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한은 뒤도 보지 않고 말을 달렸다. 하지만 말이 워낙 잘 달리는 탓에 우리가 따라가기는 버거웠다. 띠동갑인 친구 둘이서 애초에 보조를 맞춰 달린다는 것이 문제였다.

더더군다나 그 친구는 노새를 타고 왔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노새를 떠나서 노쇠하기까지한 모양인지 숨소리마저 거칠었다.

 

허억허억. 저 놈 잘도 달리는군.”

 

이 친구야. 그러게 아무 생각 없이 달리지...”

 

아닐세. 정의를 위해서...”

 

3시간 전에 기생의 보쌈을 논하던 친구치고는 극적인 변화였다.

마치 심장이 터질 것처럼 괴로워하기에, 나는 내 뒤에 친구를 태우고는 다음 객주에서 친구를 내려놓고 다시 궁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자마자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것처럼 객주 하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괴한도 객주에 들어섰다.

 

저놈! 잡을 수 있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져서 친구의 목에 수면침을 놓았다. 눈이 스르르 감기기 전에 잠꼬대처럼 말을 쏟아냈다.

 

꼭 잡아서 내가 노인이 아니라는...”

 

뒷말을 미처 듣지 못했지만 어쨌든 좋았다. 나는 노새치고는 기운을 발휘해 여기까지 달려온 그의 노새의 등을 어루만졌다. 헉헉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이미 죽기 일보 직전인 듯 했다.

하긴 노새와 말이 나란히 달려봤자 얼마나 달렸겠는가.

애초에 노새를 타고 괴한을 추적한다는 것부터가 무리였다.

나는 말과 노새를 어둠속에 숨긴 채 괴한과 객주의 심부름꾼이 말하는 소리를 엿들었다.

 

가기를 데려왔다고 말씀드려라. 주인님께서는 아직 안 주무실터이니...”

 

알겠습니다. 어른께 말씀드리지요. 3시간전부터 계속 기다리고 계셨습니다요. 비둘기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가 하구요.”

 

비둘기! 육황자의 비둘기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객주로 다가가, 좀 더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괴한은 객주의 3층방으로 올라가고 있었고, 심부름꾼은 괴한의 말에 다가가 보따리를 풀고, 다가기를 끌어내었다.

불쌍한 다미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거칠게 끌려나갔고, 나는 철없는 친구가 말한대로 구출할까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황자가 개입되어 있으니 함부로 나설 수도 없는 노릇, 나는 객주 건물에 몸을 밀착시키고, 3층으로 기어올라갔다.

 

그래. 다미야. 무슨 말을 들었느냐.”

 

육황자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울렸다.

 

댁은 뉘시기에 저에게 그런 것을 물으십니까.”

 

다미의 목소리가 냉기를 띄었다.

 

이 몸 다미, 지금은 비록 노래부르는 기생이오나 이 혍통에 흐르는 피는 진정 궁의 관료의 것입니다. 어찌 잔치자리에 있던 비밀 이야기를 함부로 하오리까.”

 

“...호오.”

 

육황자는 잠시 미소를 머금었지만 그것은 잠깐이었다.

 

말을 못하겠느냐. 네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줄은 아느냐.”

 

모르...”

 

보쌈패들은 이 몸의 검 앞에 무릎 꿇고 죄를 빌어라!”

 

다미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늙은 친구가 소리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한때 짧게나마 함께 강호에 있던 친구답게 수면침이 말을 듣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혈도 혈도마다 꽂아놓을 것을, 방심한 탓이었다.

 

자네, 뒤를 밟혔군.”

 

육황자가 여유롭게 말했다.

 

일부러 뒤를 밟히게 한 것이겠지?”

 

설마 그렇겠습니까.”

 

두건을 벗으며 괴한이 대답했다. 흰 두건이 벗겨지면서 나는 그 얼굴이 유랑안에서 설교를 하던 포교사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하여간 들통이 났으니 도망치세나. 악극에서 악역이 그렇듯 말일세. 자넨 내 말을 알겠지?”

 

그리하지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객주에서 바닥으로 심하게 내동댕이쳐졌다. 객주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내가 기어올랐던 것은 객주가 아니라 심하게 썩은 거목이었다.

 

으잉. 자네 안 다쳤나!”

 

친구가 비틀비틀 걸어오면서 소리치면서 다가왔지만 나는 거기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어느샌가 육황자와 포교사가 말을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나랑 같이 저 괴한들을 쫓...”

 

닥치게!”

 

나는 나도 모르게 거칠게 내뱉고는 묶은 끈을 풀어 말에 올라탔다..

