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방법론에 대해서라면 무조건 모으는 성격탓에 참 다양한 종류의 독서류 책을 모았다.
그것도 가족들이 쓸모없는 책이라고 지적하는 통에 알게 되었으니 내 성격도 참...
그 중 갑 오브 갑은 사이토 다카시의 책들인데, 삼색볼펜 독서법을 제외하고는 이 사람 독서법에 대한 책은 다 모은 기분이...
그런데 사이토 다카시의 독서론을 떠밀고 내 최고의 독서법 책으로 등극한 책이 있으니 바로 채석용님의.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50가지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살짝 떠오르력다가 사라진다...

원래는 옛날에 나온 책을 제목을 바꿔서 새로 내놓은 것이라는데, 확실히 좀 어렵지만 체계적이고 인문학 , 소설류에 대한 치밀한 접근법이 돋보이는 책이다.
적어도 쉽게 쉽게 읽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면 독서의 잔근육이 붙는다...는 것을 설명하는 책이랄까.
물론 책이 주관적일 수 있다는 그 논리대로 작가 취향의 접근법이라는 생각도 좀 들지만.

인문학 책을 읽는 방법에 대해서 다소 일본식에 가깝게 방법론을 상세히 알려주기 때문에 조금은 용기가 생긴다.
이게 아니면 내가 무슨 수로 철학을 제대로 읽을 생각을 하겠냐는...
진중권 교수(일 가능성이 높은)에 대한 자잘한 불평이 들어있는 듯 한데...
물론 공식적으로 증명은 안되었지만, 같은 학문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원한을 사면 어떻게 되는가...하는 걸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좋겠지만...정황상 진교수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나야 뭐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하여간 타산지석이려니...)

이 책에 나온 책을 찢어라, 불태워라...등등 다소 살벌하고 엉뚱해보이는 방법도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여기나온 다양한 방법들 중 몇가지를 옛날에 해본 적이 있어서, 즐겁기도 하고...내가 엉뚱한 사람인가...하고 걱정도 하고 그랬다. 내 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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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은 역사에 도착하자마자 돈 얼마와 함께 역사의 요릿집에 편지를 맡겼다. 그리고 다시 기차로 돌아와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 동안에도 하선생은 계속 자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자고 있는 동안 대답을 미룰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이번에는 계모에게 가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 편지는 아마 다음 역에 다른 편지들과 함께 부쳐질 것이었다.

[어머니, 솔직히 말씀드리겠어요. 저는 그분과 반도에서 혼인하려 했어요. 하지만 이제 와서 사실을 밝혀드릴수 밖에 없겠네요. 그동안 그이는 대륙에서 이름을 떨치는 분이 되셨고, 저와 혼인할 의지가 없으신 거였어요...
지금 반도로 간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사실 전 종점까지-그러니까 반도까지-갈 생각이 없습니다.
아마 편지를 받으실 때쯤이면 저는...]

그때 한두가 다시 1등칸으로 돌아왔다. 그는 애초에 떠난 적도 없는 사람인양 자고 있던 하선생옆에 다시 앉았다.

"3등칸으로 가신다더니?"

설의 물음에 한두가 말했다.

"자리가 없다고 쫓겨났습니다."

그의 말에 설은 잠시 안도했다. 한두가 하선생과 그녀의 사이에서 완충제 작용을 해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걱정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두는 마치 몇시간만에  물을 꼭 짜내버린 행주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모가 부쳐주는 적은 돈으로 수녀원에서 도둑생쥐같이 음식물을 몰래 훔쳤던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요기는 하셨나요?"

그녀의 말에 그가 머뭇거렸다. 사나이의 기개를 이 여인앞에서 꺾어야 한단 말인가?

"...풀빵으로 했습니다."

반쯤은 솔직하고 반쯤은 기가 빠진 모습으로 그가 대답했다.

"삶은 달걀을 저번 역에서 샀는데 좀 드시겠어요?"

그녀가 자그마한 가방에서 삶은 달걀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비싼 달걀을! 하면서 한두는 받아들었다.

"...걱정 마십시오. 다 잘 될 겁니다."

제국어로 그가 설에게 말했다.

"예?"

설의 말에 한두가 말했다.

"아니, 얼굴이 많이 안되어보이셔서요...뭔가 걱정이 있나하고..."

그의 말에 설이 얼른 차창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그 오랜 시간의 기차여행때문일까? 그녀의 얼굴은 그녀 스스로 보아도 초췌해보였다.

"아니, 아무 일도 없어요..."

그녀의 부인에 한두가 한숨을 푹 쉬었다.

"오래 기다리지는 마십시오."

하우정이 못 알아듣는 대륙어 사투리로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가 있었던 수녀원 지방의 말이었다.

"....."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한두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쪽지를 내밀었다.

