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를 보는 것은 해로운 것이다. 라고 말한 선생님이 있었다.
그 사람은 만화같은 것은 읽기에는 쉽지만, 머리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선생님이, 몇년 후에 만화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금은 우스웠지만 비웃기에는 너무 진지한 일이었다.
자신이 비난한 일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기로 한 사람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일까.

"잉킹 좀 도와줘."

만화부에 있던 친구가 한 말을 난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다.
잉킹? 그게 뭐지?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잉크는 만년필에 넣는 잉크와 같고, 펜은 습자용 펜인 줄만 알았다.

"잉크칠 좀 해달라는 말이야."

내 의문에 친구는 키득거리면서 대답했다. 손에는 잉크자국과 톤먼지로 얼룩이 져 있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멋져보였다.
학과 성적으로 보면 내가 더 성적이 좋았지만, 그녀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사람 특유의 건강함이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에도 안 하던 만화를 대학시절에 시작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유치한 일일수도 있다.
고등학생 시절에 만화부를 하던 친구들이 대학들어와서 만화를 그만두는 걸 보면 말이다.

"넌 언제부터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니?"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한번 흔들었다.

"처음이야."

"처음이라고?"

확실히 처음 그리는 것처럼 삐뚤삐뚤하긴 했다. 그림 그리는 실력으로만 보면 고등학교때 친구들이 더 잘그리는 것같았다.

"그런데 만화부가 좋니?"

"...응."

가끔 우리는 동아리실에서 술을 마셨다. 알싸한 맛의 수입 맥주-이름은 알 수 없다. 그때 우리에게 중요한 건 맥주의 이름이 아니라 그 알싸한 기분을 즐기는데 있었으니까.-를 마시면서 이런 모양이 더 낫지 않을까, 저런 모양이 더 낫지 않을까. 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내 부모님들은 때로 내게 물어보신다. 그때 그 좋은 시절을 만화만 그리면서 컴컴한 동아리방에 있는 게 정말 즐거웠냐고. 당신들이 보시기에 나는 고등학교때도 보지도 않던 만화를 그리기 시작하는 좀 이상한 아이였던 것이다.
알싸한 맥주, 그리고 반 사회인으로서 어른이기도 한 사람이 시도하는 아이의 영역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우린 정말 즐거웠다.

난 만화를 즐겨보진 않았다.
그 점에 있어서는 내 만화의 소울 메이트가 안타까워하긴 했다.
점점 많아지는 만화의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으니까.
지금은 절판되고 스캔본으로 인터넷 서점에서 팔리고 있는 스바루, X, 엔젤릭 레이어 등.
(그녀는 클램프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래도 난 만화를 그렸고-내가 좋아하는 만화의 형식이라고 해봤자 텅 빈 배경에 고양이 한마리씩 얹어놓는 그림이랄까. 그녀는 그걸 타래팬다 스타일이라고 불렀다.-지금도 무슨 이야기인줄은 모르겠다.-

안 굴러가는 펜을-초심자에게는 펜 다루는 게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니-조심스럽게 굴려서
외곽선을 긋고, 배경을 하얀 백지로 놔두는 게 내 즐거움이었다.
가끔은 백지에 펭귄들만 수도 없이 그리기도 했는데. 그녀의 입장에서는 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던 듯 하다.

"펭귄, 고양이...너는 배트맨을 좋아하나보구나."

수험생활의 폐해로 만화는 물론, 슈퍼 히어로 영화는 보지도 않던 나였기에 그 말은 좀 황당했다.

"배트맨? 그게 뭐야?"

"뭐? 한번도 보지 않았어?"

