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중독자의 여행 - 형과 함께한 특별한 길
니콜라스 스파크스 지음, 이리나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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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중독자의 여행 리뷰

 

 

떠나기, 형과 함께

 

바쁜 일상 속에서 정신없이 살다가 갑자기 세계 곳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지 않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불가능이 현실이 된다면, 삶은 무척이나 큰 영향을 받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여행의 영향은 계속해서 삶 속을 타고 흐른다. 이 책은 계속해서 소설을 쓰며 다섯 아이들과 시끌벅적한 일상을 보내던 작가가 여행을 통해 삶을 다시 바라보는 이야기이다.

영화로도 제작된 소설 <노트북>의 저자인 니컬러스 스파크스는 일중독자라 할 인물이다. 우연한 기회에 여행을 떠날 결심을 하고, 이 여행에 그의 친형과 함께하리라 마음먹는다. 여행은 특별한 의미가 되어 그의 인생에 남았다.

책의 본문은 저자의 가족들의 이력으로 시작한다. 이는 여행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 지금까지 자신들과 가족이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는 의미를 가지며, 동시에 형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사실, 이 책의 원제를 보면, ‘Three weeks with my brother(내 형과 보낸 삼주간)’이다. 이로보아 작가는 여행보다도 을 책의 중심에 놓고 있는 것 같다. 번역본에도 부제는 형과 함께한 특별한 길이라고 되어 있다. 스파크스의 형 미카는 과연 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형은 어렸을 적부터 동생 니컬러스와는 좀 달랐다. 미카는 세 살 반 때 아버지에게 잔디를 기계로 깎게 해달라고 졸랐다가 거절당하자 동생들을 데리고 가출해서 집 밖으로 3킬로미터 정도 나가기까지 한다.(p.26~27)

스파크스는 형을 어려서부터 항상 잘 따랐다. 어린 시절 까마귀에 공격당하자 형이 구해주는데, 이를 두고 스파크스는 형 미카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나도 형처럼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p.40)고 말한다. 그는 형을 사랑하는 동시에 부러워했다. ‘형은 뭐든 다 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어떤 일을 하든 나보다 나았다’(p.47). 형은 항상 그를 감싸고 위로해주는 강한 존재였다.

이러한 태도는 이후에도 이어진 것 같다. 저자는 육상선수 출신으로 아킬레스건을 다쳐 선수생활을 그만 둔 좌절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 그러나 형 미카는 어른이 되어서도 동생이 부러워할 정도로 낙천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인 것으로 보인다. 형은 동생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일도 중요하고 가족도 중요하지만 신나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아니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즐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모두 헛일이라고.”(p.46)

 

저자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형이라고 생각한다.(p.59) 이것이 아마도 형과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 숨은, 그리고 결정적인 동기인 것 같다. 그리고 형은 동생에게 진단과 처방을 내려준다.

넌 네가 삶을 지배하지 않고 삶이 너를 짓누르게 했어. 그게 핵심이야”(p.77)

그게 너를 지배하게 하지는 말고……여행이 끝날 때쯤엔 되돌아보면서 오길 잘했다고 생각할 테니”(p.77~78)

이렇게 해서 일중독자는 여행을 떠난다. 그는 일중독자가 된 것에 대해 바쁜 상황을 즐기는 탓에 항상 바빴다……뭐든 해낼 자신이 있었다. 당연히 일은 점점 많아졌고, 나날이 번창했다’(p.59)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 자의든 타의에 의해서든 일에서 벗어나게 되는 시간이 온 것이다.

