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알래스카
안나 볼츠 지음, 나현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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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모두 각자만의 아픔을 최소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아픔에 매몰되면 타인의 고통이나 어려움이 눈에 보이지 않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사람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알다시피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 마주치고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또한 나처럼 마음 한구석에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 사실을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매우 많은 것이 변화한다.

『안녕, 알래스카』는 강도 사건으로 인해 가족들과의 행복한 일상이 무너진 파커와, 파커의 반려견이었던 알래스카를 도우미견으로 맞이하게 된 뇌전증을 앓고 있는 소년 스벤이 각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함께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다. 새 학기가 시작된 첫날, 파커와 스벤은 같은 반 교실에서 처음 만난다. 파커는 짓궂은 농담을 하는 스벤이 영 못마땅하고, 스벤을 마중 나온 알래스카의 모습을 보고 그에게서 알래스카를 되찾아와야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파커의 계획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고, 스벤과 파커는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간다.


"세상이 삐딱하게만 보인다."

네덜란드와 독일의 유명 문학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 안나 볼츠의 책이 국내에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은 사춘기 청소년들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하면서도 각자의 아픔을 가진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힘을 합쳐나가는지를 다정한 시선으로 그린다. 이 책에서 특히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둘은 파커의 '전' 반려견이자 현재는 스벤의 도우미견인 '알래스카'를 매개로 거의 매일 밤 스벤의 방에서 몇 시간씩 시간을 보낸다. 스벤은 갑작스레 앓게 된 뇌전증 때문에 자신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자신이 무엇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털어놓고 파커 역시 지난 강도 사건으로 인해 자신과 가족들의 일상이 어떻게 무너졌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둘이 처음부터 바로 서로에게 마음을 연 것은 아니다.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려 하지 않던 시간과 그로 인해 쌓인 오해 때문에 사이가 완전히 틀어질 뻔한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파커와 스벤은 가장 위기의 순간에 서로를 도우며 진정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각자의 기울기로 기울어진 막대 같던 둘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하나의 사다리가 된다.


마음이 힘들면 주변을 돌아보기가 힘들어진다. 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에 대해 골몰하는 것만 해도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시고 내쉰 뒤 주변을 둘러보자. 우리는 모두 각기 다른 모양으로 구부러지고, 찌그러지고, 울퉁불퉁해져 있지만 그럼에도 함께 살아가고 있다. 지칠 때는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쉬고, 넘어진 다른 이의 손을 잡아주면서 말이다.


* 해당 글은 문학과지성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단행본을 제공받은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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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버 드림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조혜진 옮김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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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떤 순간에 가장 공포를 느끼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 다를 것이다. 공포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고, 사람마다 공포를 느끼는 순간은 모두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예고 없이 튀어나온 기괴한 형상에 공포를 느끼고, 어떤 이는 유혈이 낭자한 사고 현장의 이미지에서 공포를 느끼고, 또 다른 어떤 이는 조난 당한 숲속에서 맹수를 만난 상황을 상상할 때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사만타 슈웨블린의 『피버 드림』은 여러 가지 종류의 공포 중에서도,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을 때 우리를 엄습하는 '미확인에 대한 불안'이 자아내는 공포를 훌륭하게 그려내고 있다.

─ 벌레 때문이에요.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돼요. 그리고 기다리면서, 벌레가 생기는 정확한 순간을 찾아내야 해요.

─ 왜 그래야 하는데?

