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생각을 많이 했어.
인선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들었다. 그녀도 그 바람구멍 속을보고 있었다.
하도 생각해서 어떤 날엔 꼭 같이 있는 것 같았어. - P190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그녀는 주전자에 생수를 부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제목을 묻지 않았어.

나는 대답했다.

작별하지 않는다.

주전자와 머그잔 두 개를 양손에 들고 걸어오며 인선이 되뇌었다. 

작별하지 않는다. - P192

잔에서 입술을 뗀 인선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생각했다. 그녀의 뱃속에도 이 차가 퍼지고 있을까. 인선이 혼으로 찾아왔다면 나는 살아 있고, 인선이 살아 있다면 내가 혼으로 찾아온 것일텐데 이 뜨거움이 동시에 우리 몸속에 번질 수 있나. - P194

막 내려앉은 순간 눈송이는 차갑지 않았다. 거의 살갗에 닿지도 않았다. 결정의 세부가 흐릿해지며 얼음이 되었을 때에야 미세한 압력과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얼음의 부피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 P185

흰빛이 스러지며 물이 되어 살갗에 맺혔다. 마치 내 피부가 그를빛을 빨아들여 물의 입자만 남겨놓은 것처럼.
어떤 것과도 닮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섬세한 조직을 가진 건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차갑고 가벼운 것은, 녹아 자신을 잃는 순간까지 부드러운 것은.

이상한 열정에 사로잡혀 나는 눈 한줌을 움켜쥐었다가 펼쳤다.

손바닥 위에 놓인 눈이 새털처럼 가벼웠다. 손바닥이 연한 분홍꽃으로 부푸는 동안, 내 열기를 빨아들인 눈이 세상에서 가장 연한 얼음이 되었다.

잊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부드러움을 잊지 않겠다.

그러나 이내 견딜 수 없이 차가워져 나는 손을 털었다. 흠뻑 젖은 손바닥을 코트 앞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삽시간에 딱딱해진 손을 남은 손에 비볐다. 열기가 지펴지지 않았다. 몸속 온기가 모든 손을 통해 빠져나간 듯 가슴이 떨려왔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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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멈춘 게 언제였을까, 나는 생각한다.

내가 건천으로 미끄러지지 않았다면 그전에 물을 먹일 수 있었을까.

그 순간 제대로 길을 택해 내처 걸어왔다면, 

아니, 

그전에 터미널에서 더 기다려산을 가로지르는 버스를 탔다면. - P155

이제 더 할일이 없다.

몇 시간 후면 아마는 얼어붙을 거다.
2월이 올 때까지 썩지않을 거다.
그러다 맹렬히 썩기 시작한다.
깃털 한줌과 구멍 뚫린 뼈들만 남을 때까지. - P156

속솜허라.
동굴에서 아버지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에요.


양치잎 같은 그림자가 벽 위를 미끄러지며 소리 없이 솟아올랐다.


숨을 죽이라는 뜻이에요. 움직이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 소리도내지 말라는 거예요. - P159

어멍이 기다릴 건디.
내가 어멍이라는 말을 뱉은 순간 아버지의 몸 전체가 움찔 떨리는 걸, 전류가 옮겨온 것처럼 느낄 수 있었어요. - P160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스쳐가고 있었을 상상들의 내용을 몰랐지만, 절망적인 결론에 다다를 때마다 내 손을 잡는다는 걸 알 수있었어요. 그의 몸에서 배어나온 조용한 전율이, 빨래를 쥐어짜는 순간 쏟아지는 물처럼 손을 적시는 걸 느꼈어요. - P161

깊은 숨을 내쉴 때마다 통증이 물러난다. 들이마시면 다시 전진해와 안구 안쪽을 도려낸다. 깜박 잠들었다 통증 속에 깰 때마다 뼈들의 희끗한 형상이 파고든다. 인선의 마지막 영화가 끝나기직전, 유골 수백 구가 묻힌 구덩이가 맥락도 설명도 없이 일 분 가까이 클로즈업되었던 장면이다. 무릎을 구부려 올린 사람의 유골,
삭은 천조각이 허리에 걸쳐진 유골, 작은 발뼈에 고무신이 신겨진유골들이 밭고랑 같은 구덩이 속에 포개져 있었다. - P167

누군가 두드리는 것같이 현관문이 덜컹거린다. 뒤안으로 난 창도 흔들린다. 유리창에 비친 실내의 가구들 위로 눈발이 어지럽게 날린다. 통나무들을 고정한 밧줄들 사이로 방수포가 기구처럼부푼다.
식탁 등이 진저리치다 꺼진다. 먹물 같은 어둠이 실내와 창밖의 풍경을 동시에 지운다. 두 팔을 뻗어 허공을 더듬으며 나는 마루를 가로지른다. 짐작보다 벽이 멀리 있다. 마루의 천장등 스위치를 찾아 올린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 P168

의식이 꺼지는 순간마다 예리한 꿈이 파고든다. 