 

 

여행, 픽션과 논픽션

 

이 책에 묘사된 전 세계의 명소들을 방문하는 여행의 내용 자체는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형과 얽힌 과거의 사연들이 더 비중있게 여겨지며, 여행지에서도 형과 저자의 대화가 더 부각되고 있다. 그와 그의 형이 여행지에서 한 행동은 유쾌한 미국 젊은이들의 그것이다. 마야 유적지에서는 상대방의 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행동도 서슴지 않고 하며, 페루에서 슈퍼볼 경기를 생방송으로 보며 당연히 영어로 중계하지 않는 것을 불평한다. 쿠스코 박물관에서도 그다지 진지하지 않은 행동들이 유쾌한 필치로 묘사된다. 이런 활기 넘치는 청년들의 에피소드에 여행지의 역사에 대한 설명과 경치에 대한 감상 등이 부가된다.

이러한 에피소드들은 독자에게 재미있게 느껴질 수도 있고,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나는 저자가 이런 내용을 솔직히 일어난 그대로 썼다는 것을 일단 긍정적으로 보고 싶다. 논픽션에서 우선 중요한 점은 사실을 왜곡하거나 사실의 측면에서 의도적으로 독자를 기만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픽션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픽션과 픽션은 완전히 다른 장르이며, 그것을 평가하거나 해석하는데에도 완전히 다른 방식이 필요한 것이다. 논픽션, 특히 이 책과 같이 저자 자신과 형의 생애와 여행 그 자체를 다룬 책의 경우에는 저자의 면면이 그대로 드러나게 될 수밖에 없는데, -그 면면 자체가 훌륭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간에- 모두가 인간의 한 진실인 것이다. 그렇기에 논픽션의 윤리를 지키는 것은 인간의 진실과 맞닿아 있다.

 

 

형과 함께 살아오기, 다시 돌아오기

 

저자인 니컬러스 스파크스와 그의 형이 어렸을 적부터 살아온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고 유쾌한 색채로 쓰여있으며, 많은 비슷한 또래들의 향수를 자극할 것이라 생각된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밝은 분위기로만 기술되고 있어서 조금 불편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들의 부모도 별거한 시기가 있었고, 저자나 형이 무척 심하게 다쳐도 이상하리만큼 부모님이 무관심하게 대처한 사실 등은 충분히 슬퍼해도 될 것 같은데, 이 또한 일관되게 유쾌함을 더하는 에피소드로 만들어져 있다.

아마도 저자의 인생관이나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교육 등이 영향을 미쳐서 저자의 글쓰기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즐거움과 슬픔을 고루 성찰하는 글로 이 책을 썼다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3주간의 세계여행은 저자와 형과 가족 간의 사랑과 우애를 다시 확인하고 갱신하는 과정이었다. 그들은 부모님의 사망과 동생의 갑작스러운 사망을 애도하고 슬퍼하지만 서로가 있기에 살아갈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다.

형 또한 종교문제 등에 관해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동생인 저자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해결할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형제가 서로 도움이 되는 여행이었음이 분명하다.

 

결론

 

니컬러스 스파크스의 첫 논픽션 작품이라고 들었는데, 그의 소설을 좋아했던 독자들에게 큰 선물이 될거라고 생각한다. 새해에 이 책을 읽고 밝고 희망찬 분위기에서 한 해를 시작하는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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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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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리뷰

 - 아픔과 슬픔에 찬 삶을 따뜻하게 응시하기

 

 

   저녁

 

   해가 지고 있다. 석양이 하늘을 물들이고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하루를 정리하고 다음을 준비해야 할 시기인 저녁이다. 글에도 저녁이 있다면, 지금까지 지난 시간을 정리하고 조금씩 마무리할 준비를 하는 상태가 있다면, 손홍규의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이 바로 그러한 책이라 할 것이다.

   책의 제목이 가진 뜻은 첫머리에 실린 저자의 말에서 가늠해 볼 수 있다. 딸아이와 저녁에 산책을 나선 저자의 생각이다.

