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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
나카자와 신이치 외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신화의 논리에 의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행위와, 초월적인 영역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샤머니즘은 완전한 공생관계에 있는 셈이죠. 그런데 어느 시기가 되자 갑자기 야생의 사고가 미치는 영향력이 축소되고 샤머니즘이 확대되기에 이릅니다. 이런 변화는 아무래도 국가라는 문제하고도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 샤머니즘과 매우 가까운 곳에 불교의 '명상'이 있지요. 무척 가까운 것 같지만 엄청나게 먼 관계죠. 호흡법을 가다듬으며 하는 불교의 명상법과 샤먼의 망아적 명상법 사이에는 차이가 있지요. 불교의 명상에서 '우주적 지성'이 통과하는 존재로서의 자아를 망아 상태에서도 버리지 않습니다.
불교는 제국이 탄생한 시대에 생겨나서, 제국을 탄생시킨 요소에 인간의 지혜를 붕괴해갈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지혜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 사상입니다.-> 불교는 일신교적이며 초국가적인 거대제국이 막강한 세력을 휘두르고 글로벌 스탠더드가 세계를 정복해가는 이 세계 안에서, 그런 것은 인간 정신의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고 그 속에서 지혜가 생명력을 유지하도록 하는 방법으로서 거듭나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불교가 심층심리학과 맥락이 닿아 있는 이유는 붓다 주위에 모인 최초의 사람들은 상당한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일일이 윤리를 말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 즉 윤리는 이미 당연한 것이고 그 다음이 바로 마음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마음이 어떤 것인지 명상을 통해 체득하려고 하였고 불교는 근대과학과 일신교 이 둘의 한계를 초월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임종장면은 박력이 있기 때문에 진리나 신의 정의라는 것은 이 세상의 존재에게는 절대적인 부정과 박해를 받게 마련이라는 사고가 있다. 그러니까 싸워야만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진리는 세계와 동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