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정치학 - 기독교 세계 이후 교회의 형성과 실천
스탠리 하우워어스 지음, 백지윤 옮김 / IVP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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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없이 치료는 불가능하다.

현상을 알아야 소망을 얘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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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정치학 - 기독교 세계 이후 교회의 형성과 실천
스탠리 하우워어스 지음, 백지윤 옮김 / IVP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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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없이 치료는 불가능하다.

현상을 알아야 소망을 얘기할 수 있다.

 

 

'증언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명제와

'우리는 무엇을 증언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이며,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남았다.

 

 

정치학(, politics)이란 사회과학(, social science)의 한 분야로서 정치 또는 정치현상을 그 연구의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정치학이란 개념을 정의하기에 앞서 정치 또는 정치현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치 또는 정치현상은 인간사회에서 발생된다.

 

 

정치학이란, 정의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현상을 연구의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상을 살펴보아야 한다. 교회의 정치학은 이런 정의에서 이해하면 좋을 듯 싶다. 우리는 정치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 뭔가 권모술수를 쓰고 당파를 짓는 것을 연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정의에서 언급하듯이, 교회의 정치학을 통해 현재 교회의 현상을 살펴 볼 수 있다. 그리고 살펴보아야 비로소 다음을 논할 수 있다. 그렇기에 교회의 건강함을 소망하는 사람이라는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다소 있을 수 있겠지만, 모든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관점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질문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현상을 파악함으로써 다음을 논할 수 있다. 정확한 진단 없이는 치료는 불가능하다.

 

 

우선 신학에 관한 전공지식이 없는 사람 입장에서 책은 어렵게 느껴진다. 단어들의 낯섦에서 오는 어려움이다. 개인적으로 모를 법한 단어들에 대한 용어정리가 있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 책이 신학을 전공한 사람들만을 위해 쓰인 책이라기 보다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신앙서적이라는 생각에서 그러하다. 생각이 틀렸을지라도, 일반 독자들에게 '어렵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생각하게 만드는 이러한 책은 신학에 무지한 사람들도 읽을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기독교의 변화는 신학자들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움직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사실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또한 《포스트크리스텐뎀》이라는 책과 함께 읽으면 좋다. 목차들만 살펴봐도 이 책을 읽는데 큰 도움이 되는 내용들임을 살펴 볼 수 있다. 또한 한국 기독교에 대한 책이니 만큼 더욱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읽으면서 궁금했던 용어들과 좀 더 이해가 필요한 부분에서 내용들이 있어서 《교회의 정치학》을 함께 읽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추천사를 읽고 마음에 들었던 부분을 공유하자면 아래와 같다.

당신이 촛불을 밝히든 태극기를 흔들든 그 사이에 끼여 있든, 하우어워스는 당신을 불태우고 당신의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하우어워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현실과 결탁하기보다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비전을 불어넣는다. 복음의 증인이 되기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오늘날 기독교의 복음은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극히 내면화되었다. 사회적 책임과 역사적 사명은 외면한 채, 각자 입맛에 따라 정치나 여론에 편승하는 모습이다. 하우어워스는 복음이 곧 인간과 인류 역사에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이것은 신자에게 진정한 자유이자 명예이다. 바로 지금 한국 교회에 필요한 성찰은 책임 있는 신자가 되는 것이다.

<추천사 中>

 

 

기독교는 언어의 힘을 잃어버렸다. 너무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언어를 남발한다. 그리고 그것은 경건하게 보이는 척도라고 착각한다. 성경적 언어의 나열은 거북하다. 언어에 생명이 없이 때문이다. 수식어로 전락한 어휘들은 익숙한 단어에 불과하다. 그래서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을 야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신뢰를 주지 못한다.

소용되는 데는 덕을 세우기 위해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되어야 하며, 진정한 관계를 위해 서술되어야 한다. 잊어버린 맥락을 다시금 회복해야 한다. 잃어버린 힘의 회복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교회는 신실한가? 그렇다면 '교회'와 '세상'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을 스스로 없애야 한다. 그러해야 한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분은 교회를 오히려 고립시킨다. 왜냐하면 '세상'이라 불리는 사회 안에 교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교회 안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교회에서만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가르침은 교회를 위한 내용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말씀들로 충만하다. 그리고 교회는 그러한 역할을 감당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부름받은 공동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정체성이 수식어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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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 플라톤의 대화편 현대지성 클래식 28
플라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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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지 않은 변론, 듣지 않은 변론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듣는 변론

 

 

 

 

누가 죄인인가 누가 죄인인가

 

책을 읽고 딱 떠오른 가사.

