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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즈만이 희망이다 - 디스토피아 시대, 우리에게 던지는 어떤 위로
신영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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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다. 상황이 지금처럼 악화되기 전인 1월에 해외여행을 다녀왔는데, 이제는 그것이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느껴진다. 며칠이면 나아지겠지, 몇 주 후에는 좋아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버텨왔지만, 이제는 사태가 호전되리라는 희망을 쉽사리 품지 못하겠다. 앞으로는 상황이 나아질 날을 마냥 기다리기보다는 이미 닥쳐온 뉴노멀에 대비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코로나19의 여파는 전 세계 구석구석까지 미치고 있고,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일하던 곳이 문을 닫는 바람에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어찌어찌 생활을 연명하고는 있지만, 우리 사회에는 그조차 버거운 사람들도 많다. 저자 신영전은 그들을 우리 사회의 '퓨즈'라고 일컫는다.

『퓨즈만이 희망이다』는 저자가 지난 15년 동안 쓴 짧은 에세이를 묶어낸 것으로, 우리나라의 의료 체계의 문제점을 요목조목 짚은 사회비평에세이다. 총 여덟 개의 장으로 구성된 책은 가장 최근 대한민국의 의료 이슈를 면밀하게 다루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정권이 바뀌고, 정책이 변하는 동안에도 저자는 '복지는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일관된 주장을 펼친다. 그 안에서 의료민영화, 규제샌드박스법 등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에게 가장 먼저 피해를 준다는 이유 등으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저자는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취약계층을 퓨즈에 빗대었는가? 그것은 약자가 곧 현대의 모순을 가장 농축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퓨즈'는 과전류가 흐르면 제일 먼저 끊어져 전기 장치를 보호하고 합선으로 인한 화재를 방지하는 장치다.그런 의미에서 퓨즈는 탄광의 카나리아와도 같다. 그러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소외 계층은 잘못된 의료 정책 때문에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변화는 미미하고, 한국의 공공의료는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퇴보하는 것만 같다. 규제샌드박스법이나 데이터3법, 규제프리존 등 의료계의 악법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중 가장 문제적인 것이 의료민영화와 관련된 사안이다. 자본은 국민의 공포와 불안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질병을 명명하고, 의료 상품과 서비스를 판매해 이득을 취한다. 그 안에서 한 사람의 건강, 더 나아가 삶과 생명은 상품 가치를 지닌 거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저자는 이와 같은 흐름이 단순히 자본의 책임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정부와 기업, 시민을 포함한 우리 사회 전체의 책임이며 모두가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사회는 변하지 않고 상황은 악화되기만 할 뿐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문제를 인지하고 끊임없이 저항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끝이 없어 보이는 투쟁의 길,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은 희망일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패배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만파식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 도달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이 중요하며, 만파식적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의 정반합처럼 정과 반이 만나 더 나은 합으로 가는 것이다. 우리는 '경계 짓기'가 아닌 '경계 허물기'를 통해 더 나은 공공의료 환경을 이룩하고 이웃과 더불어 살 수 있을 것이다.

* 해당 글은 한겨레출판 서평단에 선정되어 단행본을 제공받은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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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
장폴 뒤부아 지음, 이세진 옮김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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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살면서 종종 삶이 갈피를 잃은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나쁜 일은 마치 등 뒤에서 때를 노리고 있던 것처럼 한꺼번에 닥쳐오곤 한다. 왜 자꾸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내 인생은 도대체 왜 이렇게 흘러가는가? 거대한 추가 내 발목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만 같다. 이런 쥐구멍 같은 내 삶에도 언젠가 볕 들 날이 올까?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는 지난 2019년,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프랑스 콩쿠르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작가 장폴 뒤부아는 주인공 폴 한센의 수감생활과 그의 지난 인생에 대한 회고를 통해 상실과 후회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센은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지난 수십 년 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아파트 '렉셀시오르'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교도소에 수감되며, 자신의 지난날을 회상하며 교도소 생활을 버틴다. 덴마크의 목회자 출신인 아버지와 프랑스에서 작은 독립영화관을 운영하던 어머니, 가족의 해체와 아버지의 몰락, '렉셀시오르'에서의 생활과 삶의 동반자인 위노나, 그리고 반려견 누크까지. 이 소설은 폴 한센이라는 인물이 지나온 삶의 면면과 그의 현재를 교차로 보여주며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이 책을 읽는 데에는 조금의 참을성이 필요하다. 주인공이 어째서 수감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설명은 책의 마지막을 읽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알 수 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수감되었는지 모를 주인공에 대한 흥미가 생기기도 이전에,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대뜸 꺼내놓는다. 독자로서는 별로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를 강제로 듣게 된 셈이다. 게다가 몹시도 평범한 그의 개인적인 과거에 익숙해질 때쯤이 되면 소설은 다시 현재의 수감생활로 돌아온다. 심지어 주인공과 같은 방을 사용하는 수감자 패트릭 호턴 또한 그다지 호감 가는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약간의 참을성과 함께 이 책을 끈질기게 읽는다면, 소설의 말미에는 약 300페이지에 걸쳐 켜켜이 쌓인 삶의 층이 하나의 점으로 모이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 소박한 멋이 있는, 홈이 파이면 파이는 대로, 금이 가면 금이 가는 대로, 상처와 상실과 후회의 연속일지라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어떤 한 사람의 단단한 인생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조각나 있던 삶의 퍼즐이 맞물리는 순간, 독자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나는 결말을 위해 앞의 페이지들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감히 말한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을 읽은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기를 권한다. 소설의 문장들이 완전히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책은 적어도 두 번은 읽어야 한다.