─ 중요하거든요, 우리 모두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가제본 기준) p.4

소설은 아만다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다비드의 질문을 받으면서 시작한다. 다비드는 아만다에게 '벌레가 생기는 정확한 순간'을 찾아야 한다며 집 앞마당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묻는다. 아만다는 다비드가 왜 그 일에 대해 묻는지 알지 못하지만, 자신의 집 앞마당에서 자신의 딸인 니나와 다비드의 엄마인 카를라와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만다의 이야기 속에서, 카를라는 다시 자신의 아들 다비드에 관한 기묘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아만다는 불안함 속에서 자신과 니나 사이의 '구조 거리'가 시시각각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소설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끝 모르는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소설은 오로지 '아만다'와 '다비드' 두 사람의 대화로만 진행되는데, 독자는 오로지 그들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누구인지, 또 지금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어떤 상황인지를 유추해내야만 한다. 하지만 다비드의 질문은 불친절하고, 아만다는 시종일관 불안에 떨고 있으며, 아만다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카를라 역시 아들 다비드에 관한 기묘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대화를 통해 주어지는 정보는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에 독자는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읽을 때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하다.

『피버 드림』은 이야기의 새로움이 발생하는 지점을 정확히 포착한 소설이다. 소멸되지 않고 기화하는 존재의 비극적 양상과 인과를 파헤치는 대신 마법같이 뒤섞인 목소리를 들려준다. 소설을 이루는 외적 정보를 비밀에 부치면서도 단숨에 이야기로 몰입하게 만드는 인력이 근사하다. 사만타 슈웨블린은 우리에게 아직 낯선 작가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 되었다.

편혜영 (소설가, 2017 셜리잭슨상 장편 부문 수상자)

그러나 이 소설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사건의 인과 관계를 명확히 하고 단서를 찾아 이 모든 일의 전말을 밝혀내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마치 안개에 가려진 듯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고 흐릿한 상황에서 오는 '불명확성'에 대한 불안함을 통해 긴장감을 유발하고 이야기를 진행한다. 아만다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다비드는 정말로 아만다의 옆에 있는가? 아만다의 상상이 만들어낸 환영이나 환청은 아닌가? 아만다의 딸 니나는 어디 있고, 카를라는 정말로 온전한 정신인가? 녹색 집의 여인은 다비드와 니나에게 무엇을 한 것인가? 이 소설에서 확실한 것은 그 무엇도 없다. 독자는 그저 그 불안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사만타 슈웨블린은 불친절하지만 그렇게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그녀만의 흡인력으로 독자를 『피버 드림』이라는 '불안의 늪'에 발을 묶어둔다.


* 해당 글은 창비 서평단에 선정되어 가제본을 제공받은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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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일본의 미래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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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나라 안에만 머무르지 않게 됐다. 비단 물리적인 이동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이동 및 교류도 전에 없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진격의 거인>, <귀멸의 칼날>, <주술회전> 등의 일본 만화들이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해당 작품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 바로 '우익 논란'이다.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를 당했던 뼈아픈 역사가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당연히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지난 2019년 촉발된 '일본 불매 운동'은 2021년이 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일본의 유명 SPA 브랜드는 명동에 있던 대형 매장을 철수했고, 일본 맥주의 판매율은 95%가량 떨어졌으며, 일본으로 향하는 여행객의 수는 불매 운동 이전의 절반 정도에 밖에 미치지 못한다. 불매운동의 계기가 된 사건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였지만,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불매 운동 이전부터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리고 그 질긴 역사의 고리에 대해서라면 한국인은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억지로 수탈당해야만 했던 시간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와 정당한 보상을 원한다. 그만큼 양국 사이에 자리 잡은 갈등의 씨앗은 오랜 옛날에까지 뿌리를 뻗고 있으며, 단순한 '인사치레'만으로는 그 골을 넘어갈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은 언제까지고 서로에게 적대적인 관계로 남아야 하는가? 과거의 역사를 바로잡고, 적대를 타협으로, 갈등을 협력으로 바꿔 평화의 길로 함께 나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강상중은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숙명과도 같은 오랜 질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총 여섯 개의 챕터로 구성된 『한반도와 일본의 미래』는 한반도가 분단된 배경에서부터 시작해서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북한과 중국, 나아가 미국 등 동북아시아의 역사와 정치에 깊게 연관된 주변국들 사이의 관계를 낱낱이 분석하는데, 이는 한-일 문제가 단순히 양국 간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다. 제목에는 '한반도'와 '일본'이라고 적어두었지만, 사실 이 책은 동북아시아의 현재 정세와 그렇게 된 배경, 그리고 우리가 다 함께 평화 공동체로서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 정리한 책에 더 가깝다.

