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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양장) ㅣ 소설Y
천선란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평점 :
지구에서 피어나 자란 세대가 있다.
인간 모두가 지구에서 삶이 피어나 자라는 것이 당연한데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이 소설에서는
조금 비슷하면서도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 소설의 주인공 나인은 지구에서 피어나 자란 외계인이기에..
나인은 자신이 인간이 아닐 것이라는 의심을 1퍼센트도 하지 않고 자랐다.
당연하게도 학교를 다녔고, 친구가 있었고, 그들과 같이 식사를 했으며 태권도 학원도 다닐 정도로
건강한 아이였다. 하지만 어느날부터 이상한 꿈을 꾸고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일들을 겪게된다.
식물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의아함이 점차 기정 사실이 되어가고 자신만 이 지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자신의 외계인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자신만이 문제가 아니다. 친구들에게 어찌 말을 할 수 있을까 사실은 내가 외계인이었노라고..
받아들여질 것인지, 아니면 허무맹랑 괴짜 거짓말을 늘어놓는 이상해져버린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닐까
점차 그들에게서 등돌려지면 어찌해야 할까. 생각해보면 이 많은 생각들이 지구에서 자란 인간다운
나인이기에 할수 있는 고민들이다.
2년전 실종된 학교 선배의 아버지는 나인이 자전거를 두는 곳 기둥에 실종 전단지를 매번 붙인다.
떨어진 전단지 한장이 인연이 되어 나인은 실종된 선배 박원우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박원우 실종이
가진 진실을 알고 싶어한다. 그런 나인 곁에 찾아온 외계인 승택이 있다.
나인과는 다르게 연약하게 태어나 평생 인간과 엮여본적 없이 온실의 화초처럼 키워진 승택은 나인이
신기하다. 왜 나인과 자신은 같은 대에 태어나 유일하게 살아있는 두명의 누브족인데 이토록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승택은 나인이 알고자 하는 진실을 알수 있게 누브족의 능력을 알려준다.
사실 소재를 처음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드루이드였다.
식물을 마법처럼 잘 키우는 금손가드너를 드루이드라고 요즘 많이 부른다고 한다.
우리 집에도 드루이드가 한분 계신다. 다 죽어가는 식물을 얻어와서(사실 내 입장에서 본다면
버린거라고 생각한다) 소생하고 번식 시킨 후 한 뿌리를 다시 선물하는 일이 종종 있으신 우리 어머니다.
불행스럽게도 드루이드인 어머니의 능력을 물려받지는 못한게 확실한 것 같다.
기나긴 뿌리 끝에 정말 누브족 같은 외계생명체의 계보가 있다면 어쩌면 엄마는 그들의 후손 중 한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책을 읽으며 상상해보곤 했다.
주인공 나인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럴듯하게 느껴져 웃음이 난다.
가벼운 청소년문학 성장문학같은면서도 추리스릴러같기도 하고 sf판타지 같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내용면에서 사회를 꼬집는 부분도 여기저기 보인다. 어른이기에 어른의 추악함을 더
잘 알기에 그런 부분이 보일때마다 콕콕콕 마른 나뭇가지의 날카로운 부분으로 찔리는 기분이다.
또 다르게 표현하자면 나의 유전자에 학살의 기억이 상존하고 있다는 것이구나.
승택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네 조상들이 그런 짓을 했다는게 끔찍하니?"
승택은 옹송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반응이 더 선량하네. 다행이다. 끔찍한 걸 끔찍하다고 느껴서."
본 주제보다 나는 승택과 지모의 대화가 와 닿는다.
책의 주제와 상관없이 아마 최근 일어난 계엄령 사태와 우리가 익히 듣고 매체를 통해 기억하는 민주화
운동 계엄령의 역사가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 우리 윗세대에서 끔찍한 일이 있었음을 끔찍한 것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묘하게 지금 글을 쓰는 순간 시민들에게 고개를 연신 숙이며 사과하던 계엄군의 모습이 떠오른다.
다행이다.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어야 하니까. 누구든 그다음 세대에게 진실을 알려줘야 하니까.
비록 지금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 못하는 진실이라고 해도 누군가는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돼. 모두가 야만성에 잠식되지 않게, 그것이 윤리적으로 잘못된 짓이라는 걸
알려야지. 한마디로 네가 이 비밀 서고의 열한번째 주인이라는 거야.
나인은 영 믿음직스럽지 못해서."
그저 소설 한권에 등장한 누브족이지만 어째서인지 그들의 기나긴 지구 정착생활을 애틋하게 상상하게 되기도
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의 이종족이라서 우리와 이다지도 닮은걸까.
작가가 창작한 누브족의 역사가 내 우주 속 지구에 뿌리깊게 정착했다.
비록 우리 나잇대는 시들어가는 누브족일지라도 다음세대를 위해 기억하고 알려주고 그리고..
지켜줘야지. 지켜갈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