 

아니, 자네 왜 그러나...”

 

여기서 꼼짝 말고 있게.”

 

나는 그렇게 외치고는 육황자를 따라 달렸다. 이것은 잘못하면 반정이 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더 따라갈수도 없었다. 그들의 말이 하늘로 날아올랐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내가 패설사관을 하면서 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야깃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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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에요. 저는 그 사람에게 홀린 모양입니다. 눈을 감아도 그 사람이 떠오르고 귀를 막아도 그 사람 음성이 들려옵니다. 아마 전 미친 모양입니다. 잊어버릴 수가 없어요. 보통은 사랑에 빠져도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 아닙니까?

근데 전 그 사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아마 절 경멸하면 전 울어버리고 말거에요. 하지만 그래도 전 아마 그 사람을 그리며 살아갈 것 같습니다.

 

제가 그 사람을 잊어버릴 유일한 방법은 그 사람이 죽는 것 말고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다자이 오사무의 글에서처럼 예수를 죽인 가룟 유다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알아요. 가룟 유다에게는 핑계가 있었던 겁니다. 절실히 사랑했지만 죽일 수 있는 이유.

하지만 전 핑계를 댈 것이 없군요. 무엇 때문에 그 사람이 없어져야 할까요.

단지 제 눈에, 제 귀에 들린다고 해서, 괴로워진다고 해서 죽일 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 사람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밝은 겁니다. 그 밝음에 동화될 수 없는 그 어두움 때문에 괴로울 뿐이죠. 아름다운 사람. 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밝음을 당신은 좋아하지 않습니까? 왜 제게 그 사람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겁니까?

어째서 추종하느냐고, 노예근성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아, 사랑은 마치 노예와도 같은 것입니다. 오로지 노예같은 사랑이 아닌 것은 신에 대한 사랑뿐일 것입니다. 아니오, 그런 것이 없다고요?

제가 말씀드릴 것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사랑. 그것은 고귀한 것. 옛적 그리스 시대에 그 시대의 사람들이 고귀했던 것은 노예에게 귀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고귀한 것은 그 사랑의 대상에게 무조건적인 노예의 헌신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쌍방간의 사랑도 있지 아니하느냐고 물어보신다면 저는 그것이 서로에게 노예에 가까운 헌신을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리렵니다.

 

노예. 그것과 밝음이 어찌 공존하느냐. 그걸 제가 당신에게 어찌 다 설명하겠습니까. 노예라고 해도 사랑의 노예인 것.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헌신할 수 있고 그것이 밝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정 섬김을 받는 자도 노예인것을요. 사랑이 없어지면 그렇게 허무하고 어두운 것을 당신은 아십니까?

 

저는 그래서 고민합니다. 아아, 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그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제 사랑이 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지금에 와서 그 마음을 헌신짝 버리듯 해서 그 사람을 짓밟는다면...

그렇습니다. 그야말로 사랑은 쓰레기가 되어버리겠죠.

그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사람을 참으로 어떻게 해야 옳을까요. 그 가련하고 순수한 마음을...이 내 마음을.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을 볼때마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도망치는 것입니다.

저기 또 다가오는 군요. 아아 멀리로 그냥 도망갈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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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본 그 친구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반대편에 앉아있는 흰비단 옷을 입은 사나이가 고개를 살짝 밑으로 까닥였다. 그 움직임과 동시에 객주에 여기저기 앉아있던 검을 패용한 사내들이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커다란 비명소리가 들렸다.

 

다가기가 보쌈당했다! 저 놈 잡아라!!”

 

3층에서 누군가가 흰 보따리를 짊어지고 마차에 뛰어들었다. 나는 유쾌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친구에게 일침을 놨다.

 

자네같은 자가 또 있구만.”

 

설마...”

 

친구는 빙긋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자위에 심부름꾼에게 주는 은전을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세.”

 

?”

 

또로록. 은전놓는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친구는 내 팔뚝을 잡아챘다. 나는 그 은전 색깔을 지금도 눈으로 보는 것처럼 기억하고 있다. 약간 녹이 슬어 하얀색깔 안쪽에 녹색빛이 돌던 그 은전.

잠깐만. 보쌈한다고 하지...”

 

때로는 반대의 일을 해도 좋은 법이지.”

 

친구가 웃었다.

 

다가기를 보쌈하려고 했었는데, 마침 보쌈을 당했으니 구해오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일인 것 같네.”

 

가기. 노래만 부르는 기생. 다미.

성과 이름이 모두 가짜인 기생세계에서 그녀의 존재는 이채로웠다.