주인공 폴 한센은 어떤 역경이 있어도 인생이라는 길을 묵묵히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책의 캐치프레이즈처럼 '실패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반짝임은 어떤 강렬한 빛이 아닌, 저녁놀이 잔잔한 물결에 반사되어 조각나는 빛의 산란, 그런 반짝임이다. 삶의 곳곳에 산재해 있는 작고 사소한 순간들, 실패라는 모래 속 반짝이는 한 톨의 유리 조각 같은 것이다. 아직 출간되지 않은 작품이기 때문에 스포일러는 지양해야 하지만, 나는 이 책의 마지막 한 문단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고 싶다. 내용상의 스포일러를 포함하지는 않으니 안심하시길.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이 마지막 한 문단이 갖는 울림을 느끼게 되기를 바란다.

잠시 후 이 기나긴 길의 끝에서, 나는 친척들에게 가서 인사를 하리라. 현관문을 두들기면 누군가가 나에게 문을 열어주리라. 그러면 나는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말하리라. "저는 요하네스 한센의 아들입니다"(Jeg er Johanes Hansens son). - (가제본 기준) p.294


* 해당 글은 창비 서평단에 선정되어 단행본을 제공받은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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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
김비.박조건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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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

김비, 박조건형 글

발행처 : 한겨레출판

발행일 : 2020년 7월 22일

213쪽

13,500원


-


나는 독립적인 사람이다. 무엇이든 혼자 하는 것을 좋아하고, 혼자일 때의 자유를 좋아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온전히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은 내게 커다란 기쁨이다. 그러나 아주 가끔, 누군가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할 때가 있다. 피로 이어진 가족이 아닌,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함께하며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모습을. 내가 지치고 힘들 때 선뜻 자신의 어깨를 내게 내어줄 사람이 옆에 있는 삶을. 혼자가 아닌 나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같으면서도 다른, 동시에 다르면서도 같은 두 사람이 서로의 동반자가 되기로 결심하기까지는 얼만큼의 마음이 필요할까?

『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의 공동저자인 김비와 박조건형은 우리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성'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MTF 트랜스젠더 소설가와 오랜 기간 우울증을 앓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얼핏 보면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둘은 '작가-팬'이라는 관계에서 '인생의 동반자'로 발전해 삶을 함께 꾸려나가고 있다. 이 책에는 두 사람의 일상과 더불어 그들이 함께하며 느낀 점을 적은 글이 담겨 있다.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두 사람이 각각 적어 내려간 이야기는 사뭇 다른 면이 있다. 그러나 공통점은 바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넘실댄다는 것. 독자는 사소하고 내밀한 발자국을 따라가며 그들의 다정한 일상으로 초대된다.

물론 두 사람의 일상이 언제나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함께 참여한 행사에서 트랜스젠더에 관한 혐오 발언을 접한 뒤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기도 하고, 박조건형의 '우기' 때문에 오랜 기간 준비하던 책이 엎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 책은 '함께 함'의 기쁨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어려움 또한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들이 그것을 극복하는 방식이다. 제목의 '양산'은 김비와 박조건형이 삶을 꾸려나가는 터전이면서 동시에 그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그늘'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볕이 반짝 드는 양지일 수 없다면, 우리는 어느 틈엔가 삶의 한구석에 드리운 그늘 안에서도 서로를 위하며 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리고 별것도 아닌데 슬플 때는 둘이서 양산을 여행한다는 김비와 박조건형은 서로의 그늘까지도 보듬어줄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다.


가수 동방신기가 일본에서 발매한 곡 중에는 '明日は 來るから(내일은 오니까)'라는 제목의 곡이 있는데, 아래는 내가 이 노래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사이다.

