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 망국의 신하에서 일본 경제의 전설이 되기까지
시부사와 에이이치 지음, 박훈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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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제 근대화의 토대를 닦은 인물,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자서전이다. 입지전적의 인물. 일제강점기 우리는 그들의 경제와 금융, 산업 전반을 강제로 이식받았고, 광복 후에도 일본 경제를 롤모델 삼아 고도성장했으므로 일본 경제 근대화의 토대를 닦은 인물을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 읽었다.

읽고 난 소감은, 우리에게 직접적 해코지를 한 인물은 아니지만 넓게 보아서 우리나라를 일본의 병참기지화해 식민 수탈을 하게 한 사람으로 우리가 봤을 땐 '수탈의 아버지'라고 봐야 옳겠다 싶었다. 그러나 개인 인생만 따져 봤을 때 역시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난 인물'이었고 상황 판단이나 생각, 결단력은 본받을 바 많았다.

짧다고 생각하면 한순간도 아니고, 길다고 보면 천 년도 더 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일생이다. 하지만 짧은지 긴지는 꼭 흐른 세월의 숫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겪은 일들이 많은지 적은지에 따라, 또는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 내 생애를 말하자면, 옛날 고향에 있을 때는 쟁기와 소쿠리를 짊어졌고, 장마에는 나비가 밀을 먹어버릴까 걱정했으며, 가뭄에는 묘판에 물이 부족한 것을 원망하며 살았다. 그러나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한탄하여, 겁 없게도 국가의 우환을 자신의 우환이라고 여겨 줄곧 살아왔던 초가집을 떠나 서쪽의 수도[교토]로 갔다.

시부사와 에이이치, 『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21세기북스 (p. 14)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작은 농촌 마을에서 농사꾼으로 태어났다. 부지런하고 엄한 아버지가 가계를 일으켜 세웠고,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에는 글 공부하고, 좀 자라서는 농사와 상업을 배운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아버지를 무척 존경하고 사랑했던 것 같다. 비록 뜻이 달라 각자의 삶을 살게 되지만, 어린 시절을 회고한 글을 보면 그가 아버지에게 배운 바 많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께 혼나거나 잔소리 때문에 섭섭했던 일도 있었지만 커서 보니 아버지의 올바른 우려였다고 받아들인다.

그의 아버지가 정말로 멋진 분이었던 게,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나 뜻을 도모하려 했을 때 그가 아버지와 밤새우며 토론했다는 일화다. 시부사와는 도쿠가와 막부 시대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농사꾼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을 아버지께 말씀드리니 아버지는 농사꾼으로 태어난 이상, 농사 지으며 신분을 바꿀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이윽고 아들의 뜻을 인정하고,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가도록 자유인으로 풀어준다.


"이제 아무 말도 않겠다. 좋다,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니 맘대로 해라. 지금까지의 토론으로 시세도 잘 알게 되었다. 그런 것을 알고 나서도 그게 네 몸을 망칠 씨앗이 될지, 아니면 이름을 날릴 바탕이 될지 그건 난 모르겠다. 그래, 시세를 잘 알더라도 모르는 것처럼 나는 보리를 기르며 농민으로 세상을 보낼 거다. 설령 정부가 잘못되었더라도, 관리가 무도한 짓을 하더라도 그에 상관하지 않고 복종할 생각이다. 그런데 너는 그럴 수 없다고 하니 하는 수 없지. 오늘부터 너를 자유로운 몸으로 해 주겠다. 그렇다면 이제 종류가 다른 인간이니 대화 상대로 여기지 않겠다. 앞으로는 부자가 각각 자기 좋은 바에 따라 움직이는 게 오히려 깔끔할 것이다."고 하시며 마침내 14일 아침 내 몸의 자유를 허락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 『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21세기북스 (p. 52)

"앞으로는 결코 네 행동에 이래라저래라 지시하지 않을 테니 행동에 잘 주의하여 어디까지나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한 조각 성의를 실천하여 인인 의사라고 칭해진다면 생사와 행불행에 상관없이 나는 만족스럽게 생각한다."고 훈계하신 것은 지금도 여전히 귓전에 있는 듯하여 얘기를 하다가도 곧잘 눈물이 난다. 

시부사와 에이이치, 『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21세기북스 (p. 53)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큰 인물로 키운 건 바로 그의 아버지 덕분이 아닐까. 떠날 때 이런 말씀을 해주고, 어떤 믿음을 주는 분이 아버지라면 세상 두려울 것 없을 것 같다. 우리와 역사적 관계를 떠나서 오로지 인간으로만 따졌을 때 그는 참 좋은 아버지를 두었고, 그의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마음속 저 깊은 곳에 소중한 보물을 심어주셨다. 부럽네. 난 세상에 심드렁해서 질투도 부러움도 잘 느끼지 않지만, 좋은 아버지와 존경할 수 있는 아버지를 둔 사람만은 정말로 부럽다.

이 책에는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파란만장했던 젊은 날들이 서술되어 있으나,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던 어린 시절의 일화가 제일 와닿았고 가슴 먹먹했다(위의 발췌문은 나 개인적으로 정말 감동했다).

