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를 보는 것은 해로운 것이다. 라고 말한 선생님이 있었다.
그 사람은 만화같은 것은 읽기에는 쉽지만, 머리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선생님이, 몇년 후에 만화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금은 우스웠지만 비웃기에는 너무 진지한 일이었다.
자신이 비난한 일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기로 한 사람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일까.

"잉킹 좀 도와줘."

만화부에 있던 친구가 한 말을 난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다.
잉킹? 그게 뭐지?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잉크는 만년필에 넣는 잉크와 같고, 펜은 습자용 펜인 줄만 알았다.

"잉크칠 좀 해달라는 말이야."

내 의문에 친구는 키득거리면서 대답했다. 손에는 잉크자국과 톤먼지로 얼룩이 져 있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멋져보였다.
학과 성적으로 보면 내가 더 성적이 좋았지만, 그녀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사람 특유의 건강함이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에도 안 하던 만화를 대학시절에 시작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유치한 일일수도 있다.
고등학생 시절에 만화부를 하던 친구들이 대학들어와서 만화를 그만두는 걸 보면 말이다.

"넌 언제부터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니?"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한번 흔들었다.

"처음이야."

"처음이라고?"

확실히 처음 그리는 것처럼 삐뚤삐뚤하긴 했다. 그림 그리는 실력으로만 보면 고등학교때 친구들이 더 잘그리는 것같았다.

"그런데 만화부가 좋니?"

"...응."

가끔 우리는 동아리실에서 술을 마셨다. 알싸한 맛의 수입 맥주-이름은 알 수 없다. 그때 우리에게 중요한 건 맥주의 이름이 아니라 그 알싸한 기분을 즐기는데 있었으니까.-를 마시면서 이런 모양이 더 낫지 않을까, 저런 모양이 더 낫지 않을까. 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내 부모님들은 때로 내게 물어보신다. 그때 그 좋은 시절을 만화만 그리면서 컴컴한 동아리방에 있는 게 정말 즐거웠냐고. 당신들이 보시기에 나는 고등학교때도 보지도 않던 만화를 그리기 시작하는 좀 이상한 아이였던 것이다.
알싸한 맥주, 그리고 반 사회인으로서 어른이기도 한 사람이 시도하는 아이의 영역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우린 정말 즐거웠다.

난 만화를 즐겨보진 않았다.
그 점에 있어서는 내 만화의 소울 메이트가 안타까워하긴 했다.
점점 많아지는 만화의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으니까.
지금은 절판되고 스캔본으로 인터넷 서점에서 팔리고 있는 스바루, X, 엔젤릭 레이어 등.
(그녀는 클램프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래도 난 만화를 그렸고-내가 좋아하는 만화의 형식이라고 해봤자 텅 빈 배경에 고양이 한마리씩 얹어놓는 그림이랄까. 그녀는 그걸 타래팬다 스타일이라고 불렀다.-지금도 무슨 이야기인줄은 모르겠다.-

안 굴러가는 펜을-초심자에게는 펜 다루는 게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니-조심스럽게 굴려서
외곽선을 긋고, 배경을 하얀 백지로 놔두는 게 내 즐거움이었다.
가끔은 백지에 펭귄들만 수도 없이 그리기도 했는데. 그녀의 입장에서는 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던 듯 하다.

"펭귄, 고양이...너는 배트맨을 좋아하나보구나."

수험생활의 폐해로 만화는 물론, 슈퍼 히어로 영화는 보지도 않던 나였기에 그 말은 좀 황당했다.

"배트맨? 그게 뭐야?"

"뭐? 한번도 보지 않았어?"

그걸 시작으로 그녀와 나는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교내 비디오방에서 배트맨을 하나씩 봐가고, 비록 불법이나마 구할 수 있었던 마크로스 -기억하고 있습니까?-를 첫 시작으로 마크로스 시리즈를 다 봐나갔다.
그래도 내 그림은 변하지 않았다. 텅빈 방, 펭귄이 찾아오고, 토끼가 시계를 차고 달려나가는 그림들.
비록 그림체는 조금씩 수려하게 변해갔지만,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나와는 반대로 그녀는 점점 상업적인 스토리를 구현하기 시작했다.
보는 만화도 다양해져서 클램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쿠스모토 마키 등을 읽기 시작했고
단순히 번역된 만화를 책방에서 빌려보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책을 주문해 보곤 했다.
하지만 그림체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노력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는데...

