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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 뇌과학자의 뇌가 멈춘 날, 개정판
질 볼트 테일러 지음, 장호연 옮김 / 윌북 / 2019년 1월
평점 :
37살, 촉망받는 뇌과학자.
여느 아침처럼 출근하려고 일어났다. 그런데 갑자기 눈 뒤쪽으로 찌르는 듯한 엄청난 통증을 느낀다. 예전부터 편두통을 앓아왔기 때문에 운동하면 나아질까 싶어 운동 기구에 오른다. 하지만 운동 기구 위에서 달리는 자신의 몸이 기이하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바라보던 자신의 몸이 아니다. 자기 눈높이가 아니라, 전지적 시점, 저 우주에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것 같다.
운동하는 것보다 샤워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욕실로 간다. 그런데 욕실의 불빛이 너무 밝아 눈이 아프고, 자신의 몸을 때리는 샤워기 물의 느낌이 기묘하고 낯설다. 자신의 몸이 자기 몸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과 자신의 구분, 사물과 자신의 구분이 잘되지 않는다. 기묘하고 낯선 느낌, 자신에게 이상이 생겼음을 알아채고 욕실 밖으로 나온다. 이때 자신의 오른쪽 근육들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오른쪽 팔이 꼭 자신의 몸이 아닌 양 축 처져 자신의 몸뚱이를 때린다. 이때 깨닫는다. 뇌, 졸, 중.
그녀는 두려웠을까, 무서웠을까, 어땠을까.
‘맙소사, 뇌졸중이야! 내가 뇌졸중에 걸렸어!’ 그리고 다음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다. ‘우와 이거 멋진데!’ 일시적으로 황홀한 마비 상태에 빠졌다. 내가 이렇게 복잡한 뇌의 작용을 예기치 않게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은 실은 다 생리적 이유를 알고 있어서였다는 생각이 들자 묘하게 우쭐한 기분이 되었다. 나는 계속 생각했다. ‘자신의 뇌 기능을 연구하고 그것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진 과학자들이 얼마나 될까?’ 나는 인간의 뇌가 현실을 인지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놀라운 통찰을 안겨주는 뇌졸중을 겪고 있는 것이었다!
질 볼트 테일러,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2019, 윌북 (30쪽)

이 책은 37살, 촉망받는 하버드대 뇌과학자가 겪은 뇌졸중 경험과 극복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경험과 더불어, '우리의 뇌는 무엇이고, 행복을 위해 우린 어떻게 해야 하나'를 이 책에 담았다. 단순히 뇌졸중 경험을 담은 책이 아니다. 환자, 환자 가족에 대한 현실적 조언을 담은 책도 아니다.
뇌 과학자답게 최대한 사실적이고 논리적인 과학적 서술로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뇌과학자로서 가지고 있는 지식을 뇌졸중 경험과 접목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올바른 지식'을 전하고, 그들에게 '힘'을 보태주기 위한 책이다. 저자는 우리 머릿속의 좌뇌와 우뇌가 우리 몸의 명백히 다른 분야를 처리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뇌졸중 경험으로 좌뇌와 우뇌는 확실히 다른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저자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좌뇌와 우뇌의 다른 점을 이해하고, 이 이해를 바탕으로 누구나 '행복을 선택'할 수 있음을 알리고자 이 책을 쓴 것이다.
그녀는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선천적으로 뇌혈관 기형이었다. 오랜 세월 편두통에 시달렸는데, 추측하기로 오랜 세월 미량의 뇌출혈이 계속 있었고 이것이 편두통의 원인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뇌졸중을 일으킨 날, 소위 피떡이 터져 좌뇌의 세포가 피로 뒤덮였고, 이로 좌뇌가 관장하는 많은 능력에 문제가 생겼다. 좌뇌가 이런 쇼크 상태에 빠지자, 그동안 잘 인지하지 못했던 우뇌의 능력이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졌고 저자는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과 비슷한 경험을 한다.