살얼음에 싸인 새를 두 손에 받쳐들고 나는 세면대로 간다. 수도꼭지에서 흐르는더운 물줄기가 삽시간에 그 얼굴을 녹인다. 눈이 떠져 반짝이질기다린다. 부리가 열리길 기다린다. 숨을 다시 쉴 거지, 아마, 심장이 다시 뛸 거지. 그렇지, 이 물을 마실 거지.

하나의 꿈이 사그라들기 무섭게 다른 꿈이 송곳처럼 찌르며 들어온다. 

거대한 얼음의 구체가 된 지구가 굉음을 내며 자전한다. 끓어 넘친 용암에 덮인 대륙들이 그대로 얼어붙은 거다. 영원히 내려앉을 수 없게 된 지면 위로 수만 마리 새들이 날고 있다.
활공하며 잠든다. 퍼뜩 깨어날 때마다 날개를 퍼덕인다. 번득이는스케이트 날들처럼 허공을 그으며 미끄러진다. - P170

부서질 듯 문과 창문들이 덜컹거린다. 바람이 아닌지 모른다.
정말 누가 온 건지도 모른다. 집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려고 찌르고 불태우려고, 과녁 옷을 입혀 나무에 묶으려고, 톱날 같은 소매를 휘두르는 저 검은 나무에. - P171

죽으러 왔구나, 열에 들떠 나는 생각한다.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


베어지고 구멍 뚫리려고, 목을 졸리고 불에 타려고 왔다.
불꽃을 뿜으며 무너져 앉을 이 집으로,
조각난 거인의 몸처럼 겹겹이 포개져 누운 나무들 곁으로.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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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처럼 가볍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눈에도 무게가 있다. 이 물방울만큼.

새처럼 가볍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에게도 무게가 있다. - P109

어떻게 이렇게 가벼운 거야, 내가 물었을 때 인선은 자신도 알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새들의 뼈에는 구멍들이 뚫려 있다고. 장기 중에 제일 큰 건 풍선처럼 생긴 기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새들이 조금 먹는 건 위가 정말 작아서 그런 거야. 피도 체액도아주 조금뿐이어서, 약간만 피를 흘리거나 목이 말라도 생명이 위험해진대. 가스 불꽃에서 나오는 약간의 유해물질도 혈액 전체를 오염시킬 수 있다고 해서 전기레인지로 바꿨어. - P110

그의 한쪽 눈은 벽에서 움직이는 인선과 아마의 그림자를, 

다른 쪽 눈은 유리창밖 마당에서 저녁 빛을 받으며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두 개의 시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건지 나는 알고싶었다. 

저 엇박자 돌림노래 같은 것, 꿈꾸는 동시에 생시를 사는 것같은 걸까. - P114

내 시선을 느끼지 못한 듯 노인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교차로를 향해 먼 시선을 던지고 있다. 

말을 걸기 위해선 그의 몸을 건드려야만 한다. 

손을 뻗어 그의 어깨에 막 닿으려는 순간 노인의 얼굴에 동요가 스친다. 

새로운 빛이 어린 그의 시선이 끈질기게 향한 곳에서, 두툼한 눈을 천장에 인 작은 지선버스가 거짓말처럼 교차로를 돌고 있다. - P117

번쩍이던 눈으로 나를 응시하던 인선을 뒤로하고 택시는 김포공항을 향해 달렸다. 젖은 실밥처럼 앞유리에 달라붙는 눈송이들을 두 개의 와이퍼가 끈덕지게 지워냈다. 63

이런 눈보라는 처음이다. 서울 거리에 무릎까지 눈이 쌓이는 광경을 십 년 전 겨울에 한차례 보았지만 이만큼의 밀도로 허공을 채우지는 않았다. 59

점점 나는 초조해진다. 이 버스를 탄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두 시간 전 내가 몸을 실었던 비행기는 몹시 불안전하게 흔들리며 제주공항에 착륙했다. ... 통로 건너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스마트폰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우리 다음 비행기부터 전부 결항이야.
...
택시 승강장에서 ...공항 건물 앞으로 되돌아갔고, ...내 목적지를 들은 초로의 남자는 버스를 타라고 충고했다....일단 여기서 아무 버스나 타고 버스 터미널로 가세요. ...일단 거기선 안 가는 데 없이 다 갑니다....