雨降る 時には 君の 傘に成ろう

비가 내릴 때는 당신의 우산이 되고,

風吹く 時には 君の 璧に成ろう

바람이 불 때는 당신의 벽이 될게

나는 아직 서로의 비바람을 막아주는 우산과 벽이 되겠다는 마음의 크기가 가늠되지 않는다. 그 각오와 사랑의 크기는 단지 누군가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는 짐작할 수 없다. 서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이 맞닿아 하나가 되는 과정을 목도한 기분은 앞으로 오래도록 생각이 날 것 같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쉴 그늘이 되어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는 하루다.


* 해당 글은 한겨레출판 서평단에 선정되어 단행본을 제공받은 후 작성한 글입니다.


#책 #에세이 #리뷰 #서평 #서평단 #슬플땐둘이서양산을 #김비 #박조건형 #한겨레출판 #한겨레출판서평단 #사랑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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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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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글

발행처 : 어크로스

발행예정일 : 2020년 8월 26일

272쪽

16,000원


"선생님, 공부는 왜 해야 하는 거예요?"

학원에서 일하면서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이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몹시 당황스럽다. 선생으로서 학생들에게 마땅한 대답을 해주어야 할 텐데, 나조차도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명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선택의 폭을 넓혀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공부를 하는 것이 너희 자신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이지." 등의 답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가지만, 이것도 초등학교 고학년 쯤 돼야 먹히는 방법이다. 나의 대답을 납득하지 못한 아이들은 끝없이 내게 묻는다. 선생님, 공부는 왜 해야 하는 거예요? 그때마다 나도 스스로 되묻는다. 그러게. 공부가 도대체 뭐길래 이 사회가 우리에게 공부하기를 종용하는 걸까?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교육열이 센 것으로 이미 유명하다. 학생들의 주된 스트레스 원인은 학업과 성적이며, 과도한 입시 경쟁이나 조기 교육 등은 매년 심각한 사회 문제로 거론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우리에게 절대 가볍지 않게 다가온다. 그러나 저자 김영민은 우리 사회에서 매우 민감하게 다뤄지는 주제, 공부가 도대체 무엇이고 우리가 그것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마냥 무겁지 않게, 그리고 유쾌하게 담아냈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지난 2018년,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라는 칼럼으로 매우 화제가 되었다. 재치 있는 문장으로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지점을 꼬집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칼럼의 정석'이라고도 불리는 김영민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책을 관통하는 질문, "공부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독자에게 전한다. 김영민의 글을 따라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공부가 단순히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영민의 사유 방식은 기본적으로 거꾸로 타고 올라가는 방식이다. 자신이 많은 학생을 만나며 직접 겪은 일, 연구 계획서를 작성하면서 새삼스레 느꼈던 점 등 개별 사례에서 시작하지만, 종국에는 그 근원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이는 철학의 기본적인 탐구 방식이기도 하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위해 공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공부를 왜 해야 할까? 공부는 과연 무엇인가? 이에 대해 김영민은 "공부란 정신의 척추 기립근을 세우는 것"이라고 답한다.

척추 기립근은 척추를 굽혔다 펴는 것에 관여하는 근육 중 하나인데, 이는 다시 말해 우리 몸의 중심축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똑바로 서고, 걷기 위해서는 건강한 척추 기립근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중심이 단단해야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거짓 정보에 현혹되지 않고, 어려움이 닥쳐와도 헤쳐나갈 수 있는 힘, 그 힘을 기르는 것이 바로 공부다.

오스카 와일드는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몇몇은 별빛을 바라볼 줄 안다"고 말한 적이 있다. (…) 이 사회를 무의미한 진창으로부터 건져낼 청사진이 부재한 시기에, 어떤 공부도 오늘날 우리가 처한 지옥을 순식간에 천국으로 바꾸어주지는 않겠지만, 탁월함이라는 별빛을 바라볼 수 있게는 해줄 것이다. (…) 입시와 취업으로 전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탁월함을 목표로 공부를 하게 될 때, 아마 한국인은 양념 치킨보다 더 멋진 것, 이를테면 잘 양념된 삶을 이루고 향유하게 될 것이다. - (가제본 기준) p.10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끝없이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찾아 납득하는 것이다. 글의 앞머리에서 잠시 언급했던 것과 같이, 공부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학생들에게 해주면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업에 집중하고 누군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끝없이 질문을 붙잡고 늘어진다. 공부를 왜 해야 하냐는 학생들의 질문에는 순수한 궁금증만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공부를 왜 해야 해요?" 뒤에는 사실 "나는 공부 하고 싶지 않아요.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거든요."라는 문장이 숨어 있다. 한 명의 어른으로서 학생들이 더 바람직한 삶의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이 공부를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납득하는 것이다. 이 책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 정답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공부가 무엇인지를 찾는 것에 가까이 갈 수는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유효한 질문 중 하나, 이제는 그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때가 되었다. 그리고 공부하자. 공부를 멈추지 말자. 우리 정신의 척추 기립근을 위해, 우리가 올곧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1) 김영민, [사유와 성찰]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 경향신문, 2018.9.2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809211922005