 

  아빠는......신념이 있고 이걸 가장 위태롭게 하는 건......불행하게도 나 자신이므로 내 신념을 내게서 지켜내고 구해내기 위해......신념을 포기해야 한다. 아니 더 적절하게는 이 신념을 보호하고 실현할 수 있는 이들에게 기꺼이 넘겨줘야 한다.(p.5)

 

  작가는 마음을 다친 채 딸과 저녁 산책에서 돌아와야 했다. 신념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신념을 포기해야 하는 역설. '양심의 운명'이라는 것은 이러한 역설 속에 놓여있다는 자각과 성찰이 이 책의 전면을 둘러싸고 있는 생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작가는 저녁에 놓였다. 지금까지 온 날들을 돌아보고 조금씩 정리하며 미래를 전망해 본다. 마음을 다친 채로 그렇게 한다. 하지만 붉게 물든 저녁 하늘이 저자의 벗이 되어 마음을 이해해 준다.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에 함께 나도 저자와, 저녁과 함께 마음 아파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작가로서의 성장

 

  작가는 어린 시절 집에서 키웠던 소가 출산을 하는 과정을 회상하는 글로 첫머리를 연다. 소가 출산하기까지의 신비로운 과정, 그리고 소를 떠나보내기까지의 일과 그 시절 사람들의 삶의 애환에 대한 관찰은 작가를 문학의 길로 인도하게 된 것 같다. 작가는 그 시절의 경험을 통해 자신있게 문학은 소다(p.22)고 말한다. 투박하면서도 비장하고, 희극적인 면을 결코 뺄 수 없는 삶 그 자체와도 같은 소, 그리고 그와 같은 문학의 길을 사랑하며 그는 고이 걸어온 것이다.

   소설가의 꿈을 품고 대학에 들어간 후, 작가는 갑작스럽게 고모의 부음을 받는다. 고모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 젊은 문학도는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장례과정을 바라보며 중첩시키고, 이국의 소설과 고모의 기억은 서로 대화를 나눈다.(p.26~37) 그가 본 것은 고모와 그 가족들을 통해 투영된 이 땅과 사람들의 역사였다. 젊은 작가 지망생은 이렇게 조금씩 진짜 작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 작가의 부모가 칠순이 된 노인이 되었고(p.63), 이제 스스로 부모가 된 저자는 삶이란 것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느낀다. 할머니와 넛할아버지의 고독과 우수(p.55), 과묵했던 작은 할아버지의 본심(p.58), 차갑게 보였던 어머니의 모습이 실은 완전한 오해라는 사실(p.67), 아버지의 절망(p.75)까지도 모두 나이가 차기 전에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다. 이제 부모가 되고 40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된 저자는 지금 소설가임에도 여전히 내 꿈은 소설가다’(p.79)고 말한다. 그것은 소설이 삶을 제대로 이해하는 과정이었기에, 삶을 이해함과 아울러 다시 소설가가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보인다.인간은 다시 신비로워져야 하’(p.91)는 것이다.

 

 

  작가가 되어

 

 

  이후 작가가 된 저자는 터키 여행을 떠난 체험을 기록하는데, 특히 소설가 야샤르 케말과 만나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문학은 바로 네가 선 그 자리에서 시작하는 거다’(p.118), ‘결코 자본주의에 굴복하지 말라’(p.127). 아흔 살 가까운 노인인 야샤르 케말의 열정적인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이후 우연히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저자는 더욱 문학적으로 성장한 후였다.

   과거 비참했던 한국의 밤들을 떠올리며 출세주의자들, 권력에 영합한 자들을 떠올리고 문학은 그렇게 하지 않는 거다(p.143)라고 말한다. 그는 소설가로서의 운명을 절감하고 삶에서 은퇴할 때 소설가로서도 은퇴하게 될 것임을 역설적으로 나는 은퇴하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다.’(p.147)라고 한다. 소설가로서 그 길은 살아남은 자로서 인간이 되기 위한(p.159변형) 길이다. 그러나 필멸하는 인간의 삶은 불멸의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p.166). 소설가로서 그의 체험과 사색이 인간 일반의 문제로까지 고양되어 있음은, 이 책이 살아남은 인간 모두를 위한 것, 인간이 되기 위한 모든 이들과 함께 사색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삶이 된 산문, 산문이 된 삶

 

 

  작가가 세상을 보는 눈에는 슬픔과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가득하다.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겪는 것이 슬픔과 고통이며, 아직도 우리에겐 기쁨과 즐거움보다 슬픈 일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리라. 부유한 사람이라고 해서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바라다본다. 그렇기에 그들과 함께 슬퍼하고 나지막하게 운다.

