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노래 - 그곳에 가면 떠오르는 서구소설과 영미시 35편
한은원 지음 / 한국문화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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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방법으로 여행한다. 방송에서 보면 개그맨들은 몸개그로 웃기면서 여행을 하고, 가수들은 버스킹을 하며 여행한다. 영문학자는 어떻게 여행할까? 오래전 역사학자 유흥준은 아는만큼 보인다라고 했다. 이 책의 저자는 어슬렁거리면서 여행을 한다. 여행지에 대한 사전정보(선입관?)을 차단하고 자신속에 창발하는 대지의 노래를 소중히 여긴다. 저자에 의해 선택된 35개의 장소는 35개의 소설과 35개의 시와 각각 3위 일체가 된다. 35개의 글 각각이 새로운 예술작품이다. 이 새로운 장르를 ‘3위일체문이라고 하자.

 

핵융합(fusion) 반응은 원자와 원자가 합쳐지면서 막대한 에너지를 내는 현상을 말한다. 태양이 바로 이 방식으로 타오르고 있다. 이 책에서 대지와 노래(시와 소설)은 융합되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발산한다. 대지는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노래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여행은 직접경험을 제공하고, 책과 시는 간접경험을 제공하고, 그 두 가지 경험이 합쳐지면서 새로운 영감과 지혜와 감동을 생산한다. 저자가 선택한 소설은 가족사나 인생사를 담은 장편소설이고, 시도 서사시 형태의 긴 시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긴 호흡은 말없이 사람들의 흥망성쇠를 바라보고 있는 대지가 주는 느낌과 어울린다.

 

저자가 사랑하는 것은 다양하다. 사람들, 자연, 욕망, 원초적인 것, 우연, 어쩔 수 없는 고통과 그 속에서의 기쁨, 사라져 가는 것. 이러한 것들이 특정한 공간에서 공명하면서 갑자기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이건 꼭 읽어봐야해하는 소설이나 시의 리스트가 갑자기 늘어날 것이다. 문학은 우리의 삶을 더욱 높게, 더욱 깊게, 더욱 넓게 한다.

 

35‘3위일체문은 우선 봄여름가을겨울에 분산배치된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에 또다시 봄을 놓음으로써 이것이 끝나지 않는 여행임을 알려준다. 음악에서 4박자는 완성을 뜻한다. 우린 4박자에 맞추어 행진할 수 있다. 그런데, 5박자에는 어떨까? 춤을 출 수밖에 없다. ‘대지의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 즐거움을 가져보라.

이 비극적인 인물들이 보여주는 것은 결코 성숙함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이다.
죽어가는 또는 이미 죽은 친구를 내버려둔채 거친 산을 내려와야하는 자의 속내는 어떤 것일까?
흙먼지 풀풀 날리는 시골길을 한참 따라가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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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배려, 스스로 돌보는 몸과 삶 치유인문 컬렉션 1
강신익 지음 / 미다스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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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COVID-19을 거쳤고, 유례없는 의료대란을 겪고 있다. 의사이자 철학자인 저자가 일생을 두고 연구해온 몸과 마음에 대한 성찰이 꼭 필요한 시기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너 자신을 알라,’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보이지 않는 손,’ ‘이기적 유전자,’ 등등 시대의 사고를 지배하는 여러 가지 담론이 있다. 저자는 우리가 가진 상식과 우리 시대가 믿고 있던 많은 담론들을 전복한다. 일단 전복에 이르기까지 저자의 사고의 흐름을 쫓아가는 것이 매우 즐거운 지적 여행이 된다.

 

그 많은 개념들을 전복한 결과 저자는 자기 배려를 말한다. ‘이기적인 나가 아니라 이웃을 품는 '큰 나'로서의 자기 배려이며, 질병과 고통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자기 배려이다. 우리는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고, 그것을 받아들여도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는 한 개인이 살아온 나날도 의미하지만 인류가 출현한 후 종족을 보존해온 수백만년을 의미하기도 한다.