‘왜 이러지? 예전에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나? 이런 기분이 든 적이 있었나? 마치 편두통 같아. 뇌 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집중하려고 애쓸수록 생각들이 휙휙 지나가 버렸다. 내게 필요한 대답과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서서히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내 삶과 나를 단단히 묶어놓았던 끊임없는 뇌의 재잘거림이 잦아들자 그 자리에 평온한 행복감이 밀려와 나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두려움을 담당하는 뇌 부위인 편도체가 이런 낯선 상황에 놀라 나를 공포 상태로 몰아가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좌뇌의 언어 중추가 침묵하고 삶의 기억들이 저편으로 멀어지면서 편안한 감정이 찾아왔다. 고차원적인 인지능력과 일상과 관련된 세세한 부분들이 기억에서 사라지자 내 의식은 모든 것을 다 아는 전지의 수준으로 도약한 것 같았다. 마치 우주와 ‘하나가 된’ 듯했다.
질 볼트 테일러,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2019, 윌북 (26-27쪽)
그녀의 정신은 열반의 경지에 들어갔지만, 신체 능력과 인지 기능은 갓난아기 수준으로 돌아갔다. 멍하고, 말뚱말뚱 쳐다보는 얼굴, 침을 흘리고 제대로 일어나 걷지도 앉지도 못한다. 몸은 37세, 여성이나 모든 기능이 갓난아기로 돌아간 것이다. 멀리서 비행기를 타고 보스턴에 어머니가 도착한다. 어머니는 모든 걸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저자를 갓 태어난 아기처럼 보살피고 교육한다. 침대 위에서 몸을 흔들흔들거리며 몸 뒤집기 하는 갓난아기를 보고 응원하듯, 몸을 흔들흔들거리며 앉는데 애쓰는 갓난아기를 보고 응원하듯,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는 갓난아기를 보고 응원하듯 저자의 어머니는 놀라움과 기쁨으로 아기를 돌보는 산모처럼 저자를 돌본다. 불안해하지 않고, 불행해 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으며.
어머니의 지극하고 현명한 케어로 저자는 우뇌의 행복에만 머물지 않기로 한다. 어머니가 있는 세계, 충분히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길 바라며 고통스러움이 뒤따르는 좌뇌의 세상으로 조금씩 돌아오려고 애를 쓴다. 이 모든 것은 사소한 것에도 기뻐하고, 응원하고, 모든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어머니 덕분이었다.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어머니의 절대적인 믿음이 저 행복의 세계에서, 논리적이고 소통의 세계로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를 이끈 것이다.
놀라운 책이다. 뇌과학자가 겪은 뇌졸중도 놀랍지만 이를 극복한 그녀의 의지와 노력도 놀랍고, 단지 뇌졸중 극복에 머물지 않고 본인이 겪은 것을 과학자답게 최대한 논리적이면서도 사람들이 이해 가능토록 설명하려 애쓰는 것도 대단하다.
사실 이 책은 뇌졸중에 걸린 사람이 쓴 책치고 너무나 논리 정연하고, 생생하다. 이에 대해 그녀는 좌뇌에 출혈이 있었지만 우뇌는 멀쩡했었다고 설명한다. 우뇌가 당시 모든 걸 다 인지했고, 후에 뇌졸중에 차도가 있자 관련 전문가 자신이 겪은 것을 재구성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할 때 조금씩 과거가 달라지듯, 그녀의 설명도 완전한 것이 아닐 수 있겠지만 완전히 허구는 아니라 생각되며 거의 대부분 진실하다 여겨진다.
이 책은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읽힐 수 있을 것 같다. 뇌졸중에 걸린 분, 뇌졸중을 앓고 있는 가족을 둔 분, 뇌에 관심이 있는 분,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데 관심 있는 분, 행복에 관심 있는 분 등등 각기 이 책을 다른 느낌으로, 다른 생각으로 읽을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확신을 갖고 딸의 재활을 돕는 어머니, 저자 스스로의 노력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두고두고 기억해 나의 지침으로 삼고 싶다.
