내용을 쓰니 또 다른 사건 하나가 기억난다. 이 사건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다. 여중인가 여고인가 둘이 동창인데, 커서 우연히 만났다가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노예처럼 부리고 협박해, 가정을 파괴하고 그 동창을 노래방 도우미로 전락시킨 후 지속적으로 돈을 상납 받았다는 것.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엽기 사건 속 가해자와 피해자의 심리를 이 책으로 조금 이해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오시마 노부요리의  『오늘도 중심은 나에게 둔다』이다. 


책 내용은 위 사례처럼 엽기적이지 않다. 그것과 반대로 다정다감하고 말랑한 느낌의 책이다. 신간이라 책을 다룬 언론 기사와 리뷰가 많은데, 읽어보니 많이들 이 책이 힐링 책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위로가 목적인 힐링 책과는 결이 좀 다른 책이었다. 상처받은 마음을 다독이는 게 주목적이 아니라 인간 심리를 분석하며, 대인관계에서 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제적 방법을 제시했다. 


이 책은 ① 별것 아닌 언행을 과대 해석하는 사람, ② 속마음과 달리 상대방에게 다 맞춰주다가 불만이 쌓인 사람, ③ 혼자 있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떠올리며 분노를 축적한 사람들(7쪽, 머리말 중에서)을 위한 책이다.


 

남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며 타인의 기분을 우선하다 보면 '진짜 내 감정'을 알 수 없게 됩니다. 진짜 내 감정을 알지 못하면 늘 남의 기분만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상대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그리고 인정받기 위해 계속 애를 쓰게 됩니다. 하지만 노력한다고 해서 상대에게 인정과 감사를 받는 일은 없습니다. (- 27쪽, 『오늘도 중심은 나에게 둔다』)
사실 그것은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닌 '뇌'의 문제입니다. 뇌에는 다른 사람의 행동을 흉내 내는 '거울 뉴런'이라는 신경 세포가 있습니다. 1996년 이탈리아의 뇌과학자에 의해 발견된 이 신경세포는 타인의 동작을 볼 때 뇌 속에서 자동으로 그 사람의 행동을 흉내 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거울 뉴런이라는 명칭은 마치 거울과 같이 타인의 행동을 보고 자신이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반응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혹시 긴장한 사람 옆에서 덩달아 긴장을 느껴본 적 없나요? 상대가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 뇌가 자동으로 그 사람을 흉내 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 34쪽, 『오늘도 중심은 나에게 둔다』)



이 책은 똑같이 따라 하는 것을 넘어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그런 감정까지 '뇌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영향받는다고 한다. 가령, 거만한 사람이 나를 얕잡아보면 상대방에게 반발하면서도 상대방 생각대로 나 자신이 위축되고 상대방에게 맞춰주기 위해 노력하게 되며, 또 그 사람 나를 대하는 것처럼 자기 비하와 자기혐오에 빠지게 된단다. 


타인에게 옮은 긴장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듯, 고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고치지 못해 괴로운 다른 증상들도 실제로는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 가까이 있는 사람의 뇌를 거울 뉴런이 자동으로 흉내 내면서 생겨난 증상일 수 있습니다. (- 34쪽, 『오늘도 중심은 나에게 둔다』)


뇌는 특정 상대에게 주목하면 그 상대의 뇌 상태까지 흉내 내는 성질이 있습니다. 말려들기 쉬운 사람들은 늘 자신의 감각이 아닌 상대의 감각에 주목하기 때문에 상대의 뇌를 흉내 내어 '빙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상대의 부정적인 인격까지 흡수해버리죠. (- 34쪽, 『오늘도 중심은 나에게 둔다』)


그러니까 이 책의 저자 말대로라면, 위에 엽기적인 사건 속 피해자는 가해자의 뇌 상태를 흉내 내 '빙의'된 것이다. 본인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가해자의 말에 영향을 받아(혹은 협박을 곧이곧대로 믿고), 수천만 원을 마련해 준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피해자 입장에서는 그렇게 조종을 당하는 입장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태를 좀 더 확장시키면, 사이비 교주와 사이비 교인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 