고향을 떠난 시부사와는 거물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나 같이 뜻을 도모한 사람이 끝까지 반대해 결국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그는 처음엔 화가 났으나 곧이어 그가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고 믿게 된다. 이후 방랑의 시간이 이어지고, 그를 좋게 본 사람의 추천을 받아 민부공자(미토의 군공 도쿠가와 요시아쓰의 아들, 도쿠가와 아키타케)를 모시고 프랑스 만국박람회에 참석한다. 그곳에서 유럽 문물을 받아들인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관찰력이 뛰어나고, 설득력 있는 말을 잘해 중재도 잘하며 이재에도 밝았다. 아마 이런 능력으로 짧다면 짧았다고 할 수 있는 유럽 방문 때(사실 이 기간보다 더 많은 기간 동안 해외 유학해도 별것 배운 바 없이 돌아오는 사람도 많다) 많은 것을 빨아들이듯 서구 문명과 문화, 그들의 제도를 흡수해 온다.

이것이 일본 경제 근대화의 토대가 되었고, 우리 조선을 옥죈 근본 원인이 된다(식민 경제의 근간을 받아 온 것이니까).


​///

박훈 교수님의 번역이 상당히 좋다. 예스러우면서 리드미컬하게 흐르는 좋은 문장을 구사하신다. 다만, 일본 번역이므로 일본식 문장이 눈에 조금 띄는데 그래도 대부분 우리 식의 문장을 유려하게 쓰셨다.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쓰시는 분인가 보다. 그런데 이 책은 일본 근대를 살았던 한 개인 자서전으로 지엽적인 고유명사(이름, 지명 등)나 일본의 독특한 제도 등이 지속적으로 나온다. 일본 근대 역사나, 일본 관련 기본 지식이 없는 분들은 읽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일본 근대화에 관심 있으신 분, 일본 근대화의 격변기 때 한 개인의 인생을 길라잡이 삼아 그 시대를 읽고 싶은 분께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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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3 : 세종·문종·단종 - 백성을 사랑한 사대부의 임금 조선왕조실록 3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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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왕조 역사를 살펴보면 예외 없이 하나의 진리가 있다. 선대 왕이 지은 과보가 당시에는 꾹꾹 눌러져 억압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일어나 후대 왕을 덮친다는 것이다. 문제의 씨앗은 결코 없어지지 않으며, 반드시 화가 일어난다. 역사가 슬프면서 흥미로운 건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덕일의 조선왕조실록. 이번에 3권이 나왔다. 1권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이야기를 다뤘고, 2권은 태조의 아들인 정종과 태종 대의 이야기다. 따끈따끈 신간인 3권은 애민의 王인 세종과 비극적 부자(父子) 왕인 문종과 단종을 다루고 있다.

일단 이 책을 읽기 전에 저자 이덕일 씨가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역대 왕의 재임 시기에 있었던 중요한 일이나 왕의 스타일에 집중하고 있다. 책의 구성이나 서술이 '객관'보다 '주관'적이며, '기록' 자체보다는 기록에 대한 '해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이덕일 씨의 『조선왕조실록』은 교과서적인 정보와 지식 제공이 목적이 아니라, 저자가 선별한 주제와 내용에 대한 해석이다. E. H. 카 식으로 말하자면, 저자는 적극적으로 대화하는 역사가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서 이 책은 고조선-현대사까지 국사 교과서를 한 바퀴 이상 읽어 어느 정도 조선 역사를 파악하고 있는 고등학생이나 성인이 읽기에 좋다.




그럼 이제, 책 내용-


│세종│

세종이 오랫동안 왕세자였던 양녕대군을 제치고 조선의 네 번째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인 태종에게 절대 충성하고 문(文)을 좋아하며 어진 마음을 갖고 있었다. 태종을 닮기로는 세종보다 양녕대군이 더 닮았지만, 양녕대군은 이런저런 사고를 계속 쳤고, 무엇보다 태종에게 반항한 적이 있다. 그걸 두고 볼 태종인가. 그래서 태종은 세종을 선택했다. 왕세자가 아니었던 세종이 왕이 되었으니, 태종은 후대를 위해 다시 피를 보았는데 그 희생양은 태종의 사돈이자 세종의 장인 '심온'의 제거다. 당시 '심온'과 척을 두던 '박은'과도 그 뜻이 맞아 태종은 심온을 제거했다. 심온의 아내이자 세종의 장모는 천인 명부에 올랐다. 효성스러웠고, 어버이 뜻이라면 하늘의 뜻으로 아는 세종은 태종이 죽은 후에도 장모 천안 문제를 함부로 건들지 않았다. 그만큼 세종은 태종의 뜻을 따랐다. 세종이 이렇게 순종적이므로 태종이 양녕대군 아닌 세종을 후대 왕으로 택한 것일 듯.

저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세종의 다른 면을 보여준다. 세종은 신분제를 중시한 왕으로, 사대부의 권익을 대변했다고 한다. 그 예로 <수령고소금지법>과 <종모법>을 들 수 있다. <수령고소금지법>은 백성이 고을 수령으로부터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했든, 수령이 그 어떤 비리를 저질렀든 역모가 아니면 수령을 고소할 수 없는 법이다. 수령에게 억울하게 땅을 빼앗기거나 송사에서 불합리한 대우를 받았다 해도 고소 금지다. 고소하면 고발인이 곤장을 맞거나 온갖 핍박을 받았다. 이 때문에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세종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백성의 불만과 억울한 일이 끊이지 않자, 후에 개선되었지만 어쨌거나 구중궁궐에서 사대부의 책을 읽고, 사대부의 생각을 하고, 사대부가 옳다고 하는 왕으로 살던 세종은 백성의 권익과 괴리된 생각을 했다.