이하 인상 깊었던 구절들.
- 우리는 회복을 위해 지금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명히 구분했다. (90쪽)
- 나는 집중력을 발휘하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완성한 후의 짜릿한 성취감 때문에 더 하고 싶었다. (93쪽)
- 읽는 법을 다시 배우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도 훨씬 힘들었다. (...) 읽는다는 개념 자체가 어려웠다. (95쪽)
- 읽기를 배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옆에서 지속적으로 동기를 부여해야 했다. 먼저 꼬불꼬불한 그림마다 각기 이름과 연관된 소리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했다. 이어 꼬불꼬불한 그림들이 모여 특별한 소리의 조합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배웠다. 이런 소리의 조합이 길게 연결되면 의미를 가진 하나의 소리, 즉 단어가 만들어졌다! 맙소사, 한번 생각해보라! 여러분이 이 책을 읽는 이 순간에도 여러분의 뇌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사소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분주히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96쪽)
- 주의의 부정적인 기운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기가 어려웠다. (...) 바쁜 세상을 마주하는 것은 두렵고 겁이 나는 일이었다. (99쪽)
- '평화는 생각하기 나름이야. 평화를 이루려면 지배적인 왼쪽 뇌의 목소리를 잠재우기만 하면 돼.' (107쪽)
- 나의 뇌는 새로운 자극에 흥분했고 적절한 수면으로 균형을 맞춰주면 기적이라 할 만한 치유력을 보여주었다. (107쪽)
- 가령 시각의 경우, 한쪽 눈에 안대를 씌워 시각 피질 세포로 들어오는 자극을 막으면 이 세포들이 인접 세포들과 접촉하여 다른 할 일이 없는지 알아본다. 나는 주위 사람들이 뇌의 가소성을 믿고, 그것의 성장과 학습 및 회복의 능력을 믿어주기를 바랐다. 세포의 물리적 치유 과정에서 충분한 수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108쪽)
- 나의 경우 회복 과정에서 수면의 치유력이 정말로 중요했다. (109쪽)
- 주위 사람들의 격려가 필요했다. 내가 아직 가치 있는 사람이란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내겐 차근차근 실현시켜나가야 할 꿈이 있었다. (110쪽)
- 에너지가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매일매일 해야 할 일을 아주 신중하게 선택해서 배분해야 했다. 나는 가장 절실히 되찾고 싶은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고 다른 일에는 기력을 낭비하지 않았다. (111쪽)
- 도움을 받으며 매주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단계를 하나하나 밟아갔다. (114쪽)
- 성공적인 회복을 위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했다. 우리는 매일 내가 거둔 성취를 축하하며 내가 얼마나 잘 해내고 있는가에 대화의 초점을 맞췄다. (...) 내가 회복에 성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비결 중 하나는 회복 과정 중에 현 상황을 넘어서려고 의식적으로 계속 노력했다는 점이다. (115쪽)
- 내가 회복에 성공한 것은 전적으로 모든 과제를 더 작고 단순한 과정들로 나눌 줄 아는 능력 덕분이었다. (116쪽)
- 그리고 회복하려는 내 시도에 응답해준 뇌에게 하루에도 수천 번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 무슨 일이든 마음먹기 나름이다. 나는 가급적이면 내 인생에 고마워하는 쪽을 택했다. (126쪽)
- 지금은 닌텐도 '두뇌 훈련 게임'과 '말랑말랑 두뇌 교실'로 연습하고 있다. 뇌졸중 환자뿐만 아니라 마흔이 넘은 사람들도 이런 두뇌 훈련 도구를 활용하면 좋다. (127쪽)
- 몸의 기능을 회복하는 데는 상상력을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특정 과제를 수행하는 기분이 어떨지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 빠른 회복에 도움이 되었다. (127쪽)
질 볼트 테일러,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2019, 윌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