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
S.P.램프레히트 지음, 김태길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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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번역된 철학사 책의 한자를 한글로 바꾼 판이다. 보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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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세계화 - 지구민주주의 선언
죠지 몬비오 지음, 황정아 옮김 / 창비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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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논쟁이 한창이다. 세계화의 문제점이 붉어질 때마다 득과 실을 따지며 지역화를 대안삼아 세계화 이후의 세계를 준비하자는 세계화 반대론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가 하면 현실을 생각하자는 세계화 찬성론자들의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이처럼 세계화에 대한 논쟁에 임하는 이들의 의견은 ‘찬성/반대’로 나뉜다. 이분법적인 태도가 드러나고 있다. 그렇기에 세계화 문제는, 또한 논쟁의 양상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죠지 몬비오는 <도둑맞은 세계화>에서 틈을 노리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찬성론자들의 말처럼 세계화의 체제는 유지하되, 반대론자들의 입장처럼 개념자체를 바꾸자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저자는 현재 우리의 ‘동의’만 빼고 모든 것이 세계화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민주주의’만이 국민국가에 갇혀있다고 덧붙이며 현재 세계화의 문제는 이것에서 기인하다고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주장한다. 세계화라는 거대한 체제를 바꿀 필요는 없다, 대신에 민주주의를 적용하면 된다, 라고. 저자의 말은 민주주의를 국민국가에만 적용할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적용해 ‘강압의 시대’를 ‘동의의 시대’로 바꾸자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세계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 국민국가의 임원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결정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확실히 놀랍다. 아니, 놀라움을 넘어 황당무계하게 여겨진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투표를 해서 국가간의 분쟁을 결정하자니 황당하지 않은가. ‘이상’도 아닌 ‘몽상’적인 의견처럼 보일 따름이다. 저자도 이러한 반응을 일 것을 충분히 예상했을 테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논박을 펼치는데 그 의견들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다. 몽상이 이상으로 바뀌고, 이상이 내일의 모습으로 바뀔 정도로 타당성 있기 때문이다.


그 타당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저자는 먼저 민주주의가 세계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문제임을 밝히고 있다. 사회주의의 문제점은 역사가 증명했고, 무정부주의 또한 뚜껑을 열어보면 심각한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요즘 주목받는 ‘지역화’를 통해 세계화를 극복하자는 의견도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지역화를 규제할 수 있는 세계 기구들이 또 다시 등장해야 하거니와 현재 세계화를 비판의 대상으로 만든 인간의 이기심을 지나치게 간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지역화는 또 다른 세계화의 모습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말인 셈이다. 저자는 여러 가지 대안들을 분석, 비판한 뒤에 현재의 체제를 민주주의로 개선해 세계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이라고 말한다. ‘가장 덜 나쁜 체제’라고 밖에 말할 수 없지만 가장 유력하게 희망적인 내일을 보장해줄 수 있다는 말이다.


저자는 희망적인 내일을 위해 국민국가의 개념을 벗어나 지구촌의 모든 사람이 하나의 투표권을 갖고 투표를 해서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세계의회’의 창설을 주장한다. 이 주장은 첫 번째로 비용 문제를 우려케 만든다. 하지만 저자는 투표를 준비하는데 드는 돈이 어머 어마하다고 하지만 문제 있는 세계화 때문에 발생하는 낭비에 비하면 크지 않다며 이러한 생각을 일축한다.


두 번째 우려는 실효성이다. 설사 이것을 실현한다고 해도 WTO나 IMF 같은 초국가적인 세계기구들이나 초강대국들이 이것을 통해 나온 의견들을 수렴할지 미지수다. 아무리 민주적인 과정을 거쳐 의견이 나왔다한들 상대가 듣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이미 유엔을 무시 한 채 전쟁을 한 국가가 등장했으며 그 결과로 국제 사회에서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목격했기에 이런 우려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우려를 저자는 역사를 언급하며 안심시키고 있다. 저자는 기원전 5세기에 로마에서 등장한 호민관을 예로 든다. 귀족출신의 집정관이 통치하던 그때 로마의 평민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성산 사건’ 일어난다. 사라진 그들은 도시 바깥의 산에 모여 평민회를 만들고 두 명의 호민관을 선출한다. 호민관은 무엇인가? 호민관은 본래 입권 권한이 없고 그저 당국이 유권자의 요구를 인정하도록 촉구하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역사가 알다시피 그들의 권한은 막강해진다. 다수의 지지자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고 이런 일은 그 후에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물론 저자는 오늘날에도 예외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이어서 세계를 평준화 시키는 방안 등도 말하고 있는데 그것들 또한 세계 의회의 창설만큼이나 낯설고 황당하게 여겨지지만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실현 가능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세계화의 본래 의미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충분히 반겨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력의 차이 때문에 빈부격차가 발생하고 문제가 생기는 것인 만큼 세계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평준화가 필요하고 그래서 저자의 말마따나 ‘결단’이 필요하다. 다 같이 잘 살기 위해 내일을 만드는 결단 말이다.