 

천지인에 무늬 문자를 붙이면, 각각 천문, 지문, 인문이 된다. 이 책은 이 세 가지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얘기한다. 서양 철학의 중요한 특징중에 하나가 환원이었고 이것이 세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그것이 낳은 여러 가지 문제점도 많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몸은 정신을 담기위한 그릇이라고 격하하는 것이다. 따로국밥은 국과 밥이 따로 나오지만 같이 먹을 때 맛이 있는 것인데, 현대 문명은 국은 아침에, 밥은 점심에 먹는 격이라는 것이다. 몸과 마음은 합쳐서 으로 봐야 하고, 그래야만 보이는 것이 있다. 나의 질병, 나의 고통을 제대로 알게 되는 길이며, 부수적으로는 없는 병도 만드는 의료 상품화를 막는 길이다. 또한, 건강, 행복, 웰빙이 이제 사다쓰는 소비재가 되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원시시대에 재생산을 위한 생리적 보상이었던 피로가 지금은 생산활동을 저해하는 악으로 인식하는 것을 반성할 수 있다. 모두가 선망하는 직업을 가진 의사의 행복도는 평균 행복도에 훨씬 미치지 않는 이유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매우 야심찬 책이다. ‘뭣이 중한디?’를 묻고 있다. 그는 의사이며, 철학자이기도 하고, 사회운동가가 되려고 하는 것 같다. 전세계 아미(ARMY)들을 치유하였던 BTS<Love myself>가 바로 자기 배려아닌가? 아미들이 자신들의 거울 뉴런을 가동하여 BTS에 공감하였듯이 당신들의 거울 뉴런들이 이 책에 강하게 반응하길 바란다.그래서, 이 세상이 이웃을 자기처럼 자기 배려를 하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동의보감에 나온 이 말처럼. 通卽無痛 不通卽痛 (통하면 안 아프다). 몸과 마음, 나와 이웃이 통하게하자.

 

이 책이 치유인문컬렉션1이라고 하니 다음 편이 기대된다.

通卽無痛 不通卽痛 (통하면 안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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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신학
김은혜 외 8인 지음 / 동연출판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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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들은 제 2 종교개혁의 마르틴 루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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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신학
김은혜 외 8인 지음 / 동연출판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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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SN이 첫 번째 책은 MZ 세대와 사이좋게 지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 책도 한국 교회에 매우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이번 책은 그것보다 훨씬 과감해졌다. 이 책을 읽고, 저자들에게 느끼는 저의 감정은 3가지이다.

 

첫째, 저자들은 고맙다. 개인적으로 엔지니어 크리스천으로서 나의 일의 영성이 무엇일지 궁금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상대가 없어서 외로웠는데 HTSN을 만나서 반가웠다. 기술신학은 일단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책이다

 

둘째, 저자들은 따뜻하다. 기독교에서 가장 첫째되는 계명은 하나님 사랑이고, 이웃 사랑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신앙은 개인의 구원이 전부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만물신학을 얘기한다.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창조세계에 존재하는 천하 만물의 구원을 말한다. 이 책은 모든 others, 모든 타자를 위한 책이며, 같이 진화하고 있는 모든 things, 모든 객체를 위한 활동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들은 무섭다. 마르틴 루터가 인쇄술을 이용하여 5백년전에 종교개혁에 성공했다. 저자들은 제 2의 종교개혁에서의 마르틴 루터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맞이하고 있는 메타버스, 인공지능, 생명공학 등은 인쇄술보다 더 파괴력이 큰 하나님의 계시이다. 오백년전 제 1의 종교개혁으로 교황의 권력은 개별 교회로 이동되었다. 2의 종교개혁으로 개별 교회의 권력은 어디로 이동할지 아무도 모른다.

 

왜 이들이 무서운지는 MZ세대들이 좋아하는 MBTI로 풀어보겠다.

 

우선 에너지 방향은 내향적인 I형보다는 외향적인 E형이다. 이 책은 열린 교회, 열린 신학을 말한다. 자동차의 등장으로 인간의 발이 확장되었고, 로봇으로 인간의 팔이 확장되었다면, GPT는 인간의 뇌를 확장하고 있다. 메타버스에서는 가상 행성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자아로 확장된다. 확장된 인간이 만나는 새로운 환경에 이 책은 열려 있다.