아무튼 『오늘도 중심은 나에게 둔다』는, 기사 속 가해자나 피해자, 사이비 교주-교인의 관계처럼 극단적이지 않으나 일상에서 마주치는 불편한 느낌, 불편한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제시하는 이 불편한 관계를 끊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기 암시이다. 타인의 생각, 즉 타인의 뇌에 동기화되지 말고, 자기 스스로 자기 믿음 그러니까 자기 암시를 하라고 한다. 억지로 노력할 것 없고 그냥 담담히, '나는 이러이러하다'라고 가볍게 생각하면 된다. 이렇게 글을 쓰니 뭔가 와닿는 게 약한데, 실제로 좀 이건 직접 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 '자기 암시', '자기 믿음'으로 효과를 많이 봤기 때문에 문제 해결에 대한 저자 의견에 동의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해결 책, '동경하는 사람 따라 하기'. 이것도 거울 뉴런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활용한 해결책으로 적극 강추하는 방법. (그런데 이 방법도 '자기 암시'와 상통하는 방법이다.)


누구나 때때로 대인관계가 잘 안 풀릴 때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특별히 별난 상대를 만나 힘든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되었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늘 위축되고 애로를 겪는 사람을 위한 책이다. 그런 분들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강추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계회도 살인사건 서해문집 청소년문학 5
윤혜숙 지음 / 서해문집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해문집, 청소년 문학 다섯 번째 책 『계회도 살인사건』

한자리에 앉아서 그대로 다 읽었다. 296쪽으로 결코 얇은 책은 아니지만 청소년을 대상으로 쓰인 작품으로 글자가 조금 크고, 글자 간격도 시원시원해서 빨리 읽혔다. 또 뒷이야기가 궁금해 계속 읽게 되는 추리소설인 것도 한몫. 가독성 굿, 몰입감 굿굿. 재밌게 잘 읽었다. 



│계회도(契會圖)란?


계회도란 말이 낯선데, 계는 맺을 계(契), 회는 모일 회(會), 도는 그림 도(圖) 자로, 여기서 회(會)를 우리말로 바꾸면 '모임'이어서 계회(契會)는 <계모임>이란 뜻이고 계회도(契會圖)는 '계모임을 그린 그림'이다. 


요즘 계모임이라 하면 여행이나 친목을 위해 함께 돈 모으는 모임이란 의미가 강하지만, 옛날만 해도 문인(文人)들의 모임이었다. 고려 시대 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해 조선시대까지 이어오다가, 조선 후기 접어들어 사대부 문인뿐만 아니라 중인들까지 계모임을 결성해 글을 짓고 풍류를 즐겼다. 이 모임을 기념하고, 후에도 이 모음을 했었다고 기억하기 위해 단체사진을 찍는 것처럼 단체 그림을 그린 것이 바로 계회도(契會圖)이다.


조선 후기 사대부뿐만 아니라, 중인과 평민들 사이에서도 계회가 유행하다 보니 글 모임뿐만 아니라 다른 모임까지 다양하게 활성화된 듯하다. 시전 상인들의 봄나들이나 동네 장정들의 복날 모임, 나장이나 아전들의 동기 모임, 거기에다가 서당의 책거리 날까지(51쪽, 『계회도 살인 사건』), 그림 그리는 사람을 불러 계모임 모습을 남겼다(이것만 봐도 이전과 달라진 조선 후기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신분질서의 요동침). 


여기서 재밌는 것은, 모임에 참석한 사람이 여러 명이다 보니 그림을 한 장만 그리는 게 아니라, 참석한 사람 수대로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래서 계회도를 그리는 사람은 빠르게 그림을 그려야 함은 물론이고, 여러 장의 그림이 들쭉날쭉하지 않고 균일한 실력으로 그리는 것이 특히 중요했다. 


│『계회도 살인 사건』 줄거리


계회도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진수의 아버지가 3년 전 광통교 다리 밑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비밀리에 진행되었던 계모임을, 진수 아버지가 몰래 계회도로 그린 지 일주일 만이었다. 의심스러운 점이 많은 살인사건이었으나, 단순히 검계(劍契 : 칼을 차고 다니는 모임)의 짓으로 흐지부지 일단락 되었다. 3년 후, 그동안 진수를 가족처럼 돌봐온 '인국'이 갑자기 진수 아버지의 살해범으로 밀고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간다. 


『계회도 살인 사건』은 진수 아버지의 살해범으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혀 있는 인국을 구하기 위해, 진수가 고군분투하며 인국의 무죄를 밝히고 아버지 죽음의 전말을 알아낸다는 이야기다. 용의자는 크게 세 명인데, 한 명은 포도청에 끌려간 인국이고, 또 한 명은 장 화원이라고 해서 아비 잃은 진수를 거둬 그림을 그리게 한 사람이나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고, 나머지 한 명은 당시 세도 가문이었던 김조순의 친척인 김대감이었다. 용의자 세 명 모두 뭔가 숨기는 것이 많아 모두 의심스럽다. 