[설. 이제부터 이 편지를 전하는 사람과 함께 행동해주시오.]
그것은 그녀가 기다리던 백명의 약간 기울어진 글자가 쓰인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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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읽으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앞뒤 내용이 살짝 꼬이는 부분도 있습니다...기본틀은 짜놓긴 했는데 꽉 짜놓으면
 꼭 항상 탈이 나서...이번에는 조금 느슨하게 했더니 설정구멍이...;;;;;;;;;;;
내용이야 독립군 이야기를 하면 거의 비슷해지는 법이니...(영화 암살은 보지 못했는데 오늘 검색해보니 조금 닮은 부분이 있는 것 같더군요...이를 어쩌나...난 한번도 본 적 없는데 그 영화는..영화 아가씨 트레일러야 닳을 정도로 보고 또 봤지만.)
하여간 최근에 살짝 탈이 나는 것 같아서 한동안은 휴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되도록이면 매일매일 쓰려고 노력했는데...(모퉁이의 외로운 맛 아이스크림 가게도 그래서 좀 오래걸리는 중인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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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정은 깊은 잠에 빠졌다. 약간 짧은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울락 말락하면서 천천히 움직였다.
설은 그에게서 받은 책을 펼치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그의 마음을 읽는단 말인가...이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은- 즉, 변절자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은-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닐까?
아버지의 돈으로 유학까지 갔으니 자신도 이미 그 부류인 것이겠지만.

[고해성사를 하세요. 유키.]

제국인이지만, 대륙인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며 온 수녀는 울고 있는 설을 보면서 말했다.

[울지 말고. 그대의 고통에 대해서, 그리고 그대가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그 죄악에 대해서 고해성사실로 가서 고해하세요. 유키.]

항상 설은 고통스러웠다. 아버지의 그 위치가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백명을.
그러나 철이 들고 난 후, 약혼자이길 포기하다시피 하며 대륙으로 떠나버렸던 그 사내를.
그녀는 낙인인것처럼 지고 살았다. 그가 끼워줬던 가락지가 화인이 되어서 그녀를 괴롭혔다.

[제가 반도인인 것도 고해해야 하나요?]

그 말에 수녀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침묵하더니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손으로 , 그 부지런한 손으로 설의 손을 잡았을 뿐이었다.
지금도 그 말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이 남자는 지금 내게 고해하는 것인가...


고민에 빠질 땐 성모송을 외웠다. 그것도 안되면 미사전례를...
늘 하던 습관대로 그녀는 성모송을 외우면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나의...둘도 없는...그대에게...

그리고 흩날리던 눈은 곧 눈폭풍이 되었다.

"폭풍입니다. 장군님."

백명은 독립군에게 장소를 제공하는 민가에서 장군에게 말했다.

"다 아는 이야기를..."

장군은 맛있게 담배를 태우며 느긋한 어투로 그를 나무랐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한 탓이다. 휘하들도 오래간만에 배를 좀 채웠다. 그동안 소금도 부족해 아군의 오줌을 먹을 정도로 괴로웠는데, 이런 식사를 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저 기차를 따라가야 하지 않습니까? 폭풍이 치면..."

백명의 말에 장군이 퉁을 주었다.

"어차피 말 속도로 기차를 따라갈 수나 있나?"

"하지만..."

"그치가 탔다고 너무 다급해하는군."

"하지만..."

"벌써 두번째 하지만일세."

백명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너무 느긋한 분위기였다. 그들이 쫓는 목표가 하우정이라면, 그리고 그가 들은대로 냉혈한 변절자에 암살자라면 곧 따라잡아 목을 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가장 적절한 때에 기차를 탈취해야 하네. 다음 역사에 우리 편을 심어두었지. 차안에 연락책과 곧 연락이 될거네."

[나는 유혹에 빠진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악랄하면서도 선량한 얼굴을 가질 수 있는 사람 옆에 있습니다.
그는 무언가 과거에 깊은 상처를 입은 것 같습니다. 내게 알려주지 않아요. 물론 내가 그의 마음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뭔가 그의 안에 이중적인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만나면 당신의 얼굴앞에서 마음껏 이야기할테지만, 종이에는 한정이 있어서 이렇게밖에 말을 전하지 못하는군요. 그에게 설명해달라고 하자, 어떤 책을 한권 주었습니다. 그 책에 자신의 이야기가 있다면서요...아, 당신도 그를 아시겠죠. 그는 하우정. 유명한 소설가입니다.
그가 쓴 책이라면 소설 책이겠지만...겉표지도 없고 한 것으로 보아 아직 출판 전이거나, 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갈등하고 있습니다. 일기라면 그 개인의 삶을 훔쳐보는 것이 될지도 몰라 두렵고, 항간의 소문처럼 그가 악랄한 남자라는 것이 드러날까봐 두렵습니다. 만약 그 소문대로라면 나는 그를 정면으로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소설이라면...글쎼요. 어떤 소설이건 일반적인 이야기는 아니겠죠. 안나 카레니나같은 소설이라면 읽을지도 모르겠지만...제가 그토록 피해왔던 어떤 동지의식을 느끼게 될 정도로 잘 써놓았을까봐 두렵기도 합니다.
소설이라면...진짜로 그와 제가 당신이 그토록 혐오하는 토양의 산물이라는 걸 드러냈을지도 모르죠.

