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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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고통을 넘어서>

 

 

    우리는 단어를 말한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선 단어도 우리를 '말해준다.' 사실, 몇 단어가 우리 개인을 설명하고, 사회를 드러내 보이며, 세상을 규정하는 일들은 드물지 않다. 위화가 선택한 10개의 단어들은 이 드물지 않은 예를 예술의 경지까지 고양시킨다. 인민, 영수,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 홀유. 이 단어들의 내면에 도달한 작가 위화는10개의 재료들로 자신의 삶에서 있었던 경험을 말하고, 과거의 중국과 현재의 변화된 중국을 보여주며, 삶과 역사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의미로 향한 길을 그려보인다. 10개의 돌-단어가 세상이란 수면에 만드는 파문은 가볍지 않고 둔중하다. 그것은 돌의 무게가 무겁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수면아래의 깊이가 무척 깊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먼저 우리는 ‘인민’과 만난다. 역사적, 정치적 이유로 우린 ‘인민’보다 ‘국민’에 더욱 친숙하지만, 위화의 어린시절 - 즉, 문화혁명기의 중국은 인민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인민은 바로 마오 주석님이고, 마오 주석님은 바로 인민인 것이다(p.25).' 모두가 인민을 말하고 어디서나 인민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많이 사용되는 것은 본래의 의의를  잃기 쉬운 법. 중국의 정식국호인 ’중화인민공화국‘에 등장하듯 인민의 나라를 표방하는 중국에서, 인민은 의미를 상실하고 오히려 한명의 초인격적 주체 마오쩌둥에게 모든 가치가 집중되어 버렸다. 하지만 위화는 생생하고 유머러스한 필치로 바로 이 모순의 광장에서 진정한 인민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1989년 천안문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밤하늘 아래 국가를 부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손에 아무런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지만 신념만은 대단히 확고했다(p.39).' 작가는 이 때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p.39)'고 기억한다. 약하지만 순수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서로를 위해, 국가를 위해 한데 모여 뿜어내는 목소리는 너무도 숭고하였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는 물론 '빛보다도 멀리 가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위화는 영원한 ‘영수’의 전형인 마오쩌둥을 말한다. 당시를 상징하는 인물, 당시의 질서와 가치가 인격화된 존재가 바로 그였다. 그런데 잔혹한 문화대혁명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를 그리워하는 중국인들이 많다고 한다. 이는 현재 중국이 가진 여러 문제들을 반영하는 현상일 것이다.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발생한 사회문제들, 부조리와 폭력이, 강력한 지도자와 전체주의적 질서에 대한 중국인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화는 ‘영수’의 사망 당시 자신과 수많은 이들이 모여서 함께 울다가 갑자기 홀로 격렬하게 웃게 되었던 경험을 소개한다. ‘영수’에 대한 숭배와 전체주의적 사고가 도달하는 한 지점이 블랙코미디의 한 장면과도 같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영수’에 대한 향수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영수’는 어쨌든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 살아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영수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위화는 뛰어난 작가로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되었을 어린시절의 ‘독서’와 ‘글쓰기’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의 어린시절엔 <마오쩌둥 선집>과 홍보서 이외에 다른 책은 거의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책이 귀했다. 그래서 집마다 비치된 (전시용에 가까운) 마오쩌둥 선집의 주석들과 어렵사리 필사한 책, 곳곳에 붙은 대자보를 읽으며 독서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했다. 글쓰기도 홍위병으로서 대자보를 작성한 것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다소 기형적인 과정으로 독서와 창작을 시작했지만 ‘때로는 단점에서 출발한 것이 갈수록 장점이 되기도(p.136)'하였다. 그를 작가로 만든 것은 오직 ’글쓰기 덕분이었다(p.137).' 자신의 경험을 차분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단순한 글쓰기를 넘어,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도 통찰할 수 있으리라. ‘사실 삶과 글쓰기는 아주 간단할 때가 있다(p.157).' 그 간단함이 삶과 글쓰기 모두를 관통하는 화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사실, 간단함 속에 담긴 깊은 여운의 미학은 위화가 ’루쉰‘편에서 말하는 대작가 루쉰의 작품 특징이기도 하다 ; p.161~183 참고) 단순함은 결코 단순함에 머물지 않는다.