1장 '전환의 위기'에서는 이 책을 시작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배경에 대해 개략적으로 다룬 뒤, 본격적인 내용은 그 다음 장에서부터 시작된다. 2장 '북한은 왜 붕괴하지 않았을까?'에서는 남북전쟁 이후, 우리나라와 함께 한반도를 양분하고 있는, 한반도의 또 다른 주인인 북한이 국제 정치 무대에서 어떻게 현재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다룬다. 3장 '남북 화합과 '역코스'의 30년'과 4장 '전후 최악의 한일 관계'에서는 호전되어 가고 있는 것만 같았던 한-북-일의 관계가 어떻게 다시 악화되었는지, 5장 '코리안 엔드 게임'에서는 한반도와 일본, 그리고 미국을 둘러싼 가장 최근의 정세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지막 6장 '한반도와 일본의 미래'에 이르러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보화 시대가 도래하며 국경의 의미가 무색해진 시대에, 한국과 북한 그리고 일본이 어떻게 하면 화합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지 저자의 생각을 적으며 글을 마무리한다. 책의 뒷부분에는 본문에서 언급된 각종 조약이나 합의, 또는 선언문의 전문이 수록되어 있어 그 내용을 확인하기 쉽다.


저자는 재일교포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살다 1972년 한국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자기 자신을 새로이 인식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만큼 한국과 일본 양국의 상황을 정치학적으로, 또 민족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이가 또 있을까? 한반도와 일본을 둘러싼 지난 70여 년간의 복잡한 정세를 세심하게 분석하는 것은 분명 엄청난 노력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동북아의 안녕을 위하는 애정어린 마음이 필요한 작업이다.


물론 아쉬운 지점 또한 분명 존재한다. 본문 안에는 일본 내의 '혐한'과 한국인들이 갖는 '반일 감정'을 동일선상에 놓는 듯한 표현이 중간중간 보이는데, 저자가 이를 의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러한 프레이밍에 동의할 수 없다. 그 둘은 각각이 발생하게 된 계기에서부터 분명한 차이를 보이며, 그 표현 양상 또한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단순히 '서로 미워하는 것은 둘 다 똑같아'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는 단단히 꼬인 실타래처럼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뉴스 기사 몇 개를 찾아본다고, 책을 몇 권 읽는다고 해서 그 역학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더 이상 반일과 혐한에 갇혀 있을 여유가 없다." 띠지에 적힌 문구처럼, 잘못된 역사와 인식은 바로잡되 이제는 그를 발판으로 함께 나아갈 미래를 그릴 때가 왔다는 것이다.


* 해당 글은 사계절 서평단에 선정되어 단행본을 제공받은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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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방지 대화 사전
왕고래 지음 / 웨일북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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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질러진 물'이라는 관용구는 남녀노소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용하는, 우리에게 익숙한 관용구 중 하나이다. 물이 엎질러지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듯, 이미 벌어져서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일을 뜻하는 이 말은 사실 "그러니 물이 엎질러지기 이전에 충분히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숨기고 있다. 한번 물이 엎질러지고 나면 아무리 후회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애초에 물이 엎질러지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만약 물이 엎질러졌다면 흐르는 물을 잘 닦고 빈 잔에 새 물을 채우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도 없이 많은 후회를 경험한다. '그때 이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 '무서워하지 말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걸', '이런 선택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이 책은 그런 후회 때문에 밤잠을 설쳐 본 경험이 있는 모든 이들, 그중에서도 특히 말言로 인한 후회나 상처를 가지고 있는 이들을 위한 책이다. 물이 엎질러지기 전에 미리 잔을 멀리 치워두고, 이미 물이 엎질러졌다면 그 이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적어 놓은 실용서라니. 띠지에 적혀 있는 것처럼, 지난날들의 언행으로 인해 밤마다 이불을 차지 않으려면 이 책을 보시라. 이 책은 바로 그런 후회, 그중에서도 '말'과 관련된 후회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미운 말' 사전이니까.