아, 당신의 심부름꾼이 다음 역사에서 부디 제 편지를 전달해준다면!
그 전에 읽지 않고 버텨보려고 합니다.
부디...제가 그 책을 읽기 전에 답장을 주실 수 있다면...!]

설은 편지를 마무리하고, 차창을 바라보았다.
다음 역사까지 이제 30분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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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역에서 그 임산부는 남편과 함께 내렸다. 가까운 곳에 병원이 있는 번화한 역이었다. 1등칸의 손님들이 비용일체를 대주겠다고 했으므로 역무원은 걱정없이 그 부부를 차에 태우고 떠났다.
1등칸의 손님들 2명이 내렸고, 홍설과 하 선생은 대화를 나눌 여유를 가졌다.

"아까...3등칸에서 왜 그러신 거에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궁금한 점이 생긴 터였다. 애정 이전의 궁금증.

"그럼 나도 한가지 물어보겠습니다."

"네."

"왜 갑자기 도와줄 생각이 드신거죠?"

홍설의 질문에 우정은 천천히 가방 안에 든 책을 하나 꺼냈다.

"내겐 한가지 추억이 있습니다...갑자기 그 추억이 떠올라서 변덕을 부린 거죠."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목소리가 촉촉했다. 홍설은 그 목소리에서 막 태어난 아기가 함초롬이 눈을 뜨는 것을 떠올렸다.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홍설에게 막 태어난 인격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막 만들어진 순수한 영혼!
착각은 자유라지만 어쨌든 홍설은 그가 그 부드러운 부분을 처음 드러낸것으로 착각하고 말았다.

"수녀원의 소녀들이란 건 도대체 무슨 이야기입니까?"

"전 학교를 18살에 졸업했어요. 그리고 여자학교에 다시 재입학했는데...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에 돈이 없다고 해서 수녀원에서 학교를 같이 운영하는 곳에 들어갔어요. 하지만...그곳의 아이들은 저처럼 윤택하게 살던 아이들이 아니어서, 돈을 대주는 남자와..."

"그만."

하선생은 말을 멈추게 했다.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알겠습니다. 뺨을 때린 건 미안합니다."

무자비했던 따귀를 떠올리고 홍설은 잠시 침울해졌다. 그 순간, 그는 정말...수녀원에서 언젠가 보았던, 수녀원 학교의 학생이 스폰서에게 따귀를 맞던 장면을 떠올리고 말았다...

"전 당신이..."

그때 역무원 한명이 다가와 하선생에게 대륙어로 말했다.

"그 임산부, 종양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무사히 순산했답니다. 병원비를 대주셔서 감사하다고 방금 소식이 왔습니다."

"아...다행이군요."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홍설은 잠시 얼굴을 붉혔다.

"제가 한건 거의 없네요..."

"아니오. 당신 덕분에 병원에 가게 된 겁니다. 그 임산부는 말이죠. 1등칸의 손님들 대부분이 그리고 병원비를 대겠다고 했고...순산한 건 당신 덕분이죠."

딱 잘라 말한 하선생은 손에 들었던 책을 다시 가방에 넣으려고 했다. 순간적으로 그녀에게 마음이 기울었던 그는 자신의 일기장을 그녀에게 읽히려고 했던 참이었다. 한없이 순수한 여자. 하지만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그녀의 마음에는...
 
"그런데 그 추억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빈틈을 노리고 홍설이 치고 들어왔다. 하선생은 잠시 움찔했다.
"당신의 그 추억이라는 것이...왜 그런 행동을 하게..."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가 벽력같이 가방에 넣던 책을 손에 꽉 쥐었다. 보여주고 싶다는 감정과 보여주기 싫다는 감정이 그를 뱀처럼 감고 있었다.

"알고 싶습니까?"

마침 노부인이 식당칸쪽으로 자리를 옮긴 터라,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들을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그녀쪽으로 바싹 갖다대며 조용히 말했다.

"다 읽고나면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그래도 좋다면..."

"......"

홍설은 고개를 돌렸다.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탓이리라. 하지만 그는 마치 악마처럼 그녀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댔다. 숨결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위치였다.

"읽어주십시오...꼭 읽어주십시오...그리고...제..."

그는 그녀의 귓가에서 천천히 떨어지면서 마무리했다.

