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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ㅣ 아르테 미스터리 1
후지마루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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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밤을 소중하게 간직해.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 거야." 후지마루,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아르테, 2019 (45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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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하며 깨달았다. 아아, 또 실수했구나. 사람은 언제나 잃고 나서야 후회한다. 언제나 잃고 나서야 소중했음을 깨닫는다. 알고 있었는데. 행복은 반드시 망가진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또 실수하고 말았다. 이날, 아사쓰키 시즈카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후지마루,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아르테, 2019 (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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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재밌게 읽었다. 책 한 번 펼치니 화장실 가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아니, 화장실 가고 싶은 생각은 아예 들지 않을 정도로 몰입해서 읽었다. 요즘 읽은 책 모두 다 재밌어서, '이 책도 재밌게 읽었다' 라고 쓰니 뭔가 내가 어떤 책이든 다 재밌게 읽는 사람 같은데, 아니요, 아니요. 저 꽤 까다로워요. 줏대 없어보일런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책은 정말 재밌답니다. 추천해요. 乃
후지마루 作,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원제 : 時給300円の死神)은 일본 현대 소설과 라이트 노벨 그 중간 어디에 있는 소설이다. 정통 소설이라 하기엔 뭐하고, 그렇다고 가볍기만 한 라이트 노벨이라 하기에도 뭣하다. 딱 그 중간쯤.
그리고 신기한 것이, 이 책을 펼쳐서 첫 페이지를 읽을 때부터 다 읽고 덮을 때까지 소설책을 읽는다기 보다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본 것 같았다. 배경, 주인공, 줄거리, 대사 하나하나가 애니매이션을 보듯, 눈 앞에 그려진다. 특히나 호소다 마모루의 작품을 본 것 같았다. 만고 나의 상상이지만, 저자인 후지마루가 호소다 마모루의 영향을 많이 받았거나, 혹은 그의 애니를 보는 것처럼 책 속 장면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글로 풀어 쓴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면 좋겠는데, 그렇다면 감독은 꼭, 호소다 마모루이길 바란다. 호소다 마모루의 감성과 꼭- 닮은 책이다.
책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삶에 찌들 대로 찌든 고등학교 남학생(이름 : 사쿠라)이, 절망에 사로 잡혀 횡단보도에 서 있을 때 정체 불명의 묘한 사람이 그의 앞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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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와드릴까요? 당신에게 딱 맞는 일이 있습니다." "일?"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닿을 리 없는 목소리가 신기하게도 내 안에서 들려왔다. 심장을 붙잡힌 것 같아서 섬뜩했다. 나는 뭐라고 대답했더라. 몹시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그 목소리가 나에게 손을 휘휘 흔들었다. "조만간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다음 순간, 어느새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비에 녹아든 듯이. 인파에 섞여든 듯이. 마지막까지 웃음을 흘리던 그 사람은 비 너머로 홀연히 사라졌다. 남겨진 나는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느 틈엔가 잿빛 공포는 물러갔다. 비일상과의 접촉은 어쩐지 얼떨떨했다. 후지마루,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아르테, 201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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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같은 반 여학생(이름 : 하나모리)이 사쿠라네 집으로 '고용계약서'를 들고 왔다. 일자리는 시급 300엔(대략 원화로 3,000원 │ 요즘 우리나라 기준으로 보면 완전 노동 착취 수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 이른 아침에도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내고, 때로는 한밤중에도 일을 한다. 부려먹긴 부려 먹긴 엄청 부려먹는데 시간 외 수당은 전혀 없다. 교통비도 없다. 밥값도 주지 않는다. 일 할 때 소요되는 부대 비용은 본인이 미리 받은 시급에서 무조건 써야 한다. 노동 착취 수준이 아니라 거의 노예 부려먹는 수준이랄까. 그나마 노예보다 나은 건, 언제라도 일을 못해 먹겠으면 고용 해지 서류에 사인하거나 도장 찍으면 곧바로 고용 계약이 해지된다(자유 의지로 계약을 맺고 해지할 수 있는 건 좋다).