종모법도 마찬가지다. 태종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양인으로 만들고, 세수 확장을 위해 <종부법>을 시행했다. <종부법>은 사대부에게 불리한 법이다. 대부분 결혼은 남자 양인- 여자 천민이 결혼했는데, 남자 신분을 따를 경우 자기 소유의 비가 낳은 아이들이 다 양인이 된다. 조선시대는 노비는 곧 재산이었으므로 사대부의 재산이 줄어드는 꼴이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태종이 죽고 세종이 왕이 되자 <종부법>에서 <종모법>으로 회귀를 주장했다. 세종은 사대부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상, 이 책에서 읽은 세종의 새로운 면이었다. 조선 애민의 왕이라 하면 세종이 떠오르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시대의 한계는 이렇게 크다.

그래도 왕으로서 연륜을 쌓고, 학식이 깊어져 성군이 되었다. <수령고소금지법>도 탄력적으로 바꾸고, 글 못 읽어 억울한 일 당하는 어린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일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니까. 최고 권력자가 글 못 읽는 백성을 위해 새로운 글자를 만든다는 게 이 세상 역사에 세종 외에 한 번이라도 있었던 일이 있나. 단 한 번도 없다. 게다가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동양 철학을 함축하고 있는지... 보통 성군이었다가 나이를 먹으면 졸군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세종은 더욱 좋은 임금이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얼마나 대단한지. 세종이 우리 역사에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참 좋아.


│문종, 단종│

물론 세종에게서 비극적 일의 시발점이 되는 일도 있었다. 병약한 왕세자를 대신해 둘째 아들을 너무 많이 활용했다. 꿍꿍이가 있는 신하를 의심할 줄 몰랐다. 수양대군이 왕이 될 마음을 언제부터 품었는지 모르겠으나, 한두 해에 걸쳤던 건 아닌 것 같다.

저자는 문종의 독살을 의심한다. 대놓고 독살이라고 하진 않지만, 문종 때 도승지 강맹경의 의뭉스러운 행동과 어의 전순의의 이해되지 않는 처방을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 소개하고 있다. (진짜, 진짜 그런 걸까. ㅠㅅㅠ)

문종은 충분히 나을 수 있는 병(종기)으로 죽었다. 잘못된 치료와 상극의 식이요법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문종의 죽음으로 아직 준비되지 않은 단종이 왕으로 즉위했고, 나이에 비해 총명하고 지혜로웠지만 권세 있고 권력 있던 수양대군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문종과 단종의 비극은, 어쩌면 세종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나 싶다. 태종처럼 형제, 아들, 외척, 공신 불문하고 의심하고 길들였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세종이, 이제 왕실에서 피를 끊겠다는 그 다짐이, 다시 피를 부른 결과를 낳았다.



///

역사는 이래서 슬프고, 이래서 흥미로운가 보다.
조카의 피를 보고 왕이 된 세조 역시 그러하다. 과보는 기어코 새 생명을 얻어 다시 돌아온다.


다음, 『조선왕조실록 4』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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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서 77
마이클 콜린스 외 지음, 서미석 옮김 / 그림씨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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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죽어 사라져도 기록은 남는다. 

기해년 새해를 맞아 호기롭게 읽은 서해문집, 『불멸의 서(書)77』 



책 제목처럼 인류에게 의미 있는 책 77권을 선별해 해당 책이 인류에게 특별한 이유와 책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고, 해당 책의 표지나 대표적인 페이지를 총 천연 컬러풀- 대형 도판으로 담아냈다. 도판이 시원시원하게 큰 사이즈로 그 때문에 책이 무척 크다. 



스타벅스 다이어리 기본 사이즈인 빨간 다이어리와 비교샷. 스벅 빨간 다이어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책과 크기가 비슷할 것이다. 그 책의 거의 3배쯤 된다. 얼마큼 큰지 느껴지시나요?!



잘 안 느껴지는 것 같아 옆샷. 두께는 크게 두껍지 않으나 크기만큼은 크다.


그리고 컬러지에 양장이라 다소 묵직하다. 책 제목의 무게가 고스란히 책 무게에 반영됐다. 주제에 맞는 책 무게! 아, 이런 실존적 느낌을 팍팍 뽐내는 책 탐이 나 좋다. 읽고 싶고, 갖고 싶고, 책 내용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싶은 욕망 자극.


나는 20세기에 태어난 한 세기 전 사람이라, 이렇게 현물,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탐이 난다. 실제 책을 만지고 느낄 수 없는 전자책은 여전히 관심 밖의 대상이다.


아마도 이런 나의 마음으로, 인류는 오랫동안 수많은 것들을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다. 인류 '기록'의 시작은 구석기인들부터다. 그들은 암벽이나 동굴 벽에 정교하면서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들이 벽에 그림을 그린 이유는 당장의 생존과 후대의 번성을 위해 그렸다. 하지만 수 세기 동안 그림 그리기의 행위가 이어져 내려오면서 전혀 뜻밖의 결과로 인류를 바꿔버렸다. 동굴의 그림이 사실적 그림에서 추상적 그림으로 바뀌고, 추상적 그림은 지속적으로 꾸준히 단순하고 규칙적인 기호로 변하면서 문자를 탄생시켰다. 문자를 담을 그릇으로 동굴 벽은 너무나 작았으며 말과 생각을 무한정 담을 수 있는 다른 기록지들을 발명하며 인류는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인간은 뭔가를 기록으로 남기면서 변하기 시작했고, 그 변화는 우릴 언제 어떻게 변화시킬지 모른다.


