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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카의 장갑
오가와 이토 지음, 히라사와 마리코 그림,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Paldies!"
마리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입니다.
고맙다는 말로 생을 마쳤으니 행복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마리카도 그리고 야니스도 멋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오가와 이토, 『마리카의 장갑』, 작가정신, 2018 (p. 203)
겨울 나라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
여름보다 겨울이 더 긴 이 나라, 루프마이제공화국에는 독특한 풍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엄지장갑을 짜주는 일입니다. 마리카가 사우나에서 태어났을 때 마리카의 할머니는 사랑하는 손녀를 따뜻하게 해줄 엄지장갑을 짰습니다. 아리카가 자라면 할머니는 커진 마리카의 손 크기에 맞춰 새 엄지장갑을 짜주었습니다.
마리카는 할머니가 짜주신 엄지장갑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마리카가 엄지장갑을 짜는 건 싫었어요. 어렵고, 복잡했거든요. 그 대신 오빠들과 집 밖에서 노는 걸 더 좋아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마리카는 자랐고, 좋아하는 춤과 노래를 즐기기 위해 관련 학교 동아리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동아리에서 마리카의 운명을 바꿀 사람을 만났습니다. 마리카는 생전 처음으로 진심에서 우러난 마음으로 엄지장갑을 뜨고 싶어졌습니다.
엉성하고 정말 못 만든 엄지장갑이었지만, 마리카는 야니스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루프마이제공화국에선 엄지장갑으로 여성의 마음을 표현했거든요. 야니스는 마리카가 준 엄지장갑을 끼고 학교에 왔습니다.
엄지장갑으로 마리카의 마음을 알게 된 야니스,
엄지장갑으로 야니스의 마음을 알게 된 마리카.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고 시간이 흘로 해가 제일 긴 하지 축제날 둘은 결혼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날부터 마리카는 많이 바빠졌습니다. 루프마이제공화국은 결혼할 때 신부 측에서 혼수품으로 수백 켤레의 엄지장갑을 만들어야 했거든요. 실력은 많이 모자랐지만, 엄지장갑 뜨기의 달인, 할머니로부터 따뜻한 가르침을 받으며 그 많은 엄지장갑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결혼식 날 남편의 손에 끼울 엄지장갑도 만들었습니다. 남편 손에 딱 맞으면, 부부는 정말 행복하게 산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아직 장갑을 잘 못 뜨는 마리카는 엄청난 노력과 심혈을 기울인 덕분에 남편 손에 딱 맞는 엄지장갑을 만들었어요.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마리카와 야니스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시작합니다.
오랜 시간 마리카와 야니스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환경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웃나라, 얼음제국이 루프마이제공화국을 침공했고, 곧 루프마이제공화국을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마리카와 야니스는 항상 행복했고 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도움을 주는 부부로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야니스에게도 얼음제국으로의 징집 통보가 날아왔고 야니스는 마리카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 떠나는 야니스에게 마리카는 정성들여서 짠 장갑을 선물합니다.
마리카는 야니스가 곧 돌아올 것이라 믿고, 남는 시간 동안 야니스의 해지고 구멍 난 엄지장갑을 수선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엄지장갑도 만들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야니스의 새 엄지장갑도 쌓여갔습니다. 야니스가 한 번도 착용하지 못한 엄지장갑들이요.
많은 세월이 흘러 얼음제국으로부터 소포가 왔습니다. 소포엔 야니스의 장갑 한 짝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맞춤법은 엉망이지만, 얼음제국의 한 사람이 사전을 보고 꼼꼼히 적인 짧은 메모가 적혀 있었습니다.
친애하는 마리카 님.
안녕하세요?
나은 얼음 제
국에 살고 있습니다.
이 장갑, 근처 길그리에 떨어
져 있었습니다.
장갑 안, 종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당신의 이름과
주수가 적혀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이
장갑을 보냅니다.
오가와 이토, 『마리카의 장갑』, 작가정신, 2018 (p. 178-179)
진흙투성이에 다 해진 엄지장갑을 못 본 척할 수 있었을 텐데 얼음제국의 그 사람은 소중히 소포에 넣어 마리카에게 보내주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얼음제국 사람들을 미워하기를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야니스의 해진 장갑 속에는 나뭇잎이 있었고 나뭇잎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Paldies(고마워)!