 

인식에 있어서는 감각으로 인식하는 S형보다는 직관으로 인식하는 N형이다. 이 책에는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는 창의적인 개념들이 제시된다. 전통적인 고체 교회의 한계를 극복하는 유연한 액체 교회를 제안하고 있고, 새로운 식민주의를 극복하는 보편적 행복을 제안하고 있고, 따뜻한 인공지능이 되도록 기독교적인 아가페와 한국적 정을 학습한 정 많은 인공지능을 제안하고 있다.

판단 기능적으로는 감정적인 F형이 아니라, 사고하는 T형이다. 하이데거, 헤겔, 러셀, 푸코 등 근현대 철학자들이 쌓아온 지성의 토대위에서 신학자로서 인류세, 트랜스휴먼, 포스트휴먼, 초객체 등 21세기에 새로 마주한 개념들을 풀어내고 있다.

 

계획성에 대해서는 철저히 준비해서 공식적으로 결정하는 J형보다는 변화에 적응하는 P형이라고 할 수 있다. 기술신학의 대상은 정말로 급하게 변하고 있는 무빙 타겟인 기술이므로 P형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다. ‘위험한 곳에 구원이 있다는 하이데거의 말대로 위험한 곳에 뛰어들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이 책의 MBTIENTP라고 본다. ENTP의 특징은 박학다식하고 독창적이며,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한가지 제언을 하고 싶다.

이 책에서는 도구를 사용하여 일하는 인간, , 호모 파베르와 기술에 대해서 말한다. 20세기에는 일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의 효율성을 지향했다면, 21세기에는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의 즐거움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의 가장 첫 질문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제 1 목적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기술을 사용해서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이 책에 실린 모든 글에서 기술은 절대로 가치중립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협력하여 하나님이 주신 영감으로 창조하는 기술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타락한 기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신학은 기술과 함께 서로 영향을 주면서 하나님의 나라로 가까워가는 역동적인 구도가 되어야 한다.

 

성경이후에도 하나님이 창조를 계속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이 이 창조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하나님은 즐거워 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보며보기에 좋았더라할 수 있는 그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는 길잡이가 바로 신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한번 저자들의 과감한 모험에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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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의 종교적 회귀 - - 벤야민, 데리다, 레비나스, 아감벤, 지젝, 들뢰즈, 가타리
신명아 지음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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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데리다의 해체론에서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

그리스도 탄생이후 거의 2천년간 모든 나라에서 일인당 국민 소득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가 19세기 산업혁명때부터 하키스틱같이 급격히 상승했다. 하키스틱을 눕히고 보면 끝에 공을 치는 부분에서 급격히 올라간다. (골프채도 비슷하게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부터 이 추이에 동참하여 반세기정도에 100배정도로 소득수준이 높아졌다. 그러한 급격한 변화는 개인과 사회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100년전 대부분 ‘쌍놈’으로 불리웠던 ‘개인’의 절대적인 자존감은 ‘하키스틱’만큼 높아졌다. 여전히 상대적인 자존감의 문제는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가 엄청나게 높아진 자존감의 총량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우선 사회는 포스트모던 시대가 되어 분출된 자존감의 숨통을 틔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러한 급격한 변화를 현대철학이 수용할 수 있을까? 아니면, 오히려 그 변화의 방향을 선도할 수 있는가? 그런데, 하키스틱을 선물을 준 과학기술과 대척점에 서있다고 얘기되온 종교성으로 회기라니?

나는 현대철학은 근접할 수 없는 먼 나라 얘기로 생각해왔다. 신명아 교수의 책도 역시 글은 한글이었지만 완전 외계인의 언어였다. 내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구체적으로 퇴직 후 교육선교에 참여할 것인가인데, 여기에 대입하여 책을 읽어 내려갔더니 의외로 통하는 면이 있었다. 아니, ‘그래 보였다’가 맞을 것이다. 철학이란 어느 쪽을 만져도 무엇인 것 같은 코끼리 아니겠는가? 나는 꼬리를 잡고 ‘이게 로프같아요’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Stairway to heaven이 아니라, rope to the heaven.