서해문집, 『불멸의 서 77』은 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고 앞으로도 유의미한 저작들. 그 책들 중 어떤 책은 세상과 인간의 의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데 일조한 책도 있고, 어떤 책은 당시 변화하는 시대를 그대로 담고 있는 책도 있다. 또 어떤 책은 당장은 아니었지만 누적된 결과로 인해 역사의 물꼬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어버린 책도 있다.


77권의 책들은 우리가 읽을 수 없는 책도 있고(ex. 고대 이집트 「사자의 서」), 읽을 수 있으나 읽을 가망성이 없는 책도 있고(ex. 아인슈타인 「일반상대성이론」), 현재 여전히 많이 읽히는 책(ex.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들 중 정말로 우리 인류에게 의미 있는 책 77권을 소개한다.


어맛!



불멸의 서 77권 중 다들 알만한 책도 있고, 생전 처음 보는 책도 있었다(불멸의 책들인데 왜 나는 지금껏 몰랐던 것이냐? >ㅁ<). 알던 책 중에서도 책 제목만 알고 책의 실제 모습은 전혀 몰랐던 것도 있는데 이 책을 보고, 아- 싶었던 것도 있었다. 대부분 고전들이 그랬다. 사실 죽간도 이 책으로 처음 봄. 교과서에서 흑백으로 본 적 있으려나 모르겠는데, 내 기억에 죽간은 김밥말이처럼 돌돌 말려 있는 형태로 드라마 인테리어 소품으로나 봤지 펼쳐진 멋진 모습은 보지 못했다. 이 책 속 『손자병법』 장에 죽간의 모습이 멋있게 실려 있어, 와. '죽간 멋지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실린더 속에 보관되어 있는 모습도 멋짐).



읽기 위한 코란이 아닌, 보고 감상하기 위한 『블루 코란』. 군청색과 황금색의 조화가 멋있고 아름답다.



우리 동양 문화권에선 낯선 서양의 채색책도 많이 볼 수 있다. 화려하고 어떤 책은 입이 떡- 하고 벌어진다. 그중 『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시도서』는 워낙 유명한 책이라 이미 알고 있던 책인데도, 『불멸의 서』로 큰 도판으로 보니 기존의 책에서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시도서』가 얼마나 정교한지, 성벽의 벽돌 하나하나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고, 전염병으로 고통받았던 사람들의 표정이나 옷 주름 하나까지 자세하다. 코발트색 염료를 적재적소에 잘 써 눈길을 사로잡는다.



베살리우스의 『에피톰』

과학사 책이나 의학사 책을 다룬 책을 보면 꼭 베살리우스가 등장하는데 그가 남긴 책은 처음 봤다. 지금 봐도 정교함에 눈이 똥그래지는데 당대 사람들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이 책 제작에만 4년 걸렸단다. 삽화는 미술사 책에 꼭 등장하는 티치아노가 그렸다. 두 거장이 만나 엄청난 작품을 만든 것. 사진만큼 사실적이며, 어느 부분에선 사진으로는 결코 나타낼 수 없는 부분까지 그림으로 그렸다.


  

생물 교과서에도 나오는 로버트 훅의 『마이크로그라피아』


입이 쫙- 벌어지지 않나요?! 로버트 훅은 교과서에 현미경으로 코르크 조각을 관찰해 식물 세포벽을 관찰한 사람으로 소개된다. 이 책에도 로버트 훅의 세포벽 그림이 실려 있다. 우측 하단 그림. 그리고 현미경으로 관찰한 벌레의 그림도 아주 크고, 자세하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외에도 인류사에 길이 남을 책과 그 책의 삽화가 실려 있다. 



1482년 이탈리아에서 출간된 『기하학 원론』 


조금 당황스러웠던 것도 있었다. 『불멸의 서77』은 대부분 제작 시기에 맞춰 순서대로 책을 소개하는데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은 고대 시기가 아닌, 르네상스 시기에 배치되어 있다. 오잉?! 유클리드는 헬레니즘 시대가 아닌가. 아마 『불멸의 서77』 저자들이 로마와 중세를 거치며 뚝 끊겨버린 고대 그리스의 유산을, 아랍인들로부터 거꾸로 전해 받았으므로 이곳에 배치했나 보다. 아무튼 당시 기술로 힘들었을 텐데 책 양쪽 여백에 기하학 도형을 삽입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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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손자병법을 언급하긴 했지만, 이 책에 실린 77권의 책 중 동양의 책인 극소수다. 그것도 중국 책 아니면 일본 책이다. 인도 서적도 있으나 인구비례로 따지면 턱없이 부족한 책. 이 책을 쓴 이가 호주인 한 명을 포함해서 대부분 영국인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가 서양 문화를 잘 아는 만큼이나, 그들 또한 동양 문화를 제대로 알다면 동양 서적이 좀 더 많이 실렸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 이 시대는 여전히 대항해시대의 연장선에 놓여 있고, 서유럽인들의 시각으로 세상이 재단되고 있다. 불멸의 77권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이 77권 보다 인류에 더 큰 영향을 미쳤으나 미처 실리지 못한 책도 많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아쉬운 점. 『금강경』 파트였다. 저자가 『금강경』을 중국 둔황에서 발견된 세계 최고 목판 인쇄물이라고 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세계 최고 목판 인쇄물인데. ;ㅅ; 저자들이 『금강경』을 제일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라고 소개한 것은, 비단 중국에서 발견됐을 뿐만 아니라 영국 탐험가가 이를 영국에 들고 갔기 때문으로 추측한다(현재 영국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영국이나 중국 입장에서 『금강경』을 제일 오래됐다고 주장하기 쉽다.


