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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당신들 ㅣ 베어타운 3부작 2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월
평점 :
다 읽고 나서 힘이 쭉 빠졌다. 진이 빠졌다고 해야 할지, 혼이 나갔다고 해야 할지. 몰입감이 높아 화자의 목소리를 그대로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 된다. 책이 두꺼워 속독으로 빨리 읽으려던 계획은 몇 줄 읽고 깨졌고, 눈에 남은 발자국 따라 걷듯 600쪽이 넘는 책을 한 글자 한 글자, 꼭꼭 씹으며 읽었다. 그래서 마지막 장을 읽고 책을 덮을 때 내 기운이 다 소진됐던 것이리라.
『우리와 당신들』. 이 책은 『오베라는 남자』로 유명한 프레드릭 배크만이 썼고, 그의 전작 『베어타운』의 후속편 혹은 上권, 下권 중 下권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등장인물 그대로, 배경도 그대로, 사건 사고도 그대로. 모든 게 『베어타운』의 뒷이야기지만, 『베어타운』과 느낌이 많이 다르다.
내가 『베어타운』을 읽으면서 설렜던 장면이 있었나, 캐릭터 중 누군가를 응원했던 적이 있나? 눈물을 흘린 장면은 있었나? 어쩌면 눈물은 흘렸을 수 있다. 마야의 이야기나, 벤이의 이야기가 가슴 아프고 그랬기 때문에 울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책 속 어느 캐릭터도 응원한 적 없고, 설렜던 부분은 더더욱 없었다. 『베어타운』을 읽을 때 그 당시는 잘 모르겠지만 지나고 생각해 보면 불편한 마음, 불쾌한 마음이 훨씬 컸다.
물론 『베어타운』에서 저자가 제기한 문제들, 사람들의 행동, 말 등 많은 부분에서 저자의 관찰력이 돋보여 좋았고, 생소한 아이스하키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 그곳이나 이곳이나 사람들은 똑같다는 걸 알 수 있어 유익했다. 그래도 몇몇 부분에서 아쉬웠고, 몇몇 설정에서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와 당신은』, 오랜만에 소설을 읽으며 셀렜고, 꼭 스포츠 응원하는 것처럼 몇 몇 캐릭터를 응원했다. 소설과 뚝 떨어진 채 지켜보기만 하는 독자가 아니라 소설 속 그 장소, 그곳에 내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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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당신들』의 전편이라 할 수 있는 『베어타운』의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하자면 이렇다.
빽빽한 숲으로 둘러싸인 베어타운, 한때 번성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젊은이들이 가망 없는 고향을 떠나 돈을 벌기 위해 대도시로 떠나간 곳이다. 활기 없고, 쇠락한 일만 남은 것 같은 베어타운... 그곳 사람들이 유일하게 희망을 걸고, 그들의 모든 것을 그러모아 한 마음으로 응원하는 것이 있다. 곧 무너질 것 같은, 산산히 조각나 버릴 것 같은 베어타운을 묶는 것, 그것은 '아이스하키'다. 전국에서 딱히 부각받지 못하는 작은 도시의 아이스하키 팀이지만, 라이벌인 이웃 마을, 헤드와는 철천지원수이며 두 아이스하키 팀의 승패에 따라 폭행, 패싸움, 방화가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곳이다. 그들에겐 아이스하키가 최고이며, 전부다. 그들이 부여잡고 있는 마지막 희망이자, 사랑, 집착.
이 마을에 하키 천재가 자란다. 소년은 사람들의 기대대로 잘 자라주었고 베어타운의 희망이 된다. 그 아이가 전국 규모의 경기에서 대활약을 한다면, 그래서 승리한다면 베어타운에 아이스하키 관련 어마어마한 예산이 배정될 것이고, 그 돈으로 낡고 볼품없는 인프라가 새롭게 구축되고,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건물이 건설될 것이며, 아이스하키 교육의 메카 그래서 전국에서 몰려든 아이스하키 꿈나무들로 넘쳐 활기차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곳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일자리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경기가 있기 전, 하키 천재는 베어타운 아이스하키 단장의 딸, 마야를 성폭행했고 그 사실을 안 단장은 선수들이 버스를 타고 원정 경기를 떠나기 직전에 신고해 하키 천재를 경찰이 연행하도록 한다. 하키 천재가 빠진, 베어타운 청소년 팀, 나머지 팀원들이 모두 최선을 다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패하고 만다.
우승이 날아가 버리자 희망이 꺾여 분노한 마을 사람들은 희생양을 찾는다. 그것은 성폭행을 당한 '마야'다. 사람들은 하키 천재보다 마야를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욕하고, 공격하며 갖은 괴롭힘을 가한다.