2) 철학의 사고 방식에 관해서는 지난 서평에서 간단히 다루었다. 쪼개기, 들여다보기, 방향 잡기 : 허유선, 『소크라테스 씨,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요?』, https://blog.naver.com/marl2ne/222063406417


어크로스 출판사 홈페이지 : https://acrossbook.tistory.com/

『공부란 무엇인가』 구매 링크 (알라딘) : http://aladin.kr/p/1NdZd


* 해당 글은 어크로스 서평단에 선정되어 가제본을 제공받은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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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공주 해적전 소설Q
곽재식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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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공주 해적전』

작가 비공개

발행처 : 창비

발행 예정일 : 2020년 8월 3일




『신라 공주 해적전』은 창비에서 새로 기획한 경장편 시리즈인 소설Q의 일곱 번째 책이다. 출간 전까지 작가를 공개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조금만 검색해보면 작가의 이름은 금방 알 수 있다. 그리고 검색하기 이전에, 해당 작가의 SNS 계정을 이미 팔로우하고 있었다면 서평단 모집 공고에서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작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을 것.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그 작가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출간이 되면 확인해보시라.



이 책은 총 아홉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에서 발췌한 문장으로 지어진 각 장의 제목이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나는 책을 손에 집으면 목차부터 확인하는 편인데, 목차가 흥미로우니 저절로 본문이 기대됐다.

이야기는 통일 신라 시대를 배경으로, 장희와 한수생이 우연히 만나 겪는 우여곡절을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한때는 장보고 밑에서 온 바다를 누볐던 장희는 산골에서 글공부나 하고 농사나 짓던 순진한 한수생을 꾀어내, 속된 말로 ‘한탕 해먹으려고’한다. 하지만 한수생을 속이고 달아나는 길, 왠지 모르게 마음이 쓰여 장희는 결국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내가 일부러 세상 편하게 살 기회를 버리고 지금 돌아가니,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지건 다 내가 멍청하고 아둔한 탓이다.”(p.29-30)라는 장희의 대사는 이후 장희와 한수생의 앞에 펼쳐질 험난한 미래에 대한 복선으로 작용하며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책장을 넘기다 보면 (가제본을 기준으로) 200쪽이 조금 안 되는 분량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게 되는 소설이다. #한계_없는_상상력이라는 해시태그가 아주 잘 어울리는 작품. 독자가 소설에 기대하는 것 중 가장 큰 것은 재미일 텐데, 그런 측면에서 이 이야기는 그 목적에 아주 충실히 부합한다. 이야기 안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장희의 뛰어난 순발력과 화려한 말솜씨인데,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와 같은 속담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장희의 세 치 혀가 이야기 안에서 어떤 활약을 하는지 지켜보는 것이 이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재미이다. 또, 시대적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고전소설이나 사극에서 사용할 법한 문장으로 소설이 쓰여있는데, 그것이 이야기의 내용과 어우러져 마치 어딘가에서 전해 내려오는 민담을 채록한 것 같은 느낌을 주어 그 재미를 배가시킨다. 장희와 한수생이 어떤 말솜씨와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에서 탈출하는지, 제목인 『신라 공주 해적전』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다면 올 여름 독서는 이 책으로 시작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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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2020-08-02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김봉곤 사태와 관련한 창비의 행보에 적잖이 실망한 독자 중 한 명으로서, 창비에서 진행하는 서평단에 지원하는 것이 옳은가 고민했던 것도 사실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신청하기는 했지만, 서평을 작성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서평을 올리는 것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서평단에 지원하고, 공개된 온라인 공간에 서평을 게재하는 것이 피해자에게는 또다른 형태의 가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피해자에게 연대하는 사람으로서는 부적절한 행동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에 나는 부채감을 느끼고 있으며 변명의 여지 또한 없다. 좋아하는 작가의 재밌는 글이 창비와 만나 커다란 시너지를 낼 수 있었을 텐데, 최근의 사태로 불거진 불매 운동 등으로 그 빛을 발하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작가의 팬으로서는 안타까울 뿐이다. 한 명의 독자로서, 창비가 이번 사태 이후로 진심으로 반성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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