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하지 않겠다던 약속과 달리 수천 명이 체포됐는데, 천운으로 풀려난 친척이 당숙네로 찾아왔다.

주정공장 뒤에 있는 십여동 고구마 창고에 사람들이 갇혀 있다고. 

외삼촌과 같은 동에 두달 동안 있었다고 말해주려고.

그날 밤 엄마와 이모는 기뻐서 잠을 못 이뤘다. 어쨌든 오빠가 죽지 않은 걸 알게 됐으니까. - P263

1948년 정부가 세워지며 좌익으로 분류돼 교육 대상이 된 사람들이 가입된 그 조직에 대해 나는 알고 있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정치적인 강연에 청중으로 참석한 것도 가입 사유가 되었다.

정부에서 내려온 할당 인원을 채우느라 이장과 통장이 임의로 적어 올린 사람들, 쌀과 비료를 준다는 말에 자발적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들도 다수였다.

가족 단위로도 가입되어 여자들과 아이들과 노인들이 포함되었고, 1950년 여름 전쟁이 터지자 명단대로 예비검속되어 총살됐다.

전국에 암매장된 숫자를 이십만에서 삼십만 명까지 추정한다고 했다. - P273

그해 여름 대구에서 검속된 보도연맹 가입자들이 대구형무소에 수용됐어.
...

날마다 수백 명씩 트럭에 실려 들어오는 사람들을 더 수용할 공간이 없게 되니까 재소자들부터 골라내 총살했어. 

그때 죽은 좌익수 천오백여 명에 제주 사람 백사십여 명이 포함돼 있었어. - P273

경산에 있는 코발트 광산이야. 1942년에 폐광돼서 당시엔 비어있었어.

약 삼천오백 명이 이곳에서 총살됐어.

대구형무소 재소자. 대구보도연맹 가입자, 경산경찰서 인근 창고에 수용됐던 경북 지역 가입자까지. - P274

여러 날에 걸쳐 군용 트럭이 광산으로 들어갔어. 새벽부터 밤까지 총소리가 들렸다는 주민들의 증언이 있어.

갱도가 시체로 가득찬 다음엔 근처 골짜기로 장소를 옮겨서 총살하고 매장했어.

강정훈‘이라는 이름 옆으로 그어진 연필 선에 집게손가락을으며 인선이 말한다.

여기 찍힌 스탬프 날짜가 7월 9일이니까. 외삼촌은 골짜기기아니라 광산에서 총살됐을 거야. 

28일 스탬프가 찍힌 사람들은 글짜기에서 죽었을 확률이 높고, 

27일에 실려간 사람들의 유해는 두곳 중 어느 쪽에 있을지 알 수 없어. - P274

삼 년 동안 사백 구를 수습하고 2009년에 중단했으니까, 지금도 삼천 구 이상이 갱도에 남아 있어.
...
그 삼 년은, 여기뿐 아니라 전국의 학살 터에서 유해가 발굴된기간이기도 해.
...

...활주로 아래 뼈들의 사진을 내가 본 것도 그때야. - P285

결국 엄마는 실패했어.
먼 곳에서 들리는 듯 인선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뼈를 찾지 못했어. 단 한 조각도

얼마나 더 깊이 내려가는 걸까, 나는 생각한다. 이 정적이 내 꿈의 바다 아랜가.

무릎까지 차올랐던 그 바다 아래.
쓸려간 벌판의 무덤들 아래. - P286

바깥이 아니라 가슴 한쪽에서 시작된 것 같은 한기다.

몸이 떨리고, 내 손과 함께 흔들린 불꽃의 음영에 방 안의 모든 것이 술렁인 순간 나는 안다.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것인지 물었을 때 인선이 즉시 부인한 이유를.

피에 젖은 옷과 살이 함께 썩어가는 냄새, 수십 년 동안 삭은 뼈들의 인광이 지워질거다.

한계를 초과하는 폭력이 제거될 거다.

사 년 전 내가 썼던 책에서 누락되었던, 대로세 선 비무장 시민들에게 군인들이 쏘았던 화염방사기처럼. 
수포들이 끓어오른 얼굴과 몸에 흰 페인트가 끼얹어진 채 응급실로 실려온 사람들처럼.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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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더 있는 것 같을 때가 있어.

작은 돌기들 같은 그 촛농 방울들로부터 눈을 들며 인선이 말했다.

뭔가가 더 남아 있어, 아미가 이렇게 있다 가고 나도.

그녀의 물음이 뒤따라 정적을 건너왔다.

너도 그럴 때가 있어? - P208

...나는 대답 대신 물었다.

언제부터 그랬어?

...

뼈들을 본 뒤부터야.
...

...만주에서 돌아오던 비행기에서.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아미가 죽은 다음이거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일 거라고 짐작했다. 만주 촬영이라면 벌써 십 년 전, 인선이 후암동에 살던 때다.

그가을에 유골들이 발굴됐어.

어디에서?

나는 물었다.

제주공항, 하고 대답하며 인선이 목소리를 낮췄다.

활주로 아래에서. - P209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다음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건 그렇게 해가 바뀌었을 때였어. 

...

그가 만약 십대였다면 출생연도가 엄마와 얼추 비슷할 것 같았어.
두 사람의 그후에 대해 다루면 되겠다는 계획이 섰어.

 한 사람은 날마다 수십 차례 비행기들이 이착륙하는 활주로 아래서 흔들리며, 다른 한 사람은 이 외딴집에서 솜요 아래 실톱을 깔고 보낸 육십 년에 대해서. - P213

이 집에 나도 가봤어.

재작년에. 아들 부부만 살고 있었어.