50년전에 이조에 이름을 올렸던 벼슬했던 자의 자손이 미끄러지면 어떻게 되는가를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예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조상을 존경하는 이조의 관리들은 그녀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지켰다. 가끔 노래를 불러당하고 청하기는 했지만 그녀에게 돈을 주거나 괴롭히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들에게 기생이 아니라 이조의 관리의 따님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왜 그때 육황자의 비둘기가 거기 있는지 의문이었지만 우선 거칠게 끌고 가는 친구를 따라 말을 타고 그 괴한을 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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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갑자기 예전의 친구로부터 비둘기 서신을 받았다. 옛적에 짓궂은 장난질을 치던 친구인데 세월이 세월이니만큼 다시 만났을 때는 수염을 길게 기른 품이 노인처럼 보였다.

가족에 대해서 물어보니 벌써 손자를 다섯이나 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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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가, 근 20년만에 다시 보니 많이 늙었지?”

  

손자를 물어본다고 은근 타박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열여덟살같은 기분이네.”

  

“.....”

  

“자네도 지금은 궁중관리지만, 예전에는 나랑 같이 장난도 많이 치지 않았나.”

  

“그랬...었지.”

  

가지각색의 장난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질 일이었다.

  

“내가 왜 대로 왔는지 아는가?”

  

“.....”

  

“나는 몇 년뒤면 환갑이네. 이제 완전히 노인취급이야.”

  

“.....”

  

그러고보니 그와 나는 거의 띠동갑이었다.

  

“난 아직 노인이 아닐세.”

  

“아니, 자네가 그런 말을 한다고해서 달라질...”

  

“그러니까 자네 도움이 필요하네.”

  

“?”

  

“...기루에 침입해서 기생을 하나 보쌈하자고.”

 

“자네, 아내 얼굴을 어찌 보려고.”

  

“그 사람이 설마 대까지 오겠나? 더더군다나 자네와 나의 실력이라면 들키지도 않을 걸세. 자네도 옛날에 기루에 뛰어들어서 무기, 예기를 보쌈하지 않았나. 불행하게도 자네가 나같은 풍류남이 아니어서 그저 장난치는 걸로 끝났으니 그게 애석하이.”

  

...철이 덜 들어도 한참 덜 든 놈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도망치려고 하자 이 친구는 내 소매를 붙들고 늘어졌다.

  

“내가 이제 몸이 좀 느려져서 그러니 자네도 같이 가세.”

  

“.....”

  

“같이 가세나.”

  

“나는 관리일세. 더더군다나 지금은 근신 중이야.”

  

그때 육황자의 비둘기가 갑자기 탁자에 뛰어들었다. 온통 하얀 빛깔인 비둘기.

그건 육황자의 상징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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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날 서고에서 경전을 필사하고 있었다. 날씨는 바야흐로 서서히 서늘해지고 있었다. 해배되고 나서 근신만 벌써 3개월. 유배시 죄명은 함께 대동한 무관을 의식불명의 상태로 데려온 것과 무단으로 지방관을 치죄한 것이었다.

지금도 그 결정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지만, 사실 황명과는 다르게 움직인 것도 있어서 마음이 언짢기도 했다. 더더군다나 그 요물에게 홀린 것인지, 같은 죄인데도 그 요물편이 더 나아보이지 않는가. 적어도 백성을 괴롭히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덕분에 매일매일 경전을 베끼면서 마음수행을 하는 것이었다. 옛 강호에 있을 때처럼.

 

오늘 베끼는 것은 무언가?”

 

경전을 베끼는 것은 하나의 정신수양이었다. 100장 정도 베끼고 나면 등에 살짝 땀이 배인다. 그리고 나서 밖을 쳐다보면 시원한 바람이 불고, 살랑살랑 창에 단 천이 흔들리면서 예전의 풍경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 황자님.”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면 계속 그렇게 창을 응시하고 있을 터였다.

수린과 지금은 황태자가 된 나의 어린 아이 제 3황자를...

 

그대가 지금 필사하고 있는 것이 일어경이었지.”

 

. 그러합니다.”

 

일어경, 한단어만으로 세상을 그려낸다는 격언집. 지금의 내 상황에 딱 맞는 것이었다.

 

그래, 격언이 머리에 들어오기는 하는가? 요즘 같은 어지러운 세상에는 그대같은 이가 살아남기가 힘들지.”

 

“.....”

 

지금 내 앞에 앉은 사람은 제 6황자. 지금의 황태자의 친동생이자 가장 위험한 상대.