해체의 대상은 변한다. 그것은 인간의 원죄로 읽힌다. 끝없이 ‘쓴 뿌리를 내는 대지’이다. 우리가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무엇은 그 순간부터 우리를 옥죄는 자가면역 질환이 된다. “자가면역 질환은 세균, 바이러스, 이물질 등 외부 침입자로부터 내 몸을 지켜주어야 할 면역세포가 자신의 몸을 공격하는 병입니다. 자가면역은 인체의 모든 장기와 조직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의 정치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은 이 ‘자가면역 질환’이라는 단어로 명쾌히 설명된다.

자기면역 질환을 진단하는 방법은 미디어에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소련이 붕괴하는데 반정부운동자간 팩스 통신이 힘을 발휘했고, 튀지니에서부터 불었던 민주화 운동인 재스민 혁명이 페이스북 같은 SNS로 가능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독교는 이 면에서 비밀주의를 고수하는 유대교나 코란의 번역을 거부하는 이슬람에 비해 우월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경을 독일어로 변역해서 모든 이들에게 배포함으로써 가능하였다. 그런데, 최근 deep fake와 같이 미디어를 교란하는 사탄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것보다도 미디어 뒤편에 숨어있는 대기업 또는 패권주의 국가들 같은 빅 브라더가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자가면역 질환은 해체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나를 위협하는 자가면역인지 나를 보호하는 정상적인 면역 시스템인지 구분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은 키에르케고르의 책 제목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떠올리게 한다. 데리다는 아브라함-이삭의 사건을 들어 이를 설명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모리아산을 오르며 끝까지 고민하지 않았을까? 이게 진정한 하나님의 뜻인가, 사탄의 역사인가, 아니면 욥이 당했던 하나님과 사탄의 합작 농락일까? 그리스도인은, 혹은, 실존적 단독자는, 극도의 ‘불안’속에서 혼자서 결단해야 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이 결단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한다. 대세에 따라 ‘이방인’이 되었고, 그저 햇빛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변명한다. 그런데, 이 불안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신의 자유의지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좁은 길을 택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필요하다. 그 보상을 줄 수 있는 근거로 데리다는 메시아성(性)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메시아는 여기에 도달한 이들에게 같은 동역자로 인정해준다. “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났다.”

하키스틱만큼 높아진 개인의 자존감으로 개인개인들은 수많은 결정을 해야 한다는 운명에 놓여졌다. 그런데, 이때 대부분은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닌 ‘이방인(gentile)’이 된다. ‘자유에로부터 도피’에서 파시스트의 도래가 좋은 예이다. 결정은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트랜드라는 말에 귀기울이고, 실증적인 데이터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 결과는 넓은 길을 택하는 것이 된다. 예를 들면, 메시아주의이다. 메시아주의는 타성에 젖은 신앙이다. 인류가 이룬 성취에 대한 교만에 빠지고, 욕망을 우상화하고, ‘내가 먹을 것, 마실 것’ 걱정을 달고 살면서 ‘이웃사랑’은 잊어버린 신앙이다. 모두 해체할 대상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좁은 길을 택한 이들이 끝에 도달하여 성취감을 느낄 때, 그들도 또한 교만에 빠져 해체할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기독교에서 수많은 죄중에서 가장 나쁜 죄를 교만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아, 우린 언제나 이방인이 될 수 있다. 언제든 지고 있는 십자가를 땅에 내팽게칠 수 있다.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해체불가능한, 아니, 해체불필요한 ‘메시아성’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을 주시옵소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선지자가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말을 선포하듯, 데리다의 철학도 아프게 다가온다. 그 자신도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까? 자살로 생을 마감한 철학자의 철학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방향을 정해도 좋은 것일까? 다시 이 책이 ‘외계인의 언어’로 멀어지려 하는구나. 시지이프의 바위는 다시 저 깊은 골짜기로 굴러 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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