사쿠라는 어이가 없을 만큼 열악한 알바라며 저어했지만 '즉시 채용!' '시급 선 지급'이란 조건에 마음이 끌렸다. 살짝 갈등 했지만, 사쿠라는 하나모리의 제안에 응한다. 그리고 이 노동 착취 수준의 알바가, 절망에 빠져 삶의 낙이 없던 사쿠라의 인생을 구원해 주는 계기가 된다.
사쿠라가 하게 된 아르바이트는 바로 사신(死神) 아르바이트다. 세상에 남은 미련과 후회 때문에 하늘 나라로 올라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죽은 사람들(이 책에서는 한자 어휘인 사자死者로 표현한다)을, 사신 알바생들이 도와주어 하늘 나라로 올라가도록 해준다.
사쿠라는 6개월 한시적으로 사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총 다섯명의 사자를 하늘로 올라가는 데 도와준다. 한때 자신의 여자친구 였던 '아사쓰키', 누군가의 변변찮은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구로사키', 약한 몸으로 아기를 낳다 죽어 사자가 '히로오카', 엄마에게 학대 당하다 죽임을 당한 여자아이 '시노미야', 그리고 같이 6개월 동안 사신 알바를 했던 '하나모리'... 사쿠라는 이렇게 다섯 명의 사자를 도와준다.
사실 이 소설이 참 괜찮은 것이 무작정 선(善), 착함을 강요하지 않는다. 등장인물 모두 평범하면서도 속에 웅크리고 있는 '약한 마음'이 '악한 마음'으로 바뀌어 못된 짓을 저지른다. 예로, 첫번재 손님이었던 선량하고 착한 '아사쓰키' 역시 '사쿠라'가 마음 아프거나 말거나 자신의 바람을 채우고 하늘로 떠난다. 사자들이 마음의 응어리를 풀고 하늘로 올라갈 때도 갑자기 뭔가 깨달음을 얻거나, 갑자기 개과천선하여 착한 사자로 변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이 못해 본 것을 해보고, 외면하고 회피하고 싶었던 자신의 추악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직시한 순간 떠난다. 또 착하고 밝은 사자인줄로만 알았는데 마음에 늘 분노가 깃들어 있어 자길 도와주려는 사신에게 저주를 퍼붓고 마음에 상처를 준 채 떠난 사자도 있다. 사랑하는 아들을 괜히 낳았다는 생각에 괴로워 하는 사자도 있으며, 친어머니에게 직접 죽임을 당해 도대체 엄마의 진짜 마음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 하는 사자도 있다.
보통 소설들은 그냥 '좋게 좋게', '그래야만 하니까', '일반 도덕률에 따라' 소설의 끝에 사자들의 응어리를 풀고 눈물 흘리며 '어머니를 사랑한다' 혹은 '자식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저승으로 떠나는데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고 직접 말하거나, 작은 깨달음을 얻고 훌쩍 떠난다.
이런 전개가 이해가 되고, 사자들이 그렇게 몇 날 며칠, 혹은 몇 년을 이승을 헤매다 갑자기 저승으로 떠나는 모습이 나는 이해가 된다. 저자 후지마루가 어떤 생각으로 전개를 이런 식으로 했는지 그 의도도 어렴풋 알 것 같다. 게다가 난 어설프게 좋게, 선량하게 끝맺는 것보다 이런 결말이 나는 더 좋다. (다만, 이 소설의 맨 끝은 해피엔딩으로 좀, 솔직 담백한 전개에 비해 밋밋하고 일반적 결말이다)
가족이기에 강요되는 '사랑의 덕목'들. 가족간의 '사랑', '책임감'은 실로 복잡한 것이라서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고, 사회가 강요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중산층의 행복한 가정을 이상향으로 제시해 왔고, 많은 가정이 이상적 모습의 중산층 가정을 따라하기 위해 많이 애써왔다. 겉보기에 행복하고, 만족스럽고, 사랑으로 넘치는 가족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뜯어보면 뭔가 미묘하게 어그러지고 부서져 서로가 서로를 학대(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그리고 이 학대 속에는 무관심과 방임도 포함된다)하고, 외로워하고 괴로워하며 그러면서도 어떤 마음의 끈을 놓지 못한다.