동양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 살면서 영국인이 뽑은 불멸의 77권을 보며 아쉬운 점도 있고 약간 억울한 점도 있지만 만족하며 잘 보았다. 교과서로나, 책으로 접한 적 있지만 그 실물이 어떠한지 알지 못했던 책들을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대부분의 책들이 고전 제목이나 내용만 소개하고, 책 표지나 삽화를 싣는다 해도 흑백이거나 자세히 보기에 그림이나 사진이 너무 작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 책의 역사나 고서에 관심 있는 사람, 인류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책에 관심 있는 분들께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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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왕 교보클래식 1
에른스트 테오도어 아마데우스 호프만 지음, 정영은 옮김, 강주헌 감수 / 교보문고(단행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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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에 이미 픽사의 《토이스토리》 같은 이야기가 있었구나. 지금으로부터 3세기 전인 18세기에, 현대적 이야기인 토이스토리가 있었다니... 놀랍다 놀라워. 지금 픽사 작품과 비교해 봐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촌스럽지도 않다. 이야기로서의 '세련미'와 '재미'가 두루두루 갖춰져 있다. 18세기에 21세기 식의 현대적 작품은 무엇이었을까? 바로바로, 독일 낭만주의 작가 에른스트 테오도어 아마데우스 호프만(아, 이름이 무척 기네요!)의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왕』이다.




│ 저자 소개 │

저자, 에른스트 테오도어 아마데우스 호프만(이하 호프만)은 1776년 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도 커서 아버지처럼 법조계에 몸을 담았으나, 나폴레옹의 패권주의 정책 때문에 번번이 어려운 상황에 맞닥트린다. 한때 지인의 도움을 받으며 겨우 생계를 잇던 시기도 있었다(그의 인생의 변곡점마다 나폴레옹이 있음. 그 시대 어느 누구가 나폴레옹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만은). 그러다 본인의 창작적 재능을 살려 작곡과 음악평론, 그리고 소설을 집필한다(하늘은 불공평하네요!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재능을 주다니요!)

│책 소개│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왕』은 호프만이 1816년에 발표한 동화다. 환상적이고 어느 부분에선 기괴한 느낌도 있는 낭만주의 작품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호두까기 인형」은, 호프만의 원작을 프랑스 대문호(이자 대식가.. 아니 미식가) 알렉상드르 뒤마가 각색하고, 러시아 대 작곡가 차이콥스키가 발레 음악으로 작곡한 것이다.

│줄거리│

원작 이야기는 의사인 슈탈바움의 셋째 딸 7살 마리가 주인공이다. 마리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호두를 까는 '호두까기 인형'을 부모님으로부터 선물 받았다. 호두까기 인형은 못생겼지만, 왠지 정이 갔고 지켜주고 싶었다.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 받은 그날 밤, 마리는 혼자 인형을 갖고 놀다가 장식장 속 인형들과 오빠의 군인 장난감들이 움직이고 말하며, 쥐의 대군들과 전투를 치르는 것을 목격한다. 호두까기 인형이 위기에 처하자, 마리는 신발을 벗어 쥐들에게 던지고 의식을 잃는다. 깨어나니 엄마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간밤에 있었던 일을 가족들에게 말하지만 모두 믿지 않는다. 다만, 마리의 대부님인 드로셀마이어 씨만 의미심장한 노래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는 호두까기 인형에 대한 이야기다. 드로셀마이어 대부님은 뭔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대부님의 이야기는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왕』 속에서 액자식 구성으로 진행된다. 아름다운 공주였던 피를리파트 공주는, 쥐인 마우제링크스의 저주로 아주 못생긴 공주로 변한다. 공주에게 걸린 저주를 풀고 다시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이가 드로셀마이어의 조카다. 드로셀마이어의 조카는 마음씨 착하고 똑똑하며, 아주 잘생긴 청년이었다. 공주의 마법을 그가 풀어주면 둘은 결혼하기로 했으나, 마지막에 일이 잘못돼 잘 생겼던 드로셀마이어 조카가 흉측한 모습으로 변하고 만다. 잘 생겼던 청년이 갑자기 못생기자 그 모습에 실망한 피를리파트 공주가 그를 배반한다.