실수인 줄도 모르고 넘어가는 사소한 말의 습관부터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악의를 품고 던지는 말까지, 『후회 방지 대화 사전』은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마주치는 '미운 말'을 총망라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미운 말'이란 말하는 이의 의도와 상관없이(때로는 상관 있기도 하지만) 듣는 이에게 독이 되어 결국 상처를 입히는 말을 뜻한다. 위로랍시고 건넨 말에 도리어 친구가 토라져서 당황하거나, 그 자리에서는 칭찬인 줄 알았지만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미묘하게 찝찝했던 경험이 있지 않은가? 이는 모두 말하는 이의 의도와 듣는 이가 받아들이는 말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사건이다. 저자는 짧은 문장 속에 담겨 있는 속뜻을 낱낱이 파헤침으로써 그 표현의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짚어주고, 예시를 통해 사례에 대한 이해를 도우며, 이런 말을 하거나 들었을 때에 대한 바람직한 대처 방안과 대체어까지 제안한다. 물을 엎지르기 전에 잔을 멀리 밀어두는 방법과 물이 흘렀을 때 말끔하게 닦아내는 방법을 모두 알차게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말言에 대한 실용서라는 측면에서 지난 2016년, 봄알람에서 출간한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가 생각나기도 했다.

이 책은 가독성 좋은 문장과 현실감 있는 예시들로 구성되어 있어 제법 두꺼운 두께에도 불구하고 술술 읽힌다. 게다가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응용법까지 알려준다는 점에서 한국어 사용자를 위한 여러모로 훌륭한 대화 실용서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조차도 한국어 특유의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종종 어려움을 느끼곤 하는데, 하물며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들에게는 어떻겠는가? 소위 말하는 '토종 한국인'뿐만 아니라 한국어를 사용하는 다른 이들에게도 이 책이 피가 되고 살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 '미운 말 사전'은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으면서도 나를 방어하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든든한 방패와도 같다. 이 책에서 얻은 요령을 갑옷처럼 몸에 두르면 그 어떤 미운 말도 두렵지 않다.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전해지는 말들 때문에 내가 상처 받을까봐, 혹은 남을 상처줄까봐 걱정되는 이들은 『후회 방지 대화 사전』을 책장에 꼭 두 권 씩 구비해두기를. 그중 한 권은 틈 날 때마다 펼쳐보느라 금방 닳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해당 글은 웨일북 서평단에 선정되어 단행본을 제공받은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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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람들
박솔뫼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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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이란 어떤 것일까?"