장르는 역사 추리소설로, 반전의 반전이 있어 끝까지 읽어야만 범인을 알 수 있다. 이야기가 곁다리로 흐르지 않고 진범을 찾기 위해 한줄기로 흐르기 때문에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이것은 추리소설의 강점). 그뿐만 아니라 역사 소설이기 때문에,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며 완전히 단절돼 버려 뭔가 아주 오래전 옛날이야기 같은 조선 후기 생활상을 조금 엿볼 수 있어 좋다(이것은 역사소설의 강점). 그리고 청소년을 독자로 쓴 책이라, 살인 사건을 다루지만 자극적이지 않고 다소 청소년에게 낯선 우리 고유의 어휘가 사용되지만 맥락상 뜻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어 독서를 방해하지 않고, 어휘력 향상에도 좋을 것 같다. 


│나의 감상


역사 소설은 이주호 작가의 『역랑』 이후 한 달인가, 두 달 만에 읽는데 잼잼이요- 진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밥 먹기 위해 잠시 자리 비운 건 빼공) 청소년을 위해 쓴 책이라,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적인 내용이나 어휘는 거의 없지만, 읽다 보면 작가가 자료 수집을 많이 했구나 싶다. 이 소설보다 조금 앞 시대 사람인 김홍도와 신윤복에 대한 소설은 많지만, 이렇게 이름 없는 화가(진수)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 시대를 엿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조선은 왕과 신하들로만 이루어진 나라가 아니었고, 독보적인 실력을 갖춘 천재들만 살았던 나라도 아니었다. 무수한 무명 씨들로 이루어진 나라였고 그 무명 씨들도 꿈을 꾸고 꿈을 실현하며 조선의 톱니바퀴를 움직였다. 이렇게 재미있고 진입장벽인 낮은 역사소설이 많이 쓰여서, 지금과 단절돼 버린 조선과 한결 가깝고 이해도가 높아졌으면 한다. 


한참이나 그림을 들여다보던 나는

손끝으로 풀숲에 박혀 있는 글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버지, 이건 뭐예요?"

"그건 기억할 '억'이라는 글자지."

"기억? 그게 뭔데요?"

"시간이 사람 가슴에 새겨 놓은 그림 같은 거지."

아버지가 팔딱거리는 내 가슴을 가리키며 웃었다. 

아버지의 사람 좋은 웃음이 떠올라 가슴 한끝이 얼얼했다. 

(- 24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의 히나타 식당
우오노메 산타 지음, 한나리 옮김 / 애니북스 / 2018년 9월
평점 :
품절


가쿠다 미쓰요의 에세이를 읽었을 때 봤을 거다. 우오노메 산타 씨 이름을. 

'산타, 산타... 진짜 이름이 산타야?! 일본 이름에는 산타가 있구나. 왠지 크리스마스가 떠오르네.'라고 생각했던 기억. 아마도 가쿠다 미쓰요의 『이제 고양이와 살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에서 본 것 같은데, 거기서 본 이름이 정말로 '우오노메 산타'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희미한 기억으로든 날조된 기억으로든 산타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 고양이와 살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에서 가쿠다 미쓰요 씨가 산타 씨의 만화를 상당히 좋아한다고 적어 놓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은, 나도 좋아하고 싶은 법. 기회가 생겨 산타 씨의 『행복의 히나타 식당』을 읽어 보았다.



총 25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단행본 만화책이다. 무슨 사연을 가졌는지, 젊은 엄마가 두 아이만 데리고 도쿄로 급작스럽게 상경해 음식점을 차리고 자리를 잡는다는 스토리가 이 만화책의 큰 줄기이고, 각 에피소드마다 하나의 일본식 정식이 소개되며 그 음식을 먹는 손님의 사연이 나오는 형식이다. 


주인공 엄마 이름은 데루코, 첫째 아들 이름은 간타, 둘째 갓난아기의 이름은 히나코이다. 아이 엄마와 첫째 아들의 사연은, 에피소드가 진행됨에 따라 조금씩 단편적으로 보여주다가, 후반부에 본격적으로 그녀의 사연이 나온다. 