드로셀마이어 대부님의 이야기를 들은 마리는, '호두까기 인형'이 이야기 속 드로셀마이어 씨의 조카임을 확신한다. 진열장 속에 있는 '호두까기 인형'에게 자기 자신은 피를리파트 공주처럼 그대를 배반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자, 드로셀마이어 대부의 진짜 조카가 마리의 집에 찾아와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느낀 점│

마리의 꿈인지 상상인지 그 환상적 이야기와 현실의 넘나듦. 그리고 대부이신 드로셀마이어가 들려주는 액자식 구성의 이야기. 그리고 저주가 풀려 진짜 청년의 모습으로 나타난 호두까기 인형(드로셀마이어 대부의 조카)... 경계를 허물고 이 세계와 저 세계의 종횡무진하는 것이 능수능란하다. 18세기에도, 소위 '메타적' 소설이 쓰였구나. 놀랍다, 놀라워. 나는 이런 이야기가 20세기가 되어 미하엘 엔데(ex. 『끝없는 이야기』)부터 시작된 것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꽤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서 살짝 충격을 받았다. 미하엘 엔데의 환상적 동화는, 호프만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구나 싶다.

사실 지난달에 디즈니 영화, <호두까기 인형과 4개의 왕국>을 보았다. 혹평이 많았지만, 나 개인적으로 재밌게 봤고 중간중간 흘러나온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곡들이 정말 좋았다. 가슴도 설레어서 원작을 꼭 읽어 보고 싶었다. (너무 유명한 작품이라 지금까지 정작 원작 읽기는 싫었었다. 그 바람에 이 좋은 작품을 이제야 읽었네요. 뒤늦게 읽어 아쉽기도 하지만 지금이라도 읽어서 기쁩니다!)

원작은 영화와 많이 달랐다. 발레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원작과 얼마나 다를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원작은 원작대로 디즈니 영화는 영화대로 좋았다. 어차피 호프만의 작품도 틀을 깨고 이곳과 저곳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야기인데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여 뒤마의 각색, 차이콥스키의 상상력, 이 시대의 재현(디즈니) 등 세부 사항과 설정은 다르지만 뭐가 됐든 간에 다 좋다.

호프만의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왕』은 원작으로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상상과 창작에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고전은 역시 고전이고, 대문호와 대작곡가가 이 작품에 뛰어든 이유를 알겠다. 뒤마와 차이콥스키 이름만으로 원작의 작품성이 보장되는 것 아니겠어요?! 시시한 작품이라면 그들이 애써 바쁜 시간을 쪼개 새로운 창작을 하진 않았을 거예요. 뒤마와 차이콥스키를 믿고, 호프만 원작을 읽으면 좋겠다.

올해 계획 중 하나가 12월에 <호두까기 인형> 발레를 보는 것이다. 발레 보러 가기 전에 원작 또 읽어야지. 매년 12월이면 읽고 싶고, 긴긴 겨울 이 책으로 기분 좋은 상상을 하고 싶다. 호프만의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왕』은 비단, 7살짜리 여자아이들의 상상만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대문호(이자 대식가.. 아니 미식가) 뒤마와 러시아 대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러니 우리의 상상력도 자극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과 저곳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메타적 세계로-

+ 단, 18세기식 호러적 느낌이 몇몇 곳에 있다. 그래도 그 당시 동화들에 비하면 상당히 순화되고 말랑한 작품이며, 오히려 현대 동화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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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카의 장갑
오가와 이토 지음, 히라사와 마리코 그림,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Paldies!"

마리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입니다. 

고맙다는 말로 생을 마쳤으니 행복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마리카도 그리고 야니스도 멋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오가와 이토, 『마리카의 장갑』, 작가정신, 2018 (p. 203)



겨울 나라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


여름보다 겨울이 더 긴 이 나라, 루프마이제공화국에는 독특한 풍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엄지장갑을 짜주는 일입니다. 마리카가 사우나에서 태어났을 때 마리카의 할머니는 사랑하는 손녀를 따뜻하게 해줄 엄지장갑을 짰습니다. 아리카가 자라면 할머니는 커진 마리카의 손 크기에 맞춰 새 엄지장갑을 짜주었습니다. 


마리카는 할머니가 짜주신 엄지장갑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마리카가 엄지장갑을 짜는 건 싫었어요. 어렵고, 복잡했거든요. 그 대신 오빠들과 집 밖에서 노는 걸 더 좋아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마리카는 자랐고, 좋아하는 춤과 노래를 즐기기 위해 관련 학교 동아리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동아리에서 마리카의 운명을 바꿀 사람을 만났습니다. 마리카는 생전 처음으로 진심에서 우러난 마음으로 엄지장갑을 뜨고 싶어졌습니다. 


엉성하고 정말 못 만든 엄지장갑이었지만, 마리카는 야니스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루프마이제공화국에선 엄지장갑으로 여성의 마음을 표현했거든요. 야니스는 마리카가 준 엄지장갑을 끼고 학교에 왔습니다. 


엄지장갑으로 마리카의 마음을 알게 된 야니스, 

엄지장갑으로 야니스의 마음을 알게 된 마리카.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고 시간이 흘로 해가 제일 긴 하지 축제날 둘은 결혼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날부터 마리카는 많이 바빠졌습니다. 루프마이제공화국은 결혼할 때 신부 측에서 혼수품으로 수백 켤레의 엄지장갑을 만들어야 했거든요. 실력은 많이 모자랐지만, 엄지장갑 뜨기의 달인, 할머니로부터 따뜻한 가르침을 받으며 그 많은 엄지장갑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결혼식 날 남편의 손에 끼울 엄지장갑도 만들었습니다. 남편 손에 딱 맞으면, 부부는 정말 행복하게 산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아직 장갑을 잘 못 뜨는 마리카는 엄청난 노력과 심혈을 기울인 덕분에 남편 손에 딱 맞는 엄지장갑을 만들었어요.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마리카와 야니스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시작합니다. 


