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멈춘 게 언제였을까, 나는 생각한다.
내가 건천으로 미끄러지지 않았다면 그전에 물을 먹일 수 있었을까.
그 순간 제대로 길을 택해 내처 걸어왔다면,
아니,
그전에 터미널에서 더 기다려산을 가로지르는 버스를 탔다면. - P155
이제 더 할일이 없다.
몇 시간 후면 아마는 얼어붙을 거다. 2월이 올 때까지 썩지않을 거다. 그러다 맹렬히 썩기 시작한다. 깃털 한줌과 구멍 뚫린 뼈들만 남을 때까지. - P156
속솜허라. 동굴에서 아버지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에요.
양치잎 같은 그림자가 벽 위를 미끄러지며 소리 없이 솟아올랐다.
숨을 죽이라는 뜻이에요. 움직이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 소리도내지 말라는 거예요. - P159
어멍이 기다릴 건디. 내가 어멍이라는 말을 뱉은 순간 아버지의 몸 전체가 움찔 떨리는 걸, 전류가 옮겨온 것처럼 느낄 수 있었어요. - P160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스쳐가고 있었을 상상들의 내용을 몰랐지만, 절망적인 결론에 다다를 때마다 내 손을 잡는다는 걸 알 수있었어요. 그의 몸에서 배어나온 조용한 전율이, 빨래를 쥐어짜는 순간 쏟아지는 물처럼 손을 적시는 걸 느꼈어요. - P161
깊은 숨을 내쉴 때마다 통증이 물러난다. 들이마시면 다시 전진해와 안구 안쪽을 도려낸다. 깜박 잠들었다 통증 속에 깰 때마다 뼈들의 희끗한 형상이 파고든다. 인선의 마지막 영화가 끝나기직전, 유골 수백 구가 묻힌 구덩이가 맥락도 설명도 없이 일 분 가까이 클로즈업되었던 장면이다. 무릎을 구부려 올린 사람의 유골, 삭은 천조각이 허리에 걸쳐진 유골, 작은 발뼈에 고무신이 신겨진유골들이 밭고랑 같은 구덩이 속에 포개져 있었다. - P167
누군가 두드리는 것같이 현관문이 덜컹거린다. 뒤안으로 난 창도 흔들린다. 유리창에 비친 실내의 가구들 위로 눈발이 어지럽게 날린다. 통나무들을 고정한 밧줄들 사이로 방수포가 기구처럼부푼다. 식탁 등이 진저리치다 꺼진다. 먹물 같은 어둠이 실내와 창밖의 풍경을 동시에 지운다. 두 팔을 뻗어 허공을 더듬으며 나는 마루를 가로지른다. 짐작보다 벽이 멀리 있다. 마루의 천장등 스위치를 찾아 올린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 P168
의식이 꺼지는 순간마다 예리한 꿈이 파고든다.
살얼음에 싸인 새를 두 손에 받쳐들고 나는 세면대로 간다. 수도꼭지에서 흐르는더운 물줄기가 삽시간에 그 얼굴을 녹인다. 눈이 떠져 반짝이질기다린다. 부리가 열리길 기다린다. 숨을 다시 쉴 거지, 아마, 심장이 다시 뛸 거지. 그렇지, 이 물을 마실 거지.
하나의 꿈이 사그라들기 무섭게 다른 꿈이 송곳처럼 찌르며 들어온다.
거대한 얼음의 구체가 된 지구가 굉음을 내며 자전한다. 끓어 넘친 용암에 덮인 대륙들이 그대로 얼어붙은 거다. 영원히 내려앉을 수 없게 된 지면 위로 수만 마리 새들이 날고 있다. 활공하며 잠든다. 퍼뜩 깨어날 때마다 날개를 퍼덕인다. 번득이는스케이트 날들처럼 허공을 그으며 미끄러진다. - P170
부서질 듯 문과 창문들이 덜컹거린다. 바람이 아닌지 모른다. 정말 누가 온 건지도 모른다. 집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려고 찌르고 불태우려고, 과녁 옷을 입혀 나무에 묶으려고, 톱날 같은 소매를 휘두르는 저 검은 나무에. - P171
죽으러 왔구나, 열에 들떠 나는 생각한다.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
베어지고 구멍 뚫리려고, 목을 졸리고 불에 타려고 왔다. 불꽃을 뿜으며 무너져 앉을 이 집으로, 조각난 거인의 몸처럼 겹겹이 포개져 누운 나무들 곁으로.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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