만화부의 실체없는 선배 하나가 극동 문화제에서 만화부문 시상이 있다면서 만화부에서 1사람만 나갈 수 있다고 했다. 그때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선배가 계속 날 찍어서 이야기하는 바람에 그녀의 기분이 꽤 상했던 모양이다. 

"좋겠어. 극동 문화제에 나갈 수 있어서."

"난 별 생각 없는 걸. 나가봤자 또 앨리스나 그리고 있겠지."

"넌 정말."

얄미워. 하고 그녀가 내뱉듯이 말하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문화제가 시작되기 1달전까지 나오지 않았다.

"부실에 안나올거니?"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친 내가 그녀의 옥탑방에 가서 본건 그야말로 기가 질릴 정도의 원고들이었다.
새카만 잉크로 얼룩진 팔 다리. 라면만 끓여먹어서 부은 얼굴에 엄청난 양으로 쌓인 뭉뚝한 펜들.

"넌 문화제 준비 안 해?"

그녀의 말에 나는 잠깐 웃었다. 밤에도 만화, 낮에도 만화.

"난 안 나갈거야."

"아냐. 넌 나가야 돼."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내가 왜? 난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스토리도 엉망인걸..."

"나랑 같이 하면 되잖아!"

그녀가 자존심도 버리고 그렇게 말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1달 동안 우리 둘은 그녀가 스토리를 내가 그림을 맡아서 작업하기 시작했다.
물론 시상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우리 둘다 시원하게 미역국을 마셨다.

"흐..."

그녀는 뜻모를 신음을 흘리면서 펜을 집어들었다. 손에는 물집이 가득했는데도 그리고, 또 그리고 계속 그려댔다.

"이제 됐어."

나는 그녀와 화해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풀렸다.
만화는 그리면 그릴수록 어려웠기때문에 이제 그만.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 반대였던 모양이다.
소울 메이트같았던 우리는 그 일을 계기로 헤어졌다.
나는 현실세계로, 그녀는 만화부에서 만화 그리는 세계로...


"어, 바닐라 에센스 12월호다. 어디, 주네브가 떴는지 볼까?"

가끔 나는 그녀가 투고하는 원고를 바닐라 에센스에서 본다.
그녀는 주네브라는 필명으로 개그만화를 그리고 있다.
그림실력이야 일취월장했겠지만 가장 그녀다운 색채를 볼 수 있는 것이 개그만화여서 그럴 것이다.
지금 사회인 친구들에게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30대  오피스 레이디들의 삶을 개그로 만든 주네브는 인기를 엄청나게 끌고 있다.

"돈 많이 벌겠지? 프리랜서라서 시간도 자유롭고."

친구들 중 몇명이 몽상을 시작한다.

"주네브라는 애 그림도 그렇게 잘 못 그리는데 책이 엄청 팔린대잖아."

"아서라. 쉬워보이는 게 어려운 법이란다."

킥킥거리면서 이야기는 종료된다.
나는 바닐라 에센스를 가방에 담고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간대학교 졸업 이후로 그녀와 나는 만난 적이 없다. 전화통화조차도.
하지만 나는 그녀가 자신의 진정한 길을 뚫었다는 걸 안다.
부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건 그 아이의 길이니까.
나는 방안에 있는 뭉뚝한 펜들을 생각했다.
문화제에 제출하기 위해 인정사정없이 그어댔던 펜들.
모두 추억속의 물건이지만, 이제는 완전히 내려놓고 가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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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독한 아이였습니다.
그의 첫마디로 문장은 시작되었다.
그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고독한 인형사를 떠올렸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인형을 만들겠지.
그게 구체관절인형인지, 천인형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땀한땀 인형옷을 만들고 인형 머리에 머리카락을 심을 거야.
아아, 고독하지 않으면 하지 못하는 직업이 아닐까...

