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부는 바닥에 누워 괴로워하고 있었다. 피같이 농도 짙은 땀방울이 여기저기 맺혀 있었고, 여인은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가만히...가만히...우리가 왔어요."

제국인 의사가 제국어로 말하자, 그것을 노부인이 통역했다. 그녀도  제국어에 밝아 홍설이 나설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임부의 배를 어루만지며, 의사에게 상태가 어떤지 물었다.

"음..."

워낙 다급한 상황인지라 의사 자신도 상황 파악을 못한 채로-그러니까 자신의 전문 분야를 잠시 망각하고- 따라온 것이었다. 그제서야 그 의사가 산부인과가 아니라 내과 의사라는 것이 밝혀졌다.
잠시 소란이 일었지만-뭐야! 우릴 우습게 보는 거냐! 장난하냐!-어차피 와줄 의사가 꼭 산부인과 의사일수만은 없다는 의견이 있자 가라앉았다.

"어쨌든 진통제가 좀 있으니, 우선..."

의사의 말에 노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우선 아이부터...
그러자 제국 의사가 말했다.

"이 상태라면 사산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아이를 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홍설의 말에 잠시 의사의 눈이 번쩍이다가, 이내 빛이 서서히 꺼졌다.

"나도 그러고 싶습니다만...워낙 상태가 위중하니...그리고 내 소견으로는-산부인과적은 아니지만- 이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복부가 팽만되어 있고, 만져보면 딱딱하게 굳어 있어요. 한번 저들에게 물어봐주겠습니까? 임신한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그의 말을 길게 통역할 실력은 없었기에 -노부인도 한두도- 홍설이 통역을 맡았다. 그녀의 말에 남편되는 사람이 떠듬거리면서 말했다.

"임신한 게 오래된 것 같기는 했습니다만...그래봤자 3주나 4주 정도지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옛날 귀인들은..."

"귀인인게 중요한 게 아니요."

의사가 잘라 말했다.

"아마 배 안의 대부분에는 아기가 아니라 종양이 들어 있을 겝니다."

"...선생님!"

노부인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말을 잘랐다.

"그렇게...말씀을..."

"이 정도로 구를 정도면 양수라도 터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산부인과 의사는 아니지만 그건 알겠습니다. 아이는 죽은 겁니다. 이제 좀 있으면 산모도 죽을 테니...죽는 그 순간만이라도 고통을 줄여줘야 할 겁니다. 모르핀이라도 있으면 좋을...아니!"

그때 하선생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의 정체를 알 리 없는 3등칸의 반도인들은 멀뚱히 그를 쳐다보았고...
홍설과 노부인은 어리둥절했으며, 의사는 그가 손에 든 것을 보고 외마디 말을 질렀다.

"선생! 그건 모르핀이 아닙니까. 딱 좋은 때에 갖고 오셨군요. 어서...어서...이리로 오십시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정이 말했다.

"정말, 그 산모는 죽을 수 밖에 없는 겁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다정했지만 어쩔 수 없는 냉혹함으로. 우정이 말했다.

"그렇다면 편히 가게 해주십시오. 이 정도 양이라면 안락사는 가능할 겝니다."

"...안락사라니! 선생!"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진통제를 찾은 거 아닙니까?"

우정은 입을 악 물고 말했다.

"도와주려면 책임지고 끝까지. 아니면 건드리질 마시오. 제국 양반!"

하선생이 스스로도 제국인이라 자부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제국의 의사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멍하니 있는 그를 보고 있던 우정은 답답한 듯, 이내 대충 자리 잡고 앉아 있던 의사를 밀어내고, 치사량의 모르핀을 넣은 주사기를 들었다. 그리고 아무도 충격으로 제지하지 못하는 순간, 혈관으로 밀어넣었다...
아니 밀어넣으려 했다. 홍설이 밀지만 않았더라면.

"이게 무슨 짓이에요!"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하선생도 여자에게 잔인해질 수 있었다. 그는 밀어내는 홍설의 뺨을 아까 전의 복수라도 되는 듯 호되게 갈겼다.

쫙!

 충격으로 홍설이 밀리는 순간, 다시 주사기가 움직였다. 그러나 무슨 뜻이 있었던지...치사량만큼은 아니었다.
잠깐 앞으로 정기적으로 주사를 하면 잘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하선생은 벌떡 일어났다.

"바카야로(바보같은 자식!)!"

그 말과 동시에 그는 차벽을 치면서 나가버렸다.
애초의 등장만큼이나 너무 뜻밖인 퇴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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