가족의 복잡다단하고 심리적, 감정적 문제는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구나.
이 소설은 겉으로는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사신을 저승으로 보낸다는 임무를 부여받은 주인공 이야기지만 이 소설의 핵심은 결국 '가족 간의 사랑'이다. '가족의 사랑과 책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소설로, 책을 덮고 난 후의 울림이 크다. 물론 사람마다 살아온 바 다르고, 가족, 가정에 대해 겪은 바 생각하는 바가 각기 달라 저자가 말하고자 한 내용이 가슴에 와닿는 정도는 모두 다를 것이다. 어쨌든 나는 신선한 느낌으로 잘 읽었다.
특히 다른 캐릭터보다 주인공인 사쿠라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사쿠라의 아버지는 본디 유명인이었는데 사고를 쳐서 하루 아침에 교도소에 들어가고, 출소 후 재기를 위해 시작한 사업은 실패하여 빚쟁이로 전락한다. 이 과정에서 부모님은 이혼한다. 사쿠라의 어머니는 사쿠라를 언제나 사랑으로 대했지만, 이혼할 때 어머니는 선선히 사쿠라의 양육권을 포기한다. 이때 사쿠라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쩌면 배신감이리라. 언제나 자신을 사랑으로 다해 준 어머니가, 너무나 쉽게 자길 포기하고 떠나겠다니! 어머니가 자신에게 줬던 사랑까지도 의심스럽다. 집에 돈이 없어 굶어야 하는 것보다, 큰 고민도, 큰 안타까움도, 큰 괴로움도 없이 자길 떠난 엄마 때문에 삶이 힘들었다.
어쨌거나 사쿠라는 사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정리한다. 요건 체념이 아니고 어머니에 대한 '이해'라 할지 '수긍'이라할지, 그런 것.
이 책은, 이런 마음의 갈등, 상처, 응어리를 '소박한 행복'에서 찾는다. 일상에서 나눌 수 있는 재밌지만 실없는 농담들, 이룰 수 있을지 몰라도 가볍게 상상하고 꿈 꿔보는 미래와 장래 희망, 딱히 이렇다할 내용은 없어도 삐뚤빼뚤 정성껏 쓴 자식의 편지, 하교 후 집에 들어섰을 때 환한 미소로 맞아주는 엄마의 미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와 손을 잡고 이곳 저곳을 놀러다니고, 작은 일이지만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자기 과거와 자기 생각을 스스럼 없이 이야기하고 들어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순간, 그 기쁨, 그 행복이 참 의미있다고 표현한다. 저자는 이것은 '작은 기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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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이 아이가 여행을 떠나면 다시 잊어버릴 허망한 기억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음 세상으로 이어나가면 분명 언젠가, 잊어버렸을 무렵에 작은 행복으로 만날 수 있다. 잔혹한 세상에 한 줌의 호의가 더해지면 분명 세상은 멋있어진다.
후지마루, 『너는 기억 못할테지만』, 아르테, 2019 (363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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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우리 삶을 지탱하는 건, 너무나 평범해서 내일이면 잊을 소박한 일상과 웃음, 농담들이 아닐까 싶다. 기억에서 너무나 쉽게 잊히는 소박한 기쁨들, 행복들. 하지만 이런 것들로 우리 삶은 이뤄지고,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막연하게 '희망'을 안고 오늘 또 한 발 내딛는 것. 이런 한 걸음, 한 걸음이 우릴 이루는 삶, 인생일 것이다.
작은 호의, 작은 배려, 작은 농담, 작은 인정, 작은 기쁨, 작은 안도, 작은 행복.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라는 어떤 강박에도 결박되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