내 망상에 책상에 앉아서 소설을 쓰고 있던 사촌언니가 비웃었다.

"그건 다 팔아먹기 위해서 하는 거야. 별다른 의미가 있는 말이 아니라고. 더더군다나 인형만 만들고 있다고 누가 밥을 준대니..."

다른 건 몰라도 실행력 하나만은 알아준다는 나인만큼 신문에 실린 그 기사의 주인공을 찾아가기로 했다.
미리 전화를 하고-제자인듯한 사람이 받으면서 곤란하다고 흘리긴 했다.-그 사람에 대한 기사를 모으고-기껏 가서 할말이 떨어지면 안되니까.-거기까지 갈 여비를 계산하고-돈이 모자랄 일은 없지만-하면서 근 열흘을 시간을 보냈다. 예전에 어느 누구랑 소설을 같이 쓰면서 살다가 머리끄댕이를 잡혀서 온 사촌언니는 여전히 냉소적이었지만 가족들은 내가 정말 대견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손재주는 우리 집에서 알아주는 손재주이고, 지금은 고등학교 1학년에서 진로 탐색하는 중이니, 잘하면 예술가 하나 나오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예술가는 뭐 별건가."

그러는 자기도 밥만 먹으면 책상에 앉아서 글만 쓰는 주제에...
사촌언니는 빈정거리기를 밥먹듯 했다. 그 열흘동안.

"네가 인형을 만드는 법을 배운다고 예술가가 될 것 같니? 아니면 내가 3년동안 내내 글만 쓴다고 해서 소설가가 될 것 같니?"

물론 그 말에는 일말의 진실이 숨어 있었다.
바로 자기가 소설가가 되지 않을 거라는 말.
보통 말에는 자신의 마음과 미래가 담긴다. 그러니까 언니는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열흘 뒤, 나는 경기도 파주에 있다는 그 인형사의 작업실앞에 서 있었다.

보통 고독하리라고 생각되는 작업실이 아니라, 파주 외곽에 있는 아주 조그마한 동네였다.
그리고 그 작업실에서는 떠나갈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왜 그래..."

딩동.
차임벨을 울렸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딩동.

미리 내가 오는 것을 알고 문 열어주지 않기로 한 것이 아닐까.

딩동.

세번째 울리자 벌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렸다...하는 것은 내가 기다리는 문이 열린 것이 아니라 옆집의 문이 열렸다는 것이지만.

"까르르르...아이. 이러지 마."

소스라칠 정도로 교태 넘치는 목소리에 문을 열고 나온 아주머니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 쌍년이. 새벽부터 저녁까지 도대체 그칠 줄을 모른다니까."

"저기, 안녕하세요.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뭘 여쭤봐. 저 소리 못 들었어?"

아주머니는 저것들때문에 집값내려간다면서 투덜거렸다.

"저기, 여기가 소oo 인형사님 댁이 아닌..."

"맞아. 하지만 인형은 1년에 3개 만드나 마나하지. 나도 처음에 몇번 갔었는데 맨날 남자만 끌고 돌아다녀서 실망했어. 요즘도 술에 떡이 되서는 거의 매일 우리 집문을  발로 찬다구. 정말 쌍년이야."

고독하긴 개뿔이...
라고 투덜거리던 사촌언니의 혜안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미련을 못 버린 나는 차임벨을 30번 가까이 울렸다.
그제서야 문이 열렸다.

탈색해서 흰 머리카락을 하고 영구 화장을 해서 모양새 있는 진한 눈썹에, 아침부터 화장을 두텁게 했는지
붉은 입술에 하얀 설화석고같은 얼굴을 한 여자가 등을 벅벅 긁으면서 문을 열었다. 물론 옆에는 아까 전 웃음소리를 내게 한 주인공이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아이 참 끈질기기도 하지.  잡지 안 봐!"