 

   위화가 경험한 20세기 중엽 이후 중국의 모습은 대부분 무척이나 경직되어 있었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감히 서로 말을 주고받지도 못했고, 칠판에 누군가가 ‘사랑’이라고 적어놓자 학교 혁명위원회가 범인을 색출하려 대대적으로 나서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와 너무도 다르다. ‘극단적으로 억압된 시대는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반드시 극단적으로 방종하는 시대를 조성(p.194)'하기 때문이다. 물론 극도로 억압되었던 과거보다는 자유로워진 현재가 더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과거와 현재의 상황 모두 빛과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체제나 경제적 상황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고, 인간이란 존재의 깊은 내면과 삶의 블가해함과도 맞닿아 있다. 위화의 글을 통해 우리가 도달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라고 해도 크게 틀리진 않을 것이다. (위화가 ’혁명‘편에서 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혁명‘의 허구성인데, 이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이 바로 보편적 가치에 대한 모색이다. 이점에서 인간 일반의 내면과 삶의 블가해함에 대한 통찰은 정치적인 영역에서도 깊은 울림을 남기고 있다)

 

   ‘인민’이나 ‘영수’, ‘혁명’과 같은 단어가 과거 중국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단어라면 ‘풀뿌리(草根)’, ‘산채(山寨)’, ‘홀유(忽悠)’는 현재 중국의 모습을 드러내는 키워드이다. 세 단어 모두 현대에 새로운 의미가 생겼는데, ‘풀뿌리’는 현대 중국의 비주류 약자층(p.264)을, ‘산채’는 모방이나 짝퉁제조, 권리침해, 규범위반, 농담, 못된 장난 등(p.291)을 의미하고 ‘홀유’는 남을 속이는 것(그러나 ‘사기’보다는 부드럽고 장난스러운 함의를 가진다 ; p.321.)을 말한다(흥미롭게도 ‘산채’는 쟝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의 개념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조사해보니 ‘simulacre’를 ‘山寨’로 번역하진 않는 것 같다).

    중국 경제의 급속한 성장으로 풀뿌리 출신의 인물이 벼락부자가 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는데, 그 중에는 산채물건을 만들거나 산채조직을 이용하고 홀유에 의해 돈을 번 이들이 많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산채나 홀유의 행위는 경제활동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어 각종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위화가 말한 '인민'은 이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시사하고 있기도 하다.

 

   '인민'은 '영수'의 지도아래, '혁명'을 경험하며 살았고, 이 시기에 한 소년은 '독서'와 '글쓰기'를 하며 '루쉰'과 비견되는 작가가 되엇다. 그와 루쉰과의 '차이'는 지금 그의 앞에 '산채'와 '홀유'의 집적으로서의 21세기 '풀뿌리'들의 중국이 놓여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를 통해 위화가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 중국 전체가 느끼고 있을 것은 아마도 고통일 것이다. 그것은 성장통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제거해야 할 사회의 종양덩어리가 만들어내는 통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고통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쉽게 소통하도록 해주는 것은 없을 거라고(p.353)' 위화가 말한 것 또한 통증만큼이나 명백한 진실이다. 이 책을 한마디로 ’고통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혁명의 흥분과 광기, 무자비한 살육과 숙청, 폭력과 홀유의 경험 모두 중국이 겪은 고통이다. 그렇지만 고통이 소통으로 이어지는 길을, 모두가 고통을 통과해 형통으로 가는 길을 찾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 이 책 바닥에 있기에, 지금의 고통을 넘어서는 한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그 따뜻한 마음도 빛보다 멀리 퍼져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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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a1003 2018-10-27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1984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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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이지만 그 허구는 언제나 현실의 진실에 맞닿아 있다. 소설은 어떤 형태로든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며, 반영을 통해 어둠에 가려져 은폐되었던 현실이 폭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폭로’로서의 역할 때문에 때로 소설작품은 탄압의 대상이 된다. 과거 공산주의 국가의 종주국이었던 구소련이나 현재 중국 등지에서 수많은 작품들이 금서로 지정된 것은 이런 서적들이 실제로 체제유지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오웰의 <1984>는 세 개의 초대국가(超大國家)가 정립(鼎立)하는 미래의 사회를 다루는데, 이 국가들은 구소련과 중국과 같은 전체주의체제를 취하고 있다.(이런 이유로 20세기 소련과 중국에서 조지 오웰의 <1984>는 금서였다) 오웰은 <1984>를 통해 그의 생존 당시 인류 앞에 드리운 어둠으로서 전체주의를 주목했고, 불행하게도 오웰의 경고는 아직도 유효하다. 따라서 <1984>가 반영하는 디스토피아적 요소를 주목하고 우리의 현재를 반성해 보는 것, 나아가 우리가 실존하는 주체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고민해 보는 것이 오웰을 읽는 모든 이의 과제가 될 것이다.