<도둑맞은 세계화>가 이상을 넘어 몽상적으로 여겨지는가? 저자의 주장이 반감을 일으킬 정도로 황당무계하게 여겨지는가? 첫 인상은 그렇다. 하지만 이런 꿈같은 생각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저자가 언급했듯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했던 것도 그런 것이 있기에 그랬득 이 문제 많다고 생각되는 세계화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꿈같은 생각이 필요하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은 그저 변화할 기회,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생각하고 고민했다고 하는데 <도둑맞은 세계화>는 그런 역할로서 제격이다. 세계화를 찬성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양쪽만 보지 말고 위아래를 보자. <도둑맞은 세계화>에서 누누이 강조하듯, 그곳에서 꿈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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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경제론 - 제7판
정운찬.김영식 지음 / 율곡출판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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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부터 보아왔는데 초판의 중요한 오류를 몇 군데 수정한 재판('83년)부터 한국 거시경제학의 Bible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 되었죠. 한자해독에 무리가 없는 저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2판에 가장 정이 가고 또 그 책을 통해 거시경제학의 토대를 잡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계속 보완되다가 공저로 바뀐 6판, 대폭 현실 데이타가 첨가되고 연습문제도 보완되었으나 책의 구성에서는 영 아니올시다 였습니다. 이후 김영식선생이 2005년 서울대로 옮기고 난 후 학생들과 동료들로부터 첨삭과 교정을 받은 후 2년만에 발간된 7판에서는 제법 짜임새 있고 연습문제도 많이 보완되어 6판 보다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안국신 교수의 책이 중급 혹은 너무 자세하여 읽기에 곤란한 면이 있는데 비하여 이 책은 7판이 나옴으로써 거시Bible로서의 명성을 어느정도 되찾을 것 같습니다. 단지 6판을 구입한 자들에게는 책이 미비하여 불필요한 지출을 하게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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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외로운 발바닥 > 투자자의 권리장전 FTA, 과연 우리경제에 득인가...
낯선 식민지, 한미 FTA
이해영 지음 / 메이데이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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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참 한미 FTA가 화제가 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한미 FTA를 통하여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한단계 도약할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반드시 한미 FTA를 체결해야한다고 주장하고 한편에서는 한미 FTA가 양극화를 심화시키며 궁극적으로 우리경제의 대미 종속화를 가져올 것이라며 한미 FTA 저지를 위한 결사항전도 불사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한미 FTA의 찬반 양측 모두 한미 FTA가 향후 우리경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중대한 문제에 관하여 이와 같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은 만약 잘못된 방향으로 우리나라가 나아갈 경우 그 피해가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이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한미 FTA를 찬성하는 쪽 주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전세계적으로 경제개방이 대세이며 미국이 전세계의 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먼저 미국과 한미 FTA를 체결하여 국가경제의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한미 FTA를 통하여 미국의 선진적인 금융제도, 서비스 산업의 노하우를 우리나라가 접하여 해당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꾀할 수 있고, 세계 경제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미국시장에서 우리나라가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선도적인 위치에서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의 장밋빛 청사진을 본다면 한미 FTA가 우리경제의 도약을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것처럼 느껴진다. 거기다가 한미 FTA 협상이 결렬되면 한미동맹에 심각한 균열이 생겨 우리나라에 큰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맹목적 친미주의자들의 은근한 부추김도 일반 국민들에게 한미 FTA는 어쨌든 꼭 체결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한미 FTA는 절대로 체결해서는 안된다는, 혹은 적어도 무척 신중하게 판단하여 우리나라의 이익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도록 철저한 검증을 거친 뒤에 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 정부의 장밋빛 청사진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이루어진 바 없고(선진문물을 접하면 우리도 선진화된다는 식의 막연한 낙관론이 대부분이다), 정부의 주장과 반대되는 비관적 전망을 밝히는 연구도 많은 지금 상황에서 한미 FTA 체결을 현정부 임기내 반드시 달성해야 할 과제로 밀어붙이는 것은 우리나라의 운명을 걸고 도박을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한 것은 미국은 오래전부터 철저한 계획을 세워 자국에 이익이 되리라는 판단하에 한미 FTA를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에 반하여 우리나라는 철저한 준비없이 미국에 이끌려 한미 FTA 체결만을 위하여 협상을 서두른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백번 양보하여도 우리나라가 세계 최강 미국(최근들어 안 그런 척도 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과의 협상에서 미국의 양보를 이끌어내 우리나라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올 것 같지도 않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책에서 지적하듯이 이행의무강제금지(p150)와 투자분쟁해결절차(p157) 등을 통하여 정부가 공공복리를 위하여 우리 경제에 대하여 법적 규율을 하는 것이 한미 FTA로 인하여 무력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저자가 지적하듯이 위헌성의 문제도 있지만 일단 한미 FTA가 체결된 이후에는 미국의 투자자가 우리정부가 한미 FTA에 위반되는 부당한 규제를 하였다는 이유로 제3의 중재기관에 제소하여 우리나라가 천문학적 배상금을 물게 되는 결과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투자자의 이익보존을 위하여 정부가 국내법적 규율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미국의 투자자에게 우리나라 주권의 상당부분을 좌지우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런데 이 점에 관하여 우리 정부는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는다...)