그 한마디를 툭 던지고는 두 사람은 다시 문을 닫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놀란 나머지 문이 닫기기 전 들고 간 가방을 문 사이에  끼우고 말았다.

"잠깐만요 인형사님을 뵈러 왔어요!"

"...인형사? 너  아직도 인형 만들고 있었냐? 별일이네."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높은 음으로 씨발! 이라고 투덜거리더니 내 가방을 확 밀어버렸다.

"너 당장 돌아가!"

그녀가 말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가방을 들이대! 너같은 것들이 요즘 얼마나 많이 오는 지 알아? 귀찮아죽겠어. 정말."


그리고 두 사람은  작업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요란한 -무슨 사람들의 비명소리같은-음악이 동네를 가득채웠다.

"그래서 예술가는 찾았니?"

돌아와보니 창가의 햇살을 받으며 사촌언니가 담담하게 물었다.

"...아니."

"쫓겨났구나."

"...아니야."

"뭐 보아하니 실망한 것 같은데?내가 너무 김을 뺐나?"

사촌언니가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나랑 살던 언니는 데뷔했는데...그 언니도 예술가스럽진 않았어. 노력만 계속 하고..."

"...천재는 노력 안 해도 되나봐."

사촌언니는 책상에서 일어나 커튼을  다시 쳤다.

"순간의 관심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런 사람도 일하고 있으니 네가 못 할 일은 없을 거야...근데 아직 인형사 하고 싶어?"

응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아니라고 대답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응이라고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언니는 쿡 하고 웃더니 헐렁한 옷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상자를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

"미니 재봉도구야. 한번 해보라고. 우선은  천인형부터 해야 하지 않겠어? 첫 시작이 튼튼해야 되니까."

"응. 고마워."


십년이 지난 지금 나는 미술계에서는 조금  이름을 알린 인형사가 되었다.
어떤 사람은 내 인형에서 요시토모 나라의 세계를 읽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내가 소oo작가를 사숙했다고들 한다. (그건 그녀의 주장이다.)하지만 내 첫시작은  사촌언니가 준 단순한 재봉도구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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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토모 나라가 남자라는 걸 안 게 최근입니다. 최근 그를 다룬 영화를 보고 있거든요.
인형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표정이 고정되어 있으니까 굉장히 따분하죠.
이 초쓰기는 창작블로그에 있는  꿈같은 소설의 연작입니다.
저 머리끄댕이를 잡혀서 끌려왔다는 아가씨가 거기에 나오죠.
그러니까 이건 미래 소설입니다 미래소설이에요. 암요.
이것도 오마쥬라고 하면 오마쥬인것이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의 타에코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세설 한번 읽어보세요. 정말 재미있으니까요. 타에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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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 이외에는. 아니 나조차도.
진심으로 무엇을 원하는가. 만약에 신이 묻는다 해도 신은 내 소망을 알겠지만 난 아마 모르리라.
빛을 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사람을 만나지 못한 지 정말 오래되었다. 말을 밖으로 꺼낸 지 오래 되었다.
나는 언제부터 여기에 갇혀 있었던 것일까. 어린 시절에는 누군가가 옆에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도
\ 없다.
먹을 것이 가끔 위로부터 내려온다. 토굴의 한 구석에는 쓰레기통과 화장실이 빈약하게나마 있어서 외로움을 제외하면 사실 다른 것은 필요치 않다.
가끔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 복...수라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다만 자주 들려온다는 것만 알 뿐이다.
철썩 철썩 쏴아아아아아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것이 무엇의 소리일까. 말만 할 수 있을 뿐, 나가면 바깥의 사람들과 소통할 수나 있을지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어려운 단어를 배우는 건 쉽지 않았지만, 적어도 어린 시절에 배운 지식을 탐욕스럽게 소화시킨 덕분에 보통의 언어수준은 되리라 생각한다.


"도련님."