 

우선 책에 읽을 거리가 많아서 좋았다. 본문 밑에 주석이 각각 실려 있어서 읽는데 편했다. 주석이 뒤에 따로 모아져 있는 책들이 있는데, 정말 불편하다. 책장을 넘겼다 확인했다 하는 반복이 귀찮기 때문이다. 또한 읽는 흐름 역시 끊긴다. 그런데 이 책은 본문 밑에 바로 주석이 실려 있어서 읽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물론 이해는 다 못하지만, 찾는 수고를 하지 않을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또한 각 장에 들어갈 때, 등장인물에 대한 소개가 있어서 관계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A) 소크라테스의 1차, 2차 변론을 담은 소크라테스의 변명, (B) 크리톤, (C) 파이돈, (D) 향연, (E) 해제, (F) 연표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구성은 본문인 소크라테스의 변명부터 크리톤, 파이돈, 향연으로 구성되어 있고, 뒤에 해제와 연표가 있다. 예전에 다른 책으로 한 번 읽었던 기억이 있어 처음부터 쭉 읽었다. 그러나 추천하기는 해제를 읽고 연표를 본 다음에 본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책을 읽고 소크라테스는 평소에도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자신만의 원칙이 있었음을 『크리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크리톤이라는 친구가 소크라테스를 지지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그를 탈옥시킬 수 있음을 말하며 탈옥을 권한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탈옥을 선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삶의 원칙이 있었고, 평소에 자신만의 생각들이 죽음 앞에서도 담담하게 선택할 수 있는 근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파이돈』에서는 죽음 앞에서 여러 사람들(p.92中)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데, 소크라테스와 함께 있던 그들에게 묘한 감정이 아로새겨졌을 것이다. 『향연』은 이해가 잘 되지 않으나, '에로스(사랑)'에 대하여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구나를 발견하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단순히 좋은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의 대화는 심오하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현 시대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할까?' 였다. 에로스(사랑)에 대한 깊고 다양한 대화가 가능한 것을 보면서, 현 시대의 사랑은 그에 비해 '진짜 사랑에 대해 알까?'라는 질문이 생겼다.

아이러니 하게도, 판결은 소크라테스의 표현을 현실화 시켰다. '죽으나 죽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의 말을 완성시킨 것은 재판을 통한 사형 선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들은 스크라테스를 육체적으로 죽였지만, 그의 정신은 죽이지 못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이 사실이 되게 만든 것이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자연사 했다면 이런 대화가 남겨졌을까,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고찰이 전해질 수 있었을까 싶다. 

 

사실, 1차 변론인 아래 내용만 살펴봐도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압도적인 우승이다. 고발한 사람에게는 모순이 많으며 고발을 위한 꼬투리 잡기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미 결론을 알듯이 소크라테스는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고발 당한 소크라테스. 그들이 말하는 타락은 도시의 신들을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청년들을 진정으로 타락하게 만든 것은 재판 결과였다. 환멸을 느낀 것이다. 그로 인해, 많은 청년들이 아테네를 떠났다. 그 중 대표적이 인물이 바로, 이 책의 저자 '플라톤'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소크라테스의 육신은 죽였으나, 그의 정신은 죽이지 못했다.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명분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사형 선고를 했지만, 결국 그 사형 선고는 아테네의 철학에 사형 선고를 내린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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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 플라톤의 대화편 현대지성 클래식 28
플라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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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지 않은 변론, 듣지 않은 변론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듣는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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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선 민주주의 - 억만장자 코크는 어떻게 미국을 움직여왔는가
낸시 매클린 지음, 김승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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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민주주의가 될 것인가

소수를 위한 민주주의가 될 것인가

 

 

'민주주의는 지속될 수 있을까?', '민주주의의 약점은 무엇일까?', '민주주의는 건강한가?' 이런 고민들은 불필요하게 여겨진다. 또한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것처럼 치부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민주주의를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간다.

'민주주의'하면 떠오르는 건, 투표이다. 선거 시즌이 되면 민주주의에 대해 잠깐 생각할 뿐, 그외에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체제가 오래 되었고, 안정적이라 느끼지면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민주주의 약점은 없는지, 또한 민주주의가 완벽한 체제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민주주의는 과연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는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 또는 그러한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을 의미한다. 군사정권이나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가깝지 않은 북한을 제외하고 대다수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벼랑 끝에 선 민주주의》를 읽기에 앞서, 개념들이 있다.