이 인터뷰를 했던 해 겨울에 이분은 돌아가셨어.


한 가지를 이분은 오해했어.


아버지 손이 물그릇을 받을수없을 만큼 떨렸던 건 그  순간의감정 때문이 아니야.

협심증 약을 드셨어. 결국 심근경색이 왔어.

손이 떨리던 것도 고문 후유증이었어. - P235

돌이 됐다고 했지. 죽었다는 건 아니잖아요?

그태 안 죽었는지도 모르잖아요. 저건 그러니까......돌로 된 허물 같은 거죠.

아, 말하고 보니까 정말 그런 것 같은데.

허물을 벗어놓고, 여자는 간 거안!

어디로?

그건 뭐 그 사람 맘이지. 산을 넘어가서 새 삶을 살았거나, 거꾸로 물속으로 뛰어들었거나......

물속으로?

응, 잠수하는 거지.

왜?

건지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 거 아니야. 그래서 돌아본 거 아니야?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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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뭐야?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인사만 하지 않는 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 거야?

완성되지 않는 거야, 작별이?

미루는 거야, 작별을? 기한 없이?

- P193

시고 심심한 산열매를 또 끓이려는 걸까.

연둣빛이 도는 맑은 차에서 풀냄새가 났다.

191, 193

잔에서 입술을 땐 인선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생각했다. 그녀의 뱃속에도 이 차가 퍼지고 있을까. 인선이 혼으로 찾아왔다면나는 살아 있고, 인선이 살아 있다면 내가 혼으로 찾아온 것일 텐데, 이 뜨거움이 동시에 우리 몸속에 번질 수 있나. - P194

왜 나한테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한 걸까? 아프다 해도 나는 천적이 아닌데.

우린 대화를 나눴어, 너도 봤지.

사실은 어떤 말도 나눠진 적 없었던 걸까? 새는 새였고, 나는 인간이었을 뿐일까?

하지만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야.

정말 헤어진 건 아니야, 아직은.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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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자신의 책에서 2루타의 순간을 ‘에피퍼니Epiphany‘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에피퍼니란 어떤 일의 본질이나 의미를 갑작스럽게 알게 되는 순간을 말한다. - P81

학습이나 시행착오를 통해 얻는 깨달음이 아니라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 감탄사 ‘아!‘가 터져 나오는 통찰의 순간을 말한다. 일생에 한두 번 맞이할까 말까 한 귀중한 통찰이라는의미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에 가깝다. - P82

아니, 오히려 에피퍼니의 공간은 우리의 마음을 뺏을 정도로 너무 흥미로우면 안 된다. 공간이 지나치게 엄숙해서 우리의 감정을 압도해도 곤란하다.

공간에 압도되면 내면에서 잠깐 울리고 사라지는 운명의 ‘아!‘를 놓칠 수 있때문이다.

일상 공간의 평범함에서는 약간 벗어나 있는, 그러나너무 특별하지 않은 공간. 그 공간에 배경처럼 흘러가는 잔잔한 사건, 이런 장소에서 우리는 일생일대의 숙제가 한번에 풀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하루키식 표현법을 빌리자면, 에피퍼니라는 수줍은 고양이는 1군보다는 2군, 메이저보다는마이너 공간에서 조용히 숨죽이며 우리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P82

다빈치의 관찰 일기는 성인이 된 우리에게 일기 쓰기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제안한다. "오늘은"으로 시작해서 하루 동안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는 일기를 쓰는 것이아니라. 오늘 나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대상에 대한 관찰을 기록하는 일기를 쓰라고 말이다. - P104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집 주방에 거대한 테이블을 두고 식구들과 읽은 책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규칙을 만들었다. 진정한 아이디어는 (본인이 개발한) 아이폰을 통해서가 아니라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대화에서 생긴다는 비밀을 그는 알고 있었다. - P106

거액을 들여 사들인 코덱스 레스터를무료로 공개한 빌 게이츠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위대한 발견은 디지털카메라의 성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용히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자기 눈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 대상을 관찰한 끝에 우리는 자신만의 통찰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다. - P107

핀란드 정부가 외국 사람이 행복의 이유를 물어오면 이렇게 대답하라고 했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당신은 왜 행복한가? 그 질문에 대한 공통된 답은 다음과 같았다.

"내일 갑자기 불행한 일이 닥치더라도 사회가 나를보호해줄 거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죠." - P118

물을 붓는 순간 갑자기 온도가 올라가므로 그 전에반드시 함께 사우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하는절차가 있다. 

그때 하는 질문이 "뢰일리?"다. 

그럼 함께앉아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뢰일리는 사우나에서 돌에 물을 뿌렸을 때 솟아오르는 증기를 가리키는 핀란드어다.

하지만 단어의 원래 뜻은 멋지게도 ‘생명의 숨결‘

그러니 사우나에서 "뢰일리?"라고 묻는 것은
‘네 삶에 숨결을 좀 불어넣어줄까?‘ 이런 의미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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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란 건 무서운 거야.
소리를 낮춰 나는 말한다.
아니, 수치스러운 거야.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을 폭로하니까.

이상한 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을 이야기를 고백하고 있다. - P237

밤마다 악몽이 내 생명을 도굴해간 걸 말이야. 살아 있는 누구도 더이상 곁에 남지 않은 걸 말이야.

아닌데, 
하고 인선이 내 말을 끊고 들어온다.

아무도 남지 않은 게 아니야. 너한테 지금.

그녀의 어조가 단호해서 마치 화가 난 것 같았는데, 물기 어린눈이 돌연히 번쩍이며 내 눈을 꿰뚫는다.

......내가 있잖아.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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