 

전체주의라는 테제

 

    ‘전체주의’는 전체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거나 박탈하는 행위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전체를 구성하는 개인이 없으면 전체 자체의 존속도 있을 수 없고, 이 전체주의에 내재한 모순 때문에 결국 극소수의 상류계층에게만 부와 권력이 집중되게 된다. 이런 결과는 극우적 이념인 나치즘과 파시즘이 전체주의와 결합한 경우나, 극좌적 이데올로기인 스탈린주의의 경우 모두에 마찬가지이다. 이 체제 아래에서 극소수 지배계층(빅브라더)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국민을 기만하고 위협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반대세력을 철저히 억압하고, 인권을 심각하게 유린하는 결과에 이른다. <1984>의 배경인 오세아니아는 이런 전체주의적 통제사회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물론 다른 초대국가인 유라시아와 동아시아도 마찬가지이다). 통제라는 것은 지배세력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강제력의 행사이며, 통제를 통해서 권력은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권력은 본성에 따라 스스로를 강화하며 마침내 폭력의 행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이 ‘합법적’이란 사실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발터 벤야민이 보여준 것처럼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기 위해 법의 제정이라는 형식을 취하는데, 이로서 법률적 불법이라는 괴물이 만들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폭력으로서의 전체주의

 

    <1984>는 바로 체제가 스스로를 실현하는 폭력에 대한 탐구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폭력을 좁은 의미의 유형력의 행사에 국한해선 안 된다. 폭력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는데, 이 형태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린 <1984>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책 밖의 현실에 존재하는 폭력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사실 개개인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것도 전체주의의 폭력적 전략 중의 하나이다). 그렇기에 슬라보예 지젝이 폭력의 종류를 정치(精緻)하게 분류한 것의 도움을 받도록 하자.

 

   지젝은 폭력을 객관적 폭력과 주관적 폭력으로 나누었는데, 이중 ‘주관적 폭력’은 우리가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국가의 경찰이나 군조직, 정부요원들을 도구로 국민을 폭행하거나 납치하고 고문하는 것에서 장발단속과 미니스커트 규제와 같은 풍속통제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통제하는데 유형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정상적이지 못한 행태로서 우리가 쉽게 인식가능하다. <1984>에서 윈스턴과 줄리아는 사상경찰에 의해 체포되고(p.269-273), 신체적 고문과 정신적인 개조(이것이 <1984>3부의 중심 내용이다)를 당해 마침내 자신을 파멸시킨 빅브라더를 사랑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주관적 폭력의 행사에 해당한다. 제3세계 국가의 독재정부가 민주화 운동가들을 탄압하는 것이나, 평화롭게 시위하는 군중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이 우리가 쉽게 찾을 수 있는 현실의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관적 폭력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도 결코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객관적인 폭력이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 폭력은 이중으로 은폐되어 있다. 이는 비가시적인 형태를 취하며,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객관적 폭력의 한 양상인 ‘상징적 폭력’을 주목하자. 이는 언어에 의해 구현되는 폭력을 말한다. 단순히 욕설이나 저속한 농담, 저주 등은 상징적 폭력의 가장 조야한 형태이다. <1984>체제하의 사람들이 벌이는 ‘2분 증오’의식에서 언어와 이미지를 사용해 사람들을 선동하고 증오로 광분케 하는 것(p.19-26에서 ‘2분 증오’의 과정이 자세히 서슬되어 있다)도 다른 형태의 상징적 폭력이다. 그러나 오웰이 본문에서 사용하고 부록 ‘신어의 원리’에서 자세하게 밝히고 있는 ‘신어(新語)’를 통한 방식이야말로 언어를 통한 상징적 폭력의 유형으로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신어의 체계에서는 단어가 일정한 방향의 의미로만 활용될 수 있어서,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체제의 부당성과 자신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지젝이 ‘구조적 폭력’이라 부르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정상적인 상황으로 여겨지고 있는 상태 자체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예컨대 현대에 전지구적(全地球的)으로 퍼져있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빈부격차가 증가하고 자본이 소수에게 집중되는 것은 필연적인데, 이러한 심각한 불균형은 폭력적인 것으로 인식되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것 정도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점점 조급해지고, 삶의 의미를 따지는 것은 사치일 뿐이다. 계속해서 힘들게 노력해도 상황은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모두 정상적인 상황이며, 이를 의심하는 자는 이상한 사람이다. <1984>의 세계에서는 전체주의 강령이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이를 의심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이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