 

황태자가 그대편을 들어주지 않아서 이런 꼴이 된 거 아닌가. 강호에서 막 도착했던 자네가 아니었으면 형님이 살아남기도 힘들었을텐데 말이야.‘

 

그때는 황자님이 태어나시기도 전이었습니다.”

 

, 그랬나?”

 

그래, 그리운 광경이었다. 강호에서 막 궁으로 입궁했을 때, 난 과거를 지우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하지만 패설관으로 막 임명받고 들어갔을 때는 강호의 버릇을 버리지 못해서 태형을 자주 당하기도 했다. 내시들의 은근한 압박과 비웃음을 이겨내기에는 내가 젊은 탓도 있었고, 궁중법도를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해 분노한 탓도 있었다.

이미 수린이 죽었을 때 마음도 죽었다고 생각했건만.

강호의 법도에 얽매이지 않는 패설관이 되면 좀 더 자유로이 노닐 수 있을 거라 생각한 탓도 있었다. 하지만 궁중은 강호보다 더 엄격했고 더 냉혹했다.

 

유주! 게 섰거라!”

 

그때 3황자는 황자도 아니었다. 황자의 어미는 궁중의 시녀로, 어쩌다 황비에게 싫증을 낸 황제폐하께 잠시 눈에 들어 제 3황자를 배었다. 하지만 어미의 신분이 천한데다가, 그당시 황비님의 구박도 심해서 제 3황자는 황자취급도 받지 못했다. 매일매일이 내시들의 구박으로 인해서 제 3황자에게는 괴로운 나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내 위의 패설서기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다가 궁중의 어른들로부터 심하게 매를 맞은 뒤 서고에 갇혀 있었다. 며칠간 근신하라는 말과 함께.

 

거기 서라니까!”

 

지금은 황태자 전하로 불리우시지만 그때는 성도 없이 유주라고만 불리고 있었다.

상궁 몇몇이 황자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여워하긴 했지만(그건 황자의 어미의 신분 탓도 있었을 것이다.)그건 신분상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서고에 갇혀서 밖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어디서 수린을 많이 닮은 듯한 어린 아이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도 궁중생활을 한 4개월 하다보니 눈치가 많이 늘어 그 어린아이가 바로 소문의 그 제3 황자가 될 아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모른 척 하고 지나가려고 했었다. 그 내시가 손에 칼을 쥐고 있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는 내시 중에서 가장 권력이 센 내시의 양자였다.

 

게 서서 내 칼을 받거라. 너같이 천한 놈이 거둬주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터! 어디 감히 꼬박꼬박 말대꾸냐! 근본도 없는 것이!”

 

아이는 이미 많이 맞아서 피멍이 들어 있었다. 연약한 하얀 팔에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있고 옷도 많이 찢어져 있었다.

 

내시주제에! 난 근본이 없지 않아! 아바마마께서 언제까지 네놈들 하는 대로 내버려두실 것 같아?”

 

그래도 자신의 근본을 알고 있는 자의 행동을 보이고 있는 그 어린아이가 얼마나 안쓰럽던지.

하지만 저 큰 권력앞에서 함부로 나설 수 가 없었다. 이미 나는 수많은 압박을 받고 있지 않은가. 겨우 강호에서 몸을 피해 온 것인데, 여기서 더 나갈 수는 없었다.

물론 실제 저 내시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면 황자의 저 발언도 궁중의 법도를 벗어나는 것을 떠나서 저 정도 체벌을 당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누가 네놈의 아바마마냐! 이놈! 황비마마께서 이미 결단을 내리셨거늘!”

 

그가 칼을 휘둘렀을 때 내 몸도 창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 생각만 한 것이었다.

피가 튀었고, 나는 그때 지금의 황비마마께서 아이를 감싸안는 것을 보았다.

그래, 진수린을 꼭 빼닮은 젊은 어미.

황비 마마셨다. 그래. 지금의 서황비 마마.

 

그만두셔요! 아두 어르신! 제가 황비께 사죄드리고 차라리 자진하겠어요. 전하의 정을 받는 것이 그렇게 나쁜 짓인지 몰랐어요. 제가 유주는 꼭 제 친가로 보내서 키우겠으니, 제발 제발 그만하셔요.”

 

칼에 팔이 찢긴 그 어미를 보는 순간, 진짜로 내가 창밖으로 뛰어내릴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하지만 아두는 그 손을 거두지 않고 어미의 목을 졸랐다. 그리고 그녀의 숨이 끊어질 정도에 이르렀을 때 유주가 아두의 손을 깨물었다.

 

이놈이!”

 

그때도 선택의 여지는 있었다. 그때 물러섰다면...

아두는 정확하게 유주의 목을 향해서 칼을 꽂았다.