한미 FTA는 궁극적으로 투자자의 권리장전의 성격을 지니는 것 같다. 양국간에 자유로운 투자가 이루어진다면 양국 경제 모두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는 대전제하에 원활한 투자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투자자가 예측하지 못한 손해를 입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는 데 그 핵심이 있기 때문이다. 한미 FTA 체결로 일부 우리 경제에 득이 되는 면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미 FTA로 이익을 보는 집단이 우리나라에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또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에서 국가간 FTA체결을 우리나라만 언제까지나 거부하고 있을 수 없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한미 FTA를 체결하는 것이 우리경제에 도움이 되는지, 또한 우리나라의 더 많은 사람들의 삶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는지에 관하여 정말로 철저하고 완전한 검증을 거친 후에야 한미 FTA 체결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과 같이 성급하게 한미 FTA 체결을 추진하는 것은 만에 하나 결과가 좋지 않을 때의 피해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책에 관하여) 한미 FTA 체결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라서 한미 FTA의 긍정적 효과에 대한 인정이 거의 없는 것과 반미주의적 시각이 아주 조금 드러나는 부분이 있는 점이 약간 설득력을 약화시키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한미 FTA의 문제점과 핵심 쟁점에 관하여 개관하는 데 무척 잘 쓰여진 책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통계자료와 문서자료가 책의 신뢰를 높여준다. 무엇보다도 한미 FTA 관련 시사토론에 체결반대쪽 패널로 저자가 빠지지 않는 점을 보면, 저자가 한미 FTA 체결의 반대쪽 입장을 대변하는 최고 권위자 중의 한명임은 의심치 않아도 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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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잭 웨더포드 지음, 권루시안(권국성) 옮김 / 이론과실천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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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과 ‘문명’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들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열에 아홉은, 아니 백에 아흔아홉은 야만이라는 단어보다는 문명이라는 단어에 손을 들어줄 테다. 그것은 문명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야만은 어떤가? 누군가에게 ‘야만인’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시장판의 쌍시옷 욕에 버금가는 비난을 담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문명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민족이나 국가처럼 문명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야만을 적대시한다. 사실 이제껏 교육되어진 가치관도 그러하다. 농업혁명이나 산업혁명 같이 인류가 진보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것은 문명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오죽하면 4대 문명이 생기면서 인류가 야만의 그늘에서 벗어났다고 말하는 이가 있겠는가.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미국의 인류학 교수 잭 웨더포드는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에서 당연하다고 믿어지던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잣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저자는 문명이 지향해야 할 구세주이고 야만은 배척해야 할 루시퍼라는 믿음이 얼마나 오류투성이인지를 밝히면서 이분법적 판단에 종지부에 막을 내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인류가 추위를 피해 동굴 속에 몸을 피하던 까마득한 과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시 인류는 참으로 약한 존재였다. 자연은 물론이고 다른 ‘종’을 상대할 특별한 힘도 없었다.