가난한 이가 가장 섦게 운다(p.219)는 말을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난한 삶을 겪어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난한 이의 심정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소설가로서 환멸이라는 것을 느끼기도 하지만 문학이란 문학에 환멸을 느낀 자가 가까스로 참고 견디며 하는 일(p.175)임을 깨닫는 것도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이 언제나 있을 것임을 깨닫기 때문이었다.

  삶의 편린이 진실하게 녹아든 글들은 슬프고 고독한 인간의 정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작가는 개인적인 삶과 내면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것은 한 인생이자, 문학의 여정이기도 했다. 인간의 진실한 모습이자 문학가로서 진지한 탐구의 과정이기도 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왜 작가가 저녁에 이르러 마음을 다쳐야만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이전보다 인생의 해가 상당히 기운 시기, 작가는 앞을 바라다보며 삶은 앞으로도 같은 슬픔과 아픔이 있을 것을, 그리고 그것을 한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념을 포기한다는 첫머리의 말은 사실 작가로서 더욱 치열하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더욱 치열하게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이다.

  말의 결함은……살아온 삶의 결함(p.46)일 수밖에 없다는 구절은 나로 하여금 나의 글의 결함과 삶의 결함들을 되돌아 보게 했다. 작가가 글을 쓰고 살며 얼마나 자신의 결함에 직면하고 괴로워했을지 실감이 갔다.

 

   그러나 작가는 계속 써야 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결국 삶이며, 작가에게는 삶 자체가 문학이 된다. 그것은 우수에 찬 어머니의 얼굴(p.48)이며, 고모의 광대뼈(p.23)이다. 이 책은 그 다정하고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 오롯이 모여 산문이 된 것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가는 존재가 아니라 사연을 쌓아가는 존재(p.89)라는 말 그대로 작가의 사연이 쌓여 삶이 되고 피멍든 문장이 되고, 슬픔이 자욱한 비내리는 광장이 된다.

 

 

 

  책을 읽다 저녁해가 질 시간이 다가올 때마다 기억하겠지. 우리의 삶도, 세상도 아주 조금씩 저물어 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글과 삶도 사연이 되어 나의 뼈속에 아로새겨짐을. 그것이 슬픔과 아픔이라 해도 아름답게 살아나가야 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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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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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차오름을 응원한다

 

  법은 아직 일반인에게는 멀기만 하고, 때로는 막연히 두렵게 느껴지는 대상이다. 그러나 우리의 개인적, 사회적 생활관계는 대부분 법에 의해 규율되고 있고 법이 우리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커져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법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일반인의 법적 상식도 증가하고 있다. 문유석 판사의 작품 <미스 함무라비>는 이런 시대에 우리 모두가 읽어봐야 할 책이다. 그것은 이 책이 단지 법적 상식을 쉽게 전달해 준다거나 법원의 실정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법과 사회에 대해 가져야 할 자세를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린 이런 자세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얻을 수도 있으리라.

 

  보통 우린 소박하게 ‘법’이라는 것은 곧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며, 실제 현실 재판에서 발생하는 불합리하고 부당하기까지 한 결과들에 대해 사법제도 전반의 부패를 들먹이며 비판을 늘어놓기 일쑤다. 이제 갓 판사가 된 박차오름은 이런 비판에서 벗어나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차있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부당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며, 판사가 정의의 화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한다. 물론 박차오름의 이런 신념에는 순수하고 이상주의적인 젊은이의 열정이 자리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아픔에 대한 깊은 연민이 이면에 놓여 있다.