"마음이 얼마나 진실한지 알아주십시오. 홍설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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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의 오마쥬 대상은 셜록 홈즈 시리즈에 한편 중 하나인 살인에 취미를 가진 한 귀족이 다른 귀족 여인들을 꼬여내서 결혼한 후 살인하고 재산을 물려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하우정은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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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부는 바닥에 누워 괴로워하고 있었다. 피같이 농도 짙은 땀방울이 여기저기 맺혀 있었고, 여인은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가만히...가만히...우리가 왔어요."

제국인 의사가 제국어로 말하자, 그것을 노부인이 통역했다. 그녀도  제국어에 밝아 홍설이 나설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임부의 배를 어루만지며, 의사에게 상태가 어떤지 물었다.

"음..."

워낙 다급한 상황인지라 의사 자신도 상황 파악을 못한 채로-그러니까 자신의 전문 분야를 잠시 망각하고- 따라온 것이었다. 그제서야 그 의사가 산부인과가 아니라 내과 의사라는 것이 밝혀졌다.
잠시 소란이 일었지만-뭐야! 우릴 우습게 보는 거냐! 장난하냐!-어차피 와줄 의사가 꼭 산부인과 의사일수만은 없다는 의견이 있자 가라앉았다.

"어쨌든 진통제가 좀 있으니, 우선..."

의사의 말에 노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우선 아이부터...
그러자 제국 의사가 말했다.

"이 상태라면 사산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아이를 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홍설의 말에 잠시 의사의 눈이 번쩍이다가, 이내 빛이 서서히 꺼졌다.

"나도 그러고 싶습니다만...워낙 상태가 위중하니...그리고 내 소견으로는-산부인과적은 아니지만- 이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복부가 팽만되어 있고, 만져보면 딱딱하게 굳어 있어요. 한번 저들에게 물어봐주겠습니까? 임신한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그의 말을 길게 통역할 실력은 없었기에 -노부인도 한두도- 홍설이 통역을 맡았다. 그녀의 말에 남편되는 사람이 떠듬거리면서 말했다.

"임신한 게 오래된 것 같기는 했습니다만...그래봤자 3주나 4주 정도지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옛날 귀인들은..."

"귀인인게 중요한 게 아니요."

의사가 잘라 말했다.

"아마 배 안의 대부분에는 아기가 아니라 종양이 들어 있을 겝니다."

"...선생님!"

노부인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말을 잘랐다.

"그렇게...말씀을..."

"이 정도로 구를 정도면 양수라도 터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산부인과 의사는 아니지만 그건 알겠습니다. 아이는 죽은 겁니다. 이제 좀 있으면 산모도 죽을 테니...죽는 그 순간만이라도 고통을 줄여줘야 할 겁니다. 모르핀이라도 있으면 좋을...아니!"

그때 하선생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의 정체를 알 리 없는 3등칸의 반도인들은 멀뚱히 그를 쳐다보았고...
홍설과 노부인은 어리둥절했으며, 의사는 그가 손에 든 것을 보고 외마디 말을 질렀다.

"선생! 그건 모르핀이 아닙니까. 딱 좋은 때에 갖고 오셨군요. 어서...어서...이리로 오십시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정이 말했다.

"정말, 그 산모는 죽을 수 밖에 없는 겁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다정했지만 어쩔 수 없는 냉혹함으로. 우정이 말했다.

"그렇다면 편히 가게 해주십시오. 이 정도 양이라면 안락사는 가능할 겝니다."

"...안락사라니! 선생!"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진통제를 찾은 거 아닙니까?"

우정은 입을 악 물고 말했다.

"도와주려면 책임지고 끝까지. 아니면 건드리질 마시오. 제국 양반!"

하선생이 스스로도 제국인이라 자부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제국의 의사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멍하니 있는 그를 보고 있던 우정은 답답한 듯, 이내 대충 자리 잡고 앉아 있던 의사를 밀어내고, 치사량의 모르핀을 넣은 주사기를 들었다. 그리고 아무도 충격으로 제지하지 못하는 순간, 혈관으로 밀어넣었다...
아니 밀어넣으려 했다. 홍설이 밀지만 않았더라면.

"이게 무슨 짓이에요!"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하선생도 여자에게 잔인해질 수 있었다. 그는 밀어내는 홍설의 뺨을 아까 전의 복수라도 되는 듯 호되게 갈겼다.

쫙!

 충격으로 홍설이 밀리는 순간, 다시 주사기가 움직였다. 그러나 무슨 뜻이 있었던지...치사량만큼은 아니었다.
잠깐 앞으로 정기적으로 주사를 하면 잘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하선생은 벌떡 일어났다.

"바카야로(바보같은 자식!)!"

그 말과 동시에 그는 차벽을 치면서 나가버렸다.
애초의 등장만큼이나 너무 뜻밖인 퇴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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