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잭 웨더포드 지음, 권루시안(권국성) 옮김 / 이론과실천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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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과 ‘문명’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들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열에 아홉은, 아니 백에 아흔아홉은 야만이라는 단어보다는 문명이라는 단어에 손을 들어줄 테다. 그것은 문명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야만은 어떤가? 누군가에게 ‘야만인’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시장판의 쌍시옷 욕에 버금가는 비난을 담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문명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민족이나 국가처럼 문명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야만을 적대시한다. 사실 이제껏 교육되어진 가치관도 그러하다. 농업혁명이나 산업혁명 같이 인류가 진보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것은 문명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오죽하면 4대 문명이 생기면서 인류가 야만의 그늘에서 벗어났다고 말하는 이가 있겠는가.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미국의 인류학 교수 잭 웨더포드는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에서 당연하다고 믿어지던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잣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저자는 문명이 지향해야 할 구세주이고 야만은 배척해야 할 루시퍼라는 믿음이 얼마나 오류투성이인지를 밝히면서 이분법적 판단에 종지부에 막을 내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인류가 추위를 피해 동굴 속에 몸을 피하던 까마득한 과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시 인류는 참으로 약한 존재였다. 자연은 물론이고 다른 ‘종’을 상대할 특별한 힘도 없었다.


문명(civilization)이라는 단어가 ‘도시’에서 유래됐고 야만(savage)이라는 단어가 ‘숲’을 나타내는 라틴어에서 유래됐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당시는 ‘야만’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인류는 농업혁명을 거치면서 도시를 만들기 위한 발판을 세우기 시작한다. 또한 무기가 생기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가축을 이용해 농작물을 수확하기 시작한다. 문명의 시대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저자는 당시에도 유목민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착민들과 불가피한 충돌이 있었음을 지적하는데 당시의 야만과 문명이 충돌하게 된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유목민들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라고 여기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유목민에서 농업혁명을 통해 정착민이 된 이들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축이나 농작물 같은 것들을 두고 필연적으로 마찰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유목민과 정착민의 대립에서 우세한 힘을 얻는 쪽은 정착민이다. 정착민은 도시의 영역을 확대해가고 결국 오늘날에 이르는 세계지도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유목민을 포함해 정착민에 속하지 못한 이들은 지도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 곳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숲’에서 유래됐지만 부정적인 의미가 짙은 ‘야만인’으로 불리게 된다.


여기까지는 웬만한 사람들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문명과 야만의 대립관계다. 저자는 이 부분을 일반적인 통설을 짚어주듯 세계 각지를 돌아보며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미지의 영역, 혹은 문명이 인정하지 않고 싶어 했던 부분들을 끄집어낸다. 첫 번째는 문명과 야만의 협력관계다. 자크 아탈리가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에서 지적했듯이 정착민이 아닌 이들이 있기에 문명의 발전은 가속도를 낼 수 있었다. 원시인들을 동물원에 가두듯 철장 안에 ‘낭만’을 운운하며 구경했던 문명이지만 문명 그 자체로는 지금의 자부심을 키울 수 없었던 것이다.


저자가 두 번째로 언급하는 부분 또한 문명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과거다. 그것은 문명이 행한 ‘악’을 폭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오늘날의 문명이 위기라고 한다. 지구가 언제 망할지 모른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무엇인가? 문명이 위기에 처한 것은 누구의 탓인가? 적대시하던 야만의 공격 때문일까?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에서 저자의 펜 끝이 향하는 부분은 이 질문과 같다. 저자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관찰하고 조사한 끝에 문명의 위기는 문명 스스로가 초래했다고 말한다. 그것에 대한 증거는 일일이 언급하기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역사 속에서 숱하게 발견됐다.


그럼에도 문명은 반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명의 자부심이 담긴 귀중한 보물들이 깨어져나간 것을 두고 걸핏하면 ‘이민족의 침입’을 핑계로 댔는데 실상 그것들도 야만이 아닌 문명의 자학적인 행위에서 비롯됐다. 전쟁과 침입, 정복과 약탈 같은 단어들도 관념상 야만에 어울리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들 또한 문명에 어울리는 단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 저자의 펜 끝은 역사 속에서 끝나지 않는다. 쓴 소리는 시간을 옮겨 현대로 향한다. 그리곤 야만과 문명의 이분법적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다. 저자는 오늘날의 문명이 ‘최악의 두려움’을 만들어 냈고, 문명 ‘스스로 수천 년 동안 두려워하며 남에게 투사시켰던 바로 그 야만을 만들어냈다’고 지적하며 이분법의 잣대를 비판한다. 본문 중 ‘세계 어느 곳에서도 나는 미국 수도 내의 길거리에서 본 것과 같은 야만과 폭력과 범죄와 잔인함을 목격하지 못했다’는 말이 저자의 쓴 소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테다.


‘악’이라는 단어가 ‘선’이 있기에 존재한다는 사고로 생각해보면 ‘야만’이라는 단어도 ‘문명’이 있기에 나타났다. 또한 ‘문명’이 있기에 ‘야만’은 재구성되고 재구성되어 자신의 모습과 상관없이 다른 이의 시선과 생각으로 취급되어졌다. 저자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날카롭게 그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의 최대 성과는 합리적으로 문명에 돌을 던졌다는 것일 테다.


그렇다고 해서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가 사실 이전의 진실만을 밝혀내는 것은 아니다. 그 동안 보여줬던 야만과 문명의 작은 협력들을 발판으로 절대적으로 ‘공존’해야 할 것을 주장하는데 그 주장은 귀 담아 들을 만 하다. 잘못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과 별도로 문명은 ‘생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과거처럼 야만과 문명을 나눠 선택한 뒤에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목전에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먼 훗날 우리의 후손이 폐허가 된 이 땅을 보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자 경고이다.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문명이 움직여야 같이 산다. 그렇지 않으면 문명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폐허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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