   그러나 점점 사건들을 다루어 가며, 일도양단적으로 모든 것이 판단되는 것은 아님을 스스로의 경험과, 동료인 임 판사와 경험 많은 한 부장 등에게서 배우게 된다.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얻은 트라우마 때문에 판사가 되었는데, 어느새 ‘복수를 하고 싶어졌다(p.193)’고 고백하기도 하고, 제자와 성관계를 가진 대학교수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렸다가, 후에 그가 자살을 시도하자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고 사직서를 내기도 한다(p.326).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박차오름은 점차 훌륭한 판사로 성장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작가는 법과 법제도의 운영 모두 불완전한 인간의 손에 달린 일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근저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나는 이것이 등장인물의 개인사를 넘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법률이라는 것도 어떤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 만든 것이며, 재판도 불완전한 인간들이 관여하여 이루어진다. 법률이 항상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법은 그저 합리적인 규칙일 경우가 많고, 때로는 그저 규칙일 뿐이다. 재판의 과정에서도 판사의 마음에 수많은 인간적 요소가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게 되며(그렇기 때문에 244쪽 이하에 서술된 ‘전관예우’의 문제도 발생한다), 최대한 공명정대하게 내린 판결도 이후에 상소심에서 얼마든지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이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절망하지 않고 정의를 실현하려 끊임없이 노력하며, 후세들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하려 노력한다. 바로 여기에 우리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다. 사법제도를 계속하여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사명에는 우리 인간에 대한 신뢰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오히려 더 많은 신뢰가 필요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박차오름과 같이 끊임없이 고민하며 노력하는 인간의 고민과 노력을 우린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단계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그 가치를 발한다. 자유의지에 의하여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올바름은 진정 의미있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요되거나 기계적인 행동은 그것이 외관상 올바른 행동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내적으로는 죽은 것이다. 불완전하게만 보일 수 있는 인간의 성질, 자유의지와 오류가능성이 가치가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하나만 첨언하자. 그 자유가 올바른 방향으로 행사되기 위해서는 계몽과 교육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예를 들어 저자가 강조하듯 ‘권리 위에 잠자지 말라’라는 언명은 널리 알려져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겸양의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는 관념이 많이 있어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좋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고 그에 부수하는 의무를 준수하는 것은 사적인 차원을 넘어 전체 법질서의 유지라는 차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하며, 법적 의식이 부재한 곳에서 정의는 찾기 어려워진다. 그러니 ‘권리 위에 잠자지 말라[고 외치는 박차오름과 같은 이들이 더욱 소중한 것이다. 그녀를 응원한다. 그리고 법의식을 지니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든 독자들에게도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잠자지 말고 깨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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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틈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지넷 윈터슨 지음, 허진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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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결코 시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은 유한한 시간 속에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에 대한 문제가 곧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고 실존적 삶에 대하여 이야기한 이는 하이데거였다. 그는 그의 주저<존재와 시간>에서 ‘시간을 모든 개개 존재이해 일반의 가능한 지평으로 해석하는 것이(<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p.13)’ 그 책의 잠정적 목표라고 말했다. 지넷 윈터슨이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시간의 틈>에서도 마찬가지로 시간은 책의 사건들과 인물들을 이해하는 한 열쇠이다. 동시에 이 작품의 이해는 우리의 삶에 대한 진실을 통찰하는 것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시간의 틈>의 이야기 뒤에 가로놓인 지평선은 우리 현실과도 맞닿아 있으므로.