작가와 독자를 구분하지 않고, 읽기와 쓰기를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골몰했을 질문이다. 물론 '좋은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을 구분하는 행위 자체에 대해 충분히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애초에 좋다는 것은 주관적인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좋은 글'이라는 어떤 절대적인 경지에 도달한 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느냐는 물음과 별개로, 우리는 모두 '좋은 글'에 관한 각자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가독성이 좋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이 좋은 글이라고 볼 것이고, 누군가는 촘촘하게 짜인 서사가 손에 땀을 쥐는 서스펜스를 만들어내야만 좋은 글이라고 여길 것이다. 어떤 독서 모임의 회원이 열 명이라면, 그 모임에는 '좋은 글'에 관한 각기 다른 판단 기준이 열 개 존재한다.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당연하게도 '좋은 글'에 대한 나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읽는 이로 하여금 '나도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글이야말로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창작은 사랑의 가장 궁극적인 형태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단순히 재밌는 글은 많지만, 글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과 별개로 '나도 이런 글을 써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글은 좀처럼 만나기 쉽지가 않다. 그리고 박솔뫼의 이번 소설집은 읽고 나면 짧은 일기라도 한 줄 적어보고 싶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2010년대, 가장 주목 받는 젊은 작가 중 한 사람인 박솔뫼의 신작 『우리의 사람들』은 총 여덟 편의 단편 소설이 묶인 작가의 네 번째 소설집으로, 박솔뫼 특유의 기이한 호흡과 문장이 무척이나 돋보인다. 지난 2016년부터 2020년 사이에 발표한 단편들은 '지나가기 혹은 영원히 남아 있기'로써 독자가 가지고 있는 '익숙함'이라는 가치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 안에서, 시간의 연속성은 더는 유의미하지 않다. 과거, 현재, 미래는 계속해서 중첩되었다 해체되기를 반복하고 '내가 겪지 않은 나의 삶'이 마치 진짜로 벌어진 일처럼 등장한다. 표제작인 「우리의 사람들」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뚜렷하게 두드러진다(그래서 표제작이 된 것일까?). 화자는 자신의 삶과 친구들의 선택에 대한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그에 맞는 '말(言)'을 골라 이야기를 펼친다. 「이미 죽은 열두 명의 여자들과」에서 또한 조한과 화자의 '말', 그리고 조한의 일기(글은 다른 형태의 말이다.)를 통해 이미 죽은 열두 명의 여자들과 김산희의 이야기가 현실로 소환된다. 말로써 여러 겹의 시간은 본래는 불가능해야 하는 중첩이 가능해진 것이다.

『우리의 사람들』에서 말은 어떤 종류의 불안을 상징하는데, 이때의 불안은 특정 인물이 느끼는 심리적인 불안이 아닌, 비선형적인 시간의 소환으로서의 불안이다. 「건널목의 말」은 겨울잠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작성된 하나의 커다란 일기와 같다. 사람들에 의해 말해지는 '말'을 땅 속에 묻는 상상을 통해 화자는 "원하는 모든 것과 원한다고 쓴 모든 것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란다. 「농구하는 사람」은 박솔뫼 식으로 다시 쓴 최인훈의 「광장」인데, 이 단편에서도 '말'은 역시 중요한 역할, 즉 불안을 야기하는 요소로 등장한다. 「광장」 속 이명준과 화자로 표상되는 비현실과 현실은 말로써 하나로 연결된다.

또다른 수록작인 「매일 산책 연습」, 「영화를 보다가 극장을 사버림」에서 역시 현재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말로써 재현된다. 구체적인 장소, 사건, 인명 등은 현실과 픽션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그리고 그중 일부는 실제로 존재했던 것들이다). 박솔뫼의 질문이 시작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과거-현재-미래의 중첩, 현실-픽션의 모호한 경계 등은 그것들을 굳이 구분해야 하는가? 우리는 정말 구분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박솔뫼 작가의 글은, 솔직히 말해서 가독성이 좋다고 말하기 힘들다. 문장의 길이는 제각각이고, 어떤 문장은 비문처럼 보이기도(실제로 비문이기도) 한다. 그러나 문학 작품에서 문장의 엄밀함이 곧 글의 완성도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박솔뫼 작가의 글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처음 읽을 때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지만, 거기서 책을 덮는 것이 아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해할 때까지 다시 읽고 싶게 만드는 글이다. 읽는 내내 이제니 시인의 산문시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박솔뫼 작가의 글을 읽으며 나도 무언가를 쓰고 싶어졌다. 지금, 여기에 실현될 수 없는 것을 소환하는 박솔뫼 식 '말'은 조금은 불친절하고 조금은 어지럽지만, 그로 인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생산하게 만든다.

끝으로, 개인적으로 더 궁금한 부분에 관해 이야기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나는 예전부터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에 관심이 많았는데, 박솔뫼의 이번 소설집에는 '부산'과 '광주'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두 곳 모두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을 연상케 하는 장소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내가 문학에 더 조예가 깊었다면 그 의미를 보다 확실이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언젠가는 온양의 호텔에 머무르며, 부산의 어느 여관에 머무르며 이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


* 해당 글은 창비 서평단에 선정되어 단행본을 제공받은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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