그걸 시작으로 그녀와 나는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교내 비디오방에서 배트맨을 하나씩 봐가고, 비록 불법이나마 구할 수 있었던 마크로스 -기억하고 있습니까?-를 첫 시작으로 마크로스 시리즈를 다 봐나갔다.
그래도 내 그림은 변하지 않았다. 텅빈 방, 펭귄이 찾아오고, 토끼가 시계를 차고 달려나가는 그림들.
비록 그림체는 조금씩 수려하게 변해갔지만,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나와는 반대로 그녀는 점점 상업적인 스토리를 구현하기 시작했다.
보는 만화도 다양해져서 클램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쿠스모토 마키 등을 읽기 시작했고
단순히 번역된 만화를 책방에서 빌려보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책을 주문해 보곤 했다.
하지만 그림체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노력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는데...

만화부의 실체없는 선배 하나가 극동 문화제에서 만화부문 시상이 있다면서 만화부에서 1사람만 나갈 수 있다고 했다. 그때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선배가 계속 날 찍어서 이야기하는 바람에 그녀의 기분이 꽤 상했던 모양이다. 

"좋겠어. 극동 문화제에 나갈 수 있어서."

"난 별 생각 없는 걸. 나가봤자 또 앨리스나 그리고 있겠지."

"넌 정말."

얄미워. 하고 그녀가 내뱉듯이 말하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문화제가 시작되기 1달전까지 나오지 않았다.

"부실에 안나올거니?"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친 내가 그녀의 옥탑방에 가서 본건 그야말로 기가 질릴 정도의 원고들이었다.
새카만 잉크로 얼룩진 팔 다리. 라면만 끓여먹어서 부은 얼굴에 엄청난 양으로 쌓인 뭉뚝한 펜들.

"넌 문화제 준비 안 해?"

그녀의 말에 나는 잠깐 웃었다. 밤에도 만화, 낮에도 만화.

"난 안 나갈거야."

"아냐. 넌 나가야 돼."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내가 왜? 난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스토리도 엉망인걸..."

"나랑 같이 하면 되잖아!"

그녀가 자존심도 버리고 그렇게 말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1달 동안 우리 둘은 그녀가 스토리를 내가 그림을 맡아서 작업하기 시작했다.
물론 시상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우리 둘다 시원하게 미역국을 마셨다.

"흐..."

그녀는 뜻모를 신음을 흘리면서 펜을 집어들었다. 손에는 물집이 가득했는데도 그리고, 또 그리고 계속 그려댔다.

"이제 됐어."

나는 그녀와 화해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풀렸다.
만화는 그리면 그릴수록 어려웠기때문에 이제 그만.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 반대였던 모양이다.
소울 메이트같았던 우리는 그 일을 계기로 헤어졌다.
나는 현실세계로, 그녀는 만화부에서 만화 그리는 세계로...


"어, 바닐라 에센스 12월호다. 어디, 주네브가 떴는지 볼까?"

가끔 나는 그녀가 투고하는 원고를 바닐라 에센스에서 본다.
그녀는 주네브라는 필명으로 개그만화를 그리고 있다.
그림실력이야 일취월장했겠지만 가장 그녀다운 색채를 볼 수 있는 것이 개그만화여서 그럴 것이다.
지금 사회인 친구들에게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30대  오피스 레이디들의 삶을 개그로 만든 주네브는 인기를 엄청나게 끌고 있다.

"돈 많이 벌겠지? 프리랜서라서 시간도 자유롭고."

친구들 중 몇명이 몽상을 시작한다.

"주네브라는 애 그림도 그렇게 잘 못 그리는데 책이 엄청 팔린대잖아."

"아서라. 쉬워보이는 게 어려운 법이란다."

킥킥거리면서 이야기는 종료된다.
나는 바닐라 에센스를 가방에 담고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간대학교 졸업 이후로 그녀와 나는 만난 적이 없다. 전화통화조차도.
하지만 나는 그녀가 자신의 진정한 길을 뚫었다는 걸 안다.
부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건 그 아이의 길이니까.
나는 방안에 있는 뭉뚝한 펜들을 생각했다.
문화제에 제출하기 위해 인정사정없이 그어댔던 펜들.
모두 추억속의 물건이지만, 이제는 완전히 내려놓고 가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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