 

   사랑과 우정

 

   언제나 사랑과 우정 사이의 갈등이 문제다. 리오와 지노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다. 둘은 서로 성행위를 한 적도 있기에 단순한 친구 이상의 존재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다. 두 사람은 서로의 미묘한 감정들을 지닌 채로 각자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살고 있다. 그러나 리오와 지노는 여전히 가깝게 지내고(88페이지에 따르면 ‘리오의 집에는 지노의 방도 몇 개 있었다’고 한다), 지노는 리오의 부인 미미와도 무척 친한 사이이다. 리오는 지노와 미미, 두 사람의 사이를 의심하고, 자신의 집에 웹캠을 설치한다. 후에 웹캠에 찍힌 영상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무척 친근하게 대하는 장면이 있었지만 성행위를 하거나 다른 특별한 장면은 없었다. 하지만 심한 의심에 사로잡힌 리오는 그것이 두 사람이 바람을 피운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이제 리오의 내면에서 확고한 기정사실로 되어버린다 - 그는 임신중인 미미에게 자신있게 “난 당신에 대해 다 알아(p.129).", "지노랑 바람피운 지 얼마나 됐어?(p.128)"라고 말한다. 분노한 리오는 자동차로 지노의 생명을 위협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객관적 진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리오에겐 오직 자신의 내면이 일그러뜨린 현실만이 사실이었고, 일그러진 현실은 자라나서 더욱 큰 문제가 되어버렸다. 리오가 투사한 것에 계속 집착하자 일종의 편집증의 증상마저 보이게 된 것이다. 그 증상은 종국에는 자기자신을 대상으로 향한 것으로 전이되고, 리오는 더욱 괴로워진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사건은 리오의 심리상태를 볼 때, 이미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전에 리오는 정신분석 전문가에게 6개월 동안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그곳에서 바르츠 박사는 리오의 내면에 ‘혐오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대상’을 그가 대상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대상의 규정은 사랑하는 동시에 질투하는 미미라는 대상이나, 사랑과 우정, 증오의 감정이 섞인 지노라는 대상에 잘 부합하는 설명이다. “다른 인간을 정말로 알 수 있을까요?”라는 리오의 질문에 바르츠 박사는 ‘관찰자와 관찰대상을 분리할 수는 없지요(p.48).’라고 말하지만 리오는 ‘아니, 할 수 있어.(p.48)’라며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이 소설의 주요한 사건들은 바로 이 바르츠 박사의 말에 대립하는 리오의 자만심에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찰자 리오가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관찰대상을 독립된 것이라고 믿는 순간 내면이 외부와 구분되지 않게 된다. 과잉된 내면이 그대로 현실로 보여지고, 오직 시간만이 변함없이 그의 주위를 흘러간다.

 

    게임 - 시간의 틈

 