읽다 보면, '엄마는 강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러 에피소드 중 제일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는, 카레라이스 편이다. 나이 지긋한 아저씨(젊은 할아버지)의 사연. 젊었을 때 아내가 아파서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마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병원 외출을 하게 되고, 가족은 집에서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먹는다. 음식 같은 건 하나도 할 줄 몰랐던 남편은, 아내가 알려주는 카레라이스 레시피를 받아 적으려고 하지만, 눈물이 앞을 가려서 도무지 쓸 수가 없었다. 아이가 우는 아빠를 보고 놀라자, 엄마는 "양파 매운 게 이제 올라왔나 봐."라고 말해서 딸은 꺄르르 웃는다. 그리고 얼마 후 아내는 죽었다. 장례식을 치른 후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는데 '남편에게'라고 적인 노트를 발견한다. 공책에는 냉장고엔 뭐가 들었고, 조미료는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많은 음식들의 레시피가 적혀 있었다. 딸아이 도시락 싸는 법까지. 여러 레시피 중, 가족이 다 함께 만들었던 카레라이스 레시피가 제일 자세히 적혀 있었는데 남편은 카레라이스만큼은 자꾸 그날 일이 생각나 만들 수 없었다. 남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딸아이를 키웠고, 사랑을 다했다. 


이제 딸이 커서 결혼할 남자가 생겼다. 딸과 신랑이 히나타 식당에 들러 데루코 씨가 만든 카레라이스를 먹고 와, 맛있다며 기분 좋은 미소를 활짝 짓는다. 예비 신랑이 이렇게 말한다.


     "사키는 표정이 참 좋단 말이야! 뭐랄까, 사랑이 듬뿍 담긴 요리를 먹어왔다고 할까. 솔직하게 맛있다는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거, 그거 굉장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럴지도 몰라. 왜, 우리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잖아. 그 뒤로는 아빠가 엄마를 대신해 주셨는데 매일 저녁 다른 곳에 들르시는 일도 없이 곧장 집으로 오셔서 저녁을 만들어주셨어. 근데 처음에는 참 못하셨거든. 계란말이는 다 태우고. 손가락은 칼에 베여 상처투성이였고...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가면 아빠가 만들어준 도시락이 창피해서 반 애들이랑 멀리 떨어져서 혼자 먹었는데 심술궂은 남자애한테 들켜서 난 엉엉 울어버렸어. 그래서 그날 아빠한테 '이제 도시락 싸지 말아 주세요.' 편지를 섰어. 다음날 꾀병으로 학교를 빠졌고 점심때가 되니 배가 고파서 뭐라도 먹으려고 부엌에 갔는데 냉장고에 아빠가 만든 볼품없는 감자 샐러드가 있었어. 감자는 덜 익은 데다 마요네즈도 잘 섞여 있지 않았지만.... 이때는 내가 좋아하는 사과가 들어 있어서 정말 맛있었어.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한참을 울면서 정신없이 먹었어. 다음날부터는 학교에 제대로 갔고 심술부렸던 남자애들한테 큰소리로 인사해줬어." 

- 104~109쪽, 우오노메 산타, 『행복의 히나타 식당』


이 대사들이 나올 때, 아버지가 서툰 솜씨로 사과를 깎는 장면이 있는데, 사과 껍질을 한 번에 깎지 못하고, 계속 끊겨서 각진 사과 모습이 나올 때, 그리고 사과 깎는 데에 집중한 아버지의 뒷모습이 정말 울컥한다.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해당 장면을 다시 보는데 눈물이 난다... 


정성이 듬뿍 들어간 따뜻한 음식이 맛있고, 사랑이 깃든 사소한 말과 행동이 내 마음을 따듯하게 하고, 뭔가 세상을 긍정적이고 가뿐하게 살도록 도와준다. 우리를 지탱케 해주는 건 이런 사소함이 아닐까 싶다. 사소하지만 전혀 사소하지 않은, 진정성과 따듯함. 


이 책에 실린 많은 에피소드들이 이런 따듯함으로 채워져 있다. 살면서 때론 상처를 입고, 그래서 살던 장소와 만나던 사람에게서 벗어나야 할 때가 있지만, 그래도 삶을 살아가게 하고, 강하게 만들어주는 건 사랑과 진정성, 따듯함이 아닐까 싶다. 