문명(civilization)이라는 단어가 ‘도시’에서 유래됐고 야만(savage)이라는 단어가 ‘숲’을 나타내는 라틴어에서 유래됐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당시는 ‘야만’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인류는 농업혁명을 거치면서 도시를 만들기 위한 발판을 세우기 시작한다. 또한 무기가 생기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가축을 이용해 농작물을 수확하기 시작한다. 문명의 시대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저자는 당시에도 유목민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착민들과 불가피한 충돌이 있었음을 지적하는데 당시의 야만과 문명이 충돌하게 된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유목민들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라고 여기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유목민에서 농업혁명을 통해 정착민이 된 이들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축이나 농작물 같은 것들을 두고 필연적으로 마찰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유목민과 정착민의 대립에서 우세한 힘을 얻는 쪽은 정착민이다. 정착민은 도시의 영역을 확대해가고 결국 오늘날에 이르는 세계지도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유목민을 포함해 정착민에 속하지 못한 이들은 지도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 곳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숲’에서 유래됐지만 부정적인 의미가 짙은 ‘야만인’으로 불리게 된다.


여기까지는 웬만한 사람들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문명과 야만의 대립관계다. 저자는 이 부분을 일반적인 통설을 짚어주듯 세계 각지를 돌아보며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미지의 영역, 혹은 문명이 인정하지 않고 싶어 했던 부분들을 끄집어낸다. 첫 번째는 문명과 야만의 협력관계다. 자크 아탈리가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에서 지적했듯이 정착민이 아닌 이들이 있기에 문명의 발전은 가속도를 낼 수 있었다. 원시인들을 동물원에 가두듯 철장 안에 ‘낭만’을 운운하며 구경했던 문명이지만 문명 그 자체로는 지금의 자부심을 키울 수 없었던 것이다.


저자가 두 번째로 언급하는 부분 또한 문명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과거다. 그것은 문명이 행한 ‘악’을 폭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오늘날의 문명이 위기라고 한다. 지구가 언제 망할지 모른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무엇인가? 문명이 위기에 처한 것은 누구의 탓인가? 적대시하던 야만의 공격 때문일까?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에서 저자의 펜 끝이 향하는 부분은 이 질문과 같다. 저자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관찰하고 조사한 끝에 문명의 위기는 문명 스스로가 초래했다고 말한다. 그것에 대한 증거는 일일이 언급하기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역사 속에서 숱하게 발견됐다.


그럼에도 문명은 반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명의 자부심이 담긴 귀중한 보물들이 깨어져나간 것을 두고 걸핏하면 ‘이민족의 침입’을 핑계로 댔는데 실상 그것들도 야만이 아닌 문명의 자학적인 행위에서 비롯됐다. 전쟁과 침입, 정복과 약탈 같은 단어들도 관념상 야만에 어울리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들 또한 문명에 어울리는 단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 저자의 펜 끝은 역사 속에서 끝나지 않는다. 쓴 소리는 시간을 옮겨 현대로 향한다. 그리곤 야만과 문명의 이분법적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다. 저자는 오늘날의 문명이 ‘최악의 두려움’을 만들어 냈고, 문명 ‘스스로 수천 년 동안 두려워하며 남에게 투사시켰던 바로 그 야만을 만들어냈다’고 지적하며 이분법의 잣대를 비판한다. 본문 중 ‘세계 어느 곳에서도 나는 미국 수도 내의 길거리에서 본 것과 같은 야만과 폭력과 범죄와 잔인함을 목격하지 못했다’는 말이 저자의 쓴 소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테다.


‘악’이라는 단어가 ‘선’이 있기에 존재한다는 사고로 생각해보면 ‘야만’이라는 단어도 ‘문명’이 있기에 나타났다. 또한 ‘문명’이 있기에 ‘야만’은 재구성되고 재구성되어 자신의 모습과 상관없이 다른 이의 시선과 생각으로 취급되어졌다. 저자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날카롭게 그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의 최대 성과는 합리적으로 문명에 돌을 던졌다는 것일 테다.


그렇다고 해서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가 사실 이전의 진실만을 밝혀내는 것은 아니다. 그 동안 보여줬던 야만과 문명의 작은 협력들을 발판으로 절대적으로 ‘공존’해야 할 것을 주장하는데 그 주장은 귀 담아 들을 만 하다. 잘못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과 별도로 문명은 ‘생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과거처럼 야만과 문명을 나눠 선택한 뒤에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목전에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먼 훗날 우리의 후손이 폐허가 된 이 땅을 보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자 경고이다.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문명이 움직여야 같이 산다. 그렇지 않으면 문명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폐허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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