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의 포고 제5조는 '영어를 공용어로 한다'였다. 적어도 미 군정청을 둘러싼 당시 임시정부 주변의 공식 언어는 영어였다. 지주 집안으로 일찍이 구미 유학 기회를 잡은 사람들, 미 선교사와 어울려 영어 좀 쓴다는 이들이 득세했다. 군정청이 잠시 운영한 군사영어학교 출신들도 48년 건국 후 대부분 고위 장성으로 승진해 창군 주역이 됐다. 백선엽.정일권 등이다. 간첩 혐의를 받아 50년 형장 이슬로 사라지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최근 영화화되는 김순임 역시 세련된 영어와 미모를 무기로 미군 핵심부에 접근할 수 있었다. 유창한 영어가 곧 정치 권력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중국과 동아시아 문제에 밝았던 미 언론인 에드거 스노는 그런 해방 정국을 '통역관 정치'라고 비꼬았다. 그때 활동한 수백 명의 통역관은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나 총리실의 핵심 보좌관들로, 파란 눈의 권부 실력자들의 한국관(韓國觀)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60여 년이 흐른 오늘날, 영어의 기세는 더욱 하늘을 찌른다. 과도한 사교육 열풍을 걱정하는 '영어 망국론' 이 나오는가 하면, 사실상의 세계어를 어릴 적부터 한글처럼 가르치자는 '영어 공용화론' 주장도 일각에서 대두된다. 이 틈바구니에서 프랑스어나 독일어 같은 전통 제2외국어는 고사 직전이다.
20세기가 영어의 세기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으로 군림하는 오늘날 지구촌 65억 인구 넷 중 한 사람꼴로 영어를 할 줄 안다. 인터넷에 유포되는 디지털 문서의 80% 이상은 영문이다. 일찍이 이렇게 될 줄 간파한 이는 독일 제2제국의 철혈(鐵血) 재상 비스마르크다. 1898년 무엇이 향후 근대사를 좌우하겠느냐는 질문에 "북아메리카 사람들이 영어로 말한다는 사실"이라고 답했다. 지하드 같은 이슬람 반미 지하단체의 선전 방송이 영어다. 자존심 강한 중국 정부도 내년 베이징 올림픽 때까지 베이징 시민 셋 중 한 사람은 영어회화를 할 수 있게 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요즘 토플 대란으로 이를 주관하는 미국 교육평가원(ETS)의 무성의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나 않을지. 한 해 180개국의 학생.직장인 2400만 명이 영어 실력을 평가받겠다고 목매고 있으니. 오늘날 영어는 토플.토익이라는 '교육 권력'의 형태로 우리 곁에 더욱 바짝 다가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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