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와 분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3
윌리엄 포크너 지음, 공진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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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타이틀을 달고 출간되는 소설 가운데 꾸준한 오역으로 독자가 호갱임을 증명해주는 책들이 몇몇 있다. 제임스 조이스와 윌리엄 포크너의 특정 작품이 대표적인데, 여기서 그 작품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포크너의 The Sound and the Fury 를 처음 읽었을 때가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 전이었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불어본(Le Bruit et la Fureur)을 먼저 보았다.


정상적인 구문에서 벗어난 희한스러운 문장들과 빈번한 시간이동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리고 2부 퀜틴 섹션의 경우 "이것은 산문이 아니라 운문"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읽은 기억도 난다. 허나 포크너가 왜 그런 식으로 구성했는지 내 식대로 이해하기 시작했고, 피와 뼈와 살로 이루어진 듯한 감각적인 문장들과 완성도가 뛰어난 조밀한 구성은 감탄을 자아냈다. 한 가족의 비극, 나아가 가족 잔혹극으로 불러도 무방한 이 소설의 내용은 동서양의 수많은 독자들 사이에 공감대를 이루기에 충분했다. 모름지기 매스터피스란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설득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 책 이후 비슷한 주제의 국내외 'ㅡ가족', 'ㅡ패밀리' 류 소설들을 꽤 읽었으나 대부분은 시시했다.


3년 전 쯤 나는 The Sound and the Fury의 한국어본을 구입해 읽었는데 불어본의 감동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또 다른 번역서는 말도 안되는 수준이라고 하니 원. 그때 추억의 불어본을 다시 꺼냈고 비교도 해볼 겸 영어본도 구입했다. 원본과는 가장 늦게 만난 셈이다(사견이지만 불어본이 더 잘 읽힌다. 원본 1~3부의 어떤 문단은 지독히도 까다롭다). 나를 호갱으로 만들었던 한국어본은 사실 제목부터 이상했는데 이를 지적한 어떤 글에서 '헛소리와 분노'가 맞다고 하는 것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뿐만 아니라 화자가 누구인지 또는 등장인물의 연령대를 세세하게 고려하지 않은 문장들, 의식의 흐름과 시간의 이동이 일어나는 부분의 번역도 불만족스러웠다. 


한국어본에서 어떤 단어는 아예 틀리게 번역된 경우도 있다. 빈번하게 나오는 'bitch'라는 단어 하나만 보자. 성적으로 행실이 부도덕하다고 비난 받는 여성을 '개같은 년' 또는 '더러운 년'이라고 한다. 그런데 'bitch'를 엉뚱하게 돈을 받고 남자에게 몸을 파는 매춘부(prostitute) 즉 '갈보'라고 옮기는 것은 큰 실수다. 소설 속 그 어디에서도 캐디와 그녀의 딸 퀜틴이 남자에게 돈을 받고 몸을 판다는 얘기가 없다. 매춘부는 제이슨이 만나는 창부 로레인이라고 따로 있다. 


이번에 구입한 새 번역본은 영어영문학과 교수인 친구가 적극적으로 추천한 것이고, 일단 제목이 제대로 번역되었길래 나 역시 기대를 품고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포크너의 The Sound and the Fury는 이번에 출간된「소리와 분노」로 인해 한국에서 '처음' 제자리를 잡았다고 본다. 물론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중증 발달장애인이 화자인 1부 벤지 섹션을 조금만 더 원본처럼 어색하게(?) 옮겼으면 좋았겠구나 싶다. 게다가 불어본보다도 더 멀쩡하게 읽힌다. 이 섹션이 멀쩡하게 읽힐수록 화자가 중증 발달장애인임을 독자가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2부 퀜틴 섹션의 번역 문장은 친구 말마따나 대단하다. 왕년에 포크너를 가슴에 품고 다녔던 사람이라면 여동생과 사랑을 맺지 못한 퀜틴이 강물에서 투신자살하는 날 "그곳은 잠들 곳 강물은 평화로우며 물살은 세니 작별인사는 없으리라"는 문장의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해설은 예기치 않게 내용도 알차고 각주까지 꼼꼼하게 달아서 소설을 읽어 나가는 데 훌륭한 길잡이가 된다. 인용했음이 분명한 문장에 각주가 없거나, 학생 레포트 수준의 글을 작품해설이라고 독자에게 들이미는 책이 어디 한두 권인가. 번역자나 감수자의 스펙과 커리어는 빼곡히 적으면서 자신들이 인용한 문장에 각주를 생략하는 것은 독자를 우롱하고 호갱으로 취급하는 고약한 인습이다. 


새 한국어본으로 이 작품을 다시 읽고 새삼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여동생 캐디를 사모하다가 자살로 가는 퀜틴, 사생아를 낳고 남편에게 소박맞은 캐디, 피해의식에 절은 거친 성격의 가장 제이슨, 백치라는 이유로 거세당한 벤지까지 이 4남매의 비극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남북전쟁에서 패한 남부 대지주 가문의 경제적, 정신적 위기에서? 지독한 허무주의자이자 알콜중독자인 아버지로부터? 수단과 방법을 구분하지 않는 물질지상주의자인 제이슨으로부터? 가족에게 잡년으로 불리는 캐디와 그녀의 딸로부터? 


나는 전부 아니라고 본다. 콤슨 가 4남매의 비극은 원흉은 엄마 캐롤라인이다. 캐롤라인은-상징적으로-남편을 죽였고 4남매의 육체와 정신을 거세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시작과 끝을 보는 진짜 엄마가 바로 흑인 하녀 딜지이다. 딜지가 불알이 잘린 백치 벤지를 흑인들 교회에 데려가서, 그의 손을 무릎에 얹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가슴을 꽉 채운다. 한 문장만 옮겨 본다.


사람들의 목소리와 박수 소리가 드려오는 가운데 파란 눈의 벤[벤지]은 다정한 눈빛으로 앞을 응시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딜지는 그 옆에 꼿꼿이 앉아 기억된 어린양의 단련과 피를 생각하며 엄숙하고 조용하게 울고 있었다. -391쪽


마지막으로「소리와 분노」하면 늘 인용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2부 퀜틴 섹션의 도입부, 즉 아버지가 장남 퀜틴에게 '시계'를 주는 장면이다. 나 역시 소싯적에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은 없다"는 아버지의 말을 종종 써먹기도 했으나, 언제부터인가 그 문장이 공포스러워져서 선뜻 쓰지 못했다. 아마도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적음을 확실하게 인식했을 즈음이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퀜틴이 시간의 공포를 강물에서 투신자살로 끝장낼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은 책을 덮고 나서도 계속해서 깊은 상념에 잠기게 한다. "내 뼈는 평화로이 물속에서 뒹굴 것이니 그분이 일어나라 했을 때 인두 두 개만 둥실 떠오르리."





ps. 이 책에 딸려 온 책띠가 너무 날카로와서 손을 베였다. 가공을 어떻게 하길래 이렇게 날카로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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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ll 2020-12-15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콤슨 부인 한 사람만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퀜틴이 끊임없이 부친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걸 보면, 술에 절어살며 현학적이고 냉소적인 말만 내뱉는 아버지의 영향이 더 막강하지 않나 싶네요. 원서/번역서 포함해 너댓 번쯤 읽으니 모친보다 부친의 역할 부재가 더 크게 와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