오가와 이토, 『마리카의 장갑』, 작가정신, 2018 (p. 182)
장갑 속엔 글귀가 적힌 나뭇잎과 함께 칠엽수 씨앗이 있었습니다.
시간은 또 쉴 새 없이 흘러갔습니다. 마리카는 예전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엄지장갑을 매일매일 뜨게 되었습니다. 마리카는 50살이 되었고 예전 야니스의 장갑 안에 있던 칠엽수 씨앗을 땅에 심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카는 처음으로 자신을 위한 엄지장갑을 만들었습니다. 시간을 또 흘러흘러 갔습니다. 마리카가 심었던 칠엽수는 무럭무럭 자라 마리카의 키를 따라잡고, 그녀를 보호해주듯 자랐습니다. 탐스러운 열매도 달렸고, 그 열매 안에 야니스가 선물로 줬던 칠엽수 씨앗이 들어있었습니다. 또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마리카는 일흔 살이 되었습니다. 루프마이제공화국은 독립을 합니다. 더 이상 마리카는 장갑을 뜨지 않습니다. 그 장갑을 풀어 컵 받침이나 냄비 받침, 티포트 덮개를 뜹니다. 마지막으로 남겨두었던 야니스의 엄지장갑의 실을 풀어 자신의 손에 딱 맞는 엄지장갑을 만들었습니다. 남은 털실로 곰인형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마리카의 마지막 뜨개질이었습니다.
그러고 칠 년이 지나서, 마리카도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마지막으로 떴던 장갑을 낀 채로요. 그리고 마지막 말을 합니다.
Paldies!
오가와 이토, 『마리카의 장갑』, 작가정신, 2018 (p. 203)
고마워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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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식당』과 『츠바키 문구점』을 쓴 오가와 이토의 신작입니다. 『마리카의 장갑』은 상당히 독특한 소설로, 발트 3국 중 한 곳인 '라트비아'의 역사와 문화를 의인화하여 묘사했습니다. 나라를 의인화한 소설은 아주 간혹 있지만, 그 경우 전쟁으로 잃어버린 조국을 묘사하는 것일 텐데 『마리카의 장갑』은 일본과 크게 상관없는 지구 반대편 라트비아를 소재로 삼아 써서 신선했고, 일본 작가들은 소재를 참 다양한 곳에서 찾는구나 싶었습니다.
소설은 표지의 느낌처럼 따뜻하고, 추운 동유럽 감성이 물씬 풍깁니다. 라트비아는 톤 다운된 파스텔 색감의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많아 동화 속 장소처럼 느껴진다고 하는데요, 그런 느낌을 위해서인지 이 소설로 동화처럼 펼쳐집니다. 마리카가 태어나 가족들 품에 처음 안기고, 마리카 가족들이 마리카에게 해준 모든 것들이 따뜻한 동화처럼 읽힙니다.
사랑하는 야니스를 만난 후에도 마찬가집니다. 은근슬쩍 19금 이야기도 아주 잠깐 나오지만, 이건 제가 음란마귀에 씌어 그렇다고 칩시다...
『마리카의 장갑』에서 제일 중요한 소재는 역시 '장갑', 엄지장갑입니다. 처음 엄지장갑이란 단어를 봤을 때 골무를 뜻하는 건가 싶어 어리둥절했는데 찾아보니 '벙어리장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벙어리'란 말이, 언어 장애우를 폄하하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에 출판사 측에서 고심해 낯설지만 폄하하는 뜻이 없는 '엄지장갑'으로 번역했다고 합니다(하지만 나머지 네 손가락들이 소외됐어요... ;ㅅ; 더 좋은 이름은 없을까요?!).
추운 겨울, 시린 손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장갑. 그래서 얼음제국은 루프마이제공화국의 모든 문화를 다 억누르고 말살해도 단 하나, 엄지장갑 뜨기는 허용합니다. 루프마이제공화국은 추운 나라이니까요.