   리오는 미미가 낳은 딸(이름이 ‘퍼디타’로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같은 역할을 맡은 소녀와 이름이 같다)을 지노의 아이라고 생각해버리고 토니를 시켜 미국으로 떠나버린 지노에게로 보내려고 한다. 그러나 돈을 노리고 쫓아온 괴한에게 토니는 살해당하고, 퍼디타는 사건당시 현장에 있던 솁이 데려가서 키운다. 친아버지 리오는 영국에 계속 살고 있고, 어머니 미미는 프랑스 어딘가로 잠적하였는데, 퍼디타는 미국에서 새로운 부모가 된 솁과 살게 된 것이다. 세월이 흘러 퍼디타는 10대 후반의 소녀가 된다(205페이지에 ‘자동차를 타고 가도 거의 18년이나 걸리는 곳’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녀는 카센터에서 일하는 젤과 친구가 되는데, 노인이 된 솁의 일흔 살 생일파티에서 퍼디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서 점차 자신의 출생과 입양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다. 중년의 지노가 나타나 솁과 카드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퍼디타는 그가 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지노는 컴퓨터 게임 개발자다. 그가 만든 <시간의 틈>이란 고딕풍의 천사들이 나오는 게임(롤플레잉 게임으로 추측된다)에는 지노와 리오, 미미와 같은 실제 사람들이 자신만의 아바타를 통해 게임상에 플레이어로 등장한다. 오랜 세월동안 이들은 만나지 않았지만, 이 게임에 접속함으로써 일종의 만남과 상호작용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이 게임은 그들간의 '사이'(‘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와 시공간의 '틈'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의 기능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게임이 나타내는 세계관이나 시공간의 분위기가 특별히 세세한 상징적 의미를 띠고 있는지, 이 게임의 기원이 된 네르발의 꿈과 게임의 디테일한 요소가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는 단언하기 힘들다. 일단 틈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의 기능을 가짐으로써 이 소설에서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게임이라는 가상세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을지 회의하는 견해에 대해 이 소설에서 이미 그 대답을 마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바타, 클론, 대량생산, 복제, 3D 프린터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뭐가 진짠지 말할 수 있을 때가 되면 그때 가서 뭐가 가짠지 말하”(p.214, 이 구절은 시뮬라크르가 실재를 대체하는 현상에서 적극적 의미를 찾고 싶어한 장 보드리야르의 독백을 듣는 듯하다)라고 오톨리커스가 요구하는 것처럼. 현실과 가상이라는 문제는 사실 이 소설의 다른 중요한 맥락이기도 하다. 진짜 부모인 리오와 가상의 부모인 솁, 친부모이지만 아이를 버린 리오가 ‘진짜’ 부모일 수 있을지, 혹은 가상의 부모이지만 극진히 퍼디타를 사랑한 솁이 과연 ‘가짜’라고 할 수 있을지, 그리고 현실의 진실을 무시하고 가상의 외도에 집착해버린 리오의 내면 등의 요소가 소설에서 무척이나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화해와 회복

 

   이 소설에서 오해로 인한 파국으로부터 사랑과 우정의 회복에 이르는 여정이 중심적인 서사인데, 그 여정의 핵심이 퍼디타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잃어버린’ 퍼디타를 다시 찾는 것이다(라틴어로 perdita에는 ‘lost(잃어버린)’이라는 뜻이 있다).

 

   리오는 폴린의 권유대로 DNA검사를 받고 퍼디타가 과연 자신의 친딸인 것을 확인한다. 그러나 그는 99%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자신은 1%의 예외에 해당할 것이라며 고집을 꺾지 않는다. 그러고서 그가 퍼디타를 지노에게 보내려 토니에게 지시한 것이다. 이성적인 판단력을 상실한 이런 행동으로 퍼디타는 말할 것도 없고 리오 자신과 미미, 지노까지도 심한 상처를 입게 된다. 분명 오해를 풀고 관계를 회복할 여지는 있었다. 그러나 리오에게는 그런 시도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는데, 그것은 리오의 왜곡된 내면이 외부와 구별되지 않는 상태가 되었고, 외부에 대해 지금까지 견지한 견해가 무너져 버린다면 그의 내면도 심각한 상처를 입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의 불합리하고 잘못된 행동에 대한 인식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억누르고 차갑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왜곡된 상태가 바로 펴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아픔을 치유하는 연금술의 손으로 모든 이들을 어루만지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요구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퍼디타의 영아시절부터 10대 후반의 소녀가 되기까지 시간의 수평선에 가로놓인 ‘틈’이 필요했고, 그 틈 사이에 열려진 시간의 길이만큼 점차 마음의 상처와 왜곡은 치유되어 갔다. 사실, 퍼디타 자체가 일종의 ‘틈’이자, ‘매개체’이자 ‘화해와 회복’의 화신과도 같다. 그녀는 리오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흩어진 가족과 친구를 불러 모으고,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게 되는 계기이기 때문이다. 리오는 마침내 지노와 미미와 화해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결어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오해와 질투, 미움과 고집 부리기 등은 사실 우리 일상에 자주 있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그 정도가 심하든 약하든)  괴롭고 힘든 상황에 놓인다. 이런 의미에서 퍼디타와 그의 가족의 이야기는 우리 삶의 중요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는 거울과도 같다. 우리가 얼마나 약하고 악한지, 얼마나 쉽게 무너지고 서로를 괴롭히는지를 자각하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많이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이 소설에서 인생을 관통하는 깊은 진실을 엿볼 수 있음은 참으로 행운이다. 작은 것들이 얼마나 큰 힘으로 우리 삶을 옥죄는지를 알았다면 그 작은 것들을 잠시 놓아두고, 대신 작은 ‘틈’을 만드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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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인디언 속담에 이런 것이 있다. ‘말을 타고 정신없이 달리다가도 한 번씩 말에서 내려 뒤를 돌아보고 네 영혼이 뒤따라오는지 기다려라.’ 너무 급하게 허둥대다보면 정작 중요한 나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말이다. 급하게 돌아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것은 분명 빨리 달리는 말을 타고 가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바쁘게 살아가다 가장 중요한 것인 자신의 의미마저 잃어버린 채로 떠도는 것은 아닐까? 수짱은 말한다.