 

   한편, <1984>에서 당원과 ‘노동자’라 불리는 벙어리 대중(p.254에 등장하는 표현)을 구분하여 각자를 다른 방식으로 규율하는 사실(p.256이하)은 폭력이 스스로를 실현하는 과정에 있어서 단계적·효율적인 방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회에는 한정되고 단순한 지식만을 가지고 필요한 물자를 만들어 내는 노동자가 필요하고,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면 전체주의 사회체제를 더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노동자는 실질적으로 노예로서 인격이 박탈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위협요소가 되지 않는 이유는 빅브라더가 그들을 비인간화했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에서 폭력의 또다른 양태가 드러난다.

 

전체주의의 변형

 

    물론 현재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도 무너지고 명목상으로 전체주의 국가는 거의 남아있지 않고, 남아있다해도(중국이 대표적인 예다), 개방의 물결과 전지구적 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나 나치즘에만 전체주의가 있는 것은 아니며 전체주의가 특정 이데올로기에만 수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전체주의라는 괴물은 정체를 감추고 다른 모습으로 우리의 내부에 숨어있을지 모른다. 예컨대 전체주의는 시장에 의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지배하는 또 다른 형태로-이를테면 ‘시장전체주의(도정일 교수의 표현이다)’라는 것으로 변형되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경제적 구조는 정치권력과 융합하여 더욱 공고히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닐까? 우리가 모르는 사이 또다른 형태의 전체주의적 폭력은 은폐된 채로 여전히 우리를 억압하는 것은 아닌가? 수없이 많은 감시카메라와 전자장비들, 고도로 발달한 과학지식과 컴퓨터 기술 등은 이런 모종의 전체주의적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도구는 아닐까? 매스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하고 점점 편협해져가는 사람들과 피폐한 일상, 경찰국가화 되는 세상의 모습은 실제로 우리가 또다른 전체주의와 폭력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아닌 것일까?

  

   심지어 이제는 우리의 내면까지 감시자를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푸코가 말한 파놉티콘의 형태로 스스로가 스스로를 감시하며 제한하려드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오웰의 <1984>가 예언한 미래에 근접한 것만 같아서 두렵다.

 

 

결어 : 희망

 

    이처럼 현재도 유효한 오웰의 문제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질문할 것을 요구한다. 만약 우리 앞에 놓인 길이 작중의 윈스턴이나 줄리아가 걸은 길이라면? 작품 속에 묘사된 오세아니아의 상황이 바로 가까운 미래일까?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이 책에서 오웰은 이런 의문들에 온전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묵묵히 우리 앞에 반영으로서의 소설을 던지고 우리 스스로 답을 찾길 바라는 것 같다. 우리가 답을 찾으려 노력하고, 미래를 바꾸기 위해 이 작품을 교사로 삼는다면 어쩌면 무언가가 달라질 수도 있다고 암시하면서. 그러나 동시에 빅브라더를 사랑하는 자로 최후를 맞을 수도 있는 운명 또한 제시하고 있다. 우리에게 미래가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답을 결정하는 이는 바로 과거의 오웰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존엄한 인격으로서 스스로 설 수 있고, 실존으로서의 의마를 실현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그렇기에 오웰은 우리와 함께 하며 우리를 지켜볼 것이다. 미셸 푸코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기억하자.

