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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서 77
마이클 콜린스 외 지음, 서미석 옮김 / 그림씨 / 2019년 1월
평점 :
사람은 죽어 사라져도 기록은 남는다.
기해년 새해를 맞아 호기롭게 읽은 서해문집, 『불멸의 서(書)77』

책 제목처럼 인류에게 의미 있는 책 77권을 선별해 해당 책이 인류에게 특별한 이유와 책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고, 해당 책의 표지나 대표적인 페이지를 총 천연 컬러풀- 대형 도판으로 담아냈다. 도판이 시원시원하게 큰 사이즈로 그 때문에 책이 무척 크다.

스타벅스 다이어리 기본 사이즈인 빨간 다이어리와 비교샷. 스벅 빨간 다이어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책과 크기가 비슷할 것이다. 그 책의 거의 3배쯤 된다. 얼마큼 큰지 느껴지시나요?!

잘 안 느껴지는 것 같아 옆샷. 두께는 크게 두껍지 않으나 크기만큼은 크다.
그리고 컬러지에 양장이라 다소 묵직하다. 책 제목의 무게가 고스란히 책 무게에 반영됐다. 주제에 맞는 책 무게! 아, 이런 실존적 느낌을 팍팍 뽐내는 책 탐이 나 좋다. 읽고 싶고, 갖고 싶고, 책 내용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싶은 욕망 자극.
나는 20세기에 태어난 한 세기 전 사람이라, 이렇게 현물,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탐이 난다. 실제 책을 만지고 느낄 수 없는 전자책은 여전히 관심 밖의 대상이다.
아마도 이런 나의 마음으로, 인류는 오랫동안 수많은 것들을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다. 인류 '기록'의 시작은 구석기인들부터다. 그들은 암벽이나 동굴 벽에 정교하면서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들이 벽에 그림을 그린 이유는 당장의 생존과 후대의 번성을 위해 그렸다. 하지만 수 세기 동안 그림 그리기의 행위가 이어져 내려오면서 전혀 뜻밖의 결과로 인류를 바꿔버렸다. 동굴의 그림이 사실적 그림에서 추상적 그림으로 바뀌고, 추상적 그림은 지속적으로 꾸준히 단순하고 규칙적인 기호로 변하면서 문자를 탄생시켰다. 문자를 담을 그릇으로 동굴 벽은 너무나 작았으며 말과 생각을 무한정 담을 수 있는 다른 기록지들을 발명하며 인류는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인간은 뭔가를 기록으로 남기면서 변하기 시작했고, 그 변화는 우릴 언제 어떻게 변화시킬지 모른다.
서해문집, 『불멸의 서 77』은 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고 앞으로도 유의미한 저작들. 그 책들 중 어떤 책은 세상과 인간의 의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데 일조한 책도 있고, 어떤 책은 당시 변화하는 시대를 그대로 담고 있는 책도 있다. 또 어떤 책은 당장은 아니었지만 누적된 결과로 인해 역사의 물꼬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어버린 책도 있다.
77권의 책들은 우리가 읽을 수 없는 책도 있고(ex. 고대 이집트 「사자의 서」), 읽을 수 있으나 읽을 가망성이 없는 책도 있고(ex. 아인슈타인 「일반상대성이론」), 현재 여전히 많이 읽히는 책(ex.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들 중 정말로 우리 인류에게 의미 있는 책 77권을 소개한다.


어맛!

불멸의 서 77권 중 다들 알만한 책도 있고, 생전 처음 보는 책도 있었다(불멸의 책들인데 왜 나는 지금껏 몰랐던 것이냐? >ㅁ<). 알던 책 중에서도 책 제목만 알고 책의 실제 모습은 전혀 몰랐던 것도 있는데 이 책을 보고, 아- 싶었던 것도 있었다. 대부분 고전들이 그랬다. 사실 죽간도 이 책으로 처음 봄. 교과서에서 흑백으로 본 적 있으려나 모르겠는데, 내 기억에 죽간은 김밥말이처럼 돌돌 말려 있는 형태로 드라마 인테리어 소품으로나 봤지 펼쳐진 멋진 모습은 보지 못했다. 이 책 속 『손자병법』 장에 죽간의 모습이 멋있게 실려 있어, 와. '죽간 멋지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실린더 속에 보관되어 있는 모습도 멋짐).

읽기 위한 코란이 아닌, 보고 감상하기 위한 『블루 코란』. 군청색과 황금색의 조화가 멋있고 아름답다.