오랜 시간 마리카와 야니스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환경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웃나라, 얼음제국이 루프마이제공화국을 침공했고, 곧 루프마이제공화국을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마리카와 야니스는 항상 행복했고 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도움을 주는 부부로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야니스에게도 얼음제국으로의 징집 통보가 날아왔고 야니스는 마리카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 떠나는 야니스에게 마리카는 정성들여서 짠 장갑을 선물합니다. 


마리카는 야니스가 곧 돌아올 것이라 믿고, 남는 시간 동안 야니스의 해지고 구멍 난 엄지장갑을 수선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엄지장갑도 만들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야니스의 새 엄지장갑도 쌓여갔습니다. 야니스가 한 번도 착용하지 못한 엄지장갑들이요. 


많은 세월이 흘러 얼음제국으로부터 소포가 왔습니다. 소포엔 야니스의 장갑 한 짝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맞춤법은 엉망이지만, 얼음제국의 한 사람이 사전을 보고 꼼꼼히 적인 짧은 메모가 적혀 있었습니다. 


친애하는 마리카 님.

안녕하세요?

나은 얼음 제

국에 살고 있습니다.

이 장갑, 근처 길그리에 떨어

져 있었습니다.

장갑 안, 종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당신의 이름과 

주수가 적혀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이

 장갑을 보냅니다.


오가와 이토, 『마리카의 장갑』, 작가정신, 2018 (p. 178-179)



진흙투성이에 다 해진 엄지장갑을 못 본 척할 수 있었을 텐데 얼음제국의 그 사람은 소중히 소포에 넣어 마리카에게 보내주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얼음제국 사람들을 미워하기를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야니스의 해진 장갑 속에는 나뭇잎이 있었고 나뭇잎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Paldies(고마워)!


오가와 이토, 『마리카의 장갑』, 작가정신, 2018 (p. 182)



장갑 속엔 글귀가 적힌 나뭇잎과 함께 칠엽수 씨앗이 있었습니다. 


시간은 또 쉴 새 없이 흘러갔습니다. 마리카는 예전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엄지장갑을 매일매일 뜨게 되었습니다. 마리카는 50살이 되었고 예전 야니스의 장갑 안에 있던 칠엽수 씨앗을 땅에 심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카는 처음으로 자신을 위한 엄지장갑을 만들었습니다. 시간을 또 흘러흘러 갔습니다. 마리카가 심었던 칠엽수는 무럭무럭 자라 마리카의 키를 따라잡고, 그녀를 보호해주듯 자랐습니다. 탐스러운 열매도 달렸고, 그 열매 안에 야니스가 선물로 줬던 칠엽수 씨앗이 들어있었습니다. 또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마리카는 일흔 살이 되었습니다. 루프마이제공화국은 독립을 합니다. 더 이상 마리카는 장갑을 뜨지 않습니다. 그 장갑을 풀어 컵 받침이나 냄비 받침, 티포트 덮개를 뜹니다. 마지막으로 남겨두었던 야니스의 엄지장갑의 실을 풀어 자신의 손에 딱 맞는 엄지장갑을 만들었습니다. 남은 털실로 곰인형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마리카의 마지막 뜨개질이었습니다. 



그러고 칠 년이 지나서, 마리카도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마지막으로 떴던 장갑을 낀 채로요. 그리고 마지막 말을 합니다. 


Paldies!


오가와 이토, 『마리카의 장갑』, 작가정신, 2018 (p. 203)


고마워라고요. 










『달팽이 식당』과 『츠바키 문구점』을 쓴 오가와 이토의 신작입니다. 『마리카의 장갑』은 상당히 독특한 소설로, 발트 3국 중 한 곳인 '라트비아'의 역사와 문화를 의인화하여 묘사했습니다. 나라를 의인화한 소설은 아주 간혹 있지만, 그 경우 전쟁으로 잃어버린 조국을 묘사하는 것일 텐데 『마리카의 장갑』은 일본과 크게 상관없는 지구 반대편 라트비아를 소재로 삼아 써서 신선했고, 일본 작가들은 소재를 참 다양한 곳에서 찾는구나 싶었습니다.


소설은 표지의 느낌처럼 따뜻하고, 추운 동유럽 감성이 물씬 풍깁니다. 라트비아는 톤 다운된 파스텔 색감의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많아 동화 속 장소처럼 느껴진다고 하는데요, 그런 느낌을 위해서인지 이 소설로 동화처럼 펼쳐집니다. 마리카가 태어나 가족들 품에 처음 안기고, 마리카 가족들이 마리카에게 해준 모든 것들이 따뜻한 동화처럼 읽힙니다.


사랑하는 야니스를 만난 후에도 마찬가집니다. 은근슬쩍 19금 이야기도 아주 잠깐 나오지만, 이건 제가 음란마귀에 씌어 그렇다고 칩시다...