 

‘권력이 있는 곳에는 저항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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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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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먼저 눈을 사로잡았다. ‘한국이 싫어서’라는 어구가 작은 파문과도 같이 일렁이고 있었다. 더불어 에릭 쉬르데주의 책 ‘한국인은 미쳤다’가 눈에 어른거렸다. 마음에 요동을 일으킨 이 장강명의 제목이 에릭의 그것보다 새롭다거나 충격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한국인 다수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어구다. 우리 모두 몇 번쯤은 ‘한국이 싫다.’거나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말해보았을 것이므로. 그러나 이런 말을 담으면 조금이나마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공사의 영역을 불문하고 찜찜한 뒷맛을 맛보게 된다. 공공연히 한국을 비판하는 것은 우리사회에서 금기시되어 왔고, 지금도 그 여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금기의 옆에는 금기가 은폐하던 문제가 놓여있고, 우리가 한국인이라면 이 문제를 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에게 강한 영향을 미친 것은 교육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십년이상 우리는 애국심과 도덕을 같은 카테고리로 배웠고, 윤리라는 것은 ‘국민윤리’의 테두리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것이다. 물론 애국심이 결코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애국심과 국가주의·신권위주의가 뒤섞인 관념들에 의해, 우리는 한국을 비판하는 것은 일종의 비도덕적 행위나 배은망덕한 행위로 여기도록 교육받았고, 은연중에 국가주의적 사고를 주입받았다. 그리고 한국이 얼마나 아름답고 뛰어나며 훌륭한 나라인지를 배우고 자부심을 느껴왔다. 이렇게 형성된 한국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의 이면에는 비판을 금압하는 사고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그것 또한 잘못이 아닌가? 오히려 비판을 통해 더 좋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장강명의 시도는 ‘긍정적’인 것이다.

 

   장강명은 <한국이 싫어서>에서 우리의 현 모습을 호주이민을 가는 ‘계나’를 통해 접근하고 우리에게 이 문제를 자신의 스타일로 설명해주고 있다. ‘계나’가 호주로 이민을 가려고 한 이유는 ‘한국이 싫어서’,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다.(p.10) 한국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다. 물론 호주가 곧 천국은 아니고, 그곳에서도 삶의 현장은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하다. 계나는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편하지 않은 일상을 살아가야 했다. 그러다 조금 자리가 잡히고 시민권을 신청하기 조금 전, 옛날 남자친구인 지명의 전화를 받고 한국에 와서 그의 청혼을 어떻게 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다시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호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계나는 다시 호주로 가는 이유를 생각한다.

 

'몇 년 전에 처음 호주로 갈 때에는 그 이유가 ‘한국이 싫어서’였는데, 이제는 아니야.(중략) 이제 내가 호주로 가는 건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야.' (p.161)

 

   한국이 싫지는 않아도 한국에서 산다면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는 계나의 심경은 우리 대다수의 생각과 같은 것이 아닐까? 살아가며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행복해지는 것인데, 한국에서 점점 더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당연히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질 것이다. 작가는 계나의 입을 통해 호주로 가는 또다른 이유를 말한다.

 

‘사실 젊은 애들이 호주로 오려는 이유가 바로 그 사람대접 받으려고 그러는 거야. 접시를 닦으며 살아도 호주가 좋다 이거지. 사람대접을 받으니까.'(p.186)

 

   어느 나라도 부조리와 사회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빈부격차나 소외계층의 문제 등은 어디에나 있다. 이는 전지구적 금융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경제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국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자 국가가 지켜야 할 윤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국민이 인간답게 살 수 없는 국가는 존재의의를 상실한다. 자연권으로서의 인권은 국가의 가치적 근본질서이므로. 법철학자 루돌프 폰 예링의 말이 맴돈다. ‘권리를 위한 투쟁은 사회공동체의 의무다.’

 