우리 동양 문화권에선 낯선 서양의 채색책도 많이 볼 수 있다. 화려하고 어떤 책은 입이 떡- 하고 벌어진다. 그중 『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시도서』는 워낙 유명한 책이라 이미 알고 있던 책인데도, 『불멸의 서』로 큰 도판으로 보니 기존의 책에서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시도서』가 얼마나 정교한지, 성벽의 벽돌 하나하나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고, 전염병으로 고통받았던 사람들의 표정이나 옷 주름 하나까지 자세하다. 코발트색 염료를 적재적소에 잘 써 눈길을 사로잡는다.

베살리우스의 『에피톰』
과학사 책이나 의학사 책을 다룬 책을 보면 꼭 베살리우스가 등장하는데 그가 남긴 책은 처음 봤다. 지금 봐도 정교함에 눈이 똥그래지는데 당대 사람들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이 책 제작에만 4년 걸렸단다. 삽화는 미술사 책에 꼭 등장하는 티치아노가 그렸다. 두 거장이 만나 엄청난 작품을 만든 것. 사진만큼 사실적이며, 어느 부분에선 사진으로는 결코 나타낼 수 없는 부분까지 그림으로 그렸다.

생물 교과서에도 나오는 로버트 훅의 『마이크로그라피아』
입이 쫙- 벌어지지 않나요?! 로버트 훅은 교과서에 현미경으로 코르크 조각을 관찰해 식물 세포벽을 관찰한 사람으로 소개된다. 이 책에도 로버트 훅의 세포벽 그림이 실려 있다. 우측 하단 그림. 그리고 현미경으로 관찰한 벌레의 그림도 아주 크고, 자세하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외에도 인류사에 길이 남을 책과 그 책의 삽화가 실려 있다.

1482년 이탈리아에서 출간된 『기하학 원론』
조금 당황스러웠던 것도 있었다. 『불멸의 서77』은 대부분 제작 시기에 맞춰 순서대로 책을 소개하는데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은 고대 시기가 아닌, 르네상스 시기에 배치되어 있다. 오잉?! 유클리드는 헬레니즘 시대가 아닌가. 아마 『불멸의 서77』 저자들이 로마와 중세를 거치며 뚝 끊겨버린 고대 그리스의 유산을, 아랍인들로부터 거꾸로 전해 받았으므로 이곳에 배치했나 보다. 아무튼 당시 기술로 힘들었을 텐데 책 양쪽 여백에 기하학 도형을 삽입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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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손자병법을 언급하긴 했지만, 이 책에 실린 77권의 책 중 동양의 책인 극소수다. 그것도 중국 책 아니면 일본 책이다. 인도 서적도 있으나 인구비례로 따지면 턱없이 부족한 책. 이 책을 쓴 이가 호주인 한 명을 포함해서 대부분 영국인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가 서양 문화를 잘 아는 만큼이나, 그들 또한 동양 문화를 제대로 알다면 동양 서적이 좀 더 많이 실렸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 이 시대는 여전히 대항해시대의 연장선에 놓여 있고, 서유럽인들의 시각으로 세상이 재단되고 있다. 불멸의 77권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이 77권 보다 인류에 더 큰 영향을 미쳤으나 미처 실리지 못한 책도 많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아쉬운 점. 『금강경』 파트였다. 저자가 『금강경』을 중국 둔황에서 발견된 세계 최고 목판 인쇄물이라고 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세계 최고 목판 인쇄물인데. ;ㅅ; 저자들이 『금강경』을 제일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라고 소개한 것은, 비단 중국에서 발견됐을 뿐만 아니라 영국 탐험가가 이를 영국에 들고 갔기 때문으로 추측한다(현재 영국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영국이나 중국 입장에서 『금강경』을 제일 오래됐다고 주장하기 쉽다.
동양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 살면서 영국인이 뽑은 불멸의 77권을 보며 아쉬운 점도 있고 약간 억울한 점도 있지만 만족하며 잘 보았다. 교과서로나, 책으로 접한 적 있지만 그 실물이 어떠한지 알지 못했던 책들을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대부분의 책들이 고전 제목이나 내용만 소개하고, 책 표지나 삽화를 싣는다 해도 흑백이거나 자세히 보기에 그림이나 사진이 너무 작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 책의 역사나 고서에 관심 있는 사람, 인류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책에 관심 있는 분들께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