가장 먼저 나타난 시내버스를 타고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불안했다. 오후 다섯시만 되어도 어두워질텐데, 그태 시각이 벌써 두시 삼십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61

터미널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쪽 해안의 P읍을 경유하는 급행 일주버스가 들어왔다.P읍과 마을을 연결하는 작은 지선버스가 한 시간에 석 대씩 있다고 그녀는 말해줬다....
또렷하게 떠오른 그 정보들 때문에 그 순간 나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먼저 도착한 일주버스를 타고 P읍에 도착한 뒤 지선버스로 갈아타고 인선의 마을까지 들어가는 것. 그러나 문제는 이 섬의 해안선이 동서로 긴 타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P읍에서 인선의 마을로 들어가는 작은 버스의 운행이 눈 때문에 중단될지도 모른다.

터미널에서 한라산을 가로질러 인선의 마을 인근을 바로 통과하는 노선도 있지만, 배차 간격이 길어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해서 나는 그 일주버스에 올라탔다.62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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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버스가 P읍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을, 농협과 우체국의 간판들로 나는 짐작한다. 

손을 뻗어 하차 벨을 누르자 버스가 속력을 줄인다.
......

태풍의 눈 속으로 갑자기 들어선 것 같다. 이제 오후 네시를 조금 넘겼는데, 더 큰 폭설이 다가오기라도 하려는 듯 어둡다. - P88

젖은 아스팔트 위로 눈이 내려앉을 때마다 그것들은 잠시 망설이는 것처럼보인다. 

그럼・・・・・그래야지・・・・・ 라고 습관적으로 대화를 맺는 사람의 탄식하는 말투처럼, 

끝이 가까워질수록 정적을 닮아가는 음악의 종지부처럼, 

누군가의 어깨에 얹으려다 말고 조심스럽게 내려뜨리는 손끝처럼 

눈송이들은 검게 젖은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았다가 이내 흔적없이 사라진다. - P89

나를 내려준 뒤 다시 출발하는 버스의 엔진음이 눈의 정적 속으로 무디게 삼켜진다.

속눈썹에 내려앉는 눈송이를 손바닥으로 닦아내며 나는 방향을 찾는다. - P90

너무 고요하다.

계속해서 이마와 뺨에 부딪혀 맺히는 눈의 차가움이 아니라면 꿈이라고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

멸치국수와 물회를 파는 식당들에 불이 꺼져 있는 것은 일요일이라서일까? 
......
적막에 싸인 이 읍에서 불을 밝힌 곳은 길모퉁이의작은 슈퍼마켓뿐이다.

- P91

조그만 푯대는검게 젖은 아스팔트로 매초마다 수천 송이의 눈이 내려앉아 사라지고 있는 횡단보도를 나는 가로지른다.

오십 미터 가까이 걸어 올라갔을 때에야 그 푯대가 버스 정류장이라는 게 확실해진다. 

눈비를 피할 수 있는 어떤 구조물도 없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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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출장 여행을 다니던 첫해, 인선은 고향 이야기를 좀처럼 하지 않았던데다 완전한 서울말을 썼기 때문에 나에게는 서울내기와 다름없게 느껴졌다. 어느 밤숙소 로비의 공중전화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나누는 대화를 옆에서 듣고서야 인선이 먼 섬에서 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 P71

바람이 센 곳이라 그렇대. 어미들이 이렇게 짧은 게. 바람소리가 말끝을 끊어가버리니까.
그렇게 인선의 고향은 그녀가 가르쳐주는 담담한 방언 - 어미들이 홀홀히 짧은ㅡ과, 사람이 그리워 농구 경기를 즐겨 본다는아이 같은 할머니의 이미지로만 남아 있었다. 

내가 잡지 일을 막 그만 두었던 연말, 일을 사이에 두지 않은 순수한 친구로서는 처음으로 그녀를 만난 저녁까지는. - P73

말없이 우리어떤 순간에 말을 아껴야 하는지 어렴풋이 배우게 된다. 

두 사람모두 젓가락을 내려놓고도 한참 시간이 흘렀을 때에야 그녀는 입을 열어, 열여덟 살에 자신이 가출한 적이 있다고. 

그때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겼었다고 말했다. 

나는 내심 놀랐다. 인선이 아홉 살일때 홀로되어 딸을 대학까지 보낸 연로한 어머니에게 그녀가 평소얼마나 각별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P75

그런데 그해엔 왜 그렇게 엄마가 미웠는지 몰라. - P76

내가 다친 걸 진작 알았다고 그때 엄만 말했어. 병원에서 연락오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고. 

내가 축대에서 떨어졌던 그 밤에 꿈을 꿨다고 했어.

 다섯 살 모습으로 내가 눈밭에 앉아 있었는데 내 뺨에 내려앉은 눈이 이상하게 녹지를 않더래. 

꿈속에서 엄마몸이 덜덜 떨릴 만큼 그게 무서웠다. 따뜻한 애기 얼굴에 왜 눈이안녹고 그대로 있나.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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