   기억하자. 그 '의무'는 궁극적으로는 한국에 대한 긍정과 애정에 기반한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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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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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잠시 생각에 잠겼고, 읽고 난 후에도 역시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읽기 전에 눈에 보이는 것은 책의 제목과 ‘제20회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작’이라는 문구였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라니, 도대체 무슨 내용이 담긴 것일까? 이 표제는 독특하고 지적인 감각을 자극했지만, 쉽게 내용을 추측하기는 어려웠다. 어찌보면 관념적인 내용이 엉키고 뭉쳐서 지적 자극을 유발하는 소설의 제목일 수도 있었고, 감성적 수사와 로맨스로 가득한 연애소설의 제목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존에 출간된 장강명의 작품성향을 생각해 본다면 그럴 가능성은 없었고, 이 작품 역시 독자들에게 가깝게 다가와서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눈을 고정시키게 만들고, 종국에는 독자의 가슴 속에 둔중하고 오래 울리는 파동을 남길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다 읽고 난 지금 나는 이 추측이 맞았으며,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했다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사건들이 연속적인 시간의 진행방향대로 배열되지 않고, 무작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간상 후에 일어난 일이 먼저 나오고, 뒤에 나오는 과거의 사실을 다시금 배치해서 이해하여야 하는 경우가 많다. 소설 내용 중에 나오는 남자의 원고 <우주 알 이야기>도 마찬가지의 구조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p.18을 참고하라). 그러나 이런 시도는 단지 특수한 실험성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시간상의 무작위적 배열도 작가가 의도적으로 정밀하게 무작위처럼 보이도록 한 것일 수 있다. 작품을 읽어보면 작가가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효율적인 형태로 서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험적 형식에 과도하게 집착하기보다 이 소설 자체의 내용에 더 관심을 쏟는 것이 올바른 접근일 것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은 한 젊은 남자로서(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고등학생 시절에 자신을 괴롭힌 학생(이영훈)을 살해하고 교도소에 수감된 전력이 있다. 교도소와 정신병원을 거쳐 석방된 지금, 이 남자는 <우주 알 이야기>라는 소설의 원고를 써서 청소년 문학상 공모에 응모한다. 출판사에는 남자와 학교 동창인 여자가 일하고 있었다. 여자(보람)는 이 소설을 읽고 응모한 사람이 학창시절 알던 그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를 다시 만난다.

 

   남자가 살해한 영훈의 어머니는 사건 발생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계속 남자를 따라다니며 밥을 사주거나, 영훈의 유골함 앞에서 남자와 함께 아들을 추모하기도 하고, 때로는 남자의 일을 방해하기도 한다. 그녀의 전 존재가 영훈의 사망에 고착되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아들인 영훈이 일진이었거나 남자를 괴롭혔다는 사실도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가해자인 남자가 피해자인 것처럼 세상에 알려지는 것도 용납하려하지 않는다. 남자는 이런 영훈의 어머니를 위해 기꺼이 그녀의 요구에 따른다. 그러다 영훈 어머니는 결국엔 남자를 칼로 찔러 살해하기에 이른다.

 

   등장인물인 남자와 여자, 그리고 영훈의 어머니, 이 세 사람이 걸어간 존재의 궤적이 이 소설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동시에, 이 궤적은 그들이 나름대로 세계를 인식한 방식과 구조를 반영하고 있고, 소설의 주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이는 소설 속 살인사건에 관한 단순한 도덕적 판단의 문제나 사회적 문제의 인식을 넘어선 영역, 즉 어떤 패턴과 근본적인 존재의 문제에 대한 것이리라. 그리고 존재와 죽음에 대해 천착한 철학자 하이데거가 잘 설명하는 것처럼, 그들은 죽음 앞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에 도달할 기회를 얻는다.  

 

   우리가 스스로의 삶에 대해, 우리가 살던 세상에 대해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진정 우리는 누구인지, 남자의 시신은 우리 앞에 누워서 계속 묻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너는 도대체 누구였어?

너는 누구였어, 도대체?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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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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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우엘벡의 「복종」: 계속되는 물음>

 

 

 

    (0)“복종에 대한 책이죠.” (「복종」, 제5부 중에서, p.317)

 