『마리카의 장갑』에서 제일 중요한 소재는 역시 '장갑', 엄지장갑입니다. 처음 엄지장갑이란 단어를 봤을 때 골무를 뜻하는 건가 싶어 어리둥절했는데 찾아보니 '벙어리장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벙어리'란 말이, 언어 장애우를 폄하하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에 출판사 측에서 고심해 낯설지만 폄하하는 뜻이 없는 '엄지장갑'으로 번역했다고 합니다(하지만 나머지 네 손가락들이 소외됐어요... ;ㅅ; 더 좋은 이름은 없을까요?!).

 

추운 겨울, 시린 손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장갑. 그래서 얼음제국은 루프마이제공화국의 모든 문화를 다 억누르고 말살해도 단 하나, 엄지장갑 뜨기는 허용합니다. 루프마이제공화국은 추운 나라이니까요.


이 소설에서 엄지장갑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마리카가 어렸을 때 할머니가 짜주신 장갑을 받았습니다.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은 것이죠. 마리카는 엄지장갑 뜨기를 너무 싫어했는데요, 그랬던 마리카를 변화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야니스와의 만남이었죠. 처음으로 직접 엄지장갑을 떠서 야니스에게 선물해 자기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혼 혼수로 열심히 짰던 엄지장갑들, 결혼 후에도 그 어려운 낚시용 장갑을 마리카가 만들지요. 너무 어려워서 다음엔 안 만들까 싶었는데, 낚시 장갑을 받고 기뻐하는 야니스의 모습을 보고 앞으로도 쭉- 낚시용 장갑을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그만큼 마리카는 야니스를 사랑했으니까요.


야니스가 얼음제국으로 떠난 후에도 마리카는 부단히도 야니스의 엄지장갑을 수선하고, 또 새로 만듭니다. 야니스를 기다리는 동안, 야니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장갑으로 만든 것이죠.


오랜 세월이 흘러 야니스가 여전히 돌아오지 않을 때, 마리카는 의미 있는 일을 합니다. 아이가 생기면 주려고 했던 방을 아기가 계속 생기지 않자 유리천장 온실로 만들었는데요, 이곳에 엄지장갑 뜨기를 배우고 싶어 하는 여성과 소녀들을 초대해 엄지장갑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어렸을 적 마리카의 할머니가 마리카에게 가르쳐줬듯이요. 이렇게 사랑의 방식, 사랑의 매개가 되는 장갑 뜨는 방법이 널리 널리 퍼지게 됩니다. 할머니는 사랑을 마리카에게 위에서 아래로 건네주었고, 마리카는 많은 사람에게로 퍼트린 것이죠.


Paldies!(팔디에스, 고마워요/고마워)라는 루프마이제공화국의 '고마워'라는 말도 이 소설에서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 단어는 이 소설에서 3번 등장하는데, 처음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마리카가 한창 결혼 준비로 바쁠 때 장갑 뜨는 법을 배우며 마리카가 할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얼음제국에서 온 야니스의 해진 장갑 속에 있던 나뭇잎에 새겨져 있던 Paldies!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리카가 죽기 전 행복한 마음으로 눈을 감으며 Paldies!라는 말을 속삭입니다.


맨 위 발췌문에 썼듯 고맙다는 말로 생을 마쳤으니 행복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읽으니 눈물이 났어요. ;ㅅ; 서평을 적는 지금도 또 한 번 눈물이....


이 소설에서 엄지장갑은 사랑이고,

고맙다는 말은 사랑의 또 다른 말일지도 모르겠어요.


처음 읽을 땐 이게 뭐지, 루프마이제공화국은 뭐고 엄지장갑은 뭐지 싶은데 읽다 보면 푹 빠져듭니다. 한 번보다 두 번 읽을 때 더 가슴 따뜻해지고 눈물이 나는 것 같아요. 초반엔 쉽게 쓰인 동화책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죠. 이 책의 진가는 야니스가 떠난 후부터 시작됩니다. 부재로 인해 야니스의 사랑과 야니스의 존재가 더 크게 와닿죠. 그리고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야니스의 부재는 진정한 부재가 아니며, 마리카가 더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 정점이 마리카가 야니스를 위해 떴던 야니스의 장갑을 풀어, 새롭고 유익한 다른 물건들 컵 받침이나 냄비 받침, 티포트 덮개를 만드는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눈물이 나는데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마음이 따뜻해져서 나는 눈물이 납니다.

이 소설을 읽고 또 하나 생각나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그 작품 속 한 구절을 발췌하며 글을 마칩니다.



사람이란 너무 행복하면 그 행복의 의미를 잃기 쉬운 법.

행복이란 게 뭔지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무심코 인생을 업신 여길 때,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함정이 입을 벌리고 있다.


감사할 수 있는 것, 이건 틀림없이 행복하다는 증거이다.

만약 죽기 직전에 고마운 마음을 가슴에 채우고 떠날 수 있다면,

그보다 멋진 마지막은 없을 것이다.

나는 너희들에게 셀 수 없이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나려고 한다.


오늘까지 나를 남편으로, 아버지로 따라준 너희들에게 감사하며 떠나려 한다.

감사만이 인생을 더욱 의미 있게 하는 것이다.


만족스런 삶이었다. 흡족할 만큼 인생을 즐길 수도 있었다.

이 멋진 인생에 나는 감사한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에 묶이지 않고.


츠지 히토나리, 츠지 히토나리의 편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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