우리는 현재 자유민주주의에 살고 있다. 간단히 표현하자면, '자유주의 + 민주주의 = 자유민주주의'이다. 사실 뜯어보면, 민주주의 안에는 자유가 내포되어 있어서, 자유민주주의는 중복된 표현이다. 현실 정치에서 민주주의보다 자유를 앞세우면서 그 자유를 기업의 이익을 옹호할 목적으로 경제적 자유를 강조하는 보수주의 정당이 내세우는 이데올로기다. 결국,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표현인 셈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어울리는 조합일까? 물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 안에서 자본주의는 자연스러워 보인다. 심지어 하나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익숙하다. 의문을 제기하지 않아도 될 만큼.

무엇보다 대항마였던 사회주의가 공산주의로 발전하고 독재정권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다른 대안을 언급하는 것은 금기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주의를 옹호하지 않는다는 것은 반혁을 꿈꾸는 사람 같이 치부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에 대해서 의심해봐야 한다. '과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잘 어울리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이런 말이 있다. '우파는 좌파에게 현실을 모른다고 말하며, 좌파는 자신들이 정의라고 생각한다'라고. 그렇다. 실제로 좌파성향을 띤 사람들은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기에 뛰어나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공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의는 항상 승리하니까. 하지만, 이건 큰 착각이자 게으름이다. 진정으로 정의라고 말하고 싶다면, 더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뷰캐넌의 큰 그림을 그리는 전략을 배워야 한다. 그가 어떻게 자유지상주의를 만연하게 만들었는지를. 어떤 성향이든 관계없이, 배울 것은 배워야 하지 않나 싶다. 특히, 유토피아를 꿈꾸는 좌파성향의 사람들은 분명 보고 배워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합리적 무지'를 경계해야 한다. 또한 전문가들은 이를 악용해서도 안 된다.

 

뷰캐넌과 코크의 만남과 그들에 대해 알 수 있는 내용을 읽어보면, 극우성향은 교만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위한 생각뿐이지 않은가. 자신들의 노력만으로 이루어냈다고 착각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들이 쌓은 돈도 누군가의 돈이 아닌가. 무엇보다, 긍휼이 없는 언어들에 마음이 불편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그들에게 강요할 수 없다. 그렇게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돈은 왜 존재하는지를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자본주의는 좋다. 그러나 돈과 성과만 우선시 되는 것은 옳지 않다. 우월한 자와 자수성가한 가운데 교만한 자, 가난을 모르는 자만이 자본주의를 맹목적으로 찬양한다. 이들에게는 긍휼함이 없다. 자신들이 영웅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을 연민의 대상으로 여길 뿐이니 지출만 생각한다. 그리고 지출을 낭비라 여긴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결국 경제다. 그렇다면 경제는 무엇을 말하는가? 단지 경제성장률이 높은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경제'라는 말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줄인 표현이다. 다스릴 경(經), 세상 세(世), 건널 제(濟), 백성 민(民)으로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苦難(고난)에서 救濟(구제)함을 뜻하다. 그러나 극우든 극좌에는 이런 정신이 없다. 극좌는 독재주의로 나타났고, 극우는 엘리트주의(그들만의 리그)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소수만 누리고 나머지는 수단이자 희생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은 매한가지 아닌가. 누구를 위한 경제체제인가. 누구를 위한 밥그릇 싸움인가. 누구를 위한 돈이여야 하는가. 돈은 수단이어야 한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은 존재할 수 있지만, 돈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건강하지 않다.

"그 이후에도 진보주의자들은 민영화가 민주주의를 속박하는 족쇄로 전략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했다. 더 안 좋게는, 민영화 제안들이 단순히 공공 영역보다 민간 영역을 선호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이 얼마나 우파들은 치밀하고 좌파들은 게으른지 알 수 있다. 우파 성향 사람들이 좌파 성향 사람들에게 '현실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듯 싶다. 그들은 성실하다. 그리고 좌파 성향의 사람들은 막연하다.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라고 말할 수 없다. 단지 생각의 차이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우파 성향이든, 좌파 성향이든 극단은 좋지 않다. 중국의 덩샤오핑이 흑묘백묘론을 적용하지 않았는가. '흑묘백묘론은'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말이다. 결국,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 살게 하면 그것이 제일이라는 뜻이다. 이렇든 경제체제는 결국 사람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소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부유한 자든, 가난한 자든 특정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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