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정은 깊은 잠에 빠졌다. 약간 짧은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울락 말락하면서 천천히 움직였다.
설은 그에게서 받은 책을 펼치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그의 마음을 읽는단 말인가...이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은- 즉, 변절자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은-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닐까?
아버지의 돈으로 유학까지 갔으니 자신도 이미 그 부류인 것이겠지만.

[고해성사를 하세요. 유키.]

제국인이지만, 대륙인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며 온 수녀는 울고 있는 설을 보면서 말했다.

[울지 말고. 그대의 고통에 대해서, 그리고 그대가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그 죄악에 대해서 고해성사실로 가서 고해하세요. 유키.]

항상 설은 고통스러웠다. 아버지의 그 위치가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백명을.
그러나 철이 들고 난 후, 약혼자이길 포기하다시피 하며 대륙으로 떠나버렸던 그 사내를.
그녀는 낙인인것처럼 지고 살았다. 그가 끼워줬던 가락지가 화인이 되어서 그녀를 괴롭혔다.

[제가 반도인인 것도 고해해야 하나요?]

그 말에 수녀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침묵하더니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손으로 , 그 부지런한 손으로 설의 손을 잡았을 뿐이었다.
지금도 그 말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이 남자는 지금 내게 고해하는 것인가...


고민에 빠질 땐 성모송을 외웠다. 그것도 안되면 미사전례를...
늘 하던 습관대로 그녀는 성모송을 외우면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나의...둘도 없는...그대에게...

그리고 흩날리던 눈은 곧 눈폭풍이 되었다.

"폭풍입니다. 장군님."

백명은 독립군에게 장소를 제공하는 민가에서 장군에게 말했다.

"다 아는 이야기를..."

장군은 맛있게 담배를 태우며 느긋한 어투로 그를 나무랐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한 탓이다. 휘하들도 오래간만에 배를 좀 채웠다. 그동안 소금도 부족해 아군의 오줌을 먹을 정도로 괴로웠는데, 이런 식사를 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저 기차를 따라가야 하지 않습니까? 폭풍이 치면..."

백명의 말에 장군이 퉁을 주었다.

"어차피 말 속도로 기차를 따라갈 수나 있나?"

"하지만..."

"그치가 탔다고 너무 다급해하는군."

"하지만..."

"벌써 두번째 하지만일세."

백명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너무 느긋한 분위기였다. 그들이 쫓는 목표가 하우정이라면, 그리고 그가 들은대로 냉혈한 변절자에 암살자라면 곧 따라잡아 목을 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가장 적절한 때에 기차를 탈취해야 하네. 다음 역사에 우리 편을 심어두었지. 차안에 연락책과 곧 연락이 될거네."

[나는 유혹에 빠진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악랄하면서도 선량한 얼굴을 가질 수 있는 사람 옆에 있습니다.
그는 무언가 과거에 깊은 상처를 입은 것 같습니다. 내게 알려주지 않아요. 물론 내가 그의 마음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뭔가 그의 안에 이중적인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만나면 당신의 얼굴앞에서 마음껏 이야기할테지만, 종이에는 한정이 있어서 이렇게밖에 말을 전하지 못하는군요. 그에게 설명해달라고 하자, 어떤 책을 한권 주었습니다. 그 책에 자신의 이야기가 있다면서요...아, 당신도 그를 아시겠죠. 그는 하우정. 유명한 소설가입니다.
그가 쓴 책이라면 소설 책이겠지만...겉표지도 없고 한 것으로 보아 아직 출판 전이거나, 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갈등하고 있습니다. 일기라면 그 개인의 삶을 훔쳐보는 것이 될지도 몰라 두렵고, 항간의 소문처럼 그가 악랄한 남자라는 것이 드러날까봐 두렵습니다. 만약 그 소문대로라면 나는 그를 정면으로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소설이라면...글쎼요. 어떤 소설이건 일반적인 이야기는 아니겠죠. 안나 카레니나같은 소설이라면 읽을지도 모르겠지만...제가 그토록 피해왔던 어떤 동지의식을 느끼게 될 정도로 잘 써놓았을까봐 두렵기도 합니다.
소설이라면...진짜로 그와 제가 당신이 그토록 혐오하는 토양의 산물이라는 걸 드러냈을지도 모르죠.

아, 당신의 심부름꾼이 다음 역사에서 부디 제 편지를 전달해준다면!
그 전에 읽지 않고 버텨보려고 합니다.
부디...제가 그 책을 읽기 전에 답장을 주실 수 있다면...!]

설은 편지를 마무리하고, 차창을 바라보았다.
다음 역사까지 이제 30분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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