 

!”

 

그때 소리를 지른 것은 유주가 아니라 아두였다. 나는 정확히 아두의 손에 내 몸에 숨기고 있던 침을 날려 정화하게 맥이 통하는 부분을 막은 것이었다.

 

네놈! 새로 들어온 패설관! 이 겁대가리를 상실한 것들이!”

 

아두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난 차라리 냉정해지기로 했다.

 

아두 어르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의관을 찾아가셔야 할겝니다.”

 

?”

 

정확히 1시간 후면 온몸이 마비될 것이고, 정확히 2시간 후에 어르신이 돌아가실겝니다. 그러니 얼른 의관에게 뽑아달라고 하시죠. 안 그러면 궁에서 아두 어르신의 장례를 치르게 될 겝니다.”

 

, 지금 누굴 적으로 돌렸는지 아느냐? 황비 마마님을!”

 

누굴 적으로 돌리다니, 황비가 뭘 어쨌단 말이야. 아두! 네놈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대낮부터 술에 취해서는. 아룡. 네 양자의 행동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느냐?”

황제폐하셨다. 서고쪽으로는 웬만해서는 지나다니시지도 않는 분이, 우리를 본 것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냐!”

 

황제폐하께서 대로하셨다.

 

폐하.”

 

어미가 황제폐하의 발을 붙들고 울었다.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감히 천한 신분으로 씨도둑질을 한 것은 잘못된 일이오나, 이 아이가 이렇게 죽어서는...”

 

폐하께서는 더 이상 듣지 않으셨다. 폐하는 그 어미의 손을 발에서 치우시고는 그대로 검을 들어 아두의 몸을 치셨다. 검으로 베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 바로 멍이 들어, 아룡은 허겁지겁 폐하가 더 검을 드시기 전에 정신이 덜 든 아두를 데리고 자리를 황황히 벗어났다.

 

내 아들이라고?”

 

폐하께서는 냉냉한 눈길을 황자께 향했다.

 

내 아들이라...”

 

아바마마. 유주라고 합니다.”

 

궁중예법을 모르느냐? 내가 네게 말을 걸기 전에는 네가 말해서는 안된다.”

 

그리고는 황제폐하께서는 몸을 돌리려 하셨다. 그러다가 날 보고는 한마디만 하셨다.

 

배짱이 좋은 패설관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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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자네 덕분에 어머님이나 나나, 전하나 살아남은 셈이지.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전하께서는 항상 은유로 말씀을 하실 때가 많아서 진의를 파악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나는 황자의 말을 한귀로 들으면서 일어경을 다시 필사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번에는 얼마만큼 근신할 것 같은가? 이번에는 형님도 자네를 풀어주기가 쉽지 않을 것이야.”

 

서황비 마마가 동황비 마마를 찾아가시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래. 그렇게 모성애 넘치던 어미가 황자 둘을 더 낳았다. 그 냉냉하던 전하께서 어떻게 마음을 여신 것인지, 얼마 뒤에는 총애를 받아 직위가 올랐다. 그 뒤에는 황태후 마마의 마음도 사로잡아 황비까지 되어 한때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동황비 마마와 동급이 되어 오히려 동황비 마마를 벌벌 떨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몇 번의 승급을 연이어 하다가 어렵잖게 패설관들의 꿈인 패설사관이 되었다.

 

동황비인들 어머님이 쉬운 상대겠나. 자네는 몰랐겠지만 어머님은 행동 하나하나가 훌륭한 배우가 아니셨나. 친가의 핏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야.”

 

그때 내가 제 3황자를 지키려고 했던 것은 진심이었지만, 서황비의 모성애는 철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황제의 아이를 갖기 위하여 황제가 여인들을 고르는데 쓰는 고양이가 좋아하는 풀을 바닥에 깔고 황제를 유인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두의 그 횡포도 철저하게 계산된 것.

서황비는 계교로 밑바닥부터 황비가 되었다.

동황비 밑에 아들이 둘 있었지만 서황비의 꾀로 그 둘이 다 죽어버리고, 지금은 서황비의 맏아들이 황태자가 되었다.

그것이 지금의 황궁의 현실이었고, 내 현실이었다.

모든 이들의 꿈인 황태자와 황비, 그리고 패설사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호에 있었을 때보다, 아니 궁중에서 그 뜨거운 피를 식히고 있던 그 순간이 더 꿈결같은 것은 어쩐 일인가.

내가 보는 일어경에서는 그 말을 이렇게 표현한다.

 

호접지몽.

 

내가 나비런가, 아니면 나비가 나인가.

강호의 현실이 더 각박한가.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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