단행본 한 권, 짧은 분량의 만화책이지만, 울컥해서 많이 울었다. 가쿠다 미쓰요가 우오노메 산타 씨 작품을 왜 좋아한다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책에 적은 작가 이름이 진짜 산타 씨인지는 가물가물하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젠가 헤어지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F 지음, 송아람 그림, 이홍이 옮김 / 놀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볍게 읽으려고 펼쳤는데 생각보다 많이 공감하며 재밌게 읽었다. 

이런 유의 책을 뭐라고 해야 하나? 일단 분류는 에세이인데, 일상이나 경험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없고 그냥 저자의 생각이 많이 나열되어 있다. 음, 그러면 '수필'로 해석되는 에세이보다, '수상록(隨想錄)'으로 해석되는 에세이라고 하는 게 적절하겠다. 




저자, F(에프)는 일단 일본 사람이고, 남자고, 한 30대쯤 되어 보이는데 어리게 본다면 20대 후반 정도로 추측된다. 그렇다, 그냥 추측할 따름이다. 이 정도 정보 말고는 다른 정보는 크게 없다. 사실 나는 이 사람이 남자인지도 좀 의심스러운데, 글의 곳곳에서 여자의 느낌이 많이 난다. 성별도 불확실! 그래도 본인이 남자라고 하니, 남자이겠지만 이름도, 뭣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얼마든지 여자라고도 상상 가능하다. 문체나 글 내용이, 남자라고 하기엔 너무 여성스럽다. (근데 또 여성이라고 하기엔 남성스러운 면도 있긴 함) 글쎄, F라고 알파벳 하나만 올렸지만, 공동 저자일 수도 있을까. 셰익스피어의 미스터리처럼. 


어쨌든 공감가는 내용이 많고(특히 여성이라면! 그리고 여성을 독자로 쓰인 책이다), 재밌게 읽었다. 섹스 앤 더 시티의 느낌도 나고. 저자가 고리타분하지 않고 자유 분방하며, 자유 분방하지만 방종하지 않다. 자기만의 기준이 있고, 어느 선은 넘지 않는 것 같다. 자기 인생에. 


이 책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학창 시절 때 학교가기가 너무 싫어서 학교에 안 갔다는 이야기다. 중 3때, 저자는 선생님께 진심으로 학교에 오기 싫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F를 데리고 둘만 대화할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선생님도 학생 때 그랬다고, 학교는 가기 싫고 방에서 무전기로 외국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훨씬 더 좋았다고. 그런데 무전기로 외국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싶은데, 영어를 못하니 대화를 못했다. 그래서 외국어 공부를 해야 했고 공부를 하다보니 학교 선생님이 되어 있더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F에게 어떻게 해서든 선생님이 졸업까지는 책임져 주겠으니 학교 오기 싫으면 오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F는 학교에 정말로 안 갔다. 대신 도서관으로 가서 책들을 섭렵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매일 도서관에 갔는데 재밌게도 그곳 사서도 F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학생이 학교 땡땡이치고 도서관에 온 걸 사서는 정말로 몰랐을까. F는 그렇지 않을거라고 적었다. 묵인이랄까, 이해랄까. 암묵적인 비호를 받으며 도서관에 다녔던 것일 거라고. F는 선생님과 사서가 없었다면, 무사히 졸업하지 못했을 거라고 한다. 


F가 현재 정확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런 비호를 받고 자란 사람은 자기 인생에 책임감이 있고, 세상에 대한 어느 정도 믿음이 있을 거라고 본다. 그러니 『언젠가 헤어지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같은 책을 써냈겠지. 세상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자신의 내밀한 생각을 적을 수 없다. 


F는 무언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 언젠가 그것과 관련된 것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적었다. 그는 그게 글쓰기 였다. F가 언제 글쓰기를 멈출지 모르겠으나 일단 그는 한동안 더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할 것 같다. 나도 그의 이야기를 더 읽고 싶다. 


먹으면 먹을수록 머리가 나빠질 것 같은 
귀여운 딸기 아이스크림을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작은 스푼을 들면, 
일개 인간의 기분은 나빠지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애당초 우리에겐 
기분 좋게 사는 것 말고 
별 대단한 의무 같은 것도 없다. 

(- 12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홍차와 장미의 나날
모리 마리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잘 익은 홍시 색감의 표지. 

책 내용도 맛있을 것 같아서 읽었다. 