    (1)미셸 우엘벡의 소설 <복종>은 문제적 작품이다. 이 작품이 출간되기 전날에 발생한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 때문에 이 책이 더욱 주목을 받게 되고, 뜻하지 않았던 ‘문제적’ 효과를 얻기도 했지만, 책의 내용 자체가 던지는 물음은 테러사건이 던지는 파장보다 더 오래 독자의 가슴에 남으리라고 생각한다. 오랜 기독교 문명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유럽의 대표적 선진국인 프랑스, 문화와 예술의 나라이자 수많은 석학을 배출한 지성의 나라 프랑스에서, 프랑스적인 것과는 너무도 이질적인 이슬람 정권이 정상적 선거를 통해 출현하게 된다는 설정이 무척 독창적이면서도 충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이 프랑스를 장악한다는 사실은 정체가 모호한 불안감을 수반한다. 서구가 이슬람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다소 편견에 가까운 이미지들이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뉴스에서는 ‘하마스의 반대 분파가 새로운 행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했고, 거의 매일 폭탄을 두른 자살 테러범들이 식당이며 버스로 뛰어들었다.’ (「복종」, p.200) ‘호전적이고 폭력적인 이슬람’에 대한 이미지들은 지구 반대편 우리나라의 시청자들에게도 비슷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우리의 경우를 잠시 생각해보자. 세계화와 지구촌의 시대에 무색하게도 이슬람교 자체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는 깊어지지 않고, 한국어나 영어로 번역된 코란을 읽어본 이도 드물다. 많은 이들이 이슬람교는 ‘알라신’을 숭배하는 종교인 것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알라’라는 말은 신의 이름이 아니라 그냥 ‘신’이라는 뜻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프랑스의 경우도 이런 점에서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프랑스는 우리와 다소 다른 상황에 있으며, 이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지리적으로 우리보다 중동에 가까운 프랑스에는 수많은 이슬람 이민자들이 거주하고 있고, 이들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나 관료들은 이들을 정치적인 측면에서나 정책적인 면에서 고려해야만 한다. 이슬람은 프랑스에서 살아있는 현안이자 변화하는 시대의 증인들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슬람을 호전적인 이미지로만 생각하는 것은 ‘무해한 내면의 편견’일 수 없다. 이슬람은 ‘이해되어야 할 과제’의 지위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슬람화된 프랑스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요소는 가치적인 면과 체제적인 면으로 집약된다. 이 두 가지 차원에서 소설에 나오는 이슬람 정권의 기획이 정리될 수 있다.)

 

 

   (2) 정신적 가치라는 것은-그리하여 이슬람이라는 ‘가치’ 역시-언급할 때 평가를 수반하거나 평가가 선행되는 개념이다. 그런데, 제대로 이슬람을 이해해야 우리의 과제로서의 이슬람을 다룰 수도 있다. 즉, 이슬람에 대한 가치판단 이전에 가치판단의 대상이 되는 요소들에 대한 가감 없는 파악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소설에서 주목하는 ‘이슬람화’는 단순히 종교적 제의의 대상을 기독교와 교체하거나(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가 상정하는 유일신이 동일한 신인지에 대한 논의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의복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의 변화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이슬람이라는 문제는 단순한 종교적인 숭배의 대상이 변화하는 차원의 것이라기보다, 또 다른 세계관이자 사고의 변화를 수반하는 ‘방법적 전환’이란 점에 핵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우엘벡이 그려내는 프랑스 이슬람의 모습에는 그런 방법으로서의 이슬람의 면면이 잘 포착되어 있다.

   사고의 방법의 변화는 개개의 사고가 변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관련된 체계의 총괄적인 변화를 수반하게 되는데, 이로서 전통적인 가치를 가진 프랑스 사람들에게 불안을 야기하게 된다. 정신적 변화는 보이지 않기에 더욱 두려운 법 아니던가?

 

    이런 가치와 방법으로서의 이슬람이 처음 맞이하는 도전과 응전의 장은 정치무대이다. 이 소설에서 그려진 이슬람 정당이 프랑스의 정권을 잡는 과정은 무척이나 핍진한데, 서구의 대의 민주주의적 과정을 통해 이슬람이 정치의 영역에서 성공했다는 것이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이는 이슬람이 서구의 체제에 완전히 적응하고 과거 이슬람의 이베리아 지배와 같은 성과를 골 족의 나라에서 이루어 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슬람은 게르만과 앵글로 색슨을 다음 대상으로 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소설에서 실제로 모하메드 벤 아메스 대통령은 유럽전역과 터키,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새로운 로마’를 꿈꾼다. 이런 언명은 프랑스의 독자들에게 소설의 차원을 넘어 현실적인 가능성으로서 다가오는 것일 수 있다.

 