그리고 정말 오래간만에 문이 열렸다. 빛이 들어오고, 난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눈을 떴을 때는 나의 토굴이 아니라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어느 다른 토굴 앞이었다.
그것을 토굴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그것은 하얀 빛깔의 높은 토굴에 불과했다.

"드디어 아버님께서 분노를 푸셨어요. 도련님을 해코지하려던 자가 죽으면서 도련님의 위치를 가르켜주었답니다."


아아, 누군가의 분노로 내가 갇혀 있었구나. 그제서야 그 말의 의미가 생각이 났다.
복수.

유모라는 사람의 수다스러운 이야기를 듣다보니 대충 정리가 갔다. 내 어머니라는 사람은 아버지 몰래 다른 정인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결혼 전 이야기라 상관없었지만 아버지는 거기에 분노해 그 정인이라는 자를 추방시켰다.
그리고 어머니를 차지해 결혼했는데, 어머니의 순결을 의심한 아버지는 첫아들인 나를 멀리했다.
정인이라는 사람은 그런 사정을 잘 알고 나를 납치해서 어머니에게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말했다.

"어디, 시각은 괜찮은지 봅시다."

의사가 내 눈을 만졌다. 살짝 어지러운 냄새가 나는 손가락이 내 눈꺼풀을 톡톡 두들기고 눈앞에서 움직였다.

"괜찮군요. 오랜 감금생활에도 영양이 충분히 공급되었었나봅니다. 토굴에 오래 갇혀 있어서 시각이 좋지 않을까 했지만 눈도 괜찮구요."


그래서 어머니는 그에게서 떠나 아버지에게 정착했다. 아들을 버리고.


"그 다음은 발육 상태. 흐음. 이것도 정상이군요. 좀 마르긴 했지만 뼈가 약하거나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작자도 복수를 그렇게 할 정도로 나쁜 인간은 아니었군요."


돌아오고 나서 이틀 째 아버지가 나를 만나러 왔다.

"아, 네가 아합이구나."

"......"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한번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말을 하지 못하는가보군. 의사선생."

"말을 알기는 아는 모양입니다. 가끔 끄덕거리거나 하거든요."

"하지만 내가 제 아비인 것은 모르나 보지?"

"토굴에서 나온 이후부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 사내는 글을 가르쳤다고 하니까요."

"....어차피 일평생을 토굴에서 지낼 것, 뭐하러 그런 건 가르쳤는지..."

"다 듣고 있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어르신."

"그 여자 자식이니, 뭐 오죽하겠나만은...한 며칠 정도는 이렇게 해도 되겠지."


아합. 내 이름.
아버지가 내게 불러 준 이름.
그제서야 내가 원하는 것이 생각났다.
나는 손을 내밀어 아버지의 옷자락을 잡았다.

"...아니?"

아버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하는 말은 똑똑히 들렸다.

"내가 네 아버지인것을 아느냐?"

대답하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이내 내 손을 옷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좀 당황했는지 황황한 걸음으로 의사선생과 자리를 떠났다.
어머니를 만난 건 한참 뒤였다. 여기 사람들 말에 의하면 하루가 지나서였다고 한다.

"불쌍한 것."

어머니의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포근한 품이 날 감싸안았다.

"널 찾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단다. 그 자가 그토록 흉폭한 자인줄 누가 알았겠나."

유모가 들어와서 어머니와 날 떼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손을 들어서 유모의 간섭을 막았다.
그리고 하녀에게 부탁해 칼과 둥그런 무언가를 가져오게 했다.
사각사각.
둥그런 것의 껍질을 벗기고 어머니는 내게 그것들을 조각내어서 먹게 해주었다.
달고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그제서야 어머니는 유모를 불러 날 밖에 산책을 시켜주라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유모가 칼을 들어서 어머니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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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다시 토굴에 갇혔다. 어머니를 죽였다는 혐의를 씌우지 않기 위해서. 라고 아버지는 말했지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증거는 명백했다. 어머니를 찌른 것은 유모였고, 그 이외에 혐의를 가질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옛날 토굴에 다시 돌아오니 소망을 다시 가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건 일시적인 소란에 불과했다.
만나서는 안 될 사람들을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더냐. 바깥 세상은."