이것이 『우리와 당신들』의 전작, 『베어타운』의 주된 줄거리다. 결말은, 성폭행 피해자 마야가 친구 아나에게 총기 사용법을 익히고 총 쏘는 것을 연습한다. 그리고 성폭행 가해자이지만 '베어타운'의 모든 사람들의 두둔과 암묵적 용인으로 별일 없이 지내는 천재 소년에게 마야는 복수를 한다. 마야는 하키 천재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죽이지 않는다. 천재 소년은 자기 앞에 겨눠진 총 앞에서 바지에 오줌을 지리고, 얼마 뒤 부모님과 '베어타운'을 떠난다.
이것으로 마야는 복수를 제대로 한 것일까. 속이 시원할까. 상처받은 자기 몸과 마음이 다 아물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마을 사람들, 학생들의 괴롭힘은 끝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야의 기억 속, 마음속에서 끝없이 성폭행을 당할 때의 그 순간이 반복되어 지옥 속에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마야는 절친인 아나와 함께 하루를 견뎌낸다.
사실 『베어타운』은 내가 읽기에 상당히 불편하고 불쾌한 뭔가가 있었다. 전지적 관찰자 시점의 내레이션도 어딘지 낯설고 끝까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물론 흥미롭게 읽었고, 아이스하키란 스포츠가 매력적이고, 저자가 갖은 사람들을 묘사를 날카롭게 해 엄청나게 많은 띠지를 책에 빽빽하게 붙이고는 메모에 메모를 했었다. 하지만 불편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나도 마야처럼 여성이고, 무섭고 두렵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라 생각한다. 뉴스에서 누군가에게 일어난 불행한 사건을 접하면 그 사람을 동정하고, 어떨 때는 직접 물질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주변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게 만들고 그래서 그 당혹스러움에 짜증과 화가 날 때가 있다. 『베어타운』의 몇몇 설정들, 마야 주위 사람들의 반응, 사건 전개, 계속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듯한 내레이션 등등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뭔가를 아주 가는 바늘 끝으로 살짝살짝 내 손가락을 건드리다가 어느 순간 세게 찌르고 빼는 듯한 느낌을 줬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눈물이 찔끔 나는 분노, 불편.
그리고 저자가 베어타운의 몇몇 존재들을 자세한 설명 없이 너무 신비스럽게만 묘사하여, 부아가 살짝 치민 부분도 있었다. (왜 자꾸 말할 듯 말 듯 , 끝까지 말 안 하냔 말이냐! - 검은 재킷을 입은 사람들)
하지만 『우리와 당신들』은 『베어타운』에서 느낀, 불편한 감정이 전혀 들지 않았다. 여전히 전작처럼 보여줄 듯 말 듯 한 부분이 있지만, 곧 정체가 드러나고 사건에 연계된 사람들의 됨됨이, 각자의 사연을 수긍이 되도록 자세히 들려준다.
세상에 전적으로 나쁘기만 한 사람은 없다.
세상에 전적으로 좋기만 한 사람은 없다.
그리고 누군가의 아픔, 상처를 반복해 묘사하지 않는다. 주위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하며 자책하거나 괴로워하는 모습이 대폭 줄어들었다. 마야의 동생인 레오가 누나가 겪은 일에 대한 복수의 일환으로 도발이나 폭행 등 여러 사건에 휘말리는데 차라리 자책하며 가만히 앉은 것보다 위험하더라도 레오처럼 움직이고, 끝장을 볼려는 태도는 어떤 카타르시스, 혹은 감정이입이 되었다. 또 이 작은 열두 살짜리 소년이 무슨 생각 할까, 곧 어떤 행동을 하며 어떤 사고를 칠까 궁금해 계속 책을 읽게 된다.
그리고 베어타운 아이스하키단의 훌리건이라 할 수 있는 '그 일당', '검은 재킷을 입은 사람'들의 존재도 수면 위로 드러나 뭔가 깔끔히, 말끔히 정리되는 게 있다. 그들도 대화, 혹은 커뮤니케이션 방식만 제대로 알면 충분히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들에겐 의리가 있었는데 이 '의리'에는 뭔가 사람을 동조케 하는 어떤 힘이 있다. 이 힘은 '이 사람들이라면 믿을 수 있겠어'라는 만고 저자가 상상으로 만든 허상의 캐릭터에게 내 감정을 이입하고 그들을 응원을 했다. 부당한 일, 부당한 폭행이 벌어지면 그들이 나타나 주길 바라며.