이 소설에서 엄지장갑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마리카가 어렸을 때 할머니가 짜주신 장갑을 받았습니다.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은 것이죠. 마리카는 엄지장갑 뜨기를 너무 싫어했는데요, 그랬던 마리카를 변화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야니스와의 만남이었죠. 처음으로 직접 엄지장갑을 떠서 야니스에게 선물해 자기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혼 혼수로 열심히 짰던 엄지장갑들, 결혼 후에도 그 어려운 낚시용 장갑을 마리카가 만들지요. 너무 어려워서 다음엔 안 만들까 싶었는데, 낚시 장갑을 받고 기뻐하는 야니스의 모습을 보고 앞으로도 쭉- 낚시용 장갑을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그만큼 마리카는 야니스를 사랑했으니까요.
야니스가 얼음제국으로 떠난 후에도 마리카는 부단히도 야니스의 엄지장갑을 수선하고, 또 새로 만듭니다. 야니스를 기다리는 동안, 야니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장갑으로 만든 것이죠.
오랜 세월이 흘러 야니스가 여전히 돌아오지 않을 때, 마리카는 의미 있는 일을 합니다. 아이가 생기면 주려고 했던 방을 아기가 계속 생기지 않자 유리천장 온실로 만들었는데요, 이곳에 엄지장갑 뜨기를 배우고 싶어 하는 여성과 소녀들을 초대해 엄지장갑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어렸을 적 마리카의 할머니가 마리카에게 가르쳐줬듯이요. 이렇게 사랑의 방식, 사랑의 매개가 되는 장갑 뜨는 방법이 널리 널리 퍼지게 됩니다. 할머니는 사랑을 마리카에게 위에서 아래로 건네주었고, 마리카는 많은 사람에게로 퍼트린 것이죠.
Paldies!(팔디에스, 고마워요/고마워)라는 루프마이제공화국의 '고마워'라는 말도 이 소설에서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 단어는 이 소설에서 3번 등장하는데, 처음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마리카가 한창 결혼 준비로 바쁠 때 장갑 뜨는 법을 배우며 마리카가 할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얼음제국에서 온 야니스의 해진 장갑 속에 있던 나뭇잎에 새겨져 있던 Paldies!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리카가 죽기 전 행복한 마음으로 눈을 감으며 Paldies!라는 말을 속삭입니다.
맨 위 발췌문에 썼듯 고맙다는 말로 생을 마쳤으니 행복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읽으니 눈물이 났어요. ;ㅅ; 서평을 적는 지금도 또 한 번 눈물이....
이 소설에서 엄지장갑은 사랑이고,
고맙다는 말은 사랑의 또 다른 말일지도 모르겠어요.
처음 읽을 땐 이게 뭐지, 루프마이제공화국은 뭐고 엄지장갑은 뭐지 싶은데 읽다 보면 푹 빠져듭니다. 한 번보다 두 번 읽을 때 더 가슴 따뜻해지고 눈물이 나는 것 같아요. 초반엔 쉽게 쓰인 동화책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죠. 이 책의 진가는 야니스가 떠난 후부터 시작됩니다. 부재로 인해 야니스의 사랑과 야니스의 존재가 더 크게 와닿죠. 그리고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야니스의 부재는 진정한 부재가 아니며, 마리카가 더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 정점이 마리카가 야니스를 위해 떴던 야니스의 장갑을 풀어, 새롭고 유익한 다른 물건들 컵 받침이나 냄비 받침, 티포트 덮개를 만드는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눈물이 나는데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마음이 따뜻해져서 나는 눈물이 납니다.
이 소설을 읽고 또 하나 생각나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그 작품 속 한 구절을 발췌하며 글을 마칩니다.
사람이란 너무 행복하면 그 행복의 의미를 잃기 쉬운 법.
행복이란 게 뭔지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무심코 인생을 업신 여길 때,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함정이 입을 벌리고 있다.
감사할 수 있는 것, 이건 틀림없이 행복하다는 증거이다.
만약 죽기 직전에 고마운 마음을 가슴에 채우고 떠날 수 있다면,
그보다 멋진 마지막은 없을 것이다.
나는 너희들에게 셀 수 없이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나려고 한다.
오늘까지 나를 남편으로, 아버지로 따라준 너희들에게 감사하며 떠나려 한다.
감사만이 인생을 더욱 의미 있게 하는 것이다.
만족스런 삶이었다. 흡족할 만큼 인생을 즐길 수도 있었다.
이 멋진 인생에 나는 감사한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에 묶이지 않고.
츠지 히토나리, 츠지 히토나리의 편지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