저자 이름 '모리 마리', 그녀 아버지 이름은 '모리 오가이'

'모리 오가이'라는 이름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는데, 일본 근대문학에 대단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그를 흠모하고 존경했다고 한다. 모리 오가이의 라이벌로는 나쓰메 소세키가 꼽힌다. 모리 오가이는 처음부터 문학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집안이 대대로 다이묘의 시의로 지내면서, 최상류층은 아니었지만 고등 지식을 접할 수 있었고 모리 오가이는 그 덕에 어린 나이에 동양 고전을 공부하고, 서양 외국어도 익힌다. 머리도 좋았던지, 19살에 현재 도쿄대 의학부를 졸업했는데 이는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최연소 졸업이라고 한다. 모리 오가이는 군의관이 되어, 독일에서 8년 동안 유럽 의학 공부를 하고 돌아온다. 이때 모리 오가이가, 치명적인 위생병에 걸리게 된다. 아, 눙물.... 


모리 마리가 쓴 『홍차와 장미의 나날』의 독후감을 쓰는데, 그녀의 아버지 '모리 오가이'에 대해 장황하게 쓰는 이유는, 이 에세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그녀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이 에세이는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와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 아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 있는데 생각보다, 아니 어느 페이지이고 그녀의 아버지 흔적이 없는 데가 없다. 


정말 부잣집에서 공주님으로 자란 모리 마리이기 때문에, 사실 그녀라는 독립된 인격체가 이 책을 썼다기 보다 '모리 오가이의 그림자', '모리 오가이의 사랑과 애정'으로 만들어진 그 무엇이 글을 쓴 느낌이다. 


모리 오가이는 너무하다 싶을 만큼 모리 마리를 귀여워했고, 서양 문화를 너무나 동경했다(모리 마리의 이름, 마리도 프랑스 이름이다. Marie....). 모리 오가이는 음식에도 좀 까탈스러운 면이 있었는데, 오랜 유학생활로 유럽 음식에 길들여져 있었던 터라, 독일 요리책을 직접 번역해 자기 어머니와 아내에게  레시피대로 요리해 달라고 했다. 이런 식문화를 가진 집에서 자란 모리 마리도, 유럽 식문화를 동경하고 뭔가 예의라던가 유럽 그대로의 레시피를 따르지 않으면 벌컥벌컥 화를 냈다고 한다. 모리 오가이가 그랬다는데, 그 아버지의 그 딸이라 모리 마리 역시 본인도 '병적일 만큼' 그러하다고 이 책에 적어 놓았다. 


책을 재밌게 읽었는데 일본 작가의 소소한 음식 에세이라기보다, 군인으로서, 문인으로서, 예술 애호인으로서 성공한 사람에게 무한정 사랑을 받고 자란 공주님의 에세이라는 게 참 재밌었다. 보통, 귀하게 자라 버르장 머리 없는 아이의 이야기는 많이 접할 수 있지만 본인이 직접 그러했다고 쓴 책은 그리 많이 없으니까. (아, 사르트르도 무한정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아서 작은 왕으로 군림하던 이야기, 외할아버지 서재에서 '관념론'을 키웠단 이야기가 있긴 하구나.)


어쨌든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 유럽 문화 광풍이 휘몰아치고 유럽 것이라면 좋고, 흠모하던 문화가 아직 일본에 있긴 한데(프랑스 음식을 추앙하고, 독일의 질서 있고 정갈한 생활을 동경하는 문화), 어느 정도 좀 우습기도 하고 흥미롭다. 이런 문화의 대표가 미야자키 하야오를 비롯하여 많은 애니메이션 작품에, 유럽의 아기자기한 마을을 배경으로 금발, 갈색 머리, 빨간 머리가 등장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저자, 모리 '마리'는, 자기 취향 확실하고 까탈스러운 '마리' 앙투아네트 같은 느낌이다.)


어쨌든 뭔가 흥미롭게 궁금하던 것을 의외의 책에서 답을 찾은 느낌이랄까. 


한 일본 작가의 소소한 에세이집이지만,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의 유학파 출신, 최고 엘리트 집안의 소소한 풍경을 볼 수 있어 좋다(어딘가 코미디 같은 요소도 있다). 해외 한 번 나가지 못하고, 일본 안에서 살았던 일본 문인의 에세이와 다르고, 태평양 전쟁 때 만주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작가들과도 다른 느낌이다. 시대 일본 상류층 엘리트 집안에 관심 있는 사람들께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