익숙한 목소리가 토굴 문 밖에서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 내 아버지의 목소리이며, 내게 옛날에 글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복수라고 읊조리던 사람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나보구나."

그는 천천히 문을 열고 토굴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내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지. 네 어머니의 남편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리고 살인자."

나는 말끝을 이었다.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건조한 진실만이 있었을 뿐이다.

"아니, 네 어머니는 네 칼에 찔려..."

"아냐. 당신이 그 남자를 죽였어. 그리고 어머니는 유모손에 찔렸고..."

"벙어리인줄 알았는데 말을 곧잘 하는구나."

아버지는 껄껄 웃으면서 토굴의 희미한 달빛아래 손을 들어보였다. 어두컴컴한 토굴의 붉은 빛이 비쳐 그의 손에 피가 묻은 것 같았다.

"왜 하필 그때였지?"

내 물음에 그가 대답했다.

"그때가 가장 네 모친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으니 말이다. 너에게 그 죄를 씌우면 더욱 좋았을 테고. 넌 정말 불쌍한 아이다. 낭랑한 목소리를 지녔으니 음유시인을 해도 잘 어울렸을테고. 정치인이 되었어도 연설을 잘 했을텐데. 어쩌자고 그런 여자의 아이로 태어나서..."

"......"

"그 여자의 아이만 아니었더라면, 그날 그놈을 죽이면서 같이 죽여버렸..."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내 옆에서 노래를 불러주고, 내게 글씨를 가르쳐준 사람은 아버지였던 것이다.
날 키우던 그 나쁜 자는 이미 없는 존재였다.

"...왜 날 토굴에서 꺼냈..."

"그 여자가 그 놈이 죽었다는 말에 슬퍼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 이야기하면서도 난 미련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슬퍼했기 때문에...
복수를...

나는 토굴앞에 슬픈 남자가 서 있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다시 자문했다.
신에게 내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

"나까지 죽이러 왔군. 수고스럽게도."

내 말에 이번에는 그가 침묵했다.

"불을 가져왔다."

"....."

토굴을 태울 불을 가져왔다는 말에는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랬던 것이니까.
여기는 흙으로 만든 굴이고, 나는 십몇년간을 매미처럼 여기에서 내려오는 영양분을 빨아먹으면서 살아왔으니까.

"아합."

불에 타 죽던지 아니면 이 흙을 먹으며 살던지.
어차피 어느 누구에게나 비슷한 삶일터.

"...죽지마."

나는 그에게 말했다.

"어느 누구도 죽이지 말고, 죽지마."

"이때껏 토굴에 갇혀 있던 짐승 주제에 할 말이!"

그가 분노했다.

"내가 말을 가르치지 않았으면 하지 못했을 것이고, 내가 먹을 것을 갖다주지 않았다면 살지 못했을 이 버러지가!"

"옷도 당신이 가져다주었지. 아버지."

내가 대답했다.

"당신이 구해주었으니 이번에는 내가 당신에게 기회를 주려고 해. 내게 복수라는 말을 가르쳐준 당신에게 또 다른 복수를 가르쳐주려고..."

"!"''

나는 화장실 한켠에 있던 날카롭게 갈린 칼을 그에게 건넸다.

"당신에게 선택권을 줄게. 날 찔러...그리고.."

말이 끝날 새도 없이 남자의 칼이 내 가슴팍으로 꽂혀 들어왔다...
나는 흘린 피를 남자의 얼굴에 발라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밑으로 떨어져내렸다.

"복수를...자신에게 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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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은 붉은 신의 문장(쿠와바라 미즈나 작, 적의 신문에 등장하는 희곡-매듀사-입니다.)
거기서는 토굴에 갇힌채 살다가, 가족에게 복수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뤘죠.
여기서는 토굴까지는 같습니다만, 복수를 하지는 않는 걸로...확실히 비교해보면 원작쪽이 파괴력이 있죠.
읽어보신 분만이 아시겠지만 약간의 향수도 담아서...;;;;,ㄲ.ㄲ
한국어판이 빨리 나와야 할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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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를 막고 서 있었다. 모든 일은 이미 다 봐버린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시각보다는 청각이 모든 것을 다 드러내버리고 있었다.
앙상한 뼈가 부서지는 소리, 흉포한 으르렁거림, 그리고...더 이상 말할 필요 없는 침묵.
그래. 그 침묵이 무서웠던 것이다.