 

   나는 지금의 내가 변했으면 한다. 어떤 식으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p.8)

 

   이 독백은 ‘조금 더 좋은 사람’, 즉 지금보다 의미있는 존재가 되길 바라는 내면의 진지한 고민이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스스로의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독백은 계속된다.

 

   지금보다 좋은 내가 되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p.8)

 

   이 책은 저자가 독자와 함께 수짱과 그녀의 친구인 마이코를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평범한 30대 사회인인 수짱과 마이코는 우리 모두의 페르소나(persona)다. 그리고 그들이 답을 찾는 것도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일상 속에서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목소리는 우리 내면에서 울린다.

 

   지금보다 더 좋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결국 더 좋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또 묻는다. ‘좋은 삶의 방식이란 어떤 삶의 방식일까?’(p.40) 그것이 벼락부자가 되거나 인기스타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카다 매니저를 짝사랑하지만 고백하지 못하는 수짱이나 유부남과 관계를 맺고 있는 마이코의 삶은 분명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쉽게 토라지는 아르바이트 학생들을 달래며 그들이 그만두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수짱이나, 직장상사의 배려를 받아들이지만 개운하지 못함을 느끼는 마이코는 이 불만족함에 자신들 스스로의 내면에도 원인이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적인 태도와 자세를 바꿈으로써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일까?

 

   '반짝반짝 빛나는 듯한 사람으로 변하고 싶은 게 아니라...조금 좋은 사람으로 변하는 것만으로도 좋다.(p.64-65)'고 수짱은 생각하며, 이런 변화가 행복으로 연결될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다 현재 모습에서 좋은 점을 발견하며 ‘지금의 내가 좋다’(p.69)고 말한다. 불륜남과 헤어지기로 결심한 마이코는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얻는다. 이러한 우리 주인공들의 모습은 스스로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며,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확실히 큰 의미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살고자 하는 바램의 시작에 이미 그 해결의 열쇠가 놓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미인으로 사는 것이 더 나은 것이라고 현실의 논리에 순응하려 하는 수짱(p.91)과 마이코(p.21)를 탓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수짱은 현실에서 기인한 상처를 받아들이고(p.96), 마이코는 스스로를 반성한다.(p.22) 이러한 태도에 근본에 있는 것이 바로 스스로의 자존감인 것이다. 자존감이 있기에 열심히 살아가며 노력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긍지를 가질 수 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진짜 자신을 자신이 찾아 헤매면 어쩌자는 거냐고(p.105)

 

   이 독백은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인정하는 선언과도 같다. 그렇기에 마침내 '다른 누군가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건, 기분 좋아......‘나’라서 좋아'(p.126)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자각이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해결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빨리 달리는 말과 같은 일상 속에서 기수인 ‘나’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줄 것이라고는 할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의 가치를 찾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우린 단단히 말에 몸과 영혼을 싣고 목적지까지 힘차게 나아갈 수 있으리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에겐 수짱과 그녀의 친구 마이코가 있으니 그 길이 외롭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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