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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 망국의 신하에서 일본 경제의 전설이 되기까지
시부사와 에이이치 지음, 박훈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12월
평점 :
일본 경제 근대화의 토대를 닦은 인물,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자서전이다. 입지전적의 인물. 일제강점기 우리는 그들의 경제와 금융, 산업 전반을 강제로 이식받았고, 광복 후에도 일본 경제를 롤모델 삼아 고도성장했으므로 일본 경제 근대화의 토대를 닦은 인물을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 읽었다.
읽고 난 소감은, 우리에게 직접적 해코지를 한 인물은 아니지만 넓게 보아서 우리나라를 일본의 병참기지화해 식민 수탈을 하게 한 사람으로 우리가 봤을 땐 '수탈의 아버지'라고 봐야 옳겠다 싶었다. 그러나 개인 인생만 따져 봤을 때 역시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난 인물'이었고 상황 판단이나 생각, 결단력은 본받을 바 많았다.
| 짧다고 생각하면 한순간도 아니고, 길다고 보면 천 년도 더 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일생이다. 하지만 짧은지 긴지는 꼭 흐른 세월의 숫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겪은 일들이 많은지 적은지에 따라, 또는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 내 생애를 말하자면, 옛날 고향에 있을 때는 쟁기와 소쿠리를 짊어졌고, 장마에는 나비가 밀을 먹어버릴까 걱정했으며, 가뭄에는 묘판에 물이 부족한 것을 원망하며 살았다. 그러나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한탄하여, 겁 없게도 국가의 우환을 자신의 우환이라고 여겨 줄곧 살아왔던 초가집을 떠나 서쪽의 수도[교토]로 갔다.
시부사와 에이이치, 『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21세기북스 (p. 14) |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작은 농촌 마을에서 농사꾼으로 태어났다. 부지런하고 엄한 아버지가 가계를 일으켜 세웠고,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에는 글 공부하고, 좀 자라서는 농사와 상업을 배운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아버지를 무척 존경하고 사랑했던 것 같다. 비록 뜻이 달라 각자의 삶을 살게 되지만, 어린 시절을 회고한 글을 보면 그가 아버지에게 배운 바 많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께 혼나거나 잔소리 때문에 섭섭했던 일도 있었지만 커서 보니 아버지의 올바른 우려였다고 받아들인다.
그의 아버지가 정말로 멋진 분이었던 게,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나 뜻을 도모하려 했을 때 그가 아버지와 밤새우며 토론했다는 일화다. 시부사와는 도쿠가와 막부 시대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농사꾼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을 아버지께 말씀드리니 아버지는 농사꾼으로 태어난 이상, 농사 지으며 신분을 바꿀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이윽고 아들의 뜻을 인정하고,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가도록 자유인으로 풀어준다.
| "이제 아무 말도 않겠다. 좋다,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니 맘대로 해라. 지금까지의 토론으로 시세도 잘 알게 되었다. 그런 것을 알고 나서도 그게 네 몸을 망칠 씨앗이 될지, 아니면 이름을 날릴 바탕이 될지 그건 난 모르겠다. 그래, 시세를 잘 알더라도 모르는 것처럼 나는 보리를 기르며 농민으로 세상을 보낼 거다. 설령 정부가 잘못되었더라도, 관리가 무도한 짓을 하더라도 그에 상관하지 않고 복종할 생각이다. 그런데 너는 그럴 수 없다고 하니 하는 수 없지. 오늘부터 너를 자유로운 몸으로 해 주겠다. 그렇다면 이제 종류가 다른 인간이니 대화 상대로 여기지 않겠다. 앞으로는 부자가 각각 자기 좋은 바에 따라 움직이는 게 오히려 깔끔할 것이다."고 하시며 마침내 14일 아침 내 몸의 자유를 허락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 『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21세기북스 (p. 52) |
| "앞으로는 결코 네 행동에 이래라저래라 지시하지 않을 테니 행동에 잘 주의하여 어디까지나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한 조각 성의를 실천하여 인인 의사라고 칭해진다면 생사와 행불행에 상관없이 나는 만족스럽게 생각한다."고 훈계하신 것은 지금도 여전히 귓전에 있는 듯하여 얘기를 하다가도 곧잘 눈물이 난다.
시부사와 에이이치, 『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21세기북스 (p. 53) |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큰 인물로 키운 건 바로 그의 아버지 덕분이 아닐까. 떠날 때 이런 말씀을 해주고, 어떤 믿음을 주는 분이 아버지라면 세상 두려울 것 없을 것 같다. 우리와 역사적 관계를 떠나서 오로지 인간으로만 따졌을 때 그는 참 좋은 아버지를 두었고, 그의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마음속 저 깊은 곳에 소중한 보물을 심어주셨다. 부럽네. 난 세상에 심드렁해서 질투도 부러움도 잘 느끼지 않지만, 좋은 아버지와 존경할 수 있는 아버지를 둔 사람만은 정말로 부럽다.
이 책에는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파란만장했던 젊은 날들이 서술되어 있으나,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던 어린 시절의 일화가 제일 와닿았고 가슴 먹먹했다(위의 발췌문은 나 개인적으로 정말 감동했다).
고향을 떠난 시부사와는 거물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나 같이 뜻을 도모한 사람이 끝까지 반대해 결국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그는 처음엔 화가 났으나 곧이어 그가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고 믿게 된다. 이후 방랑의 시간이 이어지고, 그를 좋게 본 사람의 추천을 받아 민부공자(미토의 군공 도쿠가와 요시아쓰의 아들, 도쿠가와 아키타케)를 모시고 프랑스 만국박람회에 참석한다. 그곳에서 유럽 문물을 받아들인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관찰력이 뛰어나고, 설득력 있는 말을 잘해 중재도 잘하며 이재에도 밝았다. 아마 이런 능력으로 짧다면 짧았다고 할 수 있는 유럽 방문 때(사실 이 기간보다 더 많은 기간 동안 해외 유학해도 별것 배운 바 없이 돌아오는 사람도 많다) 많은 것을 빨아들이듯 서구 문명과 문화, 그들의 제도를 흡수해 온다.
이것이 일본 경제 근대화의 토대가 되었고, 우리 조선을 옥죈 근본 원인이 된다(식민 경제의 근간을 받아 온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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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교수님의 번역이 상당히 좋다. 예스러우면서 리드미컬하게 흐르는 좋은 문장을 구사하신다. 다만, 일본 번역이므로 일본식 문장이 눈에 조금 띄는데 그래도 대부분 우리 식의 문장을 유려하게 쓰셨다.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쓰시는 분인가 보다. 그런데 이 책은 일본 근대를 살았던 한 개인 자서전으로 지엽적인 고유명사(이름, 지명 등)나 일본의 독특한 제도 등이 지속적으로 나온다. 일본 근대 역사나, 일본 관련 기본 지식이 없는 분들은 읽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일본 근대화에 관심 있으신 분, 일본 근대화의 격변기 때 한 개인의 인생을 길라잡이 삼아 그 시대를 읽고 싶은 분께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