그리고 베어타운과 베어타운 아이스하키 팀이 쫄딱 망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를 지속할 수 있는 데에 '리샤르드 테오'라는 지역 의원 캐릭터가 큰 역할을 하는데 이 캐릭터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전형적인 기회주의자, 남을 이용하고 등 처먹는 그런 캐릭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전개 중간중간, 고구마 먹다 막힌 구석을 사이다로 시원하게 뚫어주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준다. 돈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아이스하키 팀에게 지원금을 턱하니 배정한다거나 어둠의 경로로 다양한 수를 쓰는 것도 나는 사실 좋았다. 분명 그가 벌인 지탄받을 요소, 아첨, 거짓말 등은 정당하지 못하고 얍삽한 행동들인데도 소설을 읽으면 그게 용인이 되고, 어떤 쾌감을 독자에게 제공하다. 전형적인 캐릭터지만 프레드릭 배크만이 개성있게 캐릭터를 잘 만들었다고 본다.
또 새롭게 등장한 캐릭터인 '엘리사베트 사켈'.... 베어타운 하키팀에 새로 부임한 코치로 능력있다. 하지만 상당히 독특하고 남들과 감정 교감 불가하며, 생각하는 것도 희한해 주위 사람을 난감하게 만들지만 그래서 상당히 재밌는 캐릭터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존재해야 한다며 즐겁게 읽었다. 풀리지 않거나 아주 복잡하게 느껴지는 문제는 종종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열쇠가 딱 들어맞을 수 있다.
살아가면서 진심으로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몇 번이나 될까?
거의 무의미한 무언가를 전혀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기회는 몇 번이나 주어질까?
프레드릭 배크만, 『우리와 당신들』, 다산책방, 2019 (492쪽)
어쩌면 이 소설은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베어타운, 헤드 마을 사람들의 아이스하키에 대한 애정, 부부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단단하게 이어진 선수들 혹은 어떤 일당들의 형제애, 투박하지만 서로 보듬고 든든한 존재가 되어 주는 사이들... 어쩌면 『우리와 당신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와 당신들』은 불쾌한 것도, 불편한 것도 없다. 자기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과 세상으로부터 오해받는 사람들(가령 티무나 비다르),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괴롭히며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는 사람들(빌리암)이 이 책에는 없다. 그들의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이들도 누군가로부터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신뢰를 나누는 사람임을 보여주며, 감정적으로 깨지기 쉬운 면도 있음을 드러낸다. 모든 캐릭터에게 정과 사랑을 느끼며 책을 읽을 수 있다. 그 캐릭터가 겁이 많든,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폭행을 저지르고 살인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든.
이 소설에서도 언급되지만 공포물을 볼 때 제일 무서운 부분은, 공포의 대상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바로 직전이다.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 두려워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도 한 면만 봤을 때, 베일에 가려져 있는 모습만 봤을 때 우리들의 편견이 발동하여 오해하고, 함부로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 '그런 줄 몰랐어요, 단지 잘 몰라서 오해했을 뿐이에요'라고 순진한 듯, 당황한 듯 말할 수 있을 테지만. 어쨌든 누구나 그 사람의 다른 면, 따뜻한 면, 어린 시절 어떻게 자랐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며 살았는지 그것만 알아도 오해나 함부로 판단하고 단정짓는 일은 많이 줄어 들 것이다.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나의 시간은 나만의 흐름대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시간과 흐름에 말려 그 사람에게 맞춰진다. 보통 잡생각이라고 말하는 ‘자의식’도 조용해진다. 시공간의 흐름이 평상시와 다른 느낌. .. 좋은 책이나 재밌는 책을 읽을 때도 나의 시간과 공간은 평상시와 다르다. 나의 시공간은 책의 흐름, 작가가 의도한 흐름에 맞춰진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사라졌고 내 시간은 책의 흐름에 맞춰졌으며, 나의 공간은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움직였다.
뭐, 빙빙, 돌려서 말하고 있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재밌었다’라고 4음절로 짧고 간단하게 표현 가능하다.
원래 속독으로 빨리 읽으려던 책인데, 너무나 재밌게 잘 읽었고 이야기 전개나 캐릭터 몰입도가 높아서 저자의 흐름에 끌려 들어가 한 자 한 자, 빼놓지 않고 정독해 읽느라 완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정말 잘 읽었고, 좋았다. 다 읽고 나서 기운이 쭉 빠졌지만 이건 결말이 시시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잘 읽어서 그렇다(말미에 뭔가 급작스럽게 모든 일이 잘 해결되는 그런 게 조금 오글거리긴 했지만 이것 외엔 그리 흠잡을 데가 없다).
사람이란, 공동체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작가가 자기가 만든 캐릭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느낄 수 있었던 소설.
프레드릭 배크만의 다음 작품도 기대한다.
덧붙임 > 『우리와 당신들』에 나온 두 개의 사랑이야기가 참 좋았다. 얼마만에 설렘설렘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