"왜 귀를 막고 있어?"

그 질문이 나올 때까지 나는 계속 귀를 막고 있었다. 어떨 때는 손으로, 어떨 때는 내 자의로, 내 마음으로.

"응? 들려?"

나는 잠시 손을 떼었다. 그리고 내게 말을 건 소녀를 쳐다보았다.

"무엇떄문에 들리지 않는 척 하고 있었어?"

"......"

내가 있는 곳은 농아 학교다. 아무도 듣지 못하고 아무도 말하지 못하는 그런.
그런데 내 앞에 말을 하는 사람이 말을 걸었다.

"아..."

"너도 들을 수 있구나."

내 침묵에 그 소녀가 말했다.

"근데 넌."

"나도 듣고 싶지 않은게 있어서 왔어. 그러니까 너도 내 비밀을 지켜줘야 해."

듣고 싶지 않은게 뭘까.
하여간 우린 계속 같은 일을 반복했다.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우리는 수화를 배웠고, 수학을 배웠으며,국어를 배웠고, 영어를 배웠다.
우린 항상 같이 있었지만, 둘이 같이 있는다고 해서 특별히 말을 하거나 하진 않았다.
모두에게 비밀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3년동안 따로 가고 싶은 곳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학교에서 일부러 나가고 싶진 않았다.

"네 집은 어떤 곳이야?"

그녀가 묻는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풀밭에 말라빠진 나뭇가지를 들고 그림을 그렸다.
네모난 모양에 세모지붕.
그리고 지붕 위에 고양이 한마리. 고양이는 밤처럼 새카맣고 달처럼 가는 노란빛 울음을 운다.

"왜 도망쳐나왔어?"

그녀의 말에 난 되묻는다.

"넌?"

"난 별로 가고 싶지 않아. 갖고 싶은 게 없거든. 하지만 넌 고양이가 있잖아. 노란색 달같은."

"......"

내게 있어서 집이란 건 고양이가 있는 집일 뿐이었다. 내가 돌아가야할 이유가 있는 건 바로  내 옆에 착 달라붙어있는 고양이 미유...그밖의 다른 것은 관심이 없다.
내 귀가 내 자의로 멀어버린다는 건 집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고양이 밖에 없어서 그래."

"...고양이나 있는 거야."

그녀가 떠다니는 구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가는 구름이 고양이 구름이네..."

핥작하고 고양이가 내 다리를 핥는 느낌이 들었다. 옛날 내 미유가 그랬던것처럼.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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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드려 문을 부숴 들어가
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성문은 굳게 잠그고
창문은 살짝 열어놓았지
당신은 이미 날 본 순간
놓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순 없지.
당신이 맘에 들었으니
문고리 정돈 풀어줄게
문은 열어주진 않아.


두들기는 소리에 맘이 약해져
그래서 나도 모르게 대답하곤 했지.
하지만 거기까지.
문지기 없는 성
문 여는 건 당신의 몫이야.


가장 좋은 건 
연못의 거위에게 물어봐
열쇠를 삼킨 그 거위에게
나도 모르게 문 열어줄까 싶어
던져버린 열쇠의 행방을 아는.


사랑이란 알 수 없는 것
두드리기 전, 부수기 전
본래 잠겨 있던 걸 살짝 풀어주는 것.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 새로운 위험에 도전하는 것.
그것이 사랑인가
난 알던  것조차 잊었네
하지만 사랑하는 이여
그대를 그래서 사랑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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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 2015-01-31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란도트의 공주의 맘을 이해한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쓰다보니 공주의 맘을 알것같기도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