   이런 ‘체제적 이슬람화’가 유럽연합을 좌지우지할 가능성으로까지 거론되는 것은 오일달러로 대표되는 자본의 도움 덕분이기도 하다. 이슬람은 현대의 자본주의-특히 금융 분야의 지배적 지위가 만연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와도 아무런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서구적 자유민주주의체제와의 부정합적인 면도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현대 이슬람의 유연한 모습은 서구의 민주주의적 관용의 정신과 훌륭히 조화할 수 있다. 이 소설의 핍진함이 일부 사람들에게 생생한 현실의 공포를 야기하는 것은 이런 서술의 타당성에 기인한다. 사실, 가치와 방법으로서의 이슬람, 현대 체제에 완전히 적응한 이슬람이라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현실에 실재하는 공포이다. 이런 추세라면 또 다른 벤 아메스가 미래에 다른 이름으로 등장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3) 우리가 거대한 체계를 고찰할 때, 문화, 정치경제적 체제와 같은 거시적 영역을 넘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것은 개개인의 내적 차원에서의 의미이다. 소설 속에서 이슬람은 분명 성공했다. 그러나 그 현실적 성공의 가능성의 이면에는 타자의 불안감과 좌절의 이슬이 맺혀있다. 그렇기에 그 물기가 말라가고 속이 타는 불안한 내적 과정에 직면한 개개인에게는 실존적 물음이 또다시 제기될 것이다. 즉, 이슬람화의 문제는 정치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 개개인에게 실존적 과제를 부여하는 ‘삶의 문제’이자 ‘내면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고민하는 실존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나’, 프랑수아다.

   우엘벡적 주체인 프랑수아가 걸어가는 궤적은-이른바 ‘노선’을 굳이 따져보자면-지식인이지만 현실에 비판적인 좌파이기보다는 쁘띠 부르주아의 퇴폐적인 모습에 가깝고, 그는 정치에 환멸을 느끼며 조금씩 몰락하는 궤도에서 오래도록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맺는 성적 관계에는 진지한 사랑이나 결혼에 대한 고려가 선행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결코 성적인 방탕함을 추구하거나 퀴레네적 쾌락주의자인 것도 아니다. 그저 일상의 모든 것이 환멸의 냄새를 풍긴다.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한 다음날 ‘엄청난 무언가, 결코 되찾지 못할 무언가를 잃어 버렸다.’(p.15) 그렇기에 그 몰락의 과정은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프랑수아가 박사학위를 위해 연구한 주제인 위스망스라는 작가가 추구한 세계는 프랑수아의 내적 상태에 따라 다양한 측면에서 검토되고, 위스망스의 삶의 면면과 작품들은 프랑수아의 그것들과 단속적으로 비교된다. 위스망스가 프랑수아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라고 하긴 어렵다. 그러나 그는 프랑수아의 좋은 친구, 어쩌면 현실에서 사망했고 서로 만난 적도 없음에도 프랑수아에게 진정한, 그리고 아마도 거의 유일한 친구라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수아의 삶의 과정들마다 떠오르고 무언의 메시지를 던지는 친구 말이다. 마침내, 프랑수아는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마침내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고 젊은 여성과 결혼하게 되는데(무척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이마저도 위스망스가 가톨릭으로 개종을 한 모습과 대비된다. (프랑수아는 위스망스의 개종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이슬람화된 프랑스에서 ‘나’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기존의 현실에 환멸을 느낀 지식인 ‘나’의 고민, 그리고 ‘나’ 실존적 자각과 실천이라는 메시지가 이 지점에서 부상한다. 위스망스를 통해서 프랑수아는 자신의 실존적 의미에 대한 깊은 인식에 이를 수 있었다. 그 인식을 집약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위스망스의 플레이아드 총서 서문인 것이다. 서문에서 말하는 소박한 행복, 소시민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삶에서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들. 이것이 위스망스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자, 위스망스에 대해 프랑수아가 도달한 이해의 완성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복종」의 결론은 아니다. 오히려 플레이아드 총서의 서문은 또 다른 하나의 문제제기에 해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서 ‘나’가 살아가는 것의 문제를 작품이 최후로 제시하고, 열린 지평을 말미에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4) ‘복종’이란 것은 권위자 내지 절대자에 대한 충성과 동의어가 아니다. ‘이슬람은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온전히, 그 자체로서요.’(p.317) 세상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고 긍정한다면, 세상을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곧 복종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한다 해도, 신의 법이라는 것을 말하고 이해하며 실행하는데, 인간의 요소가 들어갈 수밖에 없으므로 이 ‘복종의 미학’은 불가피하게 왜곡되고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 ‘복종’의 관념이 새겨온 역사에는 위대함과 찬란함도 있지만 고통과 핏방울의 얼룩이 배어 있기도 하다.

 

   이슬람이라는 것을 이런 정신적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 그리고 현대에 등장할 수 있는 정치적 실재로서의 모습들, 이에 대해 우엘벡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계속 답해져야 할 질문이지 그 답변이 아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우리의 내면을 뒤흔들 만큼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그렇기에 우린 앞으로도 우엘벡과 함께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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