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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편지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7월
평점 :
작년, 여름이 오기 직전의 어느 날 지인의 가족들과 함께 부산여행을 간 적이 있다.
초등학생 자녀가 있는 지인은 아이들과 함께 갈만한 곳을 찾던 중 '국립 일제 강제동원 역사관'
이라는 곳을 찾아냈고 여행 일정에 넣었다. 나는 그런 역사관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대구에 희움 역사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혼자 다녀온 적은 있었지만
그보다 큰 규모가 가까운 부산에 있는 줄은 생각도 못했다.
체험관의 존재를 알게 해준 지인에게 고마웠고 지인의 아이들과 손을 잡고
함께 역사관을 돌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었다.
그리고 나서 이 책을 읽게 되어서인지 책을 읽는 내내 그 체험관 기억이 떠나질 않았다.
체험관에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갇혀서 지냈던 작은 감옥과도 같은 방을 똑같은 평수로
만들어 들어가볼수 있게 했는데 그 작은 공간에 놓여져있던 작은 나무 침대와 작은 세숫대야
등이 책을 읽는 내내 그려져 괴로웠다. 단순히 책을 읽는 것과 그와 비슷하게 만들어진 장소를
알고서 읽는 것은 다른 느낌인 것 같다. 어둡고 서늘했을 그 공간에 자신의 의지는 조금도
반영되지 않은 채 감금되어 있었을 여리디 여린 여자 아이들...
이 책은 각자의 사연으로 위안소에 들어온 소녀들과 글의 화자인 후유코(금자)가 위안소
생활을 하는 일상을 보여준다. 비단짜는 공장에 취직 시켜준다는 말을 듣고 길을 나선 금자는
자신처럼 각각의 사연에 속아 멀리 이곳까지 온 언니 동생들과 하루하루를 지낸다.
짐승의 피인줄 알고 광목천으로 닦아냈던 그 붉은 물들이 사실은 사람의 피였음을...
그 피를 스스로 닦아낸 곳에 갇혀 일본군을 위로하는 일을 하게 될줄은 그녀들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모두가 공장에서 일을 해 돈을 집에 보낼 꿈에만 부풀어 있었기에.
어린 아이들이 원치않는 일을 당하고 그 상황에 생긴 아이를 낳거나 혹은 수술을 당하며
제대로 된 음식도 먹지 못한채 때로는 서로를 욕하고 때로는 집이 그리워 서로를 부둥켜 안고 울며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우리는 글로도 생각으로도 그리고 마음으로도 그 모든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느낄 길이 없다. 다만 천만분의 일 뿐이라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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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열세살 짜리 여자애가 있을만한 데가 아니다. 열다섯 살짜리 여자애가 있을만한 데도
아니라는 걸 오지상과 군인들만 모른다. 열다섯 살인 나도 아는 걸.]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여자아이들이 존재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애초에 누군가가 생활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곳은 틀림없이 존재했던 곳이다.
그리고 여전히 누군가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을 곳이고 기억해야 할 곳이다.
추억할 수 없는데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얼마나 비통하고도 무거운 일인가.
그런 기록들을 일본은 소녀들의 아픔으로 눈물로 한자 한자 새겨놓았다.
[몸은 강물에 씻을 수 있지만, 영혼은 씻을 수 없다. 영혼에는 비누칠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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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는 천황폐하가 일본 군인들에게 내린 하사품이다."
천황은 어째서 일본 여자애들이 아니라 조선 여자애들을 하사품으로 내려주었을까.
낙원위안소에 일본 여자애는 없다. 세계위안소에는 일본 여자애는 없었다.
전쟁은 일본 군인들이 하는데. ]
하사품.. 사람에게 물건 품을 붙여 본인들이 멋대로 누군가에게 주었다...
자신들 나라의 여자아이들에게는 하지 못할 행위를 우리 나라의 여자 아이들에게는 행했다.
그리고는 마치, 자기 나라의 여자 아이들이란 듯이 일본 이름을 주었다.
금자는 후유코가 되었다. 어느날 다른 군인에게는 또 다른 일본이름으로 불렸다.
기억도 못할 일본 이름이 스무개가 넘게 생겼다.
지금 나의 이름 세글자가 너무나도 소중한 순간이다.
어머니 나는 아기를 가졌다고, 어머니 나는 아기가 죽기를 바란다고, 아기를 가진 채로도 유린당해
병신을 낳을까봐 무섭다고, 죽어 반이 썩어나간 아기를 낳을까봐 무섭다고....
금자는 배우지 못한 글자를 강물에 쓰며 마지막의 마지막 날에도 어머니께 편지를 썼을까.
그립고 그립던 어머니의 얼굴을 아무 먼 훗날에라도 보았을까.
[ "너는 무슨 죄를 지어서 조센삐가 되었지?" ]
끝순이, 해금, 은실, 금실, 악순, 점순, 연순, 애순, 을숙, 연순, 분선, 군자, 금자
소설 속 인물에 잠들어 있을 그 많은 조선 여자아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
당신들과 같은 조선 이름을 가진 우리가, 무결한 그대들을 기억하며 여기 이 곳에 있다고.
그대들이 죄가 없음을 우리가, 역사가, 미래가 안다고. 그러니